권력욕(權力慾)의 업보(業報)
세조(世祖)의 피부병
沙月 李 盛 永(2012. 10. 3)
  조선왕조 역사에서 영욕(榮辱)을 온몸으로 보여준 왕은 제7대 왕 세조다. 그의 생애는 권력의 잉태와 성장, 소멸을 일목요연하게 보여 주었고, 지금까지도 영광과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며 광릉(光陵)에 누어있다.

  세조는 권력을 얻기 위해 형제와 조카등 혈육과 이들을 편드는 수많은 신하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거나 유배하거나 관직에서 몰아냈다. 좋게 말해서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 왕이요, 나쁘게 말해서 권력의 화신이 된 왕이다. 전고대방(典故大方)에는 세조의 왕위찬탈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을 160여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세조의 왕위 찬탈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다음 표와 같다.(典故大方)
세조의 왕위찬탈과정에서 희생된 사람
구분 인명(字,號,諡號,職責 등) 인원
세칭 삼상(三相) 황보인(皇甫仁): 領議政
김종서(金宗瑞): 左議政
정분(鄭분): 右議政
3인
세칭 육종영(六宗英)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
한남군(漢南君) 어(於)
영풍군(永豊君) 천(泉)
화의군(和義君) 영(瓔)
이양(李穰)
6인
세칭 오의척(五懿戚) 송현수(宋玹壽); 礪良府院君 端宗國舅
권자신(權自愼): 端宗 內舅
정종(鄭悰): 端宗 妹夫 寧陽尉
정전(鄭全): 太宗 駙馬 日城尉
권완(權完): 敦寧判官
5인
세칭 삼재(三宰) 민중(閔仲): 吏判
조극관(趙克寬); 吏判
김문기(金文起); 吏判
3인
세칭 삼운검(三雲劍) 박중림(朴仲林): 朴彭年父
성승(成勝): 成三問父
박정(朴靖); 成勝, 兪應孚와 함께 雲劍
3인
세칭 사육신(死六臣) 박팽년(朴彭年); 監司, 字仁수, 號醉軒, 諡忠正
성삼문(成三問): 字謹甫, 號梅竹堂, 諡忠文
하위지(河緯地): 司藝, 字天章, 號丹溪, 諡忠烈
이개(李塏): 字淸甫, 號白玉軒, 諡忠簡
유성원(柳誠源); 司藝, 字太初, 號琅 干, 諡忠烈
유응부(兪應孚): 字信之, 號碧梁, 諡忠穆
6인
세칭 생육신(生六臣) 김시습(金時習): 字悅卿, 號梅月堂, 諡淸簡
조여(趙旅): 字士翁, 號漁溪, 諡靖節
남효온(南孝溫); 字伯恭, 號秋江, 諡文貞
이맹전(李孟專): 字伯純, 號耕隱, 諡貞簡
성담수(成聃壽): 字而壽, 號文斗, 諡淸肅
원호(元昊): 字子虛, 號觀瀾, 諡貞簡
6인
기타 충신(忠臣), 의사(義士), 현인(賢人) 130여인
160여인

* 삼재(三宰)에 포함된 김문기(金文起)의 문중(門中) 후손들은 김영삼정권 때부터 사육신의 유응부(兪應孚) 대신 김문기를 사육신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법정투쟁까지 벌이고 있다.
  2008년 아사달동기회 가을나들이로 영월의 장능(단종의 능)에 있는 단종역사관 지하전시실에서 사육신의 위패 속에 김문기도 포함되어 사칠신(死七臣)으로 모셔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문종(文宗)은 11세의 어린 독자(단종)에게 왕위를 승계하면서 뒤가 걱정되어 믿을 만한 신하에게 아들의 왕위를 지켜 줄 것을 이른바 고명대신(顧命大臣) 영의정 황보인(皇甫仁)과 좌의정 김종서(金宗瑞)에게 유명(遺命)을 내려 조정의 실권을 쥐게 된다.

  권력에 욕심을 품고 있던 세종대왕의 18자 중 차자 수양대군은 모사 한명회(韓明澮)와 권람(權擥)의 잔꾀를 빌리고, 문신으로 집현전 학자로 세종대왕을 도와 한글창제에 크게 기여했던 신숙주(申叔舟)를 끌어들이고, 홍달손, 양정 등 칼잡이들을 양성하여 단종2년(1453) 10월 10일 좌의정 김종서의 집을 찾아가 철퇴로서 살해하고, 영의정 황보인, 우찬성 이양, 병판 조극관, 이판 민신 등 살생부에 오른 그를 반대하는 많은 신하들을 어명을 빙자하여 대궐에 불러들여 모조리 참살하는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전광석화 같이 실행하여 왕(단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실권을 장악한다.

  첫째 동생 안평대군(安平大君)을 붕당 모의 주역으로 지목하여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사사하고, 넷째 동생 금성대군(錦城大君)도 유배 후 사사하고, 드디어 주상(단종)을 상왕(上王)으로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후 상왕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시켜 영월 청령포로 유배하였다가 이른바 ‘사육신의 단종 복위 모의’가 탄로나자 사사한다. 이들을 역사는 ‘세조의 왕위 찬탈’이라 부른다.
  한편 조선조 공신록(功臣錄)에는 세조의 왕위 찬탈에 일조하여 공신(功臣)에 책록되어 자기의 일생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영화를 누리는 사람도 79인이나 기록되어 있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기여한 공신은 다음 표와 같다.
공신록(功臣錄)
공신명(功臣名) 등급 인원 성명
輸忠衛社協贊
수충위사협찬
靖難功臣
정난공신
(39인)
(특)
1등


1인
12인


수양대군(首陽大君)
정인지(鄭麟趾), 한확(韓確), 이사철(李思哲), 박종우(朴從愚),
이효석(金孝誠), 이계전(李季甸), 박중손(朴仲),권람(權擥),
홍달손(洪達孫), 최항(崔恒), 한명회(韓明澮), 봉석주(奉石柱)
2등 8인 신숙주(申叔舟), 권준(權준), 유수(柳洙). 홍윤성(洪允成),
전전田甸), 윤사균(尹士均), 유하(柳河), 곽연성(郭連成)
3등 17인 이흥상(李興商), 이예장(李禮長), 강곤(康袞), 유서(柳서),
권언(權偃), 유사(柳泗), 홍순노(洪純老), 임자번(林自蕃),
안경손(安慶孫),유자환(柳子煥), 설계조(薛繼祖), 권경(權擎),
홍순손(洪順孫), 송익손(宋益孫), 한명진(韓明진), 한서구(韓瑞龜),
이몽가(李蒙哥) (17)
輸忠衛社同德
수충위사동덕
佐翼功臣
좌익공신
(41인)
1등 7인 이증(李증), 이련(李璉), 한확(韓確), 윤사로(尹師路),
신숙주(申叔舟),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2등 12인 정인지(鄭麟趾), 이사철(李思哲), 정창손(鄭昌孫), 윤형(尹炯),
윤암(尹巖), 이계전(李季甸), 이계린(李季린), 강맹경(姜孟卿),
홍달손(洪達孫), 최항(崔恒), 전균(田畇), 권반(權攀)
3등 22인 이징석(李澄石), 권공(權恭), 황수신(黃守身), 박강(朴薑),
박원형(朴元亨), 윤사홀(尹士홀), 구치관(具致寬), 홍윤성(洪允成),
원효연(元孝然), 조석문(曺錫文), 이예장(李禮長), 황효원(黃孝源),
한종손(韓宗孫), 윤자운(尹子雲), (韓繼美), 조효문(曺孝文),
김질(金질), 이극배(李克培), 최개(權愷), 이극감(李克堪),
정수충(鄭守忠), 조득림(趙得琳)

* 공신록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은 등급이 기록되지 않았지만 표 작성 편의와 이해를 돕기 위하여 (특)으로 표시하였다.

  이들 공신 중에 이후로도 계속 공신에 책록되고, 최고의 관직에 올라 부귀영화를 한껏 누린 대표적인 사람들을 열거해 본다.
정인지(鄭麟趾) : 정난(靖難) 2등, 좌익(佐翼) 2등, 익대(翊戴) 3등, 좌리(佐理) 2등 (4공신),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정1품), 영의정(領議政), 영경연사(領經筵事)

신숙주(申叔舟) : 정난(靖難) 2등, 좌익(佐翼) 1등, 익대(翊戴) 1등, 좌리(佐理) 1등 (4공신),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정1품), 영의정(領議政), 영경연사(領經筵事),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한명회(韓明澮) : 정난(靖難) 1등, 좌익(佐翼) 1등, 익대(翊戴) 1등, 좌리(佐理) 1등 (4공신),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정1품), 영의정(領議政), 영경연사(領經筵事),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정창손(鄭昌孫) : 좌익(佐翼) 2등, 익대(翊戴) 3등, 좌리(佐理) 2등 (3공신),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정1품),영의정(領議政), 영경연사(領經筵事)

최 항(崔 恒) : 정난(靖難) 1등, 좌익(佐翼) 2등, 좌리(佐理) 1등 (3공신),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정1품), 영의정(領議政), 영경연사(領經筵事),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홍윤성(洪允成) : 정난(靖難) 2등, 좌익(佐翼) 3등, 좌리(佐理) 1등 (3공신),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정1품), 영의정(領議政), 영경연사(領經筵事)

홍달손(洪達孫) : 정난(靖難) 1등, 좌익(佐翼) 2등, (2공신), 남영부원군(南陽府院君),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정1품), 우의정(右議政)

권 람(權 擥) : 정난(靖難) 1등, 좌익(佐翼) 1등 (2공신),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정1품), 좌의정(左議政)

* 신숙주(申叔舟)는 세종대왕을 모시고 한글 창제를 비롯하여 수 많은 문화창달에 함께 했던 사육신을 비롯한 집현전 동료들 배신하고 세조의 편에 섰다.
  젊은 시절 문장이 좋고, 외국어에 능통하였는데(7개국어)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있을 때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 정사(正使)로 가면서 신숙주를 서장관(書狀官)에 임명하여 따라간 것이 인연이 되어 세조와 개인적인 각별한 친분을 맺게 되어 이런 영광을 누린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을 '변질이 잘되는 녹두나물''숙주나물'이라 부르면서 변절자의 표상으로 삼았는데, 지금도 그 이름은 없어지지 않으니 부귀영화란 짧고, 오명(誤名)은 긴 것이다.


  세조는 왕위 찬탈과정에서 너무 많은 혈육과 신하의 피를 손에 묻혔다. 이는 즉위기간 14년 내내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였다.
  세조14년(1468) 9월 7일 병세가 악화되자 다시 세자로 세운 둘째 아들(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튿날 수강궁에서 51세로 죽었는데, 죽기 전에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쓰지 마라”는 유명(遺命)남겼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자기 몸이 빨리 썩기를 바라는 유언을 남겼은까.

  야사에 전하기를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懿敬世子)가 단종의 어머니이자 세조의 형수인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의 혼백에 시달려 19세로 요절했다는 소문이 떠돌자 분노한 세조는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바닷가에 버렸는데,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꾼 후부터 온 몸에 피부병이 생겨나 피고름이 끊이질 않고, 좀처럼 낫지 않아서 고생하면서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명수(名水)를 찾게 된다.

  조선조 때 3대 명수(名水)로 꼽혔던 오대산 우통수(于筒水), 충주의 달천(達川), 속리산 삼타수(三陀水) 중에서 먼저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아래 우통수에서 흘러내린 물에 목욕하면서 문수동자를 만난 이야기와 상원사 법당에서 생긴 고양이 이야기, 속리산 삼타수를 찾아 복천사(福泉寺)로 가는 길에 보은 ‘연거랑이소나무’(정2품송) 이야기. 황간 백화산의 반야사를 찾았다가 거기서도 문수보살을 인견한 이야기, 온양 온천에서 신정(神井)이 솟아난 이야기 등 세조의 피부병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여기 저기서 전해지고 있다.
◆ 오대산 상원사의 세조
  조선왕조는 유학을 근간으로 하였지만 특히 세조는 불가에 대하여 많은 애착을 가졌던 왕이었다. 수양대군으로 있을 때 부왕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석가보(釋迦譜), 법화경(法華經), 지장경(地藏經), 아마타경(阿彌陀經) 등 불경에서 인용하여 석가(釋迦)의 일대기를 엮은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저하였다.
  왕위에 오른 후에는 석보상절과 세종이 간행한 월인천강지곡 (月印千江之曲)을 합편하여 월일석보 (月印釋譜)를 간행하였는데 이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 제일 먼저 나온 불경언해서로서 당시 말과 글자가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국어사에서 귀중한 문헌으로 취급되고 있다.

  세조는 자신의 피부병이 인연이 되어 상원사에 목욕할 때 관(冠)과 의대(衣帶)를 걸어놓던 ‘관대걸이’, 법당 앞에 석묘상(石猫像: 고양이 석상), 문수동자상(文殊童子像), 피고름 묻은 적삼 등 유적과 유물들을 남겼다.

▶ 관대(冠帶) 걸이
관대(冠帶)걸이
  상원사 관대걸이는 세조가 목욕을 할 때 의관을 걸어 두던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세조가 목욕을 하는데 한 동자가 지나가기에 동자보고 등을 좀 밀어 달라 하였다. 동자는 세조의 등이 부스럼으로 흉스럽게 되어 있는 것을 보고도 전혀 개의치 않고 아주 시원하게 등을 밀어 주었다.
  목욕을 끝 낸 세조가 동자에게
  "너 이후로 내 등(피부병)에 관한 일을 세상 사람들에게 절대로 이야기 하지 말라"하였다. 동자가 그러겠노라고 약속하면서
  "어르신네는 오늘 문수보살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절대로 이야기하지 마십시요" 하였다 한다.

  그러니까 세조의 등을 밀어준 동자는 곧 문수보살이었다는 이야기다. 문수보살은 인간을 좋은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형상으로 나타나 도와준다고 한다.

  지금은 관대걸이가 있는 이 부근을 '관대걸이쉼터'라 하여 큰 주차장과 기념품가개, 화장실 등이 들어서 있고, 가을철이면 평일에도 관광버스가 큰 주차장을 꽉 메울 정도로 번잡하지만 조선 세조 당시는 그야말로 심심산중 한적한 곳이었을 것이다.

  오대산 효령봉 중턱까지 올라야 하는 우통수까지 갈 수는 없고, 우통수 맑고 질 좋은 물이 흘러내려오는 이 곳에서 세조가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관과 옷을 벗어 관대걸이에 걸어놓고 목욕을 했을 법도 하다.

  ▶ 목조문수동자좌상(木彫文殊童子坐像)과 세조의 피고름 묻은 적삼
  2005. 6. 6.조선일보에 위 전설에 관련하여 세조12년(1466)에 왕실에서 제작하여 이곳 상원사에 봉안한 것이라 전하는 높이 98cm의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제36호)과 세조의 피고름이 묻은 적삼 이야기가 실렸다.
목조문수동자좌상과 복장유물 ‘세조의 피고름 묻은 적삼’
  < 관련기사 >
  『지금까지 국내에서 나온 복장유물은 옷과 오곡, 오색실, 경전 등이 있다. 복장(유물)은 후세 사람들에게 당시의 시대상을 알려주는 ‘타임캡슐’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가장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남긴 복장유물은 1984년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문수동자(1466년 제작)상에서 나온 ‘세조의 피고름 묻은 적삼’. 세조의 딸인 의숙공주가 1466년 세조의 건강과 자신의 득남 (得男)을 바라며 기록한 발원문 등과 함께 피고름이 묻은 적삼이 나왔다.
  덕분에, 세조가 문수동자를 만나 등창을 고쳤다는 이야기는 500년 만에 ‘전설’에서 ‘사실’로 승격했다. 』


▶ 고양이 석상(猫像)
상원사 법당 앞 고양이 석상 2개
  세조가 목욕을 끝낸 후 상원사 법당으로 들려고 하는데 난데없이 고양이 두 마리가 나타나 세조의 바지자락을 물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세조는 언뜻 집히는 것이 있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멈추고 호위한 군사들로 하여금 법당 안을 수색하도록 하였는데 불상 뒤에 숨어 있는 복면한 자객을 찾아 냈다고 한다.

  그래서 고양이에게 고마움의 표상으로 법당 앞에 고양이석상(猫像)을 만들어 놓고, 또 고양이에게 전답을 이 곳과 서울에 내렸는데 이 것을 묘답(猫沓)이라 한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은 석가가 죽은 후 인도에 태어나 ‘반야(般若)’의 도리를 선양하였다고 하며, 반야경(般若經)을 결집, 편찬한 보살로도 알려져 있다. 그래서 경권(經卷)을 손에 쥔 모습으로 조각되고 묘사되는 일이 많았다.
  화엄경(華嚴經)에서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협시보살(脇侍菩薩)로서 보현보살(普賢菩薩)과 더불어 삼존불(三尊佛)의 일원이 되어 있다.

  그리하여 보현보살이 세상 속에 뛰어들어 실천적 구도자의 모습을 띠고 활동할 때, 문수보살은 사람들의 지혜의 좌표가 되기도 하였다. 즉, 이 보살은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돕기 위하여 일시적 권현(權現)으로서 보살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전설적으로 이 보살은 중국의 산시성(山西省) 우타이산(五臺山)에서 1만 보살과 함께 있다고도 하는데, 한국에서는 강원도 오대산에 있다고 하여 지금도 그 곳의 상원사(上院寺)는 문수보살을 주존(主尊)으로 모시고 예불하며 수행하는 도량(道場)으로 알려져 있다.
◆ 속리산 복천암(福泉庵)
  보은 법주사에서 문장대를 오르려면 북쪽 여적암골과 동쪽 세심정계곡이 있는데 볼거리도 많고 해서 대부분 동쪽 세심정길을 택한다.
  약 3Km 쯤 오솔길을 걷다 보면 세심정휴게소에서 길이 또 두 개로 갈라지는데 동쪽 길은 경업대-신선대-문수봉을 지나 문장대로 오르고, 서편 길은 복천암-냉천휴게소를 지나 문장대에 오른다.
  복천암은 서편 길로 얼마 안 가서 있는데 길에서 보이지 않고 좀 들어가야 있다.
속리산 지도
  이 복천암(福泉庵)은 신라 성덕왕19년(720)에 창건되었고, 고려 공민왕이 극락전에 ‘무량수(無量壽)’ 친필 현판을 내렸다고 한다. 절 한 쪽 켠에 바위 사이에서 석간수가 흘러나오는데 수량이 많고 오래 전부터 약수로 영험이 있어 복천(福泉)이라 부르며 전국에서 이 약수를 받으러 찾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세조도 이 소문을 듣고 행차하여 복천암에 머물면서 신미(信眉), 학조(學祖), 학렬(學?) 세 스님과 함께 3일 동안 기도를 드린 후 목욕을 하고 피부병이 나았다고 한다. 고마운 생각으로 이 절을 중수 하도록 명하고, ‘만년보력(萬年寶曆)’이라 쓴 4각 옥판(玉板)을 내렸다 한다.
복천암 전경
복천암 극락보전
복천암 마애불
대표적인 삼타수물 복천수
  세조가 복천암에 행차하는 길목에 소나무가 정2품(판서급)의 품계를 받아 ‘정이품송’이란 이름으로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는 사실은 이제 웬만한 사람은 다 안다.
  세조10년(1464) 복천암에 가기 위해 속리산 법주사로 연(輦)을 타고 행차할 때 이 소나무 아랫 가지에 걸릴까 염려하여 “연(輦)걸린다”고 말하자 소나무는 스스로 가지를 번쩍 들어올려 어가(御駕)를 무사히 통과하게 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세조는 이 소나무에 정2품(판서급) 품계를 내렸다 하여 '정2품송(正二品松)'이라 한다. 충청도 방언으로 ‘연거랑이소나무’라 한다.
  천연기념물 제103호. 수령은 600년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 15m, 가슴높이의 둘레 4.5m, 가지의 길이 동쪽 10.3m, 서쪽 9.6m, 남쪽 9.1m, 북쪽 10m이다. 이 나무가 차지한 면적은 1158.3m2이다.
정이품송
주위에 솔잎혹파리 방제용 그물이 둘러쳐 있다.
  세조가 복천암에 머물면서 신하들과 함께 산 정상 널다란 바위에 올라 시도 짓고, 문장(文章)을 겨루었다 해서 '문장(文章)을 감춘(藏) 대(臺)'라 하여 ‘문장대(文藏臺)’란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또 조선의 학자 용재(心변庸 齋) 성현(成俔, 1439?1504)은 『용재총화(心변庸 齋叢話)』에서 여말(麗末) 대제학을 지낸 이행(李行)의 말을 빌어 우리나라에서 으뜸되는 물 맛으로 충주 달천수(達川水)를 첫 번째로 꼽고, 다음으로 오대산의 우통수(于筒水), 속리산의 삼타수(三陀水)를 세 번째로 꼽았다.

  좋은 물이란 ‘팔공덕수(八功德水)’를 의미하는데 아미타부처로부터 유래됐다고 한다.
  아미타부처는 법장 비구로 수행하던 시절에 48대원을 세워 온갖 고통을 없애는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건설했다. 이곳에 있는 물은 사바 세계 물과 달라 공기처럼 의복이 젖지 않으며, 물을 마시면 전신이 가볍고, 상쾌해지고, 온 몸의 기운이 충만해지는 것은 물론 업장이 소멸된다고 한다.

  팔공덕(八功德)은 자료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칭찬정토경』은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① 고요하고 깨끗함 ② 차고 맑은 것 ③ 맛이 달다 ④ 입에 부드럽다 ⑤ 윤택하다 ⑥ 편안하고 화평하다 ⑦ 기갈 등 한량없는 근심을 제한다 ⑧ 여러 근(根)을 장양한다.
  또 다른 『구사론』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① 달고 ② 차고 ③ 부드럽고 ④ 가볍고 ⑤ 깨끗하고 ⑥ 냄새가 없고 ⑦ 마실 때 목이 상하는 일이 없고 ⑧ 마시고 나서 배탈이 나는 일이 없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 명수 세 번째에 들어가는 속리산의 물을 삼타수(三陀水)라고 부르는 것은 천왕봉계곡, 문장대계곡, 묘봉계곡의 물이 지하에서 합수하어 흐르기 때문이다. 속리산의 물이 좋다는 것은 수많은 암자들의 이름이 물이 맑다는 뜻을 가진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수정동과 수정암을 비롯해 상류에 남산약수, 복천암, 탈골암, 상고암 등 물과 관련된 암자들이 속리산에는 많다.

  복천사와 관련된 인물이 또 하나 있다. 백호(白湖) 임제(林悌)다. 이곳 복천암에서 성운(成運 ; 1497-1579, 속리산 무대로 처사형 士林을 지킨 인물)에게 배워 문장과 시에 뛰어난 천재였다.
  선조9년(1576)에 생원과, 진사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문과에 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 정랑까지 올랐으나 동서 분당에 식상해 벼슬에 뜻이 없어 그만두고 명산을 찾아 떠돌며 비분강개 하다가 요절하였다.
  서도(西道:평안도) 도사(都事:정6품) 발령을 받고 가는 도중에 황진이(黃眞伊) 무덤에 들려 시조 한 수를 지었다. 황진이가 죽은 지 9년 후에 태어난 임제도 황진이를 지극히 흠모하였던 것 같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었는다
  홍안(紅顔)은 어디가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 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 하노라
(임제)

  또 임제(林悌)가 기생 한우(寒雨: 조선 선조 때 평양 名妓)와 증답한 시조도 있다.
북창(北窓)이 맑다커늘 우장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寒雨)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임제)
어이 얼어 자리 무삼 일 얼어 자리
  원안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寒雨)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한우)
◆ 백화산 반야사의 세조 행적
  백두대간 속리산 지나 봉황산(741m)에서 서쪽으로 벋어 나온 팔음지맥의 한줄기가 금강의 지천 초강천을 만나 서북쪽에 백화산(白華山, 포성봉,934m - 주행봉,863m)을 짓는다.

  또 백두대간이 서남쪽으로 더 내려와서 600년 삼도(三道: 忠淸,全羅,慶尙) 지경 삼도봉에서 민주지산-각호산지나 북으로 벋은 각호지맥의 한줄기가 역시 초강천을 만나 남쪽 냇가에 월류봉(401m) 만들어 산과 물이 어울려 아름다운 경개를 연출하는 곳이 영동의 황간(黃澗)이다

  예로부터 이 지방 사람들 간에는 ‘백화산 반야사에는 호랑이가 살고, 월류봉이 보름달에 안겼다’고 표현해왔다고 한다.
황간(백화산-월류봉) 일대 요도
▶백화산 반야사(般若寺) 문수전(文殊殿)
  백화산(白華山?933m) 동쪽 자락에 있는 반야사(般若寺)는 백화산 산봉우리 사이를 구불구불 흐르는 석천이 S자로 크게 휘돌아 만들어진 땅에 사찰을 세웠다.
반야사 일주문과 원경
  세조가 목욕하고 문수보살을 만나 피부병을 치료한 곳으로 위 오대산 상원사가 있는가 하면 이곳 백화산 반야사도 있다. 백화산 일대는 예로부터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 그래서 사찰도 문수보살을 의미하는 '반야'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반야사는 신라 성덕왕 19년(720년) 의상 대사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인 상원스님이 창건했다고 한다.
  반야사 경내에 들어서 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산 중턱에 있는 커다란 호랑이 형상의 너덜지대다.
  백화산 기슭 에서 반야사 뒤쪽으로 흘러내 린 돌무더기가 주변 나무들과 경계를 이루면서 마치 호랑이가 꼬리를 치켜들고 산에서 내려 오는 모양이 만들어진 것. 길이 300m, 너비 80m 정도의 규모다.
반야사와 호랑이 형상의 너덜지대

  반야사에서 나와 계곡 석천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널찍한 바위 오른쪽으로 100여 미터 절벽이 앞을 막는다.
  그 꼭대기 위에 작은 암자 '문수전'이 눈에 들어온다. 꼬불꼬불 급경사 길을 올라 문수전 앞에 서면 산봉우리들 사이로 S자로 굽이도는 계곡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까마득하게 솟은 암봉들과 기암절벽을 감싸 흐르는 석천, 그 위에 사뿐히 올라앉은 문수전이 절경이다.
문수전
  문수전에는 문수 동자와 조선 세조에 얽힌 전설이 내려온다. 속리산 복천암에 왔다가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전국 사찰을 다니며 공양을 올리던 세조가 반야사에 머물렀을 때, 문수 동자의 안내로 절 뒤쪽 계곡에서 목욕을 했더니 병이 깨끗이 나았다는 것이다.

  반야사의 또 다른 볼거리는 석천 건너 소나무와 대나무 숲길을 지나면 만나는 관세음보살상이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화강암으로 만든 관세음보살상이 연못 한가운데 서서 감로수를 부어주고 있는 모습이다. 곱게 핀 연꽃과 연 잎으로 뒤덮인 연못에 산 그림자가 고요히 비치고 있다.

▶ 달과 사람의 마음이 머무는 월류봉
  반야사에서 나와 8㎞ 정도 하류쪽으로 내려가면 석천이 초강천에 합수하여 서쪽으로 조금 내려간 자리에 예로부터 한천팔경(寒泉八景) 중 하나로 불리는 월류봉(月留峰)이 나온다. '달(月)이 머무르는(留) 봉우리(峯)'란 뜻의 이름처럼 깎아지른 절벽에 달이라도 뜨면 한 폭의 그림이 된다.
  병풍같이 깎아지른 월류봉 인근의 경승지 8곳을 한천팔경(寒泉八景)이라 부르는데, 이는 인근에 있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머물렀던 한천정사(寒泉精舍)에서 이름을 땄다고 한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황간현(黃澗縣) 편에는 ‘심묘사팔경(深妙寺八景)’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8경의 이름은 똑 같다.

  한천팔경(寒泉八景)은 ①월류봉(月留峰)을 비롯하여 ②화헌악(花獻岳), ③용연동(龍淵洞), ④산양벽(山羊壁), ⑤청학굴(靑鶴窟), ⑥법존암(法尊巖), ⑦사군봉(使君峯), ⑧냉천정(冷泉亭) 8곳을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따로 독립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월류봉의 다른 모습이나 월류봉에 붙어있는 지형과 지물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달이 머무는’ 월류봉(月留峯),
  월류봉 다섯 봉우리가 봄철에 진달래와 철쭉이 만발하여 붉은 꽃으로 뒤덮여 마치 산이 큰 꽃다발을 헌화(獻花)하는 듯하여 화헌악(花獻岳),
  월류봉 중턱에 깊은 자연동굴 속에 미지의 이상향이 있을 것만 같아 청학굴(靑鶴窟),
  월류봉 아래 장교천(長橋川: 현 초강천)에 있는 깊은 소(沼) 용연동(龍淵洞),
  월류봉 동북면의 깎아지른 ‘산양만이 오를 수 있는 절벽’ 산양벽(山羊壁) 또는 산양암(山羊巖),
  월류봉 제1봉에서 북쪽으로 급히 내리 뻗어 멈출 듯 하다 다시 솟아오른 사군봉(使君峯),
  그 끝 마지막 절벽위에서 냉천 물속에 그림자 띄우는 냉천정(冷泉亭), 등이다.
달이 머무는 산 월류봉(月留峯) 다섯 봉우리와
산양벽(山羊壁)과 사군봉(使君峯)과 냉천정(冷泉亭)
산양벽(山羊壁)
사군봉(使君峯)
냉천정(冷泉亭)
  황간 월류봉 정상에 올라서면 옛 선인들이 몰랐던 또 하나의 기경(奇景)을 본다.
  월류봉 북쪽 하단을 흐르는 장교천(長橋川: 현 이름 초강천) 건너편에 장교천이 회돌이 치면서 조성한 한반도모양 지형이다.
  해발 400m의 월류봉에 올라야 볼 수 있는 경치이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영월 서면에서 만나는 한반도모양 지형에 버금가는 기경이다.
월류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한반도모양 지형과(위)
영월 한반도모양 지형(아래)
◆ 온양행궁의 신정비(神井碑)
  세종15년(1433) 정월 세종임금이 안질 치료 차 온양에 왔다가 효험이 있어 세 번 행차한 후에 행궁을 지어 세조, 영조, 정조 등이 행차한 것으로 전해지며, 지금은 행궁은 없어지고, 온양관광호텔이 되어 있는데 한쪽 가에 신정(神井)과 신정비(神井碑)가 남아 있다.

  아산시 온양역에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오른쪽 큰 길 가에 온양관광호텔이 보인다. 이 곳이 조선조 때는 온양온천으로 임금이 온천에 행차할 때 묵던 행궁(行宮)이다. 호텔 정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주차장인데 주차장 서편 울타리 가에 산듯한 비각 하나가 보인다.
  비각 안에는 높이 70Cm, 폭 50Cm 정도의 조그마한 비석이 하나 봉안되어 있는데 ‘신정비(神井碑)’라 부르며 그 옆에 지금은 물도 마르고 깊이도 메워져 얕은 우물이 하나 있는데 난간은 새로 돌러 ‘井’자를 만들어 올려 놓았다. 이것이 ‘신정(神井)’이라 한다고 안내 간판에 쓰여 있다. ‘신비한 샘’이란 뜻이다.
신정(神井)과 신정비
  안내판에 따르면 신정비는 세조 때 처음 세워졌다가 성종 때 다시 세운 것이라 하며 비문은 영숙(永叔) 임원준(任元濬: 연산군 때 갑자사화를 유발한 임사홍의 부)이 짓고 글씨는 양원(楊原) 이숙함(李淑: 나의 傍系 16대조)이 쓴 것이라 한다. 오백년이 넘는 긴 세월에 글자가 깎이어 형체를 알아보기가 힘들게 마모되었는데 뒤 늦게나마 비각을 세워 풍우를 피하게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온양편에 수록된 임원준이 쓴 신정비 기문에 따르면 세조가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 갔다가 귀경 길에 이 곳 온양 행궁에서 유숙하는데 온천과 온천 중간이 되는 행궁 뜰에서 갑자기 맑고 찬 물이 솟아 나왔다는 것이다.
  임금과 신하들이 기이하게 생각하고 이구동성으로 좋은 징조라 하여 그 이름을 ‘신정(神井)’이라 이름 짓고, 당시 수행했던 임원준이 이를 칭송하는 기문을 쓴 것이다.
  그 후 성종 때 이숙함이 온양 행궁에 입직하고 있을 때 임금이 온양 온천의 행궁에 와서 유숙하면서 신정비를 보고 너무 헐어서 다시 쓰라 해서 역시 수행했던 임원준이 기문을 짓고, 이숙함이 썼다고 되어 있다.

  임원준이숙함은 단종1년(1453) 대제학 신숙주에 의하여 노사신(盧思愼), 어세겸(魚世謙), 정난종(鄭蘭宗)과 함께 다섯 사람이 제4회 호당(湖堂: 賜暇讀書, 오늘날의 공무원 연수원)에 선발되어 같이 공부하였으며, 세조3년(1457) 중시(重試)와 세조12년(1466) 발영시(拔英試)에도 함께 급제하는 등 문학 친구로 매우 친하게 지냈다.

  또 동국여지승람에는 온양군 편에 양원 이숙감과 영숙 임원준이 이 때 만나 술 잔을 나누면서 오랜 회포를 풀며 ‘온양팔영(溫陽八詠: 온양의 여덟 가지 詩題)으로 행궁상운(行宮祥雲: 행궁 위의 상스러운 구름), 영천서액(靈泉瑞液: 시령스런 온천의 상서로운 온천물), 천주분선(天廚分膳: 임금이 하사한 주방 음식 선물), 신정륵석(神井勒石: 신정에 새긴 빗돌), 광덕조람(廣德朝嵐: 광덕산의 아침 아지랑이), 공곶춘조(貢串春潮: 공곶의 봄 조수), 송령한도(松嶺寒濤: 송령의 찬 파도), 맥롱수파(麥 龍 秀波: 보리밭 이삭 물결) 등 8개를 선정하여 시제로 삼아 시를 증답한 것이 8수가 올라 있다.

  이들 시(詩) 중에서 신정비(神井碑)를 시제로 하여 지은 신정륵석(神井勒石)을 옮긴다. 시에 앞서 이숙함은 서문에서
  “내가 산수(山수: ?), 영숙(永叔: 임원준의 자)과 같이 온천 행궁의 직려(直廬: 당직)에 입직(入直: 근무)하고 있으면서 때로는 서하(西河), 고양(高陽), 언양(彦陽) 등지의 여러 상공(相公)들과 더불어 왕복 수창(酬唱: 시문을 지어 서로 주고 받음)하며 스스로 그 회포를 풀고 지냈는데 영숙이 그 사이 팔영(八詠)의 시제 얻어 나에게 먼저 고채시(古體詩)를 지으라 하여 장차 화교(和敎: 따뜻한 가르침)의 장본으로 삼으려 하니 그야말로 키질 해 까불면 쭉정이가 먼저 나가는 법이라 이를 보는 자 나의 광참(狂僭: 경망하고 분수 없음)함을 용서하시라”하였다.

▶神井勒石(신정륵석) 신정에 새긴 빗돌
  이숙함 시
  世廟當年此臨行(세묘당년차임행) 세조 당시 (그대가) 이곳에 임행했을 때
  行殿庭心湧神井(행전정심용신정) 행궁 뜰 한가운데서 신정이 솟아났네
  從臣才藝眞第一(종신재예진제일) 호종했던 신하(그대) 그 재예 진정 제일이라
  頌德雄詞信手騁(송덕웅사신수빙) 성덕 칭송한 웅대한 글 그대 손 믿고 달렸네
  可堪石刻今완(가감석각금완부) 돌에 새긴 글자 벌써 깎이고 떨어져 나가
  二十歲光陰驚一瞥(20세광음경일별) 이십년 세월이 한 순간임에 놀랐도다
  慈聖心測命重新(자성심측명중신) 자상한 성주(성종) 측은해서 새로 중건하라 명하니
  流傳更憑太史筆(유전갱빙태사필) 뒷날 세상에 전하리로다 또다시 태사(임원준)의 붓대에 의지했노라고.

  임원준 시
  生逢聖祖誠萬行(생봉성조성만행) 살아서 성조를 뵈온것은 진실로 만행 한 일
  扈從當時到溫井(호종당시도온정) 호종했던 그 당시 온정에 왔었네
  寒泉忽湧兩湯間(한천홀용양탕간) 두 온탕 사이에 찬 샘물 홀연히 솟아 올라
  命臣記事蕪詞騁(명신기사무사빙) 신에게 기(記)하라 명하여 거치른 붓을 달렸네
  未二十年字已(미이십년자이부) 이십년도 채 안되어 글자 이미 상하였고
  時移事改共驚瞥(시이사개공경별) 세월도 세상사 바뀌니 일순 인생 함께 놀랐네
  空將耿耿寸草心(공장경경촌초심) 염려스러운 작은 마음 다시 가다듬어
  비淚磨崖重載筆(비루마애중재필) 눈물 지며 돌 갈고 다듬어 거듭 필적 실었네

  세조가 조카 단종에게 행한 악독한 업보로 얻은 피부병을 낫우려고 좋은 물을 찾아 다닌 곳으로 알려진 곳 4곳을 둘러보았다. 이 후로도 더 많은 곳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야사에는 형수, 단종의 어머니가 나타나 침을 뱉는 꿈을 꾼 후부터 온 몸에 피부병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현대 의학의 눈으로 보면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 낸 이야기일 것이다. 요즈음 아토피라 불리는 알러지성 피부병은 심적인 스트레스가 원인이 된다고도 한다. 세조도 권력을 쟁탈하는 과정에서 형제, 조카들을 비롯하여 이를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걷우었으니 어찌 심중에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았겠는가.

  불교는 참으로 인자한 종교인가보다. 세조가 집권하기 전 수양대군으로 있을 때부터 권력을 쟁탈한 뒤까지 불교의 발전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큰 업보를 안고 있는 세조인데, 그의 피부병과 관련된 여기 네 곳의 이야기 중 두 곳에서 문수보살의 출현하여 세조의 피부병을 낫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부분이 있으니 말이다. 비록 악행을 저질렀더라도 이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면 부처님도 용서하고 도와 준다는 뜻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