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선생의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 조작논쟁에 관한 소고
沙月 李 盛 永(2013.4.15)
○ 서언
우리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율곡선생의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1974년 초, 국방부(합참)가 주관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의 신조인 '자력에 의한 군사력 건설' 을 최초 계획하여 대통령 재가를 받는 과정에서 보안목적의 일환으로 '계획의 익명(匿名)'을 건의 할 때 '율곡', '아사달'. '두꺼비' 세 개의 안을 제시하여 대통령으로 하여금 선택하도록 하였는데 박정희대통령께서는 즉석에서 '율곡'을 극구 칭찬하면서 선택 함으로서 이른바 '율곡계획(栗谷計劃)'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그 때 계획의 익명 3개 안의 설정 취지는 다음과 같다.
(A) 율곡(栗谷) :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 발발 10년 전에 장기적인 안목으로 국가 위기를 예견하여 10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한 율곡 이이 선생의 호를 딴 것이며, 이것은 선생의 유비무환(有備無患) 사상을 본받고자 하는 의미.
(B) 이사달(阿斯達) : '아사달'은 일설로 단군개국 시 첫 수도(首都)이며, 우리나라의 옛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뜻으로는 신라의 모범적인 화랑의 한 사람으로 용맹스런 희생으로 나라를 구했다(救國)고 하는 신라 야사의 인물 이름.
    (C) 두꺼비 : 두꺼비는 몸에 갑옷을 두르고 수명이 긴 양서동물로서 민첩하지는 않으나, 칠전팔기(七顚八起)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독사도 감히 접근치 못하는 강인한 동물이며, 통상 복(福), 행운(幸運), 장수(長壽)의 상징.

○ 율곡의 십만양병설에 대한 문제 제기
박대통령이 서슴지 않고 '율곡'을 선택했던 그 배경이 되는 율곡의 '십만양병설'은 존재하지도 않은 것을 훗날 율곡의 제자들이 당쟁의 수단으로 삼기 위하여 조작한 허구라는 주장이 있어 율곡계획 수립에 참여했던 일원으로 내게도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한겨례신문이 [한겨례 창간 21돌 특집]으로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라는 주제로 2009년 5월 13부터 7월 15일 간에 주 1편 꼴로 연재한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의 글 10편 중, 2009년 7월 8일자에 아홉 번째로 실은 ⑨ ‘노론사관에 일그러진 조선후기사’ 라는 글에서 두 가지의 예제를 놓고 비평하는데 첫 번째가 <노론 뿌리 이이 ‘십만양병설’은 허구>라는 제하의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덕일
작가, 사학자, 1961년 10월 7일 충남 아산 출생,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몇 가지 예만 들어보겠다. 현재 국민적 상식중의 하나가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이다. 한 때 국사 교과서에 실려 있었고, 현재도 일부 도덕 교과서에 실려 있다.
  이는 국사학계의 태두라는 이병도박사가 1948년 발간한 <조선사대관(朝鮮史大觀)>에 싣고 그 제자들이 국사 교과서에 기재함으로써 국민적 상식이 된 내용이다.
그 요체는 임란 전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창했으나 선조는 말이 없고 유성룡까지 반대하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병도는 <조선사대관>에서 “십만양병론의 연월은 미상(未詳)하나 그의 문인 김장생(金長生) 소찬(所撰)의 율곡행장 중에 적혀 있으니 설령 그의 만년의 일이라 할지라도 임란 전 10년에 해당한다” 고 서술했다. ‘연월이 미상한데’어떻게 ‘임란 전 10년’이라고 특정할 수 있었을까?

십만양병설은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에는 일언반구도 없다. 인조반정 후인 효종 8년(1657)에 서인들이 작성한 <선조수정실록> (선조)15년 9월 1일자에 사관의 논평으로 "이이가 일찍이 경연에서 이를 주장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1548-1631)이 쓴
(율곡)행장을 보고 쓴 것이다.
십만양병설은 애초 연월 미상이었으나 김장생의 제자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율곡연보>에서 선조 16년(1583) 4월 즉 임란 발생 10년 전의 일이라고 정확히 특정했다. 후대에 갈수록 날짜가 더 정확해지는 이상한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송시열은 이 글에서 실제 임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이 ‘이문성(李文成)은 진실로 성인이다(眞聖人也)’라고 탄식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이가 문성(文成)이란 시호를 받은 인조 2년(1624)은 유성룡이 사망(1607)한 지 이미 17년 후였다. 사후 17년 후에 생겼던 문성이란 시호를 유성룡이 사용했다는 기록 자체가 조작이라는 증거이다.

임란 10년 전인 선조 16년 4월 이이는 병조판서였다. 이이는 선조 16년 2월 “양민(養民)을 하지 않고서 양병(養兵)을 하였다는 것은 예부터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백성들이 군역과 공납을 피해 도망가는 상황을 우려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힘든 군역과 수월한 군역을 맡은 자를 서로 교대시켜 도망을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성들이 군역을 피해 도망가는 상황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할 수 없었다. 십만양병설의 가장 큰 문제는 유성룡의 반대로 유산된 것처럼 기록한 데 있다. 서인 영수 이이의 선견지명을 남인 영수 유성룡이 반대해 전란이 초래되었다고 주장하기 위한 조작이었다.
잠곡 김육이 쓴 ‘이순신 신도비’에는 이이와 유성룡이 이순신을 등용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이와 유성룡은 당파를 초월해 국사에 협력할 수 있는 사이였으나 당심(黨心)에 찌든 이이의 제자들이 십만양병설을 창조해 그 무산의 혐의를 유성룡에게 뒤집어씌우고 둘 사이를 이간질했던 것이다. 」
(이하 김장생, 송시열 등이 유성룡을 헐뜯는 내용: 생략)

이덕일씨는 위 글에서 ‘율곡의 십만양병설은 조작된 허구’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들고 있다.
① 광해군8년(1616) 편찬한 <선조실록> 에는 일언반구도 없는데 효종8년(1657) 서인들이 작성한<선조수정실록> 에는 사관의 논평으로 기록되었다.

② 십만양병설은 애초에 연월미상이었는데 송시열의 <율곡연보>에는 임란 발발 10년 전인 선조16년(1683) 4월 이라고 정확히 기록하고 있으니 후대로 갈수록 일자가 더 정확해지는 이상한 현상이 발생하였다.

③ 임란이 일어나자(선조25년,1592) 유성룡이‘이문성(李文成)은 진실로 성인이다’라고 탄식했다고 덧붙이고 있는데 율곡 이이의 시호 문성(文成)은 인조2년(1624), 유성룡이 사망(1607)한지 17년 후이니 유성룡이 17년 후에 생긴 문성(文成)이란 율곡의 시호를 사용했다는 자체가 조작의 근거다.

④ 율곡 이이는 선조 16년(1683) 4월에 병조판서였는데 2월에 양민(養民)을 강조하고, 양병(養兵)을 억제할 것을 임금에게 간하고, 백성들이 군역과 공납을 피해 도망가는 상황을 우려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힘든 군역과 수월한 군역을 맡은 자를 서로 교대시켜 도망을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성들이 군역을 피해 도망가는 상황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잠곡(潛谷) 김육(金堉)이 쓴 ‘이순신 신도비문’에는 이이와 유성룡이 이순신을 등용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이와 유성룡은 당파를 초월해 국사에 협력할 수 있는 사이였으나 당심(黨心)에 찌든 이이의 제자들이 십만양병설을 창조해 그 무산의 혐의를 유성룡에게 뒤집어씌우고 둘 사이를 이간질했던 것이다.

○ 다른 기록 제시
율곡의 십만양병설에 관한 기록은 위 이덕일씨가 열거한 것보다 더 많은 기록들이 있지만 검토 난에서 후술하기로 하고, 월사집(月沙集: 月沙 李廷龜의 문집) 53권에 광해군 4년(1612) 봄 월사 이정구가 찬한 율곡 이이의 시장(諡狀)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기록된 십만양병설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율곡 이이가) 일찍이 연중(筵中: 經筵)에서 청하기를
“미리 10만의 병력을 길러 국가의 위급한 상황에 대비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10년 넘지 않아 장차 나라가 토붕와해(土崩瓦解)하는 변고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서애(西厓) 유공성룡(柳公成龍)이 “무사한 상황에서 병력을 기르는 것은 화(禍)를 기르는 것입니다” 하였다.
당시 오래 평안한 세월이 지속된 터라 연대(筵對:
경연 참석자)했던 신하들이 모두 (율곡)선생의 말을 지나치다 하였다.

* 경연(經筵) : 임금이 학문을 닦고, 국책을 검토하기 위해 학식과 덕망이 높은 신하로 하여금 경적(經籍)과 사서(史書), 시무(時務: 시급한 일, 당면과제) 등을 강론케 하고, 여러 사람이 참석하여 토론하는 오늘날의 세미나이다. 세자를 모시고 하는 것을 서연(書筵)이라 하였다.

(율곡)선생이 연중에서 나와서 유성룡에게 말하기를 “국가의 형세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놓였는데 속유(俗儒)들은 시무(時務)를 모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진실로 그렇다 치더라도 군(君)도 이러한 말을 하시오. 지금 미리 병력을 길러두지 않으면 필시 손을 쓸 수 없게 될 것이오.”하고 근심스런 기색을 보였다.』

[원문]「筵中。請預養十萬兵。以備緩急。否則不出十年。將有土崩之禍。西厓柳公成龍以爲無事而養兵。養禍也。時久安恬憘。筵對之臣。皆以先生言爲過。 先生出謂成龍曰。國勢危如累卵。以俗儒不達時務。他人則固無望。君亦有此言耶。今不預養。必無及矣。因愁然不樂」

『임진년의 왜란이 일어난 뒤 서애(西厓: 유성룡)가 조당(朝堂)에서 재신(宰臣)들에게 말하기를
“당시에는 나도 괜한 소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그 말을 반대하였으나 지금 와서 보니 이문정(李文靖)은 참으로 성인(聖人)이다. 만약 그 말을 따랐다면 국사(國事)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율곡이)전후로 올린 소장(訴狀)과 차자(箚子)의 주책(籌策:利害를 헤아려 생각한 꾀)도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혹 헐뜯고 반대하였으나 지금에 와서는 모두 선견지명(先見之明)에서 나온 것이니 참으로 탁월한 재주이다. 율곡이 있다면 필시 오늘의 시국을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다.”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옛 성인이)이르는바 '(옳은 일을 하면) 사후(死後)에 백 년이 지나지 않고도 옳은 평판을 얻는다’는 것이다』

[원문]「逮壬亂之後。西厓於朝堂。語諸宰曰。當時吾亦慮其騷擾而非之。到今見之。李文靖眞聖人也。若用其言。國事豈至於此極乎。且其前後章箚中籌策。其時人或?議。而今皆鑒鑒先見。眞是不可及之才。栗谷若在。必能有爲於今日矣云。誠所謂不待百年而知也」

시장(諡狀)은 임금이 신하에게 시호를 내리기 위한 지금의 상훈(賞勳) 공적조서(功績調書)에 해당하는 공문서이다.
시호(諡號)를 받을 만한 신하가 죽으면 그 사람의 일생을 가장 잘 알고 평가할 수 있는 사람으로 시장관(諡狀官)을 지명하여 그 사람의 행적과 덕행을 자세하게 평가한 시장(諡狀)을 찬하여 제출하면 이를 바탕으로 태상각(太常閣)이라는 각의를 열어 검토하고, 이에 합당한 세 개의 시호안(諡號案)을 설정하여 시장과 함께 상주하면 임금이 한 개의 안에 낙점(落點)하여 결정하고, 증시(贈諡)하는 공식적인 절차를 거친다.

그러니까 율곡 이이 선생은 선조17년(1584)에 별세했는데 28년 후인 광해 4년(1612)에서야 월사 이정구가 시장관으로 선임된 것이다.
그러고도 율곡의 시호 ‘문성(文成)’이 증시(贈諡)된 것은 율곡이 사망(선조17년, 1584)한지 40년 후인 인조2년(1624)인데 이는 월사가 율곡의 시장을 광해 4년(1612)에 찬하고도 12년 후의 일이다.

지위나, 공적이나, 학덕이 그보다 못한 사람도 죽은 후 빠른 기간 내에 증시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관직으로는 육경(吏判, 兵判)에 올랐고, 학덕으로는 ‘동방의 성인’으로 추앙을 받던 율곡 이이에게 증시가 이렇게 지연된 것은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이다.

이덕일씨가 서인의 영수 율곡 이이의 선견지명을 찬양하고, 남인의 영수 유성룡에게 무산의 혐의를 덮어씌우기 위해 율곡의 서인(노론) 제자들이 십만양병설을 조작했다며 당쟁을 끌어들인 것과 똑 같은 논리로 율곡의 증시가 지연된 것은 그 기간(선조조 후기-광해조)의 대부분을 남인이 집권하던 시기임을 고려한다면 이 또한 당쟁 때문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십만양병설이 조작된 허구라는 주장의 근거 검토
이덕일씨가 율곡의 십만양병설이 조작된 허구라고 주장한 근거에 대하여 조목 별로 검토하고자 한다.
  ① 이덕일 씨가 십만양병설의 일언반구도 기록되지 않았다는 「선조실록」은 광해8년(1616) 기자헌(奇自獻) 등이 편찬하고, 실록청에서 간행하였다.
이 때는 남인이 한창 득세하여 기승을 부릴 즈음인데 그들의 적수(敵首) 서인의 영수였던율곡 이이에게는 선견지명이 되고, 그들 남인의 영수였던 유성룡에게는 무산시킨 혐의가 될 십만양병설을 실록(實錄)에 올릴 남인의 바보가 어디에 있겠는가? 고의로 십만양병설에 관한 일언반구도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한 대목이다.

이덕일씨가 사관의 논평으로 김장생이 찬한 ‘율곡행장’을 보고 십만양병설을 서인들이 작성한 <선조수정실록>에 올렸다고 했는데 <선조수정실록>은 인조21년(1643) 이식(李植)이 <선조실록>중 잘못된 사실을 수정하고, 효종8년(1657) 김육(金堉)이 완성하여 실록청에서 간행하였다.

이 시기는 이미 인조반정(1623)으로 서인들이 득세한 후 계속되는 시기이니 없는 것을 조작해서 올렸다고 보는 관점이 있다면 이와는 반대로 있는 것을 고의로 누락시켰던 것을 다시 올려 복원(復元)하였다고 보는 관점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전자는 어느 때보다도 문풍(文風)이 크게 일어 월상계택(月象谿澤)으로 불리는 4대 문장가를 배출한 선조조 학자들의 지조를 무시하고, 당쟁에만 휘몰리는 소인배들로 추락시키는 관점으로 조선조 역사를 당쟁위주로 보는 일제 식민사관과 다를 바가 없다.

김장생의 율곡행장이나 송시열의 율곡연보 등은 사계 김장생-우암 송시열로 이어지는 율곡의 문하생들의 기록이라 하더라도 율곡시장을 찬한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는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생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동천(東泉) 김식(金湜)-이진자(頁 眞子) 김덕수(金德秀)-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로 이어지는 학맥으로 보면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과는 동문수학한 사이다.
그 윤근수의 제자인 월사 이정구가 선조실록보다도 4년 앞선 광해4년(1612)에 찬한 율곡시장에도 스승 윤근수의 학우 유성룡에게 '무산의 책임'을 지우게 될 수 있는 율곡의 십만양병설이 수록되어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관이 김장생의 율곡행장을 베껴 「수정선조실록」에 올린 것처럼 월사 이정구 역시 율곡시장을 찬하면서 ‘김장생의 율곡행장을 그냥 베꼈다’고 할 것인가.

이덕일씨는 율곡의 십만양병설은 존재하지 않았는데 서인의 율곡 제자들이 율곡의 선견지명을 찬양하고, 남인의 영수 유성룡이 무산시켰다고 모함하기 위해 조작한 허구라고 단정하였다.

그러나 나는 역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고 본다. 즉 선조조 후기와 광해조에 남인들이 득세하여 온갖 횡포를 자행하면서 율곡을 서인의 영수로 지목하고 사사건건 시비하다가 죽은 후에도 증시(贈諡)도 하지 않고 핍박 하였다.
율곡 이이에게는 선견지명이 되고, 집권 남인의 영수 유성룡에게는 무산시킨 혐의가 될 율곡의 십만양병설이 실존했음에도 실록(實錄)에 올리지 않았던 것을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득세해 세상이 바뀌었으니 당연히 실록에 올리려 할 것이며, 그래서 「선조실록」에는 없던 것이「수정선조실록」올라 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올바른 역사 복원(復元)의 정도(正道)라고 본다.
  「수정선조실록」을 편수했다는 자체가 잘못된 역사 기록을 바로잡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상적인 관점이지, 없는 사실을 날조해서 기록에 올리기 위해 실록을 수정했다는 것은 너무 삐뚤어진 관점이 아니겠는가?

② 이덕일씨가 ‘후대에 갈수록 날짜가 더 정확해지는 이상한 현상이 발생한 것’ 이라 하였다. 이는 ‘후대의 역사기록보다 선대의 역사기록이 반드시 더 정확하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역사의 기록의 정확성은 확보된 자료의 다과(多寡)와 정확성(正確性)에 좌우될 것이다. 후대에 더 많고, 더 정확한 자료를 확보해서 기록하거나, 선대의 기록에 고의로 누락시킨 것을 사세가 역전되거나 용기 있는 사가가 다시 기록에 올렸다면 선대의 기록보다 후대의 기록이 더 정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후대의 사가들이 이미 쓰여진 역사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③ 김장생이 찬한 율곡행장 내용 중에 그보다 훨씬 뒤에 증시된 율곡의 시호 문성(文成)이 등장하는 것을 이덕일씨는 십만양병설 자체의 존재를 부정하고, 조작한 증거로 단정하였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율곡행장에는 이문성(李文成), 율곡시장에는 ‘이문정(李文靖) 은 진실로 성인이다’ (李文靖眞聖人也) 라는 구절이 들어있는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첫쩨 김장생(金長生)이 찬한 율곡행장(栗谷行狀)이 순조14년(1814)에 간행된 <율곡전서>에 실린 것에는 ‘이문성(李文成)’, 자신의 문집인 사계집(沙溪集)에 실린 것에는 ‘이문정(李文靖)’으로 되어 있다.(2)
둘째 월사 이정구(李廷龜)가 찬한 율곡시장(栗谷諡狀)에는 ‘이문정(李文靖)’ 으로 되어있다.(1)
셋쩨 이항복(李恒福)이 찬(撰)한 율곡의 신도비문(神道碑文)에는 ‘이문정(李文靖)’ 으로 되어 있다.(1)
넷째 송시열이 찬한 율곡연보(栗谷年報)가 순조14년(1814)에 간행된 것에는 ‘이문성(李文成)’이나, 이보다 63년 전인 영조25년(1749)에 간행된 것에는 ‘이문정(李文靖)’ 으로 되어 있다.(2)
이와 같이 6개 기록에 이 구절이 나오는데 ‘이문정(李文靖)’이 4군데, ‘이문성(李文成)’이 2군데다.

이들 기록에 나오는 ‘이문성(李文成)’‘문성(文成)’을 이덕일씨는 율곡 이이의 시호(諡號)라고 단정하였다. 또 ‘이문정(李文靖)’‘문정(文靖)’은 이덕일씨는 제시하지 않았지만 얼핏 보기에 율곡 이이의 시호(諡號) 문성(文成)을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문정(李文靖)은 진실로 성인이다(李文靖眞聖人也)’란 구절은 중국 송나라 때부터 식자들에게 전해져 오는 고사성어이다. 즉 율곡 이이가 제창한 십만양병설‘문정(文靖)’은 율곡 이이의 시호를 잘못 쓴 것이 아니라 중국 송나라 진종(眞宗) 때의 명신(名臣)이었던 이항(李沆)시호다.

이항(李沆)은 송나라 진종이 북쪽 거란과 화친을 맺자 나라가 너무 평안하면 오히려 화근이 된다고 걱정하면서 가뭄이나 홍수가 나면 상세한 사항까지 파악하여 과도할 정도로 진종에게 일일이 보고하여 일부러 황제가 긴장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난 후에는 아무도 진종에게 나라의 어려운 일에 관한 보고를 하는 사람이 없어지니 진종은 정말로 나라가 태평하다고 믿고 궁궐을 짓고, 간신들을 등용하여 국력이 헛되이 소모되고, 국정이 어지럽게 되었다.

이를 지켜보았던 이항(李沆)의 친구였던 왕단(王旦)이란 사람이 뒤늦게 이항(李沆)의 선견지명을 깨닫고 “이문정(李文靖)은 참으로 성인이다”고 칭찬을 했는데 이 말이 식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옮겨지면서 상투어(常套語: 慣用語) 또는 고사성어(故事成語)가 된 것으로 선경지명, 나아가서 유비무환의 뜻을 내포한다.

율곡행장을 쓴 김장생, 율곡시장을 쓴 이정구, 율곡신도비문을 찬한 이항복, 율곡연보를 쓴 송시열, 이들 글에서 직접 이 말을 했다고 되어 있는 유성룡, 모두 그 시대 최고의 식자들로서 송나라 문정(文靖) 이항(李沆)에 얽힌 이 상투어를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슴지 않고 말하고, 기록하였던 것이다.

이와 유사한 내용의 말을 유성룡 이전에도 조선에서 사용한 예(用例)가 있다. <연산군일기 제5, 25장>에 의하면 연산군원년(1495) 5월 25일(庚戌)에 “옛날 위상(魏相)이 한나라 정승이 되고, 이항(李沆)이 송나라 정승이 되어 날마다 사방에서 일어나는 재변(災變)을 전하에게 아뢰고 경계하는지 모르겠다”(昔魏相相漢 李沆相宋 日取四方災異 以奏之 臣未知今之任魏相李沆之責者 能存魏相李沆之心 取四方之災 而陳戒於殿下)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이문정(李文靖)은 진실로 성인이다(李文靖眞聖人也)’란 구절의 ‘이문정(李文靖)’은 시호를 잘못 쓴 율곡 이이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의 송나라 진종(眞宗:서기998-1022년) 때의 대신 문정(文靖) 이항(李沆)을 지칭한 것이다.
따라서 사계집에 실린 김장생이 쓴 율곡행장, 이정구가 쓴 율곡시장, 이항복이 찬한 율곡신도비문, 송시열이 쓰고 영조25년(1749)에 간행된 율곡연보에 실린 율곡의 십만양병설조작된 것이라는 증거가 될 수가 없다.

그러면 순조14년(1814)에 간행된 <율곡전서>에 실린 율곡행장율곡연보에 기록된 ‘이문성(李文成)’은 무엇이며 어떻게 된 것일까 하는 문제만 남는다.

인조2년(1624)에 율곡에게 문성(文成)이 증시(贈諡)된지 190년이 지난 순조14년(1814) 판 <율곡전서>는 교정자이항(李沆)에 관련된 ‘이문정 고사’를 몰랐기 때문에 이 문제를 제기한 이덕일씨처럼 이미 알고 있는 율곡 이이의 시호 문성(文成)을 떠올리면서 전 판본(영조25년 판)에서 유성룡이 한 말 중의 ‘문정(文靖)’이 틀린 것인 줄 알고 ‘문성(文成)’으로 고쳤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유독 순조14년(1814) 판 <율곡전서>에 실린 판본(板本)에만 ‘문성(文成)’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도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이 판본으로 웹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이덕일씨가 근거로 한 자료에도 ‘문정(文靖)’으로 된 것은 하나도 언급하지 않고, ‘문성(文成)’으로만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보이며, 이것을 율곡 이이의 시호단정한 것 같다.

그러나 ‘이문정(李文靖)은 진실로 성인이다(李文靖眞聖人也)’란 구절은 유성룡이 영의정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는 때에 임진왜란이 발발 함으로서 저윽이 당황하면서 '송나라 이문정(李文靖: 李沆)이 미리 앞날을 내다보고 대비하도록 황제를 보필한 진실로 성인인 것처럼, 율곡 이이도 미리 앞날을 내다보고 십만양병설을 주장했구나' 하고 당시 자신이 우매했음을 탄식하면서 우회적으로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이 옳았음을 인정하는 구절이라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앞의 ‘문정(文靖)’, 뒤의 ‘문성(文成)’ 모두 율곡 이이의 시호가 아니라 송나라 이항(李沆)의 시호이거나, 판본 교정자가 잘못 교정한 것을 이덕일씨가 율곡의 시호로 잘못 알고 인용한 것이므로 그가 주장한 율곡의 십만양병론의 조작 근거가 될 수가 없다

④ 이덕일씨는 ‘율곡 이이가 양민(養民)을 강조하고 양병(養兵)을 억제할 것을 임금에게 간하고, 백성들이 군역을 피해 도망가는 상황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정구가 찬한 율곡시장에는 선조16년(1583)년에 율곡이 병조판서가 된 후 시무육조(時務六條)로 알려진 육조방략(六條方略)을 진달하였는데
(1) 현능(賢能)한 사람을 임용할 것(任賢能)
(2) 군민(軍民)을 양성할 것(養軍民)
(3)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갖출 것(足財用)
(4) 번병(藩屛)을 견고히 지킬 것(固藩屛)
(5) 전마(戰馬)를 구비할 것(備戰馬)
(6) 교화(敎化)를 밝힐 것(明敎化) 등이다.
이들 내용을 보면 (2), (4), (5)항은 전적으로 양병에 관한 사항이고, (1), (3), (6)항도 군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항목들이다.

또 그 이전에 선조가 율곡에게 병조판서를 진수할 때 율곡이 이를 극구 사양하자 선조는
“경은 폐정(弊政)을 경장(更張)할 것을 전후로 지성스럽게 진달하였으니 이것이 경의 평소의 뜻이었다. 지금 경이 진실로 좋은 계책을 내어서 유폐(流弊)를 모조리 혁파하고, 양병의 규모를 세운다면 국가의 다행일 것이다. 경은 노력하라” 하였다.
이는 선조가 율곡에게 먼저 '십만양병설과 같은 파격적인 방안을 강구해보라’ 고 하는 언질을 준 것이라 볼 수 있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중(筵中)에서 율곡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설파했을 때 ‘선조는 말이 없고’ 한 것은 유성룡을 비롯한 집권 주류 남인들의 반발이 워낙 거세기 때문에 선조는 이를 물리치고 십만양병설을 받아들여 밀고 나갈 용기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율곡 시장에도 “당시 오래 평안한 세월이 지속된 터라 연대(筵對)한 신하들이 모두 선생의 말을 지나치다 하였다’ 며 반대하였다고 하지 않은가?

⑤ 이덕일씨는 이순신 등용에 율곡과 유성룡이 협력한 것을 들어 ‘이이와 유성룡은 당파를 초월해 국사에 협력할 수 있는 사이인데 당심(黨心)에 찌든 이이의 제자들이 십만양병설을 창조해 그 무산의 혐의를 유성룡에게 뒤집어씌우고 둘 사이를 이간질했던 것’ 이라면서 존재하지도 않은 십만양병설을 창조해서 '당쟁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율곡과 유성룡 두 사람을 ‘당파를 초월한 사람’ 으로 묘사하면서 앞에서는 율곡을 ‘서인의 영수’, 유성룡을 ‘남인의 영수’라 지목한 것부터가 모순된다.

두 사람이 ‘이순신의 등용에 협력한 것’은 이덕일씨가 말한 것처럼 ‘당파를 초월해 국사에 협력할 수 있는 인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순신이 율곡과는 한 문중(門中: 德秀李氏)이고, 유성룡과는 동문수학(同門修學)한 사이로 이순신의 성품과 능력을 잘 알고 있으며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측면에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 결론
일제가 조선조의 역사를 ‘당쟁의 역사화’ 하여 한반도 식민지배에 이용하는 이른바 식민사관(植民史觀)으로 일관했지만 조선조의 모든 학자들이 당쟁에 뛰어들어 목을 맨 것은 아니다.
그 시대에 활약했던 나의 조상을 둘러봐도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이나, 해고(海皐) 이광정(李光庭), 오봉(五峰) 이호민(李好閔) 그리고 바로 율곡 시장을 찬한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도 그랬다. 남인 세상의 극치라 할 수 있는 광해난정 때도 벼슬에 나아가 소신을 다 해 국사를 이끌어 갔고, 서인의 세상이 된 인조반정 후에도 성심을 다 해 임금을 보필했다.

타 당의 정책에는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반대’로 일관하는 오늘날의 일부 소인배와 같은 극성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선비정신이 투철한 뜻 있는 신하들도 많았다. 그러기에 조선조가 500년을 지탱하지 않았는가?

있지도 않은 십만양병설을 조작해서 당쟁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이덕일씨의 주장은 앞에서 근거를 검토한 바와 같이 타당성이 없으며, 일부 당쟁만 일삼던 소인배의 극성만 놓고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우(愚)’를 범하는 당쟁관(黨爭觀)이 아닐 수 없다.

하기는 한겨례신문이 [한겨례 창간 21돌 특집]으로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는 선정적인 제하에 이덕일씨의 10편의 글을 올려 화살을 역사학계에 겨눈 것 자체가 현 사학계와 젊은이들의 기존 생각을 흔들어 파격적인 역전(逆傳)을 꾀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역사에 관심이 있는 누구를 붙들고 물어봐도 율곡의 십만양병설을 알고 있고, 인터넷 어디를 클릭해도 율곡의 십만양병설이 뜨고 있으니 여기에 ‘있지도 않은 율곡의 십만양병설을 서인 제자(서인)들의 조작’으로 등장 시킬 주제로 안성맞춤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 저것 자세히 조사해 보지도 않고 잘못된 자료를 성급하게 인용해서 글의 목적에 맞추어 직조(織造)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신문에 그 저자가 합작으로 깜짝쇼를 벌리고 있는 특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십만양병설 조작 문제는 표적도 잘못 선택했고, 탄약도 불량탄을 장전하여 쏜 것 같다. 이 문제를 가지고 역사계 아성을 쏠려고 작심을 했으면 ‘이문정(李文靖) 고사' 쯤은 알았어야 할 것이며, 십만양병설이 수록된 문헌이나 금석문이 무엇들이 있으며,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세밀히 조사를 했어야지 고작 판본 교정자‘이문성(李文成)’으로 잘못 교정한 기록을 '핵심 증거'로 제시하였으니 ‘선무당 사람 잡는 짓’을 하지 않았는가?

이쯤에서 문제 제기가 틀렸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으니 천만 다행이지만 그간 한겨례신문 기사와 인터넷으로 퍼져나가 젊은 이들의 머리 속에 틀린 사실을 각인시켜 정부가 초상을 화폐의 그림으로 올려놓고, 국민들이 주야로 보면서 숭배해 마지않는 율곡선생과 선생을 존경하면서 행장, 시장, 신도비문, 연보를 찬했던 조선조에 명성이 쟁쟁했던 분들의 실추된 명예는 어떻게 복원하며, 잘못 각인된 젊은이들의 생각을 어떻게 돌려놓을 것인가?
율곡선생의 영정과 오천원권 지폐 그림

이덕일씨가 50대 초반으로 아직 젊은 것 같은데 앞으로 역사를 논하는 학자로서 행세하겠다면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경망했음을 깊이 뉘우치고, 성심껏 그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 십만양병론 논쟁에 등장하는 분들의 생(生)-졸(卒) 연도와 수(壽)를 참고로 제시하면서 끝내려 한다.

율곡(栗谷) 이 이(李 珥) : 중종31년(1536) - 선조17년(1584) [壽 49]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 중종37년(1542) - 선조40년(1607) [壽 66]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 명종 3년(1548) - 인조 9년(1631) [壽 84]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 명종11년(1556) - 광해10년(1618) [壽 65]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 명종19년(1564) - 인조13년(1635) [壽 72]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 선조40년(1607) - 숙종15년(1689) [壽 83]


<2016. 12. 24 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