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그리라(香格里拉)
沙月 李 盛 永(2007.12.15)
    2004년 5월 17일-23일 4박6일간에 동기생 부부 15명이 중국 운남성의 띠킹주(迪慶州), 여강시(麗江市) 그리고 곤명시(昆明市) 근교를 관광한 적이 있다. 제일 먼저 간 띠킹주(迪慶州)의 주도는 중띠엔(中甸)인데 시중에 파는 지도상에는 '샹그리라(香格里拉)'로 표기되고 있고, 이 곳 사람들은 모두 ‘중디엔(中甸)’이라 하지 않고 ‘샹그리라’라고 부른다.

    두 번째 간 여강에도 가는 곳 마다 우리 말로 하면 ‘샹그리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프랑카드나 안내판이 서 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중국말 ‘샹그리라’는 우리 말로 이상향(理想鄕)이란 뜻이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상향에 대한 꿈은 같은 모양이다. 서양에서는 ‘유토피아’라 했고, 중국에서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 했고, 우리나라에서는 ‘청학동(靑鶴洞)’이라 했다.

    유토피아(Utopia)는 1516년 영국 런던 출생의 정치사상가 토마스. 모어(More)경이 간행한 정치적 공상을 담은 이야기 형식의 라틴어판 책인데 제명은 <사회의 가장 좋은 정치체제에 관하여, 그리고 유토피아, 새로운 섬에 관한 즐거움 못지않게 유익한 황금의 저서> 이다.
    가공의 인물 히틀로다에우스가 신세계에서 보고, 들은 가공의 여러 나라들 특히 유토피아에 관해서 모어 자신과 이야기 하는 형식으로 쓰여졌다.
    주로 당시 유럽 기독교사회를 비판한 제1권과 이상적인 사회 ‘유토피아’를 묘사한 제2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2권에서 묘사한 유토피아는 ‘시민은 평등하고, 화폐가 존재하지 않으며, 재산의 공유제가 시행되고 있다. 모든 인간이 함께 노동하기 때문에 적은 노동시간으로도 충분하여 여가는 각자의 정서를 풍부하게 하는데 사용한다’ 는 것이다.
    유쾌한 이야기 형식을 빌려서 당시 부패한 그리스도교사회의 개혁과 재생을 정치가, 지식인들에게 호소한 작품으로 큰 호응을 받았기 때문에 이후로 ‘유토피아’는 이상향을 말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 하게도 ‘유토피아’란 말의 뜻은 ‘어디에도 없는 곳’ 이란 뜻이라니 그가 묘사한 유토피아는 이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토마스 모어(Sir Thomas More, 1478∼1535)는 런던 출생의 영국의 정치가이며, 사상가이다. 옥스퍼드대학의 캔터베리 홀에서 당시 르네상스의 새로운 교육과 지식을 대표했던 T. 리너커 등으로부터 배웠으며, 런던의 법학원에서 법률학을 연구하였다. 처음에는 목사가 되기를 원하였으나 목사로서의 적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학자적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1504년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헨리 7세가 의회에 청구한 왕녀결혼비용의 삭감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그로 말미암아 헨리 7세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그 후 1509년 헨리 8세가 즉위할 때까지 정치생활에서 물러난 모어는 변호사로서 활동하여 명성을 얻게 되었고 1515년에는 모직물상인의 대표로서 프랑스와 네덜란드로 건너가 외교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가 유럽대륙에 체재하면서 여가를 이용해서 집필한 것이 유명한 《유토피아》이다. 1517년에 왕의 간청에 의해 정치생활에 복귀하여 청원재판소판사, 재무차관, 하원의장 등을 역임하고, 1529년에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1532년 헨리 8세가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블린과의 결혼을 주장하게 되자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대법관직을 사임하였다. 1534년 왕위계승법에 대한 선서를 거부하여 헨리 8세에 의해 1년 동안 런던탑에 투옥되었다가 사형되었다.

    무릉도원(武陵桃源)도원경(桃源境) 또는 도원향(桃源鄕)이라고도 한다. 중국 진(晉)나라 때 귀거래사(歸去來辭)로 널리 알려진 도연명이 쓴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비롯된다.

    무릉(武陵)의 한 어부가 곡천(谷川)을 거슬러 올라가다 복사꽃(桃花)이 만발한 숲 속의 동굴에 들어가 보니 진(秦)나라 때 학정을 피해 피난 온 사람들의 자손들이 별천지처럼 평화롭게 살고 있는데 어부는 아주 환대를 받고 며칠 동안 꿈 같은 날을 보낸 후 마을로 돌아와 다시 그 곳을 찾으려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중국에는 이와 유사한 산중타계(山中他界) 이야기로는 난가설화(爛柯說話)가 있는데 진(晉)나라 때 왕질(王質)이라는 사람이 석실산(石室山)에 나무하러 들어갔다가 선동(仙童)이 바둑을 두고 있어서 이를 관전하다 보니 대국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가지고 와서 세워 두었던 도끼의 자루가 썩어버렸고,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마을로 돌아와 보니 그 동안 이미 200년이 지나버렸더라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천하 태평할 때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생겨났다고 한다.

    도연명 (陶淵明, 365∼427)은 중국 동진(東晉)과 송(宋)나라의 시인이다. 장시성(江西省) 심양 자상(紫桑) 출생으로 이름은 잠(潛)이고, 연명(淵明)은 자(字)이며, 호(號)는 오류선생(五柳先生)인데, 사람들이 정절(靖節)선생이라 존칭했다. 동진왕조의 초창기에 큰 공을 세운 군벌의 거물 도간(陶侃)의 증손이라고 하며, 외조부 맹가(孟嘉)는 장군 환온(桓溫)의 부하이며, 풍류를 즐긴 인물로 알려졌으며, 도염명집(陶淵明集)이 있다.
도연명(陶淵明)
三才圖會(삼재도회)는 중국 명대(明代) 때 왕기(王圻)가 지은
천문, 지리, 인물을 그림으로 설명한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106권으로 되어있다.
    하급귀족의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젊어서 면학에 힘쓰며 입신의 뜻을 품었으나 29세에 처음으로 주(州)의 좨주(祭酒; 학사담당)가 되어 사관(仕官: 관직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곧 사임하고, 이어 주부(主簿; 비서담당)가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한때 고향으로 돌아갔다.

    35세 때쯤, 진군(鎭軍) 장군의 참군(參軍; 참모)이 되어 민란토벌에 종군하였고, 또 형주(荊州)의 군벌 환현(桓玄)의 막부에도 봉직했다. 최후에 고향에서 머지 않은 팽택현령(彭澤縣令)으로 80여 일 근무하다 사임하여 햇수로 13년에 걸친 관료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는데 그 때 나이 41세였다.
    ”내 어찌 오두미(五斗米; 현령의 적은 봉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을 대할소냐”라고, 현의 사찰(査察)로 온 군(郡)의 말직(末職;군 밑에 현이 있음)에게 굽신거릴 수 있겠는가 하는 유명한 한 마디를 남기고 현령의 직을 팽개쳤다.
    그리고는 전원으로 돌아가는 심경을 토로한 것이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도연명의 시는 오늘날, 사언시(四言詩) 9수, 오언시 120여 수가 전해지고 있다. 내용은
    (1) 전원에서의 은사의 생활을 노래한 것,
    (2) 유유자적한 심경을 토로한 것,
    (3) 주,현의 관리들과의 증답시(贈答詩), 영사(詠史), 의고시(擬古詩) 등이 주가 된다.

    한아(閑雅)한 정취 가운데서도 때로는 격렬한 감정이 표출되어 있어 송나라 소동파(蘇東坡)는 이것을 평해서
    ‘그의 시는 질(質;순박함)하나 실제는 기(綺; 아름다움)하며, 구(苟: 파리함)하나 실제는 유(裕: 살찜, 넉넉함)하다’고 하였다.
    또 그는 천성이 술을 좋아해서, 그의 시는 ‘편편(篇篇) 마다 술(酒)이 있다’고 할 정도이다. 그 중에도 가을밤의 지루함을 달래며 술을 마시고 마구 썼다고 하는 <음주(飮酒)>라고 제목 붙인 20수의 연작은 도연명의 독특한 시경(詩境)을 남김없이 전한다.
    그 중에서도 다섯째의 <음주(飮酒)> 시가 널리 회자(膾炙)되었다.

                        <음주(飮酒)>
    結廬在人境(결려재인경) 초려(草廬)를 맺어 인경에 있고
    而無車馬喧(이무거마선) 더구나 거마의 시끄러움이 없고
    問君何能爾(문군하능이) 그대에게 묻노니 무엇이 능하뇨
    心遠地自偏(심경지자편) 마음이 머니 땅 또한 편벽되다.
    采菊東籬下(채국동리하) 국화꽃 동쪽 울 밑에서 꺾고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유연히 남산을 보누나.
    山氣日夕佳(산기일석가) 산 기운 낮밤으로 좋고
    飛鳥相與還(비조상여환) 나는 새 서로 더불어 돌아간다.
    此中有眞意(차중유진의) 이 가운데 참뜻이 있으나
    欲辯已忘言(욕변이망언) 말하려 해도 이미 말을 잊었다.

    처음 4구의 서언(序言)은 자문자답형으로, ‘은일생활은 산중에 살 필요 없이 마음가짐 하나로도 사회에서 멀어질 수가 있다’라고 하였다. 중간 4구는 인생의 참뜻을 가을 황혼의 경치 속에 묘사한 것이다. 국화꽃을 꺾으면서 바라본 남산의 황혼 녘 경치는 깊은 맛이 감돌아 시심(詩心)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한다.

    그는 은사(隱士)의 처세를 뛰어난 감각으로 노래한 최초의 시인이었다. 당(唐)나라 때에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 등 자연파 시인들의 찬탄을 받았고, 송나라 소동파의 상찬(賞讚)에 이르러서는 ‘육조제일(六朝第一: 三國 이후 - 唐 이전 시대) 일 뿐 아니라 고금독보(古今獨步)하는 시인’이라 극찬하는 명성을 얻었다.

    시 외에도 부(賦)에는 《한정부(閑情賦)》, 산문에는 《자제문(自祭文)》, 소(疏)에는《자엄(子儼)》 등, 잡전(雜傳)에는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오효전(五孝傳)》 《사팔목(四八目)》 등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오류선생전》이 유명하며 《도정절집(陶靖節集)》 10권이 전한다. 시호는 정절(靖節)이다.

    귀거래사(歸去來辭)는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운문(韻文) 시로 405년(진나라 의회1년) 그가 41살 때 마지막 관직이었던 팽택현(彭澤縣)의 영(令)자리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의 심경을 노래한 것이다. 초사체(楚辭體)를 따른 전문(全文) 240여 자(字)는 각운(脚韻)이 다른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l장은 관리생활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심경을 읊었고,
    제2장은 집에 도착한 기쁨을 노래했다.
    제3장은 고향에서의 생활과 그곳에서 얻은 철학을 담았으며,
    제4장은 자유를 누리면서 자연의 섭리에 몸을 맡겨 살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자신의 모습을 노래했다.

    이 작품을 쓴 동기를 밝힌 서문에는 원래 성격에 맞지 않는 관직을 누이동생의 죽음을 구실로 그만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양(梁)나라의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簫統)의 《도연명전(陶淵明傳)》에는, 감독관의 순시를 의관속대(衣冠束帶)하고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오두미(五斗米;적은 봉급)를 위해 향리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고 하며 그 날로 사직하였다고 전한다.

    전반에는 관직을 사퇴하고 전원으로 돌아가는 해방감을 가을 정경 속에 그려냈고, 후반에는 다가오는 노년의 삶을 천명에 맡기는 심경을 봄의 정경 속에 묘사했다.
    “돌아가자!. 전원이 황페해 가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오?.(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라는 구절로 시작되고 전체적으로 영탄조가 강하나 신선한 정경 묘사와 청아한 풍취가 넘쳐 흐르는 걸작이다.
    관직을 내놓고 은일생활(隱逸生活)을 하겠다는 선언의 뜻이 담겼다. 이후 63세로 죽을 때까지 주로 심양 근처에서 지내면서 은사로 처세하여 명성을 얻었다. 50세가 지날 무렵, 조정으로부터 은사에게 명목만으로 주어지는 저작좌랑(著作佐郞)의 벼슬이 제수되었다.

    이 작품은 도연명의 기개를 나타내는 이러한 일화와 함께, 은둔(隱遁)을 선언한 일생의 한 절정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도연명의 대표작이며 전원생활에의 지향을 노래한 문학으로서 소명태자의 《문선(文選)》에도 실려 있다.
    이미 후한(後漢) 때 장충(張衝)의 《귀전부(歸田賦)》(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일을 한다는 내용) 등 그보다 앞선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나, 후세 문학에 끼친 영향면에서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가 가장 높이 평가되며 또한 많은 그림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귀거래사(歸去來辭)
    청학동(靑鶴洞)은 우리나라에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도인(道人)들의 이상향이다. 청학동 전설은 우리나라 전국의 이름난 산에는 두루 퍼져 있거나 바위에 새겨져 있다. 오대산 노인봉 아래를 율곡선생이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하였고, 청학동이란 이름과 청학동기(靑鶴洞記)를 남겼다.
율곡선생이 썼다는 소금강(小金剛: 오른쪽 위) 글씨와 설명
설명은 오대산국립공원에서 설치한 안내판
    근대 학자 유연집(柳淵楫, 1853∼1933)의 범암문집 (汎庵文集)에도 시문집 <청학동(靑鶴洞)>이 실려있다.
    또 삼척부에 속했던 두타산 동쪽 계곡도 이름은 좀 다르지만 뜻이 같은 무릉계(武陵溪)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두타산 무릉계 무릉반(武陵磐)과 금난정(金蘭亭) 그리고 주변 경치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청학동’이라 하면 지리산을 연상한다. 속성(俗姓)은 윤씨(尹氏)이고, 자는 이눌(而訥), 호는 침굉(枕肱)이라고 한 조선 중기 승려 현변 (懸辯)의 저서 침굉집(2권)에 가사 <귀산곡(歸山曲)>, <태평곡(太平曲)>과 함께 <청학동가(靑鶴洞歌)>가 실린 것을 시초로 지리산 청학동이 대중에게 보편적으로 알려져 왔다.

    청학동가는 청학동의 아름다운 경치를 둘러보면서 느낀 감회를 3-4조 가사로 읊은 것인데 첫머리가 “지리산 청학동을 녜듯고 이제 보니/ 최고운(崔孤雲: 신라 최치원을 말함) 종적이 처처의 완연하다” 로 시작된다.
    지금 행정구역 이름으로는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학동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지금도 ‘청학동’이라 부르면서 현재 20여 가구 100여 명의 주민들이 청학동 전설이 전해주는 이상향을 현실화 시키려 하고 있다.
    마을 뒤 지리산 삼신산(1284m)에는 삼신단(三神壇)을 모시고, 동네서 좀 떨어진 곳에 삼성궁(三聖宮)이라는 선원(仙院)을 지어놓고, 갱정유도(更定儒道)라는 단군계(檀君系) 종교를 믿으며 상투를 틀고, 갓 쓰고 도포 입으며, 초가집에서 전통적 예법에 따라 생활하고 있으나 전화, TV등 문화시설도 갖추고 있다.
지리산 삼신산(1284m) 정상의 삼신단(三神壇)
지리산 묵계리에 있는 청학선원 삼성궁(三聖宮)의 돌탑군과 설명
삼성(三聖): 환인(桓因: 한배임), 환웅(桓雄: 한배웅), 단군(檀君: 한배검)
    현변 (懸辯, 1616∼1684(광해군 8∼숙종 10)은 조선 중기 승려. 속성은 윤씨(尹氏). 자는 이눌(而訥), 호는 침굉. 본관은 나주(羅州). 9세에 천풍산(天風山) 처우화상(處愚和尙)에게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13세 때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제자인 태능(太能)을 찾아가 그의 법을 계승하고 오도(悟道)의 선승(禪僧)이라는 말을 들었다. 선암사(仙巖寺) 주지를 비롯하여 송광사(松廣寺), 연곡사 등 대찰에 머물렀으며 금화사(金華寺)에서 입적하였다. 저서에는 그의 가사 <귀산곡(歸山曲)> <청학동가(靑鶴洞歌)> <태평곡(太平曲)> 등이 실린 《침굉집》2권 이 있다

    마지막으로 샹그리라(香格里拉) 또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 두 곳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샹그리라는 1933년 영국의 소설가 제임스 힐튼이 내놓은 <잃어버린 지평선(The Lost Horizon)>에 그려진 티베트 산 속의 이상향의 이름으로 처음 나오면서부터 많은 여행가나 탐험가들의 마음 속에 꿈의 땅으로 자리 잡았고, 그런 이상향을 찾아 나선 돈키호테 같은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샹그리라'는 애초부터 없는 곳이다. 왜냐하면 작자 힐튼이 마음 속으로 그린 이상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하지를 않는다. 그래서 자기가 살고 있는 땅, 고향(故鄕)을 ‘샹그리라’라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칼 한 것은 현대 문명사회의 눈높이로 볼 때는 사람이 살기에 어려운 척박한 고장일수록 샹그리라로 더 높이 찬양한다.

    2004년 5월 곤명관광의 일환으로 샹그리라를 하루 구경할 때 구입한 이곳 장족(藏族: 티베트족) 출신 여가수 왕친라무(央金拉母)의 노래 CD에도 모두 이 척박한 땅을 ‘샹그리라’라고 찬양하는 노래들이다.
중국 왕친라무(央金拉母)의 노래 CD
    (1) 香格里拉 女孩(샹그리라뉘하이) 샹그리라의 처녀 ,
(2) 高原的陽光(가오윈더양광) 고원의 햇빛 ,
(3) 香格里拉(샹그리라) 샹그리라
(4) 美麗的家鄕(메이리더치아샹) 아름다운 우리 고향,
(5) 卓瑪的故鄕(초우마더쿠샹) 뛰어난 옥의 고향 ,
(6) 火塘(훠탕) 화덕
(7) 月亮快出來(웨량콰이추라이) 달이 밝고 시원스레 떠오르면 ,
(8) 想家的琸瑪(샹치아더초우마) 집생각 나게 하는 탁마
(9) 走進香格里拉(조우친샹그리라) 샹그리라를 달린다 ,
(10) 香格里拉的激情(샹그리라더치칭) 샹그리라의 격정,
(11) 思鄕(쑤샹) 고향생각
(12) 迪慶高原(띠킹가오원) 적경고원,
(13) 故鄕河(쿠샹허) 고향의 강 ,
(14) 권西戀歌(꿘시렌꺼) 권서의 연가
(3) 香格里拉(샹그리라) 노래 한 장면
“♩ 샹그리라! 나의 샹그리라---♪”
    중국 운남성 적경만 해도 그렇다. 땅에서 나는 작물이라고는 밀의 한 종류 뿐이고, 시장에 팔고 있는 채소도 모두 외지에서 들여 온 것이란다. 오직 흔한 것이 있다면 고원에 풀은 잘 자라서 풀을 뜯어먹고 사는 양의 고기와 양 젖으로 만드는 치즈 같은 식품 뿐이란다. 뿐인가 산소 부족으로 그 곳에 살면서 적응된 사람은 안 그렇겠지만 관광객에게는 산소통 신세를 지지 않으면 몹시 괴롭다.
샹그리라 관광객 산소흡입
    그 외 샹그리라라고 부르는 티베트, 인도, 파키스탄, 네팔의 왕국 등도 고산 산악지대로 기후와 토질이 척박하여 물산이 풍부하지 못한 곳이다.
    중국정부는 영국 작가 제임스 힐튼이 소설이 그리는 샹그리라의 배경이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고원인 청해성과 티베트고원의 남동쪽 끝 자락이라고 판단하고 여러 번 답사를 거쳐 티베트와 운남성의 접경지대를 ‘샹그리라’라고 공식 지정 공표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중에 팔리는 지도에 중디엔(中甸)을 ‘香格里拉’로 공식 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운남성 적경주 요도
'매리설산(梅里雪山)', '샹그리라(香格里拉)', '호도협(虎跳峽)', '여강(麗江)' 등이 보인다.
송찬림사에서 바라 본 중전(샹그리라) 시가지와 외곽의 한 마을 풍경
‘신의 산’이라 찬양하는 샹그리라의 최고봉 매리설산(每里雪山: 해발 6,740m)
차마고도(茶馬古道)도 여기를 지나간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면 옛 사람들이 꿈꾸던 이상향의 꿈은 다분히 문명을 등지는 현실 도피적인 면이 있고, 네 것 내 것 없는 이른바 공산(共産)사회가 지향하는 허망한 꿈과 맥이 통하고 있는 것 같아 좀 씁스름한 느낌이 든다. 또 ‘유토피아’란 말 그 자체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은 것’ 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하니 그저 꿈일 뿐이다. 그래도 사람은 꿈이 있기에 살고 싶은 의욕이 있지 않겠는가?
왕친라무(央金拉母)가요 CD <香格里拉 女孩(샹그리라뉘하이)> 몇 장면
이규태코너 「이어도 기지(基地)」
    2003년 6월 13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이규태코너 '이어도기지'라는 글에 제주도 여인들의 이상향 '이어도' 이야기가 실려있다. 전문을 옮긴다.

    먼바다 복판에 있는 외딴 암초에 이상향(理想鄕)을 설정하는 데는 동서가 다르지 않다.
    마르퀴드 사드가 살고 싶어했던 프리 섹스의 낙원 '타모에'는 남태평양에 있는 암초섬이요
    중세 유럽의 귀족들이 선망했던 게으른 자의 낙원 '코케인'도 대서양에 있는 암초섬이다. 이 섬에 가면 이마에 땀 흘리지 않고도 먹고 마시고 살 수 있으며 무서운 밤이 없이 항상 낮만 있고 사람들의 마음도 낯처럼 밝아 반목이나 불화가 없다고 알았다.
    이상향의 대명사인 '유토피아'도 암초에 둘러 싸여 안내 없이는 이를 수 없는 섬이요
    유럽사람 고금의 가장 많은 꿈을 집약시킨 '아틀란티스'도 바다 밑 암초다.

    그러하듯이 제주도 사람들의 꿈을 집약시킨 마라도 남쪽에 있는 이어도다.
    영조 연간에 과거 치러 배를 탔던 제주도 선비 장한철(張漢喆)이 동남 해상을 표류, 다섯 달 만에 돌아와 '표해록(漂海錄)'을 지었는데 그 가운데 당황하고 있는 선원들에게 이어도를 지목, 여인국에 도달할지 모른다고 용기를 주는 대목이 있다.
    여인들만 사는 이 여인국에 가면 여자들 틈에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어도파랑도(波浪島)로도 불렀듯이 물결이 소용돌이 쳐 난파가 잦았고 돌아오지 않는 남편들을 여인국에 빼앗긴 것으로 여겼던 한 많은 섬이다.

    여인국의 연장 사고(思考)인지는 몰라도 '이어도'는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며 남편이 없어 구차하게 구속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일에 지친 제주도 아낙들의 이상향이라는 설도 있다.
    강남(江南) 가는 길의 절반 지점에 있다는 이 '이어도'가 많은 민요의 후렴으로 정착하고 있음을 그 이유로 든다.
   
"이어도이어도여 요내 노(櫓)야 부러진들 요내 손목이야 부러질쏘냐 / 한라산 곧은 나무가 다 부러진들 이어도야" 하며 노 저을 때도 이어도, 보리방아 찧을 때도 이어도, 연자방아 돌릴 때도 이어도--- 이어도는 제주도 사람들에게 이요 인내희망이었다.

    이 바다속 땅인 이어도에 해저 40m, 해상 36m의 400평 짜리 구조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헬기장을 갖춘 이 기지에는 첨단 장비 108점을 설치, 해양의 조류와 어류의 동태를 조사하고 제주도에 막대한 피해를 주오온 태풍의 진로 강도를 미리 관측하는 등 전설 속의 희망을 과학화 한 것이 되어 새삼스럽다.
(2003.06.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