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반송(塔畔松) 이야기

                                  

塔畔松(탑반송)

一尺靑松塔畔栽(일척청송탑반재)

塔高松短不相齊(탑고송단불상제)

傍人莫怪靑松短(방인막괴청송단)

他日松高塔反低(타일송고탑반저)

 

탑 둘레에 심은 소나무

작은 소나무 탑 둘레에 심으니

탑은 높고 솔은 낮아 서로 가지른 하지 (어울리지) 않네

사람들아 소나무 낮다고 탓하지 말라

후일 소나무는 높고 탑이 도리어 낮을 것이니

 

이 시는 조선 명종-선조간에 살면서 이조판서까지 지내고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된 청련 이후백이 12살 때 어떤 계기가 있어 지은 시다.

 

이후백이 함양(개평동)에 살다가 9세 되던 해에 괴질이 유행하여 부모가 한꺼번에 죽고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 16세까지 이웃 고을 거창에 있는 백부(伯父: 李國權, 縣監) 밑에 의탁하였는데  어찌나 총명한지 먼 고을까지 소문이 나 있었다.

 

이후백의 이름을 ‘後白(후백)’이라 지은 것은 개령현감(開寧현감: 현 김천시 계령면 일대)을 지내면서 중앙과 영남 일원의 문사(文士)들이 중국의 진나라 왕희지 등의 문계 난정계를 본 따서 결성하여 진주 촉석루에서 정기적으로 모여 풍월을 읊고 친목을 돈독히 했던 진양수계(晉陽修契) 금난계(金蘭契)의 회원이던 조부 이원례(李元禮)가 손자 이후백이 중국 당나라 때 시선(詩仙)이라 불리던 이백(李白: 자 太白, 호 靑蓮)을 닮아서 시문을 잘하라는 소망을 담아서 ‘뒤에 태어난 이백’이란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이후백은 이러한 조부의 충정에 보답하듯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공부와 시 짓기를 잘 하였다. 문집 ‘靑蓮集(청련집)’에 많은 시문을 남겼으며, 호를‘靑蓮(청련)’이라 한 것도 조부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여 이백의 호 청련(靑蓮)을 그대로 취한 것이다.

 

이후백이 12세쯤에 절에 가서 글공부를 하고 있는 데 근처를 지나던 경상도 관찰사가 이후백이 총명하다는 것과 가까운 절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번 만나 시험 해  볼 생각으로 찾아왔다.

 

관찰사가 주위를 둘러보니 절의 탑 둘레에 심은 지 얼마 안 되는 작은 소나무를 보고 시제를 ‘탑반송(塔畔松)’이라고 내자 이후백이 곧 답하여 위의 시를 지은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이 시에서 탑은 관찰사를 지칭하고, 작은 소나무는  이후백 자신을 지칭한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이렇게 놓고 시의 뜻을 음미해 보면

 

‘지금은 탑(관찰사)이 높고 소나무(이후백)는 작지만 소나무는 무럭무럭 자라 언젠가는 탑 높이를 능가할 것이다. 그 때는 소나무가 높고 탑이 도리어 낮게 될 것이라’는 어린 이후백의 패기와 야망에 찬 시다.

 

비록 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고 백부에게 의탁한 불우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이 시에서 보여준 늠늠한 기상을 간직하고 자라서 시문에 능하고, 사리에 밝고 성정이 곧고 청백하여 관직에 나아가 이조판서까지 올랐다.

 

59세로 단명하여 정승을 눈앞에 두고 관직은 판서로 끝났지만 나라에서는 그의 청렴결백과 문장과 공적을 인정하여 그가 죽은 후에 나라에서는 청백리에 녹선(錄選)하고 증직으로 양관 대제학과 시호 문청(文淸)을 내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