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정(花石亭) 작명 이야기

 

임진각과 자유의다리가 있는 문산읍에 도착하기 전에 장단군 진동면 남쪽 끝 일월봉을 남쪽으로 크게 회돌이 치는 임진강 남안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날아갈 듯 날개를 펴고 있는 아담한 정자가 유형문화재 61호로 지정되어 있는 화석정(花石亭)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율곡리 화석동 마을  뒤 동산이다. 일제가 이 땅을 강점하여 그들의 대륙침략 목적에 맞도록 철도와 도로를 건설하면서 서울에서 평양, 의주에 이르는 길을 문산-자유의다리-개성-해주-사리원을 거치도록 연결하였지만 조선 시대만 해도 평양에 이르는 가장 빠른 직선 길은 벽제-파주(이 화석정 앞에서 임진강을 건너)-장단-평산을 거쳐 평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러니까 화석정은 옛날에는 한양-평양의 가장 번화한 길목에 있었던 것이다.

 

화석정문화재 안내간판은 화석정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있다.

 

화석정 유형문화재 안내 간판 내용

  이 정자는 율곡선생이 국사의 여가와 퇴관 후에 들러 작시, 연구와 묵상을 하던 곳이다. 율곡선생의 5대조 강평공 이명신에 의하여 세종25년(1443) 창건된 것을 성종9년(1478) 선생의 증조보 이의석이 중수하고 몽암 이숙함이 이 정자를 화석정이라 이름하였다.

  그 후 율곡선생이 다시 중수하여 사용하던 이 정지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80년간 터만 남아 있다가 현종14년(1673)에 선생의 종증손들이 복원하였으나 6.25동란 때 다시 소실되었다.

  1966년 파주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하고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선생 및 신사임당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화석정을 단청하고 주위도 정화되었다.

  * 현 화석정의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로 한글로 되어있다.

 

 

위 안내문 중에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는 대목은 여러 호종했던 신하들의 회상록에서 보통“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칠흑 같은 밤에 몽진하는 어가(御駕)가 임진강에 이르렀을 때 배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고 왜군은 뒤를 쫓고 있는 다급한 상황에서 절벽 위에 정자(화석정)에 불을 질러 강 바닥을 낮같이 밝힌 후 겨우 배를 찾아 임금이 도강하였다”는 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율곡선생은 임진왜란 10년 전에 경연에서 선조 임금에게 10만양병론을 주청했다가 배석했던 당시 득세한 유성용 등 동인들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율곡선생이 화석정을 중수 할 때 이미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불에 잘 타도록 간 솔로 정자를 지었다”고 말하기도 하는 데 그 진위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 율곡선생의 선견지명을 칭송하는 과장된 표현인 것으로 생각된다.

 

성종 9년 중수할 때 정자의 이름을 ‘화석정(花石亭)’이라 짓고, 중건 기문을 쓴 몽암 이숙함은 연안이씨 부사공 5대손 양원공(楊原公) 이숙함(李淑王咸)이다. 이숙함의 화석정 중건 기문 서두에 따르면

 

『나의 문생(文生)이며 전 날 홍주(洪州: 현 홍성)의 원을 지낸바 있는 이후(李侯) 의석(宜碩)이 그의 아우(사촌)이며 또한 나의 동료인 의무(宜茂)씨를 보내서 말하기를 파주 관아 북쪽 10리 쯤에 율곡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나의 조부 강평공(康平公: 지돈영부사를 지낸 李明晨, 율곡선생의 5대조)의 옛 별장이 있고, 별장 북쪽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에다 정자를 지어 기화이초(奇花異草)와 진송괴석(珍松怪石)을 많이 심어 놓고 감상하였는데 그 동안 세월이 흘러 퇴폐하고 다만 옛 터만 남았다.

의석이 조업(祖業)이 황폐하게 될까 두려워하여 옛 터에 정자를 중건하였다. (정자에서 바라보는 경관생략)그러므로 자네는 정자 이름을 짓고 기문을 써서 더욱 아름답게 하여 주게』하며 작명과 기문을 부탁하였다는 것이다.

 

이숙함은 이의석이 조업이 황폐될까 두려워 정자를 중건하여다는 지극한 마음과 옛 정자에 기화이초와 진송괴석을 많이 심어놓고 감상하였다는 설명에서 중국 고서 찬황공(贊皇公) 이덕유(李德유)의 평천장(平泉莊) 기문(記文)을 머리에 떠 올리고 그 기문 가운데서 ‘화석(花石)’이란 글자를 따서 이름을 ‘화석정(花石亭)’이라 지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평천장의 기문에서 찬황공이 “평천을 파는 자 나의 자손이 아니며, 꽃 하나 돌 한  개라도 남에 주는 자도 아름다운  자재가 아니다”라고 훈계하였지만 후에 평천장의 꽃과 돌이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었다는 기록을 들면서 화석정을 창건한 강평공이 이러한 훈계를 하지도 않았지만 손자 이의석은 남에게 팔지도 주지도 않았거니와 조선(祖先)의 마음에 들게 중건하여 능히 조업을 이었으니 그 어질기가 찬황공의 자손들과 비교하면 확연히 들어 난다고 칭송하고 있다.

 

그리고 기문의 말미에 『정자가 황폐해지니 꽃(花)과 돌(石)도 함께 황폐해지고, 정자가 새로워지니 꽃(花)과 돌(石)도 함께 새로워졌다. 물(物)은 비록 앎(知)이 없겠으나 서로 만남은 각자 때(인연)가 있는 것이니 어찌 우연이라 하리요. 외로운 배에 명월 싣고 청풍에 낚싯줄 드리우는 것은 이후(의석)의 속세를 떠난 그윽한 정취이니 이 다음 이후를 따라 정자에 올라 놀게 되면 다시 이후를 위하여 글을 지으리라』하면서 기문은 끝났다.

 

이 기문 서두에 양원공은 덕수이씨 이의석과 사제관계이고, 그의 사촌 이의무와는 문학 동료로서 공에게 기문을 부탁할 정도로 가깝고 허물없이 지난 사이 인 것 같다.

 

선조의 친분 때문인지 양원공의 증손 청련공 이후백과 이의석의 증손 율곡선생은 선후배 관계지만 매우 가까웠던 것 같다.

율곡선생이 찬한 석담일기에는 선조8년(1575)에 이후백이 함경도, 김인후가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떠나려 할 때 율곡 이이가 나서 임금에게 고하기를 『이후백과 김인후는 전장(典章: 법과 제도, 문물 등)에 밝고 시무(時務: 당면한 급한 일)에 능하니 조정에 가까이 두어야 합니다』고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비롯하여 이후백이 함경도 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푼일, 박순의 천거로 형조판서에 기용된 일, 이조판서로 있을 때 좋은 인재를 천거하려고 노력하고 고민한 일과 친족의 청탁을 거절했다는 일, 김효원이 “이후백이 정성에 기용되면 논박하겠다”는 말에 반박한 일 등 이후백을 좋게 평가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