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豫言)과 관상(觀相) 이야기
沙月 李盛永(2015. 1. 7)
2015, 1, 5일자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971)에 ‘월악산 통일예언’ 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랐는데, 2008. 3. 12일에도 ‘대원군 책사(策士) 박유붕(朴有鵬)’ 이라는 관상을 통한 사람과 미례를 예측하는 이야기를 올린 적도 있었다. 지맥으로는 월악산, 인맥으로는 박유붕과 관련이 있는 명나라 도사 두사충(杜思忠)의 ‘상전벽해(桑田碧海)와 도선참배(渡船參拜) 예언’ 이야기를 함께 엮는다.
<예언1>
月岳山의 통일 예언
(2015. 1. 5.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
『"월악산 영봉(靈峰) 위로 달이 뜨고, 이 달빛이 물에 비치고 나면 30년쯤 후에 여자 임금이 나타난다. 여자 임금이 나오고 3~4년 있다가 통일이 된다."

월악산(月岳山)이라 하면 충북의 제천과 충주에 걸쳐 있는 산이다. 월악산 일대 장년 식자층 사이에서는 통일을 예언하는 이 풍수도참 (風水圖讖)이 진작부터 전해지고 있었다.

이 예언의 출처를 추적해 보니 불교계 고승이었던 탄허(呑虛, 1913~ 1983)가 그 발원지였다.
탄허(呑虛, 1913~ 1983)
대개 불교 고승들은 주역(周易)이나 풍수도참, 정감록(鄭鑑錄) 같은 비결서(秘訣書)를 가까이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점쟁이나 술사(術士) 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탄허는 유년 시절부터 도교적 성향이 강했던 정읍의 보천교 (普天敎)에서 자랐기 때문에 풍수도참과 예언을 기피하지 않는 기질 이 있었다.

탄허가 1975년 무렵 월악산 자락인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있는 덕주사(德周寺)에 들렀다고 한다. 덕주사는 신라 마지막 임금이었던 경순왕의 딸인 덕주(德周)공주가 머물렀던 절이다. 마애불을 덕주공주 가 세운 것이라고 전해질 만큼, 덕주사는 망국 공주의 한(恨) 이 서려 있는 절이다.
덕주사에 게시된 덕주사 연혁
손국(遜國) : 양국(讓國), 나라를 남에게 물려줌, 양보함.
마애미륵불(磨崖彌勒佛): 돌의 면을 갈아서 요철을 만들어 미륵불 형상을 입체감있게 새긴 것
* 부처 형상을 조성하는 방법 4가지 유형
선각(線刻): 돌의 평면에 요철 없이 선(線)으로서 음각(陰刻) 하여 부처의 상을 평면으로 그린 그림.
마애(磨崖): 돌의 면을 갈아서 요철을 만들어 부처의 모습을 입체감 있게 새긴 것.
석조(石造): 돌을 쪼아서 만든 부처의 좌상(坐像) 또는 입상(立像) 조각.
감실(龕室): 바위의 수직 측면을 움푹 들어가게 파고 그 안에 석조 불상을 안치한 것.
탄허가 왔을 때 덕주사 주지를 맡고 있었던 월남(月南)스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이 풍수도참에 기반을 둔 예언이 나왔다 는 것이다. 당시 이 이야기를 접한 사람들은 황당한 이야기로 여겼음 은 물론이다.

예나 지금이나 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황당한 이야기를 천시한다. 7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월악산 봉우리 위에 뜬 달이 물에 비친다는 이야기는 납득이 안 됐다. 주변에 큰 호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자 임금 이야기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70년대 후반 댐 공사가 시작돼 1983년경 충주댐이 완성되는 게 아닌가! 충주댐에 물이 차기 시작하니까 월악산 달이 드디어 물에 비치게 되는 것 아닌가!

1983년부터 30년을 계산하면 2013년이다. 이때 여성인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되었다. 2015년은 집권 3년 차에 해당하는 해이다. 월악산 예언대로라면 올해부터 통일을 향한 어떤 조짐이 나타나야 옳다. 과연 이 예언이 실현될까? 』


이 예언이 맞으려는지 작년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사에 ‘통일은 대박’이란 말을 했는데 지난 일년 동안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말이 되었고, 금년 김정은의 신년사에 ‘최고위급회담’을 언급한 것이 그 예언의 조짐이었으면 좋으련만---
<예언2>
상전벽해(桑田碧海) 도선참배(渡船參拜) 예언
(연안이씨 이야기책, 두사충(杜士忠) 예언 )
이곳 월악산과 관련된 풍수도참 이야기가 나왔으니 월악산 몸통은 아니지만 월악산에서 북쪽으로 벋어나가 그 아랫도리가 충주호의 단양뱃길과 월악나루 뱃길 갈림길 물속에 잠기고 야트막하게 남아있는 황학산(451m) 아래서 있었던 예언 이야기다.

2003년 10월 1일 발간된 『연안이씨 이야기』 책에 ‘桑田碧海 渡船參拜를 豫言한 황강의 副護軍 墓’ 라는 이야기가 수록된 적이 있는데, 이 이야기에 상전벽해(桑田碧海) 도선참배(渡船參拜) 를 예언한 두사충(杜士忠) 이란 사람이 나온다.

그런데 이 두사충(杜士忠) 이 실제 인물로서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 대장 이여송(李如松)을 수행해서 조선에 나왔다가 난이 끝나고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아 만경두씨(萬頃杜氏) 의 시조가 되었다는 사실이 2008년 3월 12일자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의 ‘대원군 책사 박유봉’ 이란 이야기 속에 들어있다.

다만 이 이야기 중에는 ‘두사충(杜士忠)’ 이라 했는데, 조용헌 살롱 에서는 '두사충(杜思忠)' 으로 이름 가운데 글자의 한자 표기가 다르나 이야기 내용으로 봐서는 동일인이다. 두 이야기 모두 흥미로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함께 올린다.

『충주댐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월악나루나 단양으로 향하면서 월악산 영봉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을 잃고 올려보다가 시선을 낮추면 월악산에서 흘러내리는 산줄기가 황학산으로 끝맺음을 한다.

그 황학산이 충주호에 잠기면서 여러 개의 곶(串)과 같은 지형을 만들 었는데 가장 멀리 튀어나온 곶(串)의 끝머리에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아슬아슬하게 자리잡고 있는 묘지 하나가 눈에 띈다. 행정구역 으로는 제천시 한수면 북로리 작곡(鵲谷:
까치골)이다.
연안이씨 부호군(副護軍 諱 巖)의 묘
지금은 묘가 물가에 있어 충주호에 놀고 있는 물고기와 오가는 유람선을 바라보고 있지만 묘를 쓴 400여년 전에는 물가가 아니라 해발 140여 미터의 황학산 중턱에 있었고,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남한강을 이곳에서는 황강(黃江)이라 불렀다.

이 묘지에 얽힌 이야기다. 延李의 판소부감공(判小府監公 諱 賢呂)의 8대손 저헌공(樗軒公 諱 石亨)의 여섯 손자 중 넷째(六長派 中 四派), 대호군공(大護軍公 諱 孝長)의 제2자 부호군공(副護軍公 諱 巖) 의 묘다. 이암(李巖) 은 중종과 선조 때에 살았다. 부호군(副護軍:
종4품 무 관직) 에 증직(贈職)되어 후손들이 부호군공(副護軍公) 이라 부른다.

대대로 학문을 숭상하는 집안에서 자라 역시 글을 배워서 일찍이 선공 감(繕工監:
토목과 영선을 맡은 관청) 의 감역(監役)으로 일하다가 중종14년(서기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조선 중종14년 11월 南袞 등 勳舊宰相들이 '走肖爲王' 과 같은 모함을 하여 趙光祖 등 신진사류를 몰아낸 士禍) 때 종형 정헌공(正軒公 諱 山夔기) 이 조광조의 제자라는 이유로 사화에 연루시켜 파직되는 세태를 보고 실망하여 관직을 버리고 충주(忠州)로 낙향하여 수차 조정에서 불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여생을 초야에 묻혀 살다가 선조 4년에 별세하였다.

세월은 흘러 선조25년(서기1592년)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참혹한 병화에 휩쓸릴 때 조선을 돕기 위해 명(明)나라 원군의 장수로 온 이여송(李如松)이 와서 보니 조선의 산세가 웅장하여 장차 큰 인물이 많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본국에 연락하여 천문지리에 밝은 두사충(杜士忠) 이라는 도사를 불러 데리고 다니면서 큰 인물이 나지 못하도록 산의 혈(穴)을 자르고 다녔다 한다.

그때 부호군의 둘째 아들 청계당공(淸溪堂公 諱 麟瑞) 의흥(義興 :
현 경북 軍威에 있음) 현감으로 있었는데 마침 이곳에 들른 두사충(杜士忠) 을 만나 알게 되었다. 극진히 대접하였더니 감사의 뜻으로 묘 자리 하나 잡아주겠다고 하여 고향 중주로 안내하였다.

며칠간 충주 일대의 산을 둘러보던 두사충(杜士忠)이 황강(黃江:
현 제천시 한수면 일대의 남한강) 이 내려다 보이는 월악산 북쪽 줄기 끝자락 황학산 기슭에다 묘자리를 잡아주며 말하기를 ‘부친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할 때 쇠갓(鐵冠)을 쓴 사람이 지나가는 시각에 하관하라’고 말하고 이어서 ‘400년 후에는 이 산소 앞 들판에 물이 차서 상전벽해 (桑田碧海: 뽕밭이 푸른 바다로 바뀐다) 가 되고, 산소의 제절(除節) 아래서 물고기가 놀면서 파도를 일으키며, 후손들이 도선참배(渡船參拜: 배를 타고 와서 참배한다) 해야 하고, 자손 중에는 유능한 인물이 많이 배출될 것이다’ 고 예언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말들이었다. 멀쩡한 산 중턱이 ‘상전벽해’ 는 무엇이 며, ‘묘 앞에서 고기가 파도를 일으키며 놀고, 도선참배’ 라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들이었다. 그래도 중국에서 유명한 천문지리에 통달한 도사의 말이니 믿어보기로 하고 부호군 묘의 이장을 서둘렀다.

부호군의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하려고 일꾼들이 땅을 파니 큰 바위가 나와 힘들여 바위를 깨었더니 갑자기 바위 밑에서 벌 떼가 몰려나와 산 밑 황강 가 들판에 퍼져 온 들판을 까맣게 덮었다. 그 이후로 사람들이 이 들판을 ‘벌들’ 이라 불렀다 한다.

두사충(杜士忠) 이 하관시간을 정해주지 않고 ‘쇠 갓을 쓴 사람이 지나 갈 때’ 라고 하였기 때문에 유해를 운구해 놓고도 하관하지 못하고 쇠갓 쓴 사람이 지나갈 때를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하관할 때를 답답하게 기다리는데 이 때 어떤 아낙네가 들일에 점심밥을 이고 나갈 때 소나기가 잦기 때문에 비가 오더라도 빗물이 점심 음식에 들어가지 않도록 광주리 위에 솥뚜껑을 덮어 머리에 이고 산 아래 지나가고 있었다. 이를 본 상주 청계당공이 그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쇠 갓을 쓴 사람, 바로 저것이다. 빨리 하관 하여라”

이렇게 해서 부호군 묘지가 이곳에 있게 되었다. 부호군의 묘를 이장한 이후로 오랫동안 두사충(杜士忠) 이야기와 관련하여 여러 사람이 흥미를 가지고 직접 와서 보고 명당이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부호군공의 종증손(從曾孫) 되는 월사공(月沙公 諱 廷龜)의 손자 정관재공(靜觀齋公 諱 端相) 은 이곳 동쪽 인근의 청풍부사로 있을 때 직손과 함께 참배하고 “과연 명당”이라고 칭송하였고, 정관재공의 사위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도 이 묘에 와서 보고 “풍수지리에 맞는 명당”이라 하였고, 또 이곳이 고향인 수암(遂巖) 권상하(權尙夏
: 우암 송시열 문하생으로 나라에서 우의정과 좌의정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도 이 묘에 와서 보고 ‘내사군(內四郡: 주변 4개 군) 에서는 으뜸가는 명당이라 칭송하면서 가까이 지내는 문학 동료 지촌공(芝村公: 정관제공의 자)에게 묘와 아래 마을에 있는 집터의 약도를 그려 보내면서 “묘는 이미 정해 졌으나 집터는 그냥 남아 있으니 그 곳에 가서 집을 짓고 살라”고 권하였다 한다.

또 수암(遂巖)은 부호군공의 증손(曾孫) 이시희(李時熙), 이시걸(李時杰) 형제의 효행(孝行)을 조정에 천거하여 정려(旌閭)하도록 하였다. 충주댐 수몰로 지금은 충북 중원군 살이면 신당리로 옮겨진 쌍효각(雙孝閣)에 봉안된 “延安李公左承旨諱時熙將仕郞諱時杰雙孝碑(연안이공좌승지휘시희장사랑휘시걸쌍효비)’가 바로 수암 권상하가 천거하여 정려된 것이다.
쌍효각(雙孝閣)
묘를 이장한지 412년이 지나 충주댐이 완공되었다. 묘 앞에 황강과 벌들이 모두 물에 잠기어 바다처럼 되니 두사충(杜士忠) 이 말 한데로 상전벽해(桑田碧海) 가 되었다. 또한 묘지로 가는 길이 따로 없기 때문에 성묘를 하려면 배를 타고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은 매년 묘사 때면(10월 4일) 함께 모여 도선참배(渡船參拜) 하여 묘제를 올리니 400여 년 전에 두사충(杜士忠) 의 예언이 아주 적중한 셈이라 놀라워하고 있다.

두사충의 예언이 적중하게 된 것은 그 후손들이 그의 예언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충주댐공사 당시 정부에서는 수몰예정선인 해발 145m 이하의 모든 시설물과 분묘는 이설 또는 이장하라는 행정명령이 내려졌는데 이 묘는 해발 142.7m에 있어 수몰예정선 아래 있었다.

그러나 후손들은 문중에 400여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두사충의 예언을 믿고 당국에 ‘현상보존’을 청원하면서 ‘수몰되더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각서와 공증을 해 주고 이장하지 않았는데 과연 만수위 때도 묘의 제절 밑까지만 물이 차고 묘 뜰과 봉분까지는 물이 올라오지 않았다.

충주댐에서 월악나루와 단양을 오가는 유람선이 이 묘지 앞을 지날 때면 이 이야기의 골자를 엮어서 안내양의 예쁜 목소리로 녹음하여 들려준다』
<관상>
대원군 책사(策士) 박유붕(朴有鵬)
(2008. 3. 12.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
『군왕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용인(用人: 사람을 쓰는 일) 능력이고, 신하가 갖추어야 할 자질은 용사(用事: 用權 즉 권세를 쓰는 일, 일하는 능력) 이다. 군왕은 자질구레한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사람을 잘 골라 쓰면 된다. 신하는 일을 잘 할 수 있어야 한다.

구한말 대원군이 정권을 잡은 뒤에 가장 고심한 것도 사람을 판별하는 일이었다. 매일처럼 자기를 만나기 위해서 밀려드는 사람들 가운데 옥석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이 때 대원군이 고용한 책사가 박유붕(朴有鵬) 이라는 인물이었다.

박유붕의 주특기는 바로 지인지감(知人之鑑 :
사람을 알아보는 지혜)이었다. 관상(觀相)의 대가였다. 대원군 옆에 앉아서 내방객들의 얼굴과 행동거지를 보고, 그 성격과 주특기를 판별해주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박유붕 내력을 추적해 보니까, 그는 경북 청도가 고향이었다. 박유붕이 관상에 일가견을 갖게 된 계기는 처갓집의 내력이 작용하였다. 장가를 만경 두씨(萬頃 杜氏) 집안으로 갔는데, 이 처갓집이 임진왜란 때에 이여송의 참모로 따라왔다가 조선에 눌러 앉았던 중국 도사 두사충(杜思忠) 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처가에 전해 내려오던 두사충(杜思忠)의 풍수서와 관상서를 박유붕이 입수할 수 있었고, 이 공부가 어느 정도 끝나자 서울 운현궁으로 올라갔다.

운현궁 마당에서 제기를 차며 놀고 있었던 명복(命福) 도련님의 관상을 보고, 앞으로 왕이 될 것을 예언하였다. 이 예언이 들어맞았다. 명복 도련님이 고종으로 등극할 무렵부터 대원군은 박유붕이 다른 데에 가지 못하도록 운현궁에다가 붙들어 놓았다. 이때부터 세간에는 일명 '백운학'으로 알려지게 된 인물이 바로 박유붕이었다. 말하자면 원조 백운학이 청도사람 박유붕(朴有鵬)이다.

대원군은 고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복채(福債)로 서울 '삼선교'에서 '돈암동'에 이르는 구역을 박유붕(朴有鵬)에게 떼어 주었다. 그가 살았던 45칸 집은 운현궁 길 건너편에 있었다. 현 '수운회관' 뒤였다. 어느 날 대원군이 명성황후를 며느릿감으로 데려왔다. 명성황후의 얼굴을 본 박유붕(朴有鵬)은 반대하였다. 한 번 반대하고, 두 번 반대하고, 세 번째 반대를 하니까, 대원군이 "내 며느리를 보는 것이지, 당신 며느리 보나?" 하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후손인 박이수(朴二洙)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 일을 계기로 대원군과 멀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