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환비(燕瘦環肥)
- 중국 미녀 이야기 -
沙月 李 盛 永(2007.7.2)
고래로 중국의 4대미인으로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嬋), 양귀비(楊貴妃)를 꼽아왔다. 지금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 서안 동쪽 근교에 있는 옛날 중국 역대 황제들의 별장이 있는 화청지(華淸池)에는 이 네 미인의 그림을 그려 벽에 걸어놓고 있다.

서안 화청지의 ‘중국4대미인’ 그림
오른쪽으로부터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
(2002. 9. 13. 서안관광 여행 때 찍음)

이들은 언제, 누가 선정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위, 아래에 대한 서열은 없는 것 같고, 연대순으로 해서 위와 같이 나열하는 듯 하다.
서시는 중국 춘추시대(BC770-BC403)인 주(周)나라 경왕(敬王) 때, 월(越)나라 왕 구천(勾踐)이 미인계(美人計)를 쓰기 위하여 오(吳)나라 왕 부차(夫差)에게 바쳐진 여인이며,
왕소군은 전한(前漢) 원제(元帝: BC49-BC33) 때 후궁이었다가 흉노왕 호한야에게 정략적으로 시집보낸 여인이며,
초선은 후한(後漢) 말 이른바 삼국지(三國誌) 시절 초기에 사도(司徒) 왕윤(王允)의 가기(歌伎)로 길러져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 시키는 이른바 연환계(連環計)의 매개(媒介)가 된 여인이며,
양귀비는 당나라 7대 황제 현종(玄宗: 713-756)의 궁녀로 귀비(貴妃)에 올랐는데, 안록산(755)의 난으로 이듬해(756)에 희생된 된 여인이다.

또 중국에는 이들 미인을 놓고 수식하는 말(語)들이 생겨났다. 침어(沈魚: 서시), 낙안(落雁: 왕소군), 폐월(閉月: 초선), 수화(羞花: 양귀비)가 그것이다.
침어(沈魚)는 물고기가 서시를 보고 헤엄치는 것조차 잊고 바라보다가 그만 물 밑으로 가라앉아버렸다는 뜻이고,
낙안(落雁)은 기러기가 왕소군을 보고 날개 짓 하는 것조차 잊고 바라보다가 그만 땅으로 떨어져버렸다는 뜻이고,
폐월(閉月)은 달도 초선을 보고 부끄러워 구름 속으로 숨었다는 뜻이고,
수화(羞花)는 꽃이 양귀비를 보고 부끄러워 고개를 숙여버렸다는 뜻이다.
참으로 중국 사람다운 표현들이다.

그런데 4대 미인에서는 빠졌지만 그 다음으로 치는 미인이 조비연(趙飛燕)이다. 그녀를 작장중무(作掌中舞)라 수식하고 있다. ‘하도 가벼워서 손바닥 위(안)에서 춤을 춘다’ 는 뜻인데, 가볍고 말랐다는 말이다. 이름 ‘飛燕’‘날으는 제비’라는 뜻이니 이 역시 조비연이 가볍고, 말랐다 는 말이다.

반면에 양귀비는 뚱뚱한 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비연과 양귀비를 비교해서 생긴 말이 연수환비(燕瘦環肥)이다. 연(燕)조비연을 지칭한 글자이고, 수(瘦)는 ‘말랐다’는 글자이고, 환(環)양귀비의 아명 양옥환(楊玉環)에서 따온 글자이고, 비(肥)는 ‘살쪘다’는 글자이다.

그러니까 연수환비(燕瘦環肥)는 직역하면 '조비연은 말랐고, 양귀비는 살쪘다'는 말이지만 살을 붙여 의역하면 ‘조비연은 말랐어도 미인이고, 양귀비는 살쪘어도 미인이다’ 라는 뜻이다. 요즈음 젊은 여자들이 미인 되려고 마르기 위해 건강에 무리를 하면서 밥을 굶고, 다이어트에 열중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경종이 되는 말이다.
이 글의 제목을 연수환비(燕瘦環肥)로 한 것도 이 말이 미인을 표현한 말인 동시에 암시적으로 교훈을 주는 말이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다.

또 한가지 더 교훈적인 것은 중국의 미인들이 멀기는 2000년을 넘게, 짧게는 1300년이 넘게 중국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오는 것은 예쁜 자태에 못지않게 마음씨가 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조선조 때 미녀로 알려진 장녹수장희빈처럼 권력의 측근에 있으면서 총애를 빌미로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급급하지 않고, 모두 다 나라(고국)를 위해 또는 자기를 키워주고 아껴준 주인에게 은혜에 보답하였다.

서시가 고국 월나라의 구천을 위해서 헌신했고,
    왕소군이 고국 한나라를 위해 기꺼이 흉노에게 시집을 갔고,
초선이 황제를 넘보는 동탁을 제거하기 위하여 여포와 이간시키는 왕윤의 연환계(連環計)에 스스로 뛰어들어 훌륭히 해냈고,
양귀비 또한 당현종과 순수한 사랑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착한 마음씨가 그들의 아름다움을 더욱 북돋아 주고 있어 오늘날까지도 중국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 침어(沈魚) 서시(西施)
서 시
인터넷에서 퍼 온 그림, 초상의 진위는 모르겠다.

서시 (西施 ?∼?)는 중국 춘추시대 월(越)나라의 미인(美人). 춘추시대(BC770-BC403년) 말기에 오(吳)나라 왕 부차(夫差)에게 회계(會稽)에서 패하여 포로가 된 월(越)나라 왕 구천(勾踐)은, 부차에게 온갖 아양을 떨면서 신임을 얻어 월나라로 돌아가는데 부차가 호색가인 것을 알고 미인계를 써서 복수하려고 계략을 꾸몄다.
그래서 가신 범려를 시켜 저라산(苧蘿山)에서 나무를 팔고 있던 미녀 서시를 데려다가 여러 가지 성적인 기예를 가르쳐 오나라 왕 부차에게 선물로 바쳤다. 부차는 신하들의 만류도 듣지 않고 서시를 총애하여 방탕하고, 구천에 대한 경계심이 해이해져 결국 오나라가 월나라에게 멸망하는 요인이 되었다.

서시에 관한 이야기와 전설은 많으며 서시의 이름은 미녀의 대명사처럼 되었고, 후세 시인들의 시가에도 자주 등장하였다.
서시봉심(西施奉心)이란 말은 서시가 간혹 가슴앓이를 하기 때문에 손을 가슴에 얹고 얼굴을 찡그리는데, 그 찡그린 모습이 하도 예뻐서 뭇 남성들을 매혹시켰다 한다. 그래서 못생긴 여자가 서시처럼 손을 가슴에 얹고 얼굴을 찡그려 흉내를 냈는데 이를 보는 사내들이 모두 얼굴을 돌리고 달아나 버렸다는 데서 생겨난 고사성어이다. ‘같은 행동이라도 사람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르다’는 뜻이다.

서시유소추(西施有所醜)란 말도 있다. 직역하면 ‘서시(西施)도 추한 데가 있다’는 말인데 이는 ‘현자(賢者)에게도 과실(허물)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의 고사성어이다.
고사성어 말 그대로 실제 서시에게도 흠이 있었다고 하는데, 발이 못생겼다고 한다. 아마 중국 여자들 고유의 전족(纏足)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를 가리기 위하여 늘 발까지 덮이는 긴 치마를 입었다고 한다.

중국의 미인이 많기로 이름이 나 있는 항주(杭州)에 있는 서호(西湖)는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서시(西施)를 위해 팠다고 하며, 이름도 서시의 이름에서 땄다고 한다. 또 항주에는 오왕 부차의 아버지 합려(闔閭)의 묘(墓)가 있고, 이곳에 오왕 부차와 서시가 머물 때 산책하며 거울 대신 들여다보며 얼굴 화장을 했다는 우물이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항주 서호(西湖) 풍경
오왕 부차가 서시와 함께 뱃놀이하던 호수
2001년 9월 13일, 상해-소주-항주-황산 여행시 촬영

오왕 합려(闔閭)의 묘(墓)
2001년 9월 13일, 상해-소주-항주-황산 여행시 촬영

서시(西施)가 들여다보며 화장했다는 서시거울(가칭) 우물
2001년 9월 13일, 상해-소주-항주-황산 여행시 촬영

이 때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의 작심에서 생겨난 와신상담(臥薪嘗膽)은 직역하면‘섶(장작)에 누워 자고(臥薪), 쓸개를 맛본다(嘗膽)’는 뜻으로 복수심을 품고 언제나 그것을 잊지않고 생각하며 고난을 견디어 심신을 단련하는 것을 비유한 고사성어다. 「십팔사략(十八史略)」 과 「사기(史記)」의 월세가(越世家)에 전하는 내력을 보면

주(周) 경왕(敬王) 24년, 오왕 합려(闔閭)는 월왕 구천(句踐)과의 추리(椎李)싸움에서 대패했다. 합려는 적의 화살을 손가락에 맞아 상처를 입었다. 전투에서 패주하는 바람에 제대로 치료를 하지 못하여 이로 인해서 경이라는 곳에서 죽고 말았는데, 합려는 임종한 아들 부차(夫差)에게 반드시 월나라에 복수를 하여 자신의 분함을 풀어달라는 유명을 남겼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왕이 된 부차의 귀에는 언제나 그 아버지의 유명이 들렸다. 눈 앞에는 언제나 분해하던 임종 때의 아버지 모습이 보였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야겠다는 굳은 결의로 밤마다 섶(장작) 위에 누워(臥薪) 아버지의 유한을 새롭게 하며 복수심을 불태웠다. 뿐만 아니라 자기 방에 출입하는 신하들에게는 반드시 다음과 같이 자기 아버지의 유명을 소리쳐 말하게 하였다.
“부차여, 네 아비를 죽인 자는 월왕 구천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하고 말 할 때마다 부차는
“네,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3년 이내에 반드시 원수를 갚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이리하여 부차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복수를 맹세하며 오로지 군사를 훈련시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월왕 구천이 부차가 벼르고 있다는 것을 알자 양신(良臣) 범려(范閭)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듣지 않고, 기선을 잡아 오를 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리하여 양군은 오의 부초산(夫椒山)에서 격돌하여 월군이 대패하자 구천은 패잔병을 이끌고 회계산(會稽山)으로 도망쳤으나, 오군은 계속 추격하여 산을 포위하였다. 진퇴양난에 처한 구천은 범려와 함께 나라를 버리고 오왕의 신하가 된다는 조건으로 항복을 자원하였다. 항복을 받은 부차는 구천을 죽이지 않고 용서하였다.

구천은 오왕 부차의 몸종처럼 되어 정성껏 섬기면서 부차의 등창 고롬을 입으로 빨고. 똥을 맛보는 등 갖은 아양을 떨어 부차의 신임을 얻어 겨우 고국으로 돌아갈 수는 있었으나, 월나라는 이제 오나라의 속령이고, 자신은 오왕의 신하가 된 몸이라 은인자중하고 지냈다. 그러나 전에 부차가 섶 위에서 누워 망부의 유한을 되새기듯, 구천은 항상 곁에 쓸개를 매달아 놓고 기거할 때나, 음식을 먹을 때나 쓸개를 핥아 쓴 맛을 보면서(嘗膽) ‘회계의 치욕’을 되새기며 복수심을 불태웠다.

구천은 또 스스로 밭을 경작하여 조의조식에 만족하고, 인재를 등용하여 그 충언을 듣고, 마음을 닦으며 오직 국력의 재흥만을 꾀하였다. 한편으로 구천(勾踐)은, 부차가 호색가인 것을 알고 미인계를 써서 복수하려고 계략을 꾸몄다. 그래서 미녀 서시(西施)를 찾아내어 여러 가지 성적인 기예를 가르쳐 오나라에 보낸 것이다

구천이 회계산에서 오왕에게 항복한 지 12년이 되는 해의 봄, 오왕 부차는 기(杞)의 황지(黃池)에 제후들을 모아놓고 천하의 패자가되어 득의의 절정에 있었다. 그 때까지 은인자중하던 구천은 범려와 함께 부차의 부재를 노려 느닷없이 오나라를 공격해 들어갔다. 구천은 오의 잔류군을 크게 격파하였고, 그 후 4년 구천은 다시 오를 공격하여 입택(笠澤)에서 오군을 패주시켰다. 그리고 다시 2년 후 오의 수도인 고소(姑蘇)에 육박하여 이듬해 고소성을 포위하고, 오왕 부차에게 마침내 항복을 받았다. 회계의 치욕을 설욕한 구천은 부차를 용동(甬東)으로 귀양 보내려 하자 부차는 스스로 목을 쳐서 자살하였다.


이렇게 해서 월(越)나라 구천은 오(吳)를 대신해서 춘추시대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었고,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났다.

◆ 낙안(落雁) 왕소군(王昭君)
왕소군
인터넷에서 퍼 온 그림, 초상의 진위는 모르겠다.

왕소군 (王昭君 ?∼?)은 중국 전한(前漢) 원제(元帝) 때의 궁녀로 원 이름은 장(墻자의土대신女)이고, 자(字)가 소군(昭君)이다. 원제의 후궁으로 있다가 BC 33년 흉노와의 화친정책 때문에 흉노의 왕에게 출가하였다.
북방의 유목민인 흉노는 선제(宣帝) 때 질지선우와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의 두 세력으로 분열되었고, 호한야는 전한에 투항하여 신하라고 자칭하며 내조(來朝)하였다. 다음 황제인 원제 때에 질지가 한나라의 공격을 받고 패하여 죽었다. 이때 다시 내조한 호한야는 "한씨(漢氏)의 사위가 되어 북방 변경을 지키겠으니, 후궁을 하사해 달라"(중국인들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으려는 표현인것 같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원제가 내려준(바친) 여인이 왕소군이다.

후한서(後漢書)》에 따르면 그녀는 후궁이 된 뒤 몇 년이 지나도 원제가 찾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흉노에게 출가하기를 자청하였다고 한다. 왕소군을 출가 시키기로 결정한 뒤에 그녀를 처음으로 본 원제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놀라 놓치기 아까워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황제가 그 날 밤 침소에 들게 할 궁녀를 정하는 데는 궁녀들의 초상화를 보고 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궁녀들이 저마다 화공(畵工)에게 뇌물을 바쳐 예쁘게 그리도록 하였는데 왕소군은 청렴해서 그랬는지. 미모에는 자신이 있어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화공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 화공이 왕소군의 초상화를 추녀로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 황제가 한 번도 찾지 않았고, 왕소군은 흉노에게 출가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황제는 왕소군을 흉노에게 딸처럼 보내는 만큼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왕소군이 떠나는 날 접견하고 절세의 미인임을 알았으나 이미 때는 늦어 그냥 보냈고, 왕소군의 초상화를 그린 화공(毛延壽)은 그날로 목이 달아났다는 것이다.

왕소군은 호한야의 아내가 되어 영호연씨(寧胡閼氏)라고 불렸으며, 아들 하나를 낳은 뒤 호한야선우가 죽자 흉노의 풍습에 따라 본처의 아들로서 선우의 자리를 이어받은 복주루(復株累)의 아내가 되어 두 딸을 낳고 흉노의 땅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왕소군명군(明君), 명비(明妃) 라고도 불리었으며 중국 사람들은 왕소군이 호지로 가서 절개를 지키다가 죽었는데, 그녀의 무덤은 일년 내내 푸르렀다 하여 청총(靑塚: 푸른 무덤) 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러나 이는 자존심 강한 중국 사람들이 자위하고자 만들어 낸 전설에 불과할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왕소군의 애화(哀話)는 후세에 널리 전승되어 문학작품으로 만들어졌는데, 진(晉)나라 서숭(西崇)의 「왕소군(王昭君)」을 비롯하여 29수가 있고, 「明君詞(명군사)」, 「昭君詞(소군사)」 , 「明妃曲(명비곡)」 등 왕소군을 주제로 한 시가 무척 많다.

이백(李白)의 「王昭君(왕소군)」3수와 왕안석(王安石)의「明妃曲(명비곡)」2수와 구양수(歐陽修)의「明妃曲(명비곡)」1수를 옮긴다.

<王昭君(왕소군)> 이백(李白)
漢家秦地月(한가진지월) 한나라 진땅의 달이
流影送明妃(유영송명비) 흐르는 그림자로 명비를 전송하네
一上玉關道(일상옥관도) 한번 옥문관 밖길 나서서
天涯去不歸(천애거불귀) 하늘 저쪽 끝으로 가서 돌아오지 못하네

昭君拂玉鞍(소군불옥안) 왕소군 구슬안장 떨고,
上馬啼紅頰(상마제홍협) 말에 오르는 붉은 볼엔 눈물이 흥건하네
今日漢宮人(금일한궁인) 오늘까지 한나라 궁전 사람이더니
明朝胡地妾(명조호지첩) 내일 아침이면 오랑케 땅 첩이 되네

漢月還從東海出(한월환종동해출) 한나라 달은 여전히 동해에서 뜨고 있건만
明妃西嫁無來日(명비서가무래일) 명비는 서쪽 땅으로 시집가 돌아올 날이 없네
燕地長寒雪作花(연지장한설작화) 연지(燕地)나 연산(燕産)은 언제나 추워 눈이 꽃을 이루고
蛾眉憔悴沒胡沙(아미초췌몰호사) 미인(왕소군)은 초췌하여 오랑케 땅 모래 속에 묻히겠지
生乏黃金枉圖花(생핍황금왕도화) 살아선 황금(돈)이 모자라 초상화 잘못 그렸으나
死留靑塚使人嗟(사류청총사인차) 죽어서는 청총을 남기어 사람을 탄식케 하네

<明妃曲(명비곡)>王安石(왕안석)
明妃初出漢宮時(명비초출한궁시) 왕소군이 처음 한나라 궁을 나설 때
漏濕春風 髮밑友대신賓 脚垂(누습춘풍빈각수) 눈물이 봄바람을 적시며 머리카락 아래로 늘어졌네
低回顧影無顔色(저회고영무안색) 발을 떼어놓지 못하고 그림자 돌아보는 얼굴빛 어두웠으나
尙得君王不自持(상득군왕불자지) 그래도 임금(원제)이 어찌할 줄 모르도록 아름다웠네
歸來却怪丹靑手(귀래각괴단청수) 임금은 돌아와 화공의 솜씨 괴이하게 여겨 추궁하였으니
入眼平生未曾有(입안평생미증유) 눈에 드는 여인 평생동안 그림에서 못 보게 되었기 때문이네
意態由來畵不成(의태유래화불성) 사람의 참 모습 본디 그려낼 수 없는 것이니
當年枉殺毛延壽(당년왕살모연수) 그 때 모연수는 공연히 죽인 셈이네
一去心知不更歸(일거심지불갱귀)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맘 속에 알고 있으니
可憐著盡漢宮衣(가련저진한궁의) 가련케도 한나라 궁중 옷 입을 만큼 입었다네
寄聲欲問塞南事(기성욕문새남사) 소식 전하려 국경 남쪽 한나라 일 물어보려 해도
只有年年鴻雁飛(지유연년홍안비) 오직 해마다 기러기만 날아가네
佳人萬里傳消息(가인만리전소식) 가인(왕소군)은 만리길 소식 전하나니
好在氈城莫相憶(호재전성막상억) 흉노 성안에 잘 지내며 고향 땅 생각하지 않네
咫尺長門閉阿嬌(지척장문폐아교) (임금의)지척에 있는 장문궁에 아교(왕소군) 가두어 놓았던 것을
人生失意無南北(인생실의무남북) 인생살이 실의에 빠지면 남, 북이 따로 없네

明妃出嫁與胡兒(명비출가여호아) 왕소군이 오랑케 아이에게 시집 갈 때
氈車百兩皆胡姬(전거백량개호희) 오랑케 마차 백량에 모두 오랑케 여인 뿐이었네
含情欲語獨無處(함정욕어독무처) 품은 감정 말하려 해도 홀로 상대할 곳 없어
傳與琵琶心自知(전여비파심자지) 비파에 마음을 실어 맘 속으로 혼자 알고 있었네
黃金 手변旱 撥春風手(황금한발춘풍수) 황금줄채 쥐고 봄바람 일게 하는 손으로
彈看飛鴻勸胡酒(탄간비홍권호주) 비파 타며, 나는 기러기 보며 선우에게 호주 권하네
漢宮侍女暗垂漏(한궁시녀암수루) 따라온 한나라 시녀 속으로 눈물 흘리고
沙上行人却回首(사상행인각회수) 모래 땅(사막) 길가는 행인들도 고개 돌리네
漢恩自淺胡自深(한은자천호자심) 한나라 은혜는 얕은데 오랑케 은혜는 자연 깊어질 것이니
人生樂在相知心(인생악재상지심) 인생살이 즐거움은 마음 알아주는데 있으니 어이하리
可憐靑塚已蕪沒(가련청총이무몰) 가련케도 청총은 이미 무성한 풀 속에 묻혔는데
尙有哀絃留至今(상유애현유지금) 아직도 비파의 슬픈 가락은 지금까지 남아 있네

<明妃曲(명비곡)>歐陽修(구양수)
漢宮有佳人(한궁유가인) 한나라 궁중에 미인이 있었으나
天子初未識(천자초미식) 천자는 처음에 알지 못했네
一朝隨漢使(일조수한사) 하루 아침에 한나라 사신 따라
遠嫁單于國(원가선우국) 멀리 흉노 선우의 나라로 시집가게 되었네
絶色天下無(절색천하무) 절색의 미인, 천하에 또 없는 것
一失難再得(일실난재득) 한 번 잃으면 다시 얻기 어렵다네
雖能殺畵工(수능살화공) 비록 화공을 죽일 수는 있지만
於事竟何益(어사경하익) 그르친 일 결국 무슨 이익이 될 것인가?
耳目所及尙如此(이목소급상여차) 천자의 눈귀가 미치는 일조차 이렇게 됐으니
萬里安能制夷狄(만리안능제이적) 먼리 저쪽 오랑케들 어찌 제어할 수 있겠는가?
漢計誠已拙(한계성이졸) 한나라 계책 진실로 졸열했으니
女色難自誇(여색난자과) 여색을 가지고는 자기를 과시할 수 없는 것이네
明妃去時漏(명비거시루) 왕소군은 떠날 때 눈물 지며
水변西 向枝上花(서향지상화) 서쪽으로 향한 나뭇가지 꽃 위에 뿌렸네
狂風日暮起(광풍일모기) 사나운 바람 해 저물자 일어나니
飄泊落誰家(표박낙수가) 꽃잎처럼 날아다니다 어느 집에 떨어질고
紅顔勝人多薄命(홍안승인다박명) 홍안 남보다 뛰어나면 박명한 사람 많다는데
莫怨春風當自嗟(막원춘풍당자차) 봄바람 원망 말고 자기 운명이나 한탄할 뿐이네

◆ 폐월(閉月) 초선(貂嬋)
초 선
인터넷에서 퍼 온 그림, 초상의 진위는 모르겠다.

초선(貂嬋)에 대해서는 이야기 할 만한 자료를 구하지 못했다. 그래서 삼국지(三國志)에서 초선이 등장하는 부분을 발췌해서 옮겨 놓을까 한다.

후한 헌제(獻帝) 때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동탁이 정권을 잡은 후 ‘태사(太師)’라 칭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사욕을 채우고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은 가차없이 잔인하게 죽이는 횡포가 자행되었다.
심지어는 헌제를 밀어내고 황제에 오를 심사마저 품고 있었다. 그 횡포는 문무 대신들이 함께 한 연회 좌석에 삼공(三公)의 하나인 사공(司空) 장온(張溫)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 술자리에 내놓는 지경에 이러렀다.
동탁의 방자하고 잔혹함을 더는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도(司徒) 왕윤(王允)이 동탁을 없앨 방법을 찾지 못하고 고민하는 것을 보다 못한 가기(歌伎) 초선이 지금까지 길러주고 총애해 준 은혜에 보답하고자 힘이 될 것을 맹세하자 왕윤은 연환계(連環計)의 계책을 고안한다.

즉 동탁이 권력을 쥐고 오만 방자하게 굴면서 장차 황제에 오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천하에 당할 자가 없는 여포(呂布)가 동탁을 의부(義父)로 삼고 오른팔이 되어주고 있기 때문인데 왕윤의 연환계는 초선의 미색을 이용하여 동탁과 여포간을 이간(離間)토록 하여 동탁으로부터 여포를 떼어내고, 여포로 하여금 동탁을 죽이도록 하는 계책이다.

왕윤의 연환계는 착착 진행되어 먼저 여포를 집으로 초청해서 초선을 딸이라고 하면서 선보이고, 택일하여 초선을 여포에게 출가시키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며칠 후 또 동탁을 초청해서 초선을 가기(歌伎)로 소개하면서 춤과 노래를 선보여 환심을 산 후에 그날로 초선을 동탁에게 딸려 보낸다. 그러고는 여포에게는 동탁이 초선을 직접 여포에게 하사하기 위해 데리고 갔다고 거짓말을 한다.

여포는 왕윤의 말을 믿고 동탁이 초선을 자기에게 내려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동탁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이 초선을 첩으로 만들어 색정에 빠지자 여포가 동탁 몰래 초선을 만나다가 동탁에게 들켜 동탁이 여포를 죽이려고 까지 하는 등 동탁과 여포 간에는 초선으로 인하여 사이가 극도로 벌어졌다. 물론 사이에서 초선의 이간질하는 행동이 주효한 것이다.

동탁은 여포와 초선을 떼어놓기 위해 초선을 데리고 서울 낙양에서 150리 떨어진 미오성(동탁의 근거지)으로 가 있는 동안 왕윤과 여포는 한 편이 되어 동탁을 죽일 것을 결의하고, 동탁에게 황제의 자리를 양위한다는 거짓 칙서를 보내 동탁으로 하여금 낙양으로 오게 한 다음 주살한다.

이 연환계 추진 과정 중 왕윤이 초선을 여포에게 선보이는 과정과 동탁에게 춤과 노래를 선보이고 첩으로 딸려보내는 과정에 초선이 등장하는 부분을 옮긴다.

(李文烈 評繹 三國志 民音堂, 2권)
<天下를 위해 내던져진 美色>
사공(司空) 장온(張溫)이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던 날도 왕윤(王允)은 그 자리에 있었다. 동탁(董卓)의 위세에 눌리어 한번 따져 물어보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그날 지낸 일을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3공(三公)의 하나인 사공(司空)의 목을 쟁반에 담아 술자리에 내놓는 동탁의 방자하고 잔혹함을 더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분하고 원통한 것은 마음 뿐, 동탁을 죽일 마땅한 계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방을 나선 왕윤이 지팡이를 끌고 뒤뜰을 거닐기 시작했다.밤이 깊고 달이 높이 뜨도록 궁리를 해보았지만 방안에서 떠오르지 않던 묘안이 뒤뜰을 거닌다고 솟아날 리 없었다. 밤과 함께 시름만 깊어 갈 뿐이다.
그러다가 복받치는 감회를 이기지 못해 국화 덩굴 곁에서 하늘을 우러르며 눈물을 짓고 있을 때였다. 문득 모란정(牡丹亭) 쪽에서 긴 한숨과 짧은 탄식이 엇갈리며 들려왔다. 괴이한 일이라 여긴 왕윤이 발소리를 죽이고 가만히 가서 살피니 집안의 가기(歌伎: 노래와 춤으로 시중드는 여인)인 초선(貂嬋)이었다.
초선(貂嬋)은 어려서부터 왕윤의 집으로 뽑혀와 노래와 춤을 익혔는데 열 여섯인 그 무렵에는 그 재주와 아울러 아름다움도 뛰어난 가기로 자라 있었다. 왕윤은 특히 그런 초선을 사랑하여 친딸 못지않게 대했고, 초선 또한 왕윤을 아비처럼 우러르고 따랐다.

“천한 것이 무슨 사사로운 정(情)에 취해 이토록 요사스런 짓거리냐?”
한참 듣고 있던 왕윤이 소리 높여 꾸짖었다. 평소에 아끼던 초선이었지만 편치 않은 심기로 들으니 한숨이며 탄식이 모두 정인(情人)을 그리는 것으로만 느껴져 버럭 역정이 인 까닭이다.
“천한 계집이 어찌 사사로운 정이 있겠습니까?”
초선이 깜짝 놀라며 황급히 무릎을 꿇고 말했다. 왕윤이 달빛에 의지해 보니 아리따운 아미(蛾眉)에 한 가닥 수심이 서렸으나 사(私)된 기운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왕윤은 조금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며 물었다.

“사사로운 정이 없다면 어찌하여 이토록 밤이 깊은데 긴 탄식에 잠겨 있느냐?”
“용납하여 주신다면 감히 아뢰겠습니다. 진작부터 아뢰고자 하였으나 때를 만나지 못해 가슴 속에 깊이 감추고 지내온 말이옵니다”

초선이 문듣 옷깃을 여미며 진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왕윤은 심상치 않은 일이라 여겨 재촉했다.
“그래 무엇인지는 모르나 숨기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 보아라”
초선이 고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일찍부터 대인(大人)의 은혜를 입어, 이 몸이 기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노래와 춤이며 예의범절까지 크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낳은 이도 부모지만 기르신 이 또한 부모란 말이 있으나, 제가 대인께로부터 입은 은혜는 실로 견줄 데를 찾지 못했습니다. 뼈와 살이 부서져 가루가 된다 한들 그 은혜의 만에 하나라도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즈음 뵙기에 대인의 미간에 늘 근심스런 기색이 떠나지 않고 있으니 반드시 나라에 큰 일이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거기다가 또 오늘 밤은 잠자리에 조차 들지 않으시고 이토록 밤이슬을 맞으시며 시름에 잠겨 뒤뜰을 거니시니 이 천한 것이 어찌 편히 잠자리에 들 수 있겠습니까?
하여 먼 빛으로 대인을 살피다가 스스로 감회를 억제하지 못해 한숨과 탄식을 토한 것이 그만 대인에게 들린 것 같사옵니다. 그것이 대인의 심기를 건드렸다면 엎드려 용서를 빌 뿐이오나, 먼저 감히 묻고자 합니다. 혹 대인의 근심을 더는데 저 같은 것은 쓸모가 없을지요? 만번 죽더라도 대인께 도움되는 일이라면 기꺼이 이 천한 몸을 던지고자 합니다”

왕윤이 듣고 보니 뜻밖의 말이었다. 그때껏 초선을 한 어린 계집으로만 보고 있던 왕윤은 자기 귀를 의심하며 다시 한번 초선을 살폈다. 꼿꼿하고 흔들림 없는 자태며, 수심 못 지 않게 차가운 결의가 어린 아미(蛾眉)와 눈물이 반짝이는 눈길로 미루어 건성으로 둘러대는 말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자 초선의 아름다움이 전보다 한층 눈부시게 왕윤의 눈에 들어왔다. 그 아름다움을 새삼스레 느끼는 순간 문득 무슨 계시처럼 왕윤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대한(大漢의 천하가 너의 손에 달리게 될 줄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왕윤은 기쁨을 못 이겨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그렇게 소리친 뒤 초선에게 말했다.
“나를 따라 오너라. 조용한 화각(畵閣)으로 가서 의논하자.”
그러면서 앞장서 초선을 인도하는 왕윤의 눈앞에는 호색(好色)한 동탁의 모습과 아울러 아직 동탁 보다는 여자에 대해 순진하지만 한번 눈을 뜨면 앞뒤를 못 가리게 빠져들 건장하고 단순한 여포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화각에는 평소에 왕윤을 시중드는 비첩(婢妾) 몇몇이 아직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윤은 그들을 꾸짖어 물리친 뒤 초선을 청해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그 어떤 때보다 공손하고 엄숙하게 머리를 조아려 큰 절을 올렸다. 초선이 놀라 황급하게 방바닥에 몸을 엎드리며 물었다.

“대인께서 어찌하여 이 천한 것을 놀라게 하십니까?”
“너는 무릇 한천하(漢天下)에 목숨 받은 것들을 가엽게 여겨 다오---”

그렇게 말하는 왕윤의 두 눈에서는 샘솟듯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미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저 같은 것이 쓰일 데가 있다면 다만 영(令)만 내려 주옵소서. 만 번 죽는다 해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초선이 다시 굳은 결의를 보인다. 그러자 왕윤은 무릎을 꿇은 채로 말을 이었다.
“지금 백성은 모두 꺼꾸러져 죽게 되었을 만큼 위태롭고, 임금과 신하는 아울러 달걀을 재어 놓은 듯 급한 지경에 빠져 있다. 네가 아니면 이 천하를 구할 사람이 없으니 잘 듣고 다시 한번 살펴 마음을 정하거라.
역적 동탁은 장차 천자의 자리까지 넘보고 있으되, 조정에 있는 문무의 여러 벼슬아치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동탁의 주위에서 그 악을 돕는 무리들 때문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두려운 것은 동탁의 맺은 아들(義子) 여포(呂布)란 자다. 그 날래고 굳세기가 놀라와 힘으로는 아무도 여포를 꺾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오늘 밤 네 말을 듣다 보니 문득 한 계책이 떠올랐다. 이른바 연환계(連環計)다. 동탁과 여포가 하나는 드러나고 하나는 드러나지 않는 차이는 있으나 한가지로 호색(好色)하는 무리이니 네 아리따움이면 능히 그들을 도모할 있을 것이다. 먼저 너를 여포에게 시집 보낸 뒤 다시 동탁에게 바치고 너는 또 그 가운데서 적당히 그들 부자(父子)를 반목(反目)하도록 만들어라. 그런 다음 여포를 시켜 동탁을 죽인다면 큰 악(惡)을 잘라버리는 없애는 길이요,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길이 될 것이다.
네 미색을 시랑(豺狼
: 승냥이와 이리)이 같은 그들 부자에게 내던지는 것은 괴로운 일이나, 또한 천하를 위해 큰 공(功)을 이루는 일인즉, 어떠냐. 한 번 해보겠느냐”
그런 왕윤의 말은 간곡했다. 초선이 선듯 대답했다.
“저는 이미 대인을 위해 만 번 죽어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아뢰지 않았습니까? 얼른 저를 그들에게 보내 주옵소서. 제겐 저대로 대인의 뜻을 이루어 드릴 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만약 이 일이 새어나가면 내 집안은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대인께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만약 그 같은 대의(大義)에 보답하지 못하면 만칼(萬刀) 아래 죽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왕윤은 벌떡 몸을 일으켜 다시 큰 절로 초선에게 감사했다.
“고맙다. 다행히 역적이 죽고 한실이 다시 밝은 날을 맞을 수 있다면 그는 모두 네 공이리라”
그런 다음 왕윤은 초선을 끌어안고 또 한 번 비오듯 눈물을 흘렸다. 한편으로는 박명한 가인(佳人) 초선을 위한 눈물이었지만 , 다른 한편으로는 그길 밖에 달리 길이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한탄하는 눈물이기도 했다.

동탁과 여포를 겨냥한 연환계(連環計)는 다음날로 곧장 실천에 들어갔다. 왕윤은 집안에 고이 간직해 두었던 값지고 귀한 구슬(明珠) 몇 알을 꺼내 솜씨 좋은 장인에게 내주며 그걸 박은 금관 하나를 만들게 했다. 그리고 그 금관을 사람을 시켜 가만히 여포에게 보냈다.
순금으로 만듣 관에다 한 알만 해도 천금의 값이 나가는 구슬을 몇 개나 박힌 그 귀한 선물을 받자 여포는 몹시 기뻤다. 평소에 냉담하던 왕윤이 보낸 것이라 더욱 기뻤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위세도 돌보지 않고 몸소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왕윤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걸 미리 헤아리고 온갖 준비를 갖춘 채 기다리고 있던 왕윤은 문밖까지 나가 여포를 맞아 들였다. 그리고 좋은 술과 맛난 안주로 그득하게 상을 차려 둔 후당으로 인도한 뒤 상좌에 앉혔다. 귀한 선물에다 이제는 융숭한 대접까지 받게 되자 단순한 여포는 더욱 감격했다 그래서 목소리까지 떨리며 왕윤에게 감사했다.

“이 여포는 승상부에 속한 한낱 장수요, 사도(司徒)께서는 조정의 대신이십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제가 거꾸로 대접을 받는 격이 되니 몸 둘 바를 모르겟습니다”
그 같은 여포의 말에는 지나친 호의에 대한 의아로움까지 들어 있었다. 왕윤이 좋은 말로 둘러댔다.
“방금의 천하에는 이렇다 할 영웅이 없는 터에 오직 장군만이 있을 뿐이외다. 여기 이 왕(王) 아무개는 장군의 벼슬이 높음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재주를 우러러 작은 정표를 보냈을 뿐이오”
그러자 여포는 희미하게 일던 의아로움마저 풀고 기쁘게 잔을 받았다. 왕윤은 여포에게 술잔을 올리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동탁과 여포의 덕을 추켜 세웠다. 혹시라도 여포가 다시 의심을 품게 될까봐서였지만 쓸데 없는 걱정이었다.단순한 여포는 점점 우쭐해하며 신이 나 잔을 비워댔다.
몇 순배 술이 돈 뒤 왕윤이 시중하는 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시첩 몇만 남겨 자리를 좀 은밀하게 하고 호젓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은연 중에 여포의 색심(色心)을 동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젊고 예쁜 시첩에게 둘러싸인 채 본채로부터 떨어진 후당에서 마시는 때문인지 과연 오래지 않아 굳어있던 여포의 자세가 풀어지기 시작했다. 제법 시첩들을 희롱까지 해가며 번갈아 권하는 대로 거리낌 없이 마셔대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여포의 남다른 주량이 반쯤 찼다 싶을 때 왕윤은 다시 분위기를 바꾸었다. 시첩들 마저 물러가게 하고는 그 중 하나에게 넌지시 말했다.

“가거든 내 딸 초선이를 들여보내라. 아비가 부른다고 하면 수줍어 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약간 거나해진 여포는 젊고 예쁜 시첩들 마저 내보내는 게 속으로 싫었으나 집주인이 하는 일이라 말없이 보고만 있었다. 거기다가 딸을 불러댄다니 은근한 기대가 일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오래잖아 방문이 열리며 푸른 옷을 입은 두 비녀(婢女)의 부축을 받으며 한껏 단장한 초선이 들어왔다.
원래도 빼어난 자색인 데다 비단과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곱게 화장까지 하고 나니 그 아름다움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놀란 눈으로 그런 초선을 바라보고 있던 여포는 조금 전에 들은 말도 잊고, 더듬거리면서 왕윤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십니까?”
“이 아이는 내 딸 초선이외다. 이 왕윤은 장군을 집안사람처럼 가까이 여기는 터이라 이 아이를 불러 장군을 뵙게 하는 것이오”

반나마 얼이 빠진 듯한 여포를 보고 속으로는 기뻐하면서도 왕윤은 초선을 향해 엄숙하게 일렀다.
“이분은 당금 둘도 없는 영웅인 여(呂)장군이시다. 아비와는 형제와 다름없이 지내는 터이니 어려워 말고 술 한 잔 올리도록 해라”
그러자 초선은 옥으로 깎은 큰 잔 가득히 향기로운 술을 따라 다소곳이 여포에게 올렸다. 잔을 받은 여포는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가까이서 볼수록 빼어난 초선의 자색(姿色)이었다. 초승달 같은 눈썹과 가을 물처럼 맑고 찬 눈, 상아로 깎은 듯 오똑한 콧날에 복사꽃 빛 도는 볼, 그리고 붉은 꽃잎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하는 희고 가지런한 치아, 실로 미인을 형용하는 고금의 비유를 한군데 모아 놓은 듯한 얼굴이요 자태였다.
넋 나간 듯한 여포의 꼴을 보고 왕윤은 거짓으로 취한 체하여 초선에게 말했다.

“오래 장군을 모시고 술잔을 나누도록 하여라. 실로 우리 전 집안이 이분의 두터운 정에 기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니라”
여포도 그제서야 정신을 수습하고 초선에게 앉기를 권했다. 그러나 초선의 응대 또한 빈틈이 없기는 왕윤에 못지않았다. 이미 그에게 바쳐지기로 한 몸이지만 가볍고 천하게 보이지 않으려 했다. 아비의 그 같은 분부가 부당하다는 듯 맑고 고운 눈을 들어 가볍게 왕윤을 흘기고는 돌아서 나가려 했다.
초선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여포는 애간장이 탔다. 그러나 다행이도 왕윤이 나서서 초선을 달랬다.

“장군은 나와 가장 가까운 벗이나 다름이 없다. 곁에 앉는다고 아니될 일이 무에 있겠느냐?”
마치 여포의 급한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한 왕윤의 말이었다. 그러자 초선도 못 이긴 체 자리에 앉았으나 여포의 쪽이 아니라 왕윤의 곁이었다.
그 같은 초선의 몸가짐은 더욱 여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건성으로 술을 마시기는 해도 눈은 잠시도 초선을 떠나지 않았다. 금세 떠나갈 듯 떠나갈 듯 다가오는 초선에게서 느껴지는 양가(良家)의 규수다운 몸가짐이 거칠게 살아온 무부(武夫)에게는 눈부신 아름다움 못지 않게 고혹적이었다.
그만하면 여포와의 일은 거지반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왕윤은 다시 몇 순배 술잔이 오가도록 뜸을 들인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아이를 장군의 첩으로 보낼까 합니다만 장군께서 받아들이실지 모르겠소이다. 이 몸이 늙어가니 누구에겐가 맡겨야 할 터이나, 내가 마음 놓고 눈을 감을 수 있는 길은 장군께서 거두어 주시는 것뿐이외다”
여포로서는 자기 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기쁜 말이었다. 그리하여 왕윤이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여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으며 소리쳤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이 여포는 사도께 마땅히 개나 말이 주인에게 그러하듯 힘을 다해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하도 기쁜 나머지 당금 천하에서 동탁에 다음가는 자로서의 체신도 잊고 하는 말이었다.
“웬 별말씀을--- 장군께서 거두어 주시겠다니 오히려 이 왕(王) 아무개의 광영이외다. 그럼 가까운 날 길일을 골라 이 아이를 장군의 부중(府中)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왕윤이 정말 고마운 듯 그렇게 말했다. 여포는 기쁜 나머지 정신까지 아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몸은 비록 후(侯)의 자리에 올랐으나 여자에 대해서는 아직 그리 능숙한 편이 못되었다. 한참 허둥대다가 간신히 눈길을 모아 멀지 않아 가슴에 품게 될 초선을 바라보았다. 마주보는 초선의 눈길 역시 앞서와는 달리 은은한 추파(秋波)를 띄고 있었다.
그렇게 되자 술자리는 한층 무르익었다. 초선에게 넋을 잃은 여포는 지난 무용담을 자랑하며 말술(斗酒)로 호기를 부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날 밤 안으로 당장 초선을 품고 싶었다. 그러나 미리 세워 둔 왕윤의 계책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원래는 장군을 이곳에서 하룻밤 묵어가게 했으면 좋겠소만 동태사(董太師)께서 의심하실까 두렵소이다. 뒷날을 기약하고 오늘 자리는 이만 파하는 게 좋겠소”
밤이 깊자 왕윤은 문득 그렇게 말하며 술상을 거두게 했다. 여포는 아직 돌아가기가 서운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취한 몸을 간신히 가다듬으며 왕윤에게 두번 세번 절하며 고마움을 표하고는 승상부로 돌아갔다.

초선을 앞세워 여포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한 왕윤은 다시 동탁에게 손을 뻗쳤다. 여포가 다녀간 지 며칠 뒤의 일이었다. 조당에 들렸다가 마침 동탁 홀로 있는 걸 본 왕윤은 땅에 엎드려 절하며 은근한 목소리로 청했다.

“이 윤(允)의 거처가 비록 누추하나 한번 태사(太師)의 수레를 머물게 하여 수주(壽酒)라도 한잔 올리고 싶습니다. 다만 태사의 뜻을 몰라 미루다가 이제 청하는 바, 태사께서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사도께서 불러 주시기만 한다면 언제든 그 즉시 달려가겠소이다”

좀 뜻밖이긴 하지만 동탁은 기꺼이 응낙했다. 대권을 잡고 있는 그이기는 해도 조정의 원로 대신이요 곧기로 이름 높은 왕윤(王允)이 사가로 자신을 초청해 준다니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딘가 왕윤이 자신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듯한 느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감히 자신을 상대로 무슨 큰 음모를 꾸밀 위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제는 왕윤도 드디어 몸을 굽혀 자신에게 가까워지려 한다는 지레짐작으로 흐뭇할 뿐이었다.
생각보다 쉽게 동탁의 응낙을 받은 왕윤은 그 자리에서 이튿날로 그를 청했다. 그리고 돌아오기 바쁘게 동탁을 맞을 채비에 들어갓다. 황제의 어가라도 거기에 더 할 수 없을 듯한 법석이었다.
더욱 동탁을 흐뭇하게 한 것은 그를 맞는 왕윤의 태도였다. 이튿날 정오 약속대로 동탁의 수레가 이르자 왕윤은 조복을 갖추고 마중을 나가 두 번 절하고 서서 기다렸다. 그리고 갑사 백여 명을 거느린 동탁이 수레에서 내려 집안으로 들어선 뒤에도 왕윤은 여전히 당하에 머물러 있다가 두 줄로 늘어선 갑사들 끝에 미리 마련해 둔 자리에 앉은 동탁에게 다시 공손히 절을 올리는 왕윤의 태도는 손님을 맞는 주인이라기 보다는 임금을 맞아들이는 신하에 가까웠다.

“사도께서도 당(堂)으로 오르시오”
동탁이 흐뭇해서 그렇게 권했다. 그러나 마지못해 좌우의 부축을 받아 동탁의 곁에 앉은 왕윤은 여전히 송구스런 얼굴이었다.한마디 동탁이 기뻐할 칭송을 잊지 않았다.
“태사의 성덕이 크고 높으니 이윤(伊尹) 주공(周公)인들 태사께 미칠 수 있겠습니까. 분부가 지엄하여 감히 나란히 앉기는 하나 어디다 손발을 두어야 할지조차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동탁은 더욱 기뻤다.예전의 의심 많고 날카롭던 그였다면 왕윤의 그 같은 표변이 이상하게 느껴졌으련만 계속되는 성공에 취한 그라 그 말을 왕윤의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 (중 략) -

향기로운 술과 진귀한 안주는 줄을 이어 날라져 오고 사죽(絲竹: 거문고와 피리)은 세상에 다시 없는 경사를 만났다는 듯 자지러졌다. 그리하여 날이 저물고 동탁이 거나해진 뒤였다. 왕윤이 문득 낯빛을 고치며 가만히 동탁을 후당으로 청했다.
“태사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취한 중에도 소매를 끄는 왕윤의 표정에 은밀함을 원하는 구석이 있는 걸 알아 본 동탁은 호위하던 갑사들까지 물리치고 후당으로 따라 들어갔다. 거기서 왕윤은 다시 한차례 동탁을 추켜세운 뒤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제가 젊을 때부터 천문 보는 법을 익혀 온 터라 나이살이나 먹은 이제는 좀 알 듯도 합니다. 요즈음 밥마다 하늘의 상(乾像)을 살펴본 바 한(漢)의 기수(氣數)는 이미 다한 듯 싶습니다. 그런데 지금 태사의 공덕은 천하에 떨치니 순(舜)이 요(堯)를 잇고, 우(禹)가 순(舜)을 잇듯 태사께서도 한(漢)을 이으셔야 할 것입니다. 실로 하늘과 사람의 뜻에 아울러 합당한 일입니다”
듣고 보니 왕윤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너무 뜻밖인데다 내용도 너무 엄청난 것이라 동탁도 잠시 아연한 모양이었다. 한참이나 왕윤을 살피다가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내가 어찌 감히 그걸 바라겠소?”
“예부터 도(道)로 무도(無道)함을 치고, 덕(덕)이 없는 자는 덕이 있는 이에게 천하를 내어준다(有道伐無道 無德讓有德)란 말이 있습니다. 바로 태사께서 한(漢)을 이으심이 그에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찌 분에 넘치는 일이라 하겠습니까?”

왕윤이 목소리까지 가다듬어 동탁을 부추겼다. 표정 또한 조금도 맘에 없는 소리를 하는 사라 같지 않았다. 그제서야 동탁도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만약 천명(天命)이 내게로 돌아온다면 사도께서는 마땅히 원훈(元勳)이 되리라”
어느새 동탁의 눈에는 왕윤마저 한실에 등을 돌리고 자기에게서 부귀와 영달을 구하는 무리로만 보였다. 그리고 그 정성을 다한 대접과 전에 없던 아첨의 속사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중 략) -

이어 왕윤은 은밀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한쪽으로 밀쳐 놓았던 촛불을 밝히고 물리쳤던 계집종들을 불러 들였다.

“태사께 올릴 진지상 준비는 어떻게 되었느냐?”
왕윤이 묻기가 바쁘게 음식과 술이 겯들여진 상이 다시 후당 안에 차려졌다. 낮에 못 지 않게 풍성한 차림이엇다. 왕윤이 다시 동탁에게 은근하게 말했다.
“교방이 춤과 노래를 가르치나 그 풍류가 태사께 바쳐 올리기에는 모자란 데가 있습니다. 마침 제가 기른 가기(家伎)가 하나 있어 그 재주가 자못 볼만하기로 감히 태사께 바쳐 올리고자 합니다”
    “매우 좋은 일이오. 사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욱 보고싶구료”

동탁이 기꺼이 허락했다. 그러자 왕윤은 아른아른한 발을 드리우고 부는 것이며, 퉁기는 것(絲竹)을 벌리게 한뒤, 초선을 불러들여 발 뒤에서 춤추게 했다. 곧 생황(笙簧: 관악기 일종)의 소리가 방안에 가득해지며 미리 비단과 보석으로 단장하고 기다리던 초선이 거기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아름답기는 지난날 미인이 많기로 이름났던 소양궁(昭陽宮)의 궁녀가 되살아난 듯하고, 초양왕(楚讓王)을 넋빠지게 한 무산(巫山)의 선녀가 내려온 듯햇다. 두 팔을 휘저어 바삐 휘돌리면 동정호(洞庭湖)의 봄을 나는 가러기요, 버들 잎을 스치는 제비 같으며 느릿느릿 멈추어 서면 아름다운 누각에 걸린 흰구름이요, 바람에 흔들이는 한 떨기 고운 꽃이엇다.
발을 사이에 두고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동탁은 그대로 얼이 다 빠져나가는 듯했다. 거기다가 적지 않이 오른 술도 초선의 춤추는 자태를 한층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슬몃이 색심(色心)이 동한 동탁은 한 차례 춤이 끝나기가 무섭게 초선에게 말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왕윤도 곁에서 얼른 거들었다.
“태사께서 너를 부르신다. 와서 인사 드려라”
그러자 초선은 마지못한 듯 발을 걷고 나와 동탁에게 공손히 절을 올렸다.
절을 마치고 고개를 드는 걸 보니 실로 뛰어난 자색(姿色)이었다. 천하의 권세를 오로지 한 지 3년, 미인이라면 궁녀로부터 여염의 아낙까지 숱하게 안아 본 동탁이었으나, 가까이서 한 번 초선을 보자 자기는 한번도 미인을 안아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동탁은 갑자기 말까지 더듬거리며 왕윤을 돌아보고 물었다.

“이 미인이 누구요?”
“저희 가기(歌伎) 초선입니다”

왕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대답했다. 동탁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다시 한번 초선을 살피다가 불쑥 왕윤에게 말했다.
“가기라면 노래도 할 줄 알겠구료. 한 곡조 듣고 싶소이다”
“노래도 제법 흉내는 낼 줄 압니다. 태사께서 바라신다면 한마디 불러 올리게 하겠습니다”

왕윤이 그렇게 대답하고, 초선에게 일렀다.
“태사께서 네 노래를 원하신다. 일신의 광영으로 알고 제주를 다해 보아라”
그러자 초선은 수줍은 듯 동탁과 왕윤을 훔쳐본 뒤 가만히 장단을 맞추는데 쓰는 단판(檀板)을 집어 들었다.
곧 은쟁반에 옥구슬을 굴리는 듯한 초선의 음성이 방안을 가만히 떨어 울렸다. 그 모습이 이런 노래를 그렸다.

한잎 앵도꽃이 새빨간 입술로 열린듯 (一點櫻花啓絳唇 일범앵화계강진)
옥(玉)을 바수어 따스한 봄 뿜어내나 (兩行碎玉噴陽春 양행쇄옥분양춘)
정향같은 혀 숨은 칼날 토하듯 후려 (丁香舌吐橫鋼劍 정향설토횡강검)
나라의 간사한 도적무리 목베려 하네 (要斬奸邪亂國臣 요참간사난국신)

그러나 초선의 혀에 숨은 칼날을 알리 없는 동탁은 더욱 홀린 듯 반했다. 노래가 끝나자 초선의 솜씨를 크게 칭찬하고 듬뿍 상을 내렸다. 왕윤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초선에게 말했다.
“너는 그같이 과분한 상을 받고도 어찌 가만히 있느냐? 태사께 수주(壽酒)라도 올리도록 하여라”
초선이 술을 한 잔 가득 부어 올리자 동탁은 단숨에 들이키고 물었다.
“올해 나이가 몇이냐?”
“천한 몸 이제 열 여섯이옵니다”
“너는 참으로 선녀와 같이 아름답구나. 내 일찍 너 같은 미색과 재주는 본 적이 없느니라”

그렇게 되면 왕윤이 뜻하는 바는 거의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왕윤은 조금도 기쁨을 내색하지 않고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태사께서 천한 계집을 높이 보아주시니 이 윤(允)도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저 아이를 태사께 바치고 싶사오나 받아들여 주실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뿐입니다”
목소리를 가다듬어 가장 공경하는 체 그렇게 말했다. 마음은 있어도 차마 조정 원로대신의 가기까지 뺏어갈 수는 없어 군침만 흘리고 있던 동탁은 왕륜의 그 같은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입이 귀밑까지 벌어져 감사해 마지 않앗다.
“사도께서 이토록 은혜를 베푸시니 무엇으로 보답해야 될지 모르겠소이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저 아이야 말로 승상의 총애를 입게 되었으니 그 복이 얕지 아니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 고마움을 표시하는 동탁의 눈앞에서 사람을 불러 명했다.
“어서 전거(氈車)를 준비하도록 하라”
당장 초선을 보내겠다는 뜻이었다. 벌써 색심이 동할 대로 동한 동탁도 그런 왕윤의 서두름을 말리지 아니했다.

◆ 수화(羞花) 양귀비(楊貴妃)
양귀비
인터넷에서 퍼 온 그림, 초상의 진위는 모르겠다.

양귀비(楊貴妃 719∼756)는 부귀모란(富貴牡丹)형 미인이다. 또 양귀비를 두고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하였다. 즉 ‘(임금이 그녀의 미색에 빠져) 나라가 기울어질 만큼 예쁜 미인’이란 뜻이다.
중국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비로서 직급이 귀비(貴妃)인데 아명은 옥환(玉環)이다. 촉주(蜀州;지금의 四川省 崇慶縣) 출신으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인 허난부사조참군(河南府士曹參軍) 양현교의 양녀가 되었다.

재지(才智)가 있고 가무에 뛰어난 미녀로 서기735년 현종의 제18왕자 수왕(壽王) 이매(李瑁)의 비로 뽑혀 수왕자(壽王邸)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때마침 현종이 총애하던 왕비 무혜비(武惠妃)가 죽은 뒤라 허전하던 터에 현종이 그녀를 보고는 사랑하게 되었고, 서기740년 수왕저에서 빼내 여관(女冠·女道士)으로 삼고, 태진(太眞)이란 이름을 주었으며, 서기744년 궁중으로 불러들여 이듬해 27세 때 정식으로 귀비(貴妃)로 책립(冊立)되었다. 그래서 양귀비(楊貴妃)라 부르게 되었다.

정무에 싫증을 느낀 현종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낭자(娘子)라는 호칭으로 황후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세 명의 자매에게는 한국(韓國)부인·괵국부인 진국(秦國)부인의 칭호를 주었고, 오빠 양소(楊釗)에게는 국충(國忠)이란 이름을 주었다. 또한 일족이 모두 고관이 되어 황족과 통혼하였으며, 관료들도 대부분 그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경쟁을 하였다.

매년 겨울에는 현종 황제와 함께 화청궁(華淸宮) 온천에서 보냈고, 고력사(高力士)·안녹산(安祿山) 등도 서로 총애를 받으려고 경쟁하였으며, 이백(李白) 등 궁정 시인들에게 둘러싸여 호사스런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양국충과 대립한 안록산이 <안사(安史)의 난>을 일으켜 서기756년 장안으로 쳐들어오자 양국충의 권유로 현종은 촉(蜀;지금의 四川)으로 도망하기 위하여 귀비 등과 함께 장안을 탈출하였다.

그러나 장안의 서쪽 지방인 마외역(馬嵬驛;지금의 陝西省 興平縣)에서 경호하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들은 국난을 초래한 책임자로서 양국충을 죽이고, 현종에게 강요하여 귀비를 역의 불당에서 목매달아 죽게 하였다. 장안이 탈환된 뒤, 수도로 돌아온 현종은 마외에 묻힌 시신을 거두어 개장(改葬)하였으며, 여생을 귀비의 화상 앞에서 아침 저녁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귀비와 현종의 사랑과 비극은 그 뒤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었는데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을 비롯하여 많은 시문에 등장하였다.

< 長恨歌(장한가) >- 긴 한탄의 노래- 白居易(백거이)
漢皇重色思傾國(한황중색사경국) 당나라 임금 여색 좋아해 나라가 기울어질 만한 미인 생각하였으나
御宇多年求不得(어우다년구불득) 천하를 다스린 지 여러 해 되도록 구하지 못하였네
楊家有女初長成(양가유녀초장성) 양씨(楊氏) 집안에 딸 막 장성하였는데
養在深閨人未識(양재심규인미식) 깊은 규방에서 자라 아무도 알지 못했네
天生麗質難自棄(천생여질난자기) 하늘이 낸 고운 자질은 스스로 버리기 어려운 것이니
一朝選在君王側(일조선재군왕측) 하루 아침에 뽑히어 임금 곁에 있게 되었네.
回頭一笑百媚生(회두일소백미생) 머리 돌려 한 번 웃으면 온갖 아릿다움 피어나고
六宮紛黛無顔色(육궁분대무안색) 여섯 궁전의 곱게 단장한 후궁들 얼굴 빛을 잃게 되었네
春寒賜浴華淸池(춘한사욕화청지) 봄 날씨 쌀쌀한 때 화청지에 목욕을 하면
溫泉水滑洗凝脂(온천수활세응지) 온천 물은 매끄럽게 엉긴 기름 씻어내네
侍兒扶起嬌無力(시아부기교무력) 시중드는 아이 부축해 일으키니 그 아릿다움에 (임금의) 힘 다 빠져
始是新承恩澤時(시시신승은택시) 이로부터 천자의 은총을 받게 되었네
雲 髮밑友대신賓 花顔金步搖(운빈화안금보요) 구름 같은 머리, 꽃 같은 얼굴에 황금 장식으로
芙蓉帳暖度春宵(부용장난도춘소) 부용 수 놓은 따뜻한 장막 안에 봄밤을 보내네
春宵苦短日高起(춘소고단일고기) 봄밤은 너무 짧아 어느덧 해가 높이 떴을 때 일으나니
從此君王不早朝(종차군왕불조조) 이 때문에 임금은 아침 조회에도 빠졌다네
承歡侍宴無閑暇(승환시연무한가) 기쁜 마음으로 찬치 벌리기에 한가할 틈이 없었고
春從春遊夜專夜(춘종춘유야전야) 봄이면 봄 따라 놀고, 밤이면 밤을 오로지 하였네
後宮佳麗三千人(후궁가려삼천인) 후궁에는 아름다운 여인 삼천인데
三千寵愛在一身(삼천총애재일신) 삼천의 부러움이 그녀 한 몸에 있었네
金屋粧成嬌侍夜(금옥장성교시야) 황금 방에서 화장하고는 교태롭게 (임금의) 밤 시중 들고
玉樓宴罷醉和春(옥루연파취화춘) 옥루의 잔치 끝나면 취한 채 춘정에 화답하였네
姉妹弟兄皆列土(자매제형개열토) 형제 자매들까지도 모두 봉토를 받으니
可憐光彩生門戶(가련광채생문호) 아름다운 광채가 온 집안을 빛나게 하였네
遂令天下父母心(수령천하부모심) 마침내는 온 세상의 부모들 마음에
不重生男重生女(불중생남중생녀) 아들 낳는 것 중히 여기지 않고, 딸 낳는 것을 중히 여기게 하였네
驪宮高處入靑雲(여궁고처입청운) 여산 별궁(화청지) 높은 곳에 청운 꿈 들이고
仙樂風飄處處聞(선악풍표처처문) 신선 놀음 음악 소리가 바람에 실려 곳곳에 들리네
緩歌慢舞凝絲竹(완가만무응사죽) 느린 곡조의 노래와 느린 춤은 관현악기 음율에 따르고
盡日君王看不足(진일군왕간부족) 하루 해가 다 해도 임금은 부족한 것 같이 보이네
漁陽 鼓밑卑 鼓動地來(어양비고동지래) 갑자기 어양 땅에 반란 일어 땅이 울리게 북소리 울리며 몰려와
驚破霓裳羽衣曲(경파예상우의곡) 놀라 예상우의곡(현종이 양귀비를 위해 작곡한 곡)이 깨져버렸네
九重城闕煙塵生(구중성궐연진생) 구중 궁궐에 연기와 먼지가 일고
千乘萬騎西南行(천승만기서남행) 수천 수만 군사가 호위하는 행렬이 서남쪽으로 피난길 나섰네
翠華搖搖行復止(취화요요행복지) 비취색 화려한 깃발 세운 임금 행렬 가다가 다시 멈추니
西出都門百餘里(서출도문백여리) 도성문 나와 서쪽으로 백 여리 되는 곳이네
六軍不發無奈何(육군불발무나하) 온 군사가 나가지 않고 나라 망친 책임 추궁하니, 어쩔 수 없이
宛轉蛾眉馬前死(완전아미마전사) 아름다운 양귀비 군사들 말 앞에서 죽게 하였네
花鈿委地無人收(화전위지무인수) 꽃 비녀 땅에 떨어져도 거두는 사람 없었고
翠翹金雀玉搔頭(취교금작옥소두) 비취 장식 금비녀, 옥장식 꽂던 머리 모두 흐트러졌네
君王掩面救不得(군왕엄면구부득) 임금도 얼굴 가린 채 구해내지 못하여
回首血漏相和流(회수혈루상화류) 머리 돌릴 적엔 피눈물 함께 섞어 흘렸네
黃埃散漫風蕭索(황애산만풍소색) 누런 먼지 자욱하고 바람은 쓸쓸한데
雲棧 營밑呂대신絲 紆登劍閣(운잔영우등검각) 구름사다리 꾸불꾸불한 사천길 검각을 올라갔네
峨嵋山下少人行(아미산하소인행) 아미산 아래는 오가는 사람도 적은데
旌旗無光一色薄(정기무광일색박) 깃발들은 빛을 잃고 해빛도 얇아졌네
蜀江水碧蜀山靑(촉강수벽촉산청) 촉 땅 강물은 푸르고, 촉 땅 산도 푸른데
聖主朝朝暮暮情(성주조조모모정) 임금은 아침 저녁으로 (양귀비) 그리는 정 뿐이었네
行宮見月傷心色(행궁견월상심색) 행궁에서 보는 달은 마음 아프게 하는 빛 뿐이고
夜雨聞鈴斷腸聲(야우문령단장성) 밤비 속에 듣는 요령소리는 애끊는 소리였네
天旋地轉回龍馭(천선지전회룡어) 하늘이 돌고, 땅이 굴러 세상 바뀌니 임금의 수레 돌려 오는데
到此躊躇不能去(도차주저불능거) 이곳(양귀비가 죽은 곳)에 이르러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하네
馬嵬坡下泥土中(마외파하니토중) 마외파 아래 진흙 속에는
不見玉顔空死處(불견옥안공사처) 옥 같은 얼굴 보이지 않고 부질없이 (양귀비)죽은 자리만 있네
君臣相顧盡霑衣(군신상고진점의) 임금과 신하가 서로 돌아보며 옷깃만 적시고
東望都門信馬歸(동망도문신마귀) 동쪽 서울 바라보며 말에 몸 맡기고 돌아왔네
歸來池苑皆依舊(귀래지원개의구) 돌아와 보니 연못과 정원은 전과 같은데
太液芙蓉未央柳(태액부용미앙류) 태액못의 부용꽃과 미앙궁의 버드나무도 여전하네
芙蓉如面柳如眉(부용여면류여미) 부용은 그리운 이(양귀비) 얼굴 같고, 버드나무는 눈썹 같으니
對此如何不漏垂(대차여하불루수) 이를 보고도 어찌 눈물 흘리지 않으리
春風挑李花開夜(춘풍도리화개야) 봄바람에 도리화(복사꽃과 오얏꽃) 피는 밤이나
秋雨梧桐葉落時(추우오동엽낙시) 가을비에 오동잎 떨어질 땐 그리움 더욱 사무치네
西宮南苑多秋草(서궁남원다추초) 서궁과 남원에는 가을 풀만 무성한데
落葉滿階紅不掃(낙엽만계홍불소) 낙엽이 섬돌 가득히 떨어져 붉어 있어도 쓸지 않았네
梨園弟子白髮新(이원제자백발신) 이원의 악공들 흰머리 새로 돋아 났고
椒房阿監靑娥老(초방아감청아노) 황후전 궁녀들도 젊던 모습 이젠 늙었네
夕殿螢飛思 心변肖 然(석전형비사초연) 저녘 때 궁전에 반딧불 날면 그리움 더울 처연해
孤燈挑盡未成眠(고등도진미성면) 외로운 등불 다하도록 잠 못 이루네
遲遲更鼓初長夜(지지갱고초장야) 느린 시각 북소리는 긴 밤의 초저녁을 알리고
耿耿星河欲曙天(경경성하욕서천) 훤한 은하수는 새벽하늘에 걸려있네
鴛鴦瓦冷霜華重(원앙와냉상화중) 원앙기와 싸늘한데 서릿발 짙고
翡翠衾寒誰與共(비취금한수여공) 비취금 찬데 누구와 함께 할꼬
悠悠生死別經年(유유생사별경년) 아득한 생사의 이별 여러 해를 넘겨도
魂魄不曾來入夢(혼백불증래입몽) 혼백조차 꿈에 한 번 나타나지 않네
臨 工邑 道士鴻都客(임공도사홍도객) 임공 땅의 도사 홍도객(낙양 북문, 홍도문에 머물고 있는 객)은
能以精神致魂魄(능이정신치혼백) 능히 정신으로 혼백을 부를 수 있다하네
爲感君王展轉思(위감군왕전전사) 군왕이 잠 못 이루고 전전하는데 감동해
遂敎方士殷勤覓(수교방사은근멱) 마침내 도사로 하여금 정성껏 찾아보게 하였네
排風馭氣奔如電(배풍어기분여전) 바람을 밀치고 기운을 몰고 번개처럼 달려
升天入地求之 두人변扁(승천입지구지변) 하늘의 오르고, 땅 속으로 들어가 두루 찾았네
上窮碧落下黃泉(상궁벽낙하황천) 위로는 하늘 끝, 아래로는 황천까지 다 뒤졌으나
兩處茫茫皆不見(양처망망개불견) 두 곳 모두 망망할 뿐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네
忽聞海上有仙山(홀문해상유선산) 문득 들으니 바다에 신선이 사는 산이 있다는데
山在虛無 絲변票 絲변目少 間(산재허무표묘간) 산은 허무하고 까마득히 멀리 있다고 들었네
樓殿玲瓏五雲起(누전영롱오운기) 누각과 궁전은 영롱하고 오색 구름이 이는데
其中 絲변卓 約多仙子(기중탁약다선자) 그 안에 아릿다운 선녀들 많다고 하네
中有一人字太眞(중유일인자태진) 그 속에 한 사람 있는데 자가 태진(양귀비)이고
雪膚花貌參差是(설부화모참차시) 눈 같이 흰 살결에 꽃 같은 모습이 (양귀비와)거의 비슷하다 하네
金闕西 床밑木대산相 叩玉 戶밑向(금궐서상고옥경) 금장식문 달린 서쪽 행랑채 옥문 빗장 두드리며
轉敎小玉報雙成(전교소옥보쌍성) 하녀 소옥에게 말하니 (소옥은) 다시 쌍성에게 알리네
聞道漢家天子使(문도한가천자사) 당나라 천자의 사신이 왔다는 말 듣고
九華帳裏夢魂驚(구화장리몽혼경) 화려한 장막 안에서 꿈꾸던 혼령이 놀랐네
攬衣推枕起徘徊(남의추침기배회) 치마자락 부여잡고 베개 밀치고 일어나 서성거리는데
珠箔銀屛 道자首대신麗 道자首대신人아래也 開(주박은병리이개) 구슬발, 은병풍이 한겹 한겹 열려지네
雲 髮밑友대신賓 半偏新睡覺(운빈반편신수각) 구름같은 머리 한쪽으로 늘어져 잠자다 깬 모습이고
花冠不整下堂來(화관부정하당래) 꽃머리 장식 매만지지도 않은 채 대청을 내려왔네
風吹仙袂飄飄擧(풍취선몌표표거) 바람에 선의(仙衣) 소매자락 펄럭펄럭 휘날리니
猶似霓裳羽衣舞(유사예상우의무) 흡사 예상우의무(양귀비가 현종 앞에서 추던 춤)를 추는 듯 하네
玉容寂寞漏 門속柬 干(옥용적막누란간) 옥 같은 얼굴에 쓸쓸한 눈물이 줄줄 흐르니
梨花一枝春帶雨(이화일지춘대우) 배꽃 한 자지가 봄비에 젖는 듯 하네
含情凝 目변弟 謝君王(함정응제사군왕) 정겨운 눈으로 임금께 감사하며 말하기를
一別音容兩渺茫(일별음용양묘망) 한번 이별하자 (임금의) 목소리와 얼굴이 까마득히 멀어졌네
昭陽殿裏恩愛絶(소양전리은애절) 소양전에서 받던 은총은 끊어져 버리고
蓬萊宮中日月長(봉래궁중일월장) 봉래궁(신선들이 사는 곳)의 해와 달은 길기만 하네
回頭下望人환處(회두하망인환처) 머리 돌려 저 아래 사람 사는 곳 바라보아도
不見長安見塵霧(불견장안견진무) 장안은 보이지 않고 먼지와 안개만 자욱하게 보일 뿐이네
唯將舊物表深情(유장구물표심정) 다만 옛 물건으로 깊은 정 표하고자 하며
鈿合金釵寄將去(전합금채기장거) 자개 상자와 금비녀를 보내고자 하네
釵留一股合一扇(채류일고합일선) 비녀 한 개와 함께 부채 한 개 남겼는데
釵 壁에서土제거 黃金合分鈿(채피황금합분전) 비녀의 황금은 떨어지고 상자는 자개가 깨졌네
但令心似金鈿堅(단령심사금전견) 오직 마음만 금이나 자개처럼 굳게 가진다면
天上人間會相見(천상인간회상견) 천상이건 인간 세상이건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 하네
臨別殷勤重寄詞(임별은근중기사) 이별할 때 은근히 거듭 말 전하기를
詞中有誓兩心知(사중유서양심지) 말 속에 맹세 있으니 두(현종과 양귀비) 마음은 안다네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칠월 칠석날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야반무인사어시) 밤중 아무도 없는 데서 속삭이었다네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선 둘이서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서는 둘이서 연리지(連理枝)가 되자 하였네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하늘 영원하고, 땅 오래간다지만 다 할 때 있을 것이나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 이 한은 끊임없이 다 할 날이 없으리라
(總 120句)「古文眞寶(고문진보)」(明文堂)에서 옮김(일부 해역 손질함)

(주)* 비익조(比翼鳥) : 암컷과 수컷이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라서 짝을 짓지 않으면 날지 못한다는 새.
    * 연리지(連理枝) : 두 나무 가지가 맞닿아서 결이 서로 통한 가지

    이 「장한가(長恨歌)」시는 당현종과 양귀비와의 아름답고도 슬픈 사랑이야기를 노래한 것이다. 이 시에 나타난 현종의 양귀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어 시를 읽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시를 다 외울 정도였다 한다.
    이보다 앞서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시로 두보(杜甫)의 「哀江頭(애강두)」가 있었는데 백거이는 두보의 애강두를 염두에 두고 이 시를 지었겠지만 사람들에게는 이 장한가가 더 널리 애송되었다.
    또 같은 시대 원진(元 禾眞)의 「連昌宮詞(연창궁사)」와 정우(鄭 禑자示대山)의 「津陽門詩(진양문시)」 등이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시가 있지만 장한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되어 왔다.
    장한가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것으로 못박았다.

    장한가의 작가 백거이(白居易) (서기 772-846년)는 자는 낙천(樂天: 白樂天으로 더 많이 알려짐),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또는 향산거사(香山居士), 당(唐)나라 대 시인, 태원(太原: 山西省)에서 태어나 하규(下 圭邑: 峽西省 渭南)으로 옮겨 살았다.
    진사시에 급제한 후 비서성(秘書省) 교서랑(校書郞), 좌십유(左拾遺), 좌찬선대부(左贊善大夫) 등의 벼슬을 살았고, 순종(順宗) 11년(서기815년) 상서(上書)했다가 득죄하여 강주(江州) 사마(司馬)로 좌천되었고, 항주(杭州)와 소주(蘇州) 자사를 거쳐 문종(文宗) 때 형부시랑(刑部侍郞), 하남윤(河南尹), 태자소부(太子少傅)가 되고, 풍익현개국후(馮翊縣開國侯)에 봉해졌다. 무종(武宗) 5년(서기845년)에 형부상서(刑部上書: 형조판서)로서 치사(致仕: 자의로 사직함)하였다.

    그의 산문(散文)은 정세(精細) 하면서도 표현이 절실(切實)하였고, 시(詩)는 쉬우면서도 유창하여 사람들이 널리 좋아하였다. 같은 시대 원진(元 禾眞)과 자주 창화(唱和: 시를 주고 받음)하여 그의 시체(詩體)를 「원백체(元白體)」라 부르며, 유우석(劉禹錫)과 잘 사귀어 두 사람을 「유백(劉白)」이라고 불렀다.

    그는 시(詩)는 정치,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모순을 고발하는 풍유시(諷諭詩)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신락부(新樂府) 등 많음 백성들의 생활상을 반영하고 정치의 모순을 들어내는 시를 썼다. 그러면서도 서정시에도 뛰어나 「비파행(琵琶行)」,「장한가(長恨歌)」를 비롯한 많은 서정시가 세상에 널리 유행하였다. 유고로는 <白氏長慶集(백씨장경집)> 71권이 있다.

    서안 동쪽 여산(驪山) 아래 온천이 솟는 곳에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楊貴妃)를 위하여 지었다는 여산궁(驪山宮)이 있고, 현종과 양귀비가 산책하며 사랑을 나누었다는 노천 온탕 화청지(華淸池)에는 요염한 자세로 왼 발 끝으로 수온을 확인하는 양귀비옥상이 서 있다.
화청지의 양귀비 옥상(玉像)
(2002. 9. 13. 서안관광 여행 때 찍음)

    또 양귀비는 목욕을 한 후 젖은 머리를 말리는 장면이 가장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래서 당현종은 양귀비의 모발 말리는 전용 정자를 지어 이름을 양발정(陽髮亭)이라 하였다. 지금도 서안 화청지에 있다.
양귀비가 모발을 말리던 양발정(陽髮亭)
(2002. 9. 13. 서안관광 여행 때 찍음)

    양귀비 묘가 흥평현(興平縣) 마외파(馬嵬坡)에 있는데 못생겨서 시집을 못 간 어떤 여자가 양귀비 무덤에 쓰러져 한탄하며 울다가 잠이 들어 얼굴에 흙이 묻었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얼굴이 예뻐졌다는 소문이 온 나라에 퍼져 사람들이 이를 양귀비분(楊貴妃紛)이라 하면서 무덤의 흙을 파가서 하는 수 없이 무덤을 벽돌로 쌓았다고 한다.
    2007. 6. 17-21 간의 중국 실크로드 여행 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양귀비 무덤의 벽돌 마저 떼어가는 바람에 지금은 무덤을 콘크리트로 덮어버렸다고 한다.

    또 조선 광해8년(서기1616년) 관복주청사로 중국에 간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각국 사신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백일장에 명나라 황제가 출제한 과제(科題)가 ‘비비칙비(非妃則飛)’ 인데, 이 또한 양귀비 관련이 있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고사성어로서 그 뜻은 ‘양귀비(楊貴妃)가 아니라 장비(張飛)였다’ 라는 뜻이다. 이 이야기에서도 양귀비는 죽어서 착한 선녀로 나온다.
    월사는 이 백일장에서 당당 수석을 하여 명 황제로부터 책과 매화를 하사 받았는데 ‘월사매(月沙梅)’라 명명하고, 경복궁에 심어 지금도 꽃을 피우고 있다고 한다.
월사매(月沙梅) 그림
동양화가 창석(蒼石) 이억영(李億榮) 화
(유래)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황제로부터 독강목(讀綱目)이라는 책과 함께 상으로 하사 받아 와 경복궁에 심고,
우리나라에 홍매화가 퍼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다.(震檀學報)

<그림 속의 글 내용>
‘월사매(月沙梅)’:
이 꽃은 나의 선조
월사(月沙)선생께서 중국에 사신으로 깠을 때
(황제로부터 하사 받아) 가지고 온 것이다.
그래서 ‘월사매(月沙梅)’라 이름지어졌다.
창석 이억영

비비칙비(非妃則飛)(클릭): 비비칙비(非妃則飛)

◆ 작장중무(作掌中舞) 조비연(趙飛燕)
조비연
인터넷에서 퍼 온 그림, 초상은 '중국여인열저'의 조비연역 여우 장한우

조비연 (趙飛燕 ?∼BC 1)은 임풍양류(臨風楊柳)형 미인이다. 즉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가지 같이 날씬한 여자라는 뜻이다. 성양후(成陽侯) 조임(趙臨)의 딸로 미인이며 가무(歌舞)에 능숙한데 몸놀림의 가볍기가 제비같다 하여 비연(飛燕: 날으는 제비)이라 불렀다.
중국 전한(前漢) 말기 성제(成帝, BC 32∼BC 7)의 황후. 비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입신(立身)하여 양아주(陽阿主)를 섬기게 되어 그곳에서 가무(歌舞)를 배웠다. 우연히 양아주의 집을 방문한 성제의 눈에 띄어 동생과 함께 후궁으로 들어갔다가 황후가 되었다.

전한에서 제일 방탕하였던 성제가 어느 날 밤 갑자기 죽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날 밤을 성제와 함께 지낸 조비연의 동생이 살해한 혐의를 입자 그녀는 자살을 하게 되었다. 얼마 후에 궁정 내에 왕망(王莽)의 세력이 커지자 조비연은 서인(庶人)으로 격하되었으며, 동생의 뒤를 따라 자살했다.

* 서기8년 漢(한)나라 태부로 있던 왕망이 세력을 키워 한을 폐하고 스스로 新(신) 황제라 칭하며 17년간 중국을 통치하다가 서기25년 광무제가 일어나 왕망을 없애고 한(漢)을 부흥시키니 이가 통상 한무제(漢武帝)라 하였다. 이로부터 후한(後漢)이 시작된다.

이와 같이 비천한 신분에서 황후에 이르는 영화를 누렸으나 마지막에 조락(凋落)의 길을 걷게 된 조비연 자매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후에 문학작품 《조비연외전(趙飛燕外傳)》의 소재가 되었다. 이 작품은 그녀의 친척으로부터 직접 듣고 쓴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후세의 위작(僞作)이라는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