阿斯達(아사달) 小考
沙月 李盛永
서 언
  육사18기 동기회 별칭이 아사달(阿斯達)이고, 동기회 산하 동호회의 하나인 산악회의 명칭이 아사달산악회(阿斯達山岳會)다.

  우리 阿斯達山岳會가 발족한지 어언 12년이 되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긴 세월인데 나이가 보태지는 것이 달갑지 않은 지금 되돌아보면 12년이 잠깐 사이에 지나간 것 같다. 옛 시인의 시에 世事愈愈一轉頭 (세사유유일전두: 세상사 유유하다지만 머리 한번 돌리는 사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정말 실감나게 피부에 와 닿는다.

  산에 왜 가느냐? 는 질문에 “산이 거기에 있어서 간다”라고 대답했다는 어느 유명 산악인의 말처럼 산을 찾는 이유는 그것으로 족하다.
  더구나 우리 아사달산악회의 산행이야말로 육사를 함께 한 40년 지기(知己)의 친구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산에서 만나 담소하면서 푸른 산, 맑은 공기 그리고 알맞은 운동을 통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얻고,
  또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했으니 더하여 어짊(仁)을 배울 수 있으니 일석이조(一石二鳥)가 아닌가.

  그러니 굳이 산악회 이름의 의미에 관해서 신경을 쓸 일도 아니지만, 사람의 이름에도 부조(父祖)의 소망(素望) 담기듯 이왕이면 그 이름에 담긴 뜻을 안다면 더욱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물론 육사인으로서 ‘아사달’하면 모교 육사의 교가를 생각한다. 교가 2절이 ‘아사달 기리 누려 여기 반만년---’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이 말을 못 들어 본 사람은 없다. 그러면서도 이 말의 뜻과 내력을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본인이 국과연에 근무 중이던 2000년 초에 아사달산악회 조용수회장(현 국과연 소장)에게 아사달의 말뜻과 내력을 연구할 것을 요청 받고 구할 수 있는 사서들에서 내용을 모아 ‘아사달 소고’라는 제목으로 그 해 시산제 때 유인물로 산악회 회원들에게 배포한 적이 있다.

  인터넷 동기회 홈페이지를 열면 맨 위 첫 줄에 ‘육군사관학교 아사달동기회’라는 타이틀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동기회 홈페이지를 자주 애용하는 회원이나 이따금 방문하는 분들에게 육사18기 동기회 별칭 ‘아사달(阿斯達)’의 뜻과 내력을 소개하고자 아사달산악회 2000년도 시산제 때 배포한 내용을 간추리고 보완해서 올린다.

  아사달이란 말은 육사 교가 외에도 한단고기(桓檀古己), 삼국유사(三國遺史), 신채호선생의 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등 단군조선의 역사에 많이 등장한다.

  신라 때 불국사 뜰에 세워진 석가탑을 일명 무영탑(無影塔)이라 부르게 된 설화 속에 아사달, 아사녀가 나오고 또 아사달은 신라 화랑의 한 사람이었다는 설도 있다.
역사서에 나타난 아사달
  우리들이 역사교과서에서 단군에 대해서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때의 옛 이야기와 같은 단군신화로서 신기한 이야기로 듣고 넘어갔다.
  단군조선의 왕조, 강역, 수도, 문화 등 역사 속에 들어 있어야 할 내용은 한 가지도 시원스레 배운 적이 없다. 이것이 일제의 식민사관에 입각한 조선역사 축소 왜곡의 연장선상에서 야기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삼국시대 이전 우리의 상고사는 우리가 신화라는 이야기로 어물쩍 넘어 간 것 보다 훨씬 찬란했고, 당시 우리의 기록 수단 즉 글이 없었기 때문에 기록으로는 중국 사가들이 쓴 편린에 의존할 수 밖에 없지만 역사란 꼭 기록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발굴되는 유적들도 있기 때문에 근래에 와서 우리의 상고사는 중국의 하화족 (夏華族) 이른바 한족(漢族)보다도 우월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우리나라 상고사를 담은 한단고기(桓檀古記)라는 역사서가 지금부터 20년 전에 공개되었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충격적이다. 그러나 현재 사학계를 장악하고 있는 일제 식민사관의 추종자들은 이 내용들은 인정하기는 커녕 조직적인 연구를 통하여 그 내용의 진위를 밝히려는 생각도 전혀 없는 것 같다.

  환단고기(단학회 연구부 엮음, 한단고기라고도 함) 에 아사달이 많이 등장한다. 그 내용을 발췌하여 요약하면
  (1) 환웅은 그들을 크게 교화(敎化)시켜 한(桓)사람으로 받아들이고, 관경(管境)을 접수함과 함께  겨례와 더불어 혼인하도록 해서 아들, 딸들을 낳으니 이로부터 뭇 남녀가 차츰 사람이 지켜야 하는 도리를 알게 되었다. 그 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이름하는 이가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니 지금의 송화강(松花江)가이다.(太白逸史 神市本紀 4-3-45)

  (2) 아홉 환(桓)의 백성들이 다 함께 기뻐하며 진심으로 복종하였으며, 또 왕검(王儉)을 천제화신(天帝化身)이라 하며 제왕으로 추대하니 이가 단군왕검(檀君王儉)이다. 신시(神市)의 옛 규범을 회복하여 아사달에 도읍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하였다.(檀君世紀 1-1-19, 2-2-14)

  (3) 신인왕검(神人王儉)께서 불함산(不咸山)의 박달나무터에 내려오셨다. 그는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짐을 겸하여 갖추었으므로 능히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이었으니 나라를 세운 뜻과 법은 높고, 넓고, 강하고, 열렬하였다.
      이에 구한(九桓)의 백성들이 마음 깊이 복종하여 그를 받들어 천제(天帝)의 화신(化身)이라 하며 그를 제왕으로 모셨다. 그가 곧 단군왕검(檀君王儉)으로 신시(神市)로부터 전해지던 오랜 법(法)을 되찾고, 서울을 아사달(阿斯達)에 설치하여 나라를 열었으니 조선(朝鮮)이라고 불렀다.
(三聖記全上篇)

  (4) 왕검(王儉)은 신묘년 5월 2일 인시(寅時: 새벽 3시-5시)에 단수(檀樹) 아래서 태어났는데---나이 열 넷 되던 갑진년에 웅씨 왕이 그가 신성하다는 말을 듣고 비왕(裨王)으로 기용하여 대읍국(大邑國) 일을 섭행(攝行)하게 하였다.
      당요(唐堯:
중국 요임금 때) 무진년(戊辰年: BC2333년) )에 단국(檀國)으로부터 아사달 단목(檀木)의 자리로 옮겨왔다.(檀君世紀2-2-6)

  (5) 고기(古記)에서 말하기를 ‘왕검(王儉)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고 어머니는 웅씨(熊氏)의 왕녀이며 신묘년(辛卯年: BC2370년) 5월 2일 인시(寅時)에 박달나무(檀木) 밑에서 태어났다.--- 무진(戊辰: BC2333년) 제요도당(帝堯陶唐: 중국 요임금시대) 때에 단국(檀國)으로부터 아사달의 단목터에 이르니 온 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의 아들로 모시게 되었다. 이에 구한(九桓)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었고, 신과 같은 교화가 멀리까지 미치게 되었다’하였다.(檀君世紀)

  (6) 단군왕검이 나라 사람들을 불러 약속하여 말하기를 “지금부터 이후로는 백성들의 여론을 듣는 것을 공법(公法)으로 삼노니 이를 천부(天符)라 하겠노라. 천부는 만대의 벼리(綱)요 지극한 존엄(尊嚴)이 서린 것이니 누구도 범해선 아니 되리라” 하였다.
      드디어 삼한으로 땅을 나누어 다스렸는데 신한(辰韓)은 천왕이 몸소 다스렸으며,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이름하니 이가 1세단군이다.
(三韓管境 本紀4-4-15/16)

  (7) ‘저울의 대는 부소량(扶蘇樑)이다’ 라고 했으니 곧 진한의 옛 서울을 말한다. 역시 단군조선이 도읍한 곳으로 아사달이 그 곳이다. 즉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의 하르빈이다.(蘇塗經典 本訓 第5)

  (8) 21세 단군 소태(蘇台)서우여에게 살수 백리의 땅을 봉해주고 명하여 섭주(攝主)로 삼아 기수(奇首)라 이름을 지었다. 우현왕이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중지토록 권하였으나 소태가 끝내 거절하자 우현왕이 측근과 사냥꾼 수 천명을 거느리고 부여 신궁에서 즉위하니 단군 소태가 마지못해 옥책(玉冊)과 국새(國璽)를 전하고, 서우여를 패하여 서인으로 삼고, 단군 소태는 아사달에 은거하며 일생을 마쳤다.(檀君世紀2-2-280)

  (9) 21세 단군 소태가 사람을 시켜 옥책과 국새를 전하여 색불루(索弗婁)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었는데 색불루가 백악산에 도읍 할 뜻을 보이니 여러 욕살(褥薩)들이 불가하다고 고집하였다. 이에 여원홍과 개천령 등이 명을 받들어 이를 칙유하니 여러 욕살들이 모두 승복하였다.
      원년 병신 정월에 드디어 녹산(鹿山)에서 즉위하였는데 이곳이 곧 백악산 아사달이다.--- 이리하여 제(帝)가 향과 축문을 여원홍에게 주어 16일 이른 아침에 이르러 삼한 관경의 대백두산(大白頭山) 천단(天壇)에서 경건히 제사를 시행하게 하고 제(帝)는 친히 백악산 아사달에서 제사를 지냈다.
(三韓管境 4-4-97/98/99)

  (10) 22세 단군 색불루(索弗婁) 신축 6년(BC1285) 육우(陸右)가 “아사달은 천년 세업의 땅이라 해도 이미 대운(大運)이 다 했으며 영고탑은 왕기가 짙어 백악산을 능가하는 듯 합니다. 청컨대 성을 쌓고 이 곳으로 도읍을 옮기옵소서”하고 상주하였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신도(新都)에 이미 집이 있는데 어째서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인가?” 하였다.(檀君世紀)

  (11) 무술년에 수유(須臾)사람 기후(箕侯)가 군사를 데리고 불한(番韓)에 들어와 웅거하면서 스스로 불조선 왕이라 칭하거늘 연나라에서 사자를 보내 함께 토벌하자고 하였으나 말조선(莫朝鮮)이 쫓지 않았다.
      계혜년에 47세 단군 고열가(高烈加)는 드디어 제위를 버리고 아사달로 들어가자 신조선(眞朝鮮)이 오가(五加)와 더불어 공동으로 다스리니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말았다.
(三韓管境 本紀4-4-136)

  (12) 계해년에 47세 단군 고열가가 마침내 왕위를 버리고 아사달에 들어갔다. 진조선(眞朝鮮)은 오가(五加)와 함께 진시황 정(政)에게 복종하게 되더니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종말을 맞았다.(太白逸史 三韓管境 本紀 第4)

  (13) 북부여 시조 단군 해모수(解慕수) 20년 신사에 백악산(白岳山) 아사달에서 삼신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北扶餘記3-1-15)

  (14) 북부여 시조 단군 신사 20년(BC220) 명을 내리사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도록 하시고 7월에 새로운 궁궐 336간을 지어 이름하여 천안궁(天安宮)이라 하였다.(北扶餘記)

  (15) (해설)4 백악산 아사달: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조선평양도읍시대, 백악산 아사달시대, 장경당시대, 아사달산신시대로 구분한다. 백악산 아사달은 그 두 번째 도읍지를 뜻한다.

  (16) (해설)6 아사달: ‘달’은 고대어로 ‘산’, ‘땅’, ‘터’를 뜻하는 말이다. 아직도 우리말에 ‘양달’, ‘응달’등의 말이 남아있다.
      ‘아사’‘아시’가 변한 말인데 ‘처음’, ‘새’, ‘애벌’등의 뜻으로 지금도 이른 봄에 작년에 벼를 심었던 논을 처음 가는 것을‘아시갈이’라 하고, 빨래를 삶아 빨기 전에 처음 물에 빠는 것을 ‘아시빨래’라 하는 등의 말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아사달’‘처음 땅’,새 땅’, ‘새 터’를 뜻하는 순수 우리의 고대어이다. 그래서 아사달의 어원은 ‘새 터’→ ‘아시 터’→ ‘아사 달’로 올라간다. 그래서 한자 표기 ‘阿斯達’은 순수 우리말 ‘아사달’의 표음(表音) 일 뿐 한자 그 자체의 뜻은 의미가 없다.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의 왕검조선 편에도 아사달이 나온다.
  (1) 위서(魏書)에 이런 기록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檀君) 왕검(王儉)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불렀는데 중국의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였다.

  (2) 경(經)에는 아사달은 무엽산(無葉山)이라 했고, 또는 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했는데 백주(白州)에 있다. 혹은 개성(開城) 동쪽에 있다고도 하는데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 바로 그 곳이다.

  (3) 왕검당고(唐高: 堯임금)가 왕위에 오른 지 50년이 되는 경인년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이후 도읍을 아사달에 옮겼다. 그 곳을 궁홀산(弓忽山)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 불렀다. 여기서 1천오백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4) 주나라 무왕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갔다.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는데 이 때 나이가 1천9백8세였다.

  소결론
  단기고사와 삼국유사 등에 나오는 아사달은 단군왕검이 처음으로 조선이란 나라를 연 곳이고, 가장 오랫동안 수도였으며, 그 위치는 여러 설이 있으나 현 만주의 하르빈 근처 송화강 강변이라는 주장이 가장 유력하다.
  그 뜻은 ‘처음 땅’, ‘새 터전’이란 뜻이다.
무영탑(無影塔) 설화에 등장하는 아사달
  경주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에 통일신라시대(8세기)에 건립된 높이 8.2m의 2개 삼층석탑이 있는데 동쪽의 것이 다보탑(多寶塔: 국보 제20호)이고, 서쪽의 것이 석가탑(釋迦塔: 국보 제21호)이다. 이 모두 백제 석공 아사달(阿斯達)이 지은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불국사 다보탑(왼쪽)과 석가탑(오른쪽)
  석가탑은 일명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부르는데, 석공 아사달과 그 아내 아사녀(阿斯女)와의 아름답고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다음과 같은 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백제 석공 아사달이 먼 신라 서울 경주까지 와서 석탑 건립에 여념이 없어 오랫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였다.
  이제나저제나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석공의 아내 아사녀는 남편을 찾아 물어 물어서 천신만고 끝에 경주까지 와 보니 다보탑은 이미 완공되었고, 석가탑 건립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탑 건립은 공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 이들 부부는 동침은 물론 만날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들은 사람을 통해 탑이 완공될 때까지 영지(影池)에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아사녀는 영지 가에서 완공된 석가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치기만 기다리면서 영지만 들여다보고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석가탑은 영지에 그 그림자를 비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에 대한 그리움에 지친 그녀는 영지 속을 하염없이 들여 다 보다가 물 속에서 탑의 그림자를 보았다.
  너무 간절하고 지친 나머지 그녀는 환상을 본 것이다. 그녀는 반가움에 자신도 모르게 영지에 뛰어들어 그만 빠져 죽고 말았다.

  탑이 완공된 후에 아사달은 영지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사랑하는 아내에게로 급히 갔지만 아내는 이미 죽고 난 후였다. 실망한 아사달도 영지 물 속으로 뛰어들어 사랑하는 아내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이다.

  이 때부터 석가탑‘그림자가 없다’하여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김홍식 박사 편 ‘한국사대사전’에는 아사달을 당나라 석공이라 기록 됨

  무영탑과 관련한 이 아사달아사녀 이야기는 부부간의 아름답고,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는 있으나 육사교가의 가사, 육사18기동기회 별칭 및 아사달산악회 명칭의 연원(淵源)과는 거리가 멀다.
신라 화랑의 한 사람이라는 아사달
  구전(口傳)되는 바에 의하면 아사달(阿斯達)은 신라 때 화랑(花郞)의 한 사람이라는 일설(一說)이 있다.
  화랑도(花郞徒)는 신라 진흥왕 34년(서기 576년)에 처음으로 생긴 청소년으로 조직된 민간 수련단체로 일명 국선도(國仙徒), 풍월도(風月徒), 원화도(源花徒), 풍류도(風流徒)라고도 불렀으며 진흥왕 이후 문무왕 때까지 가장 융성하였으나 통일이후에는 자연히 퇴폐 해 졌다.

  화랑도의 조직에는 지도자로 화랑(花郞)이 있고, 그 밑에 낭도(郎徒)들이 있었으며, 일상적으로 세속오계(世俗五戒: 事君以忠, 事親以孝, 交友有信, 臨戰無退, 殺生有擇)를 가르쳐 삼국통일을 목표로 한 용감한 투사를 길렀다.

  화랑(花郞) 출신으로 나라에 보국(報國)한 사람중에 유명한 사람으로 김유신(金庾信), 김흠춘(金欽春), 죽지(竹旨), 사다함(斯多含), 관창(官昌), 원술(元述), 비령자(丕寧子) 등이 있으며, 성덕왕 때 김대문(金大問)이 저술한 ‘화랑세기(花郞世紀)’는 200명의 화랑을 추려 훌륭한 업적을 기록한 것이라 한다.이 화랑세기(花郞世紀)를 구하면 아사달이 화랑의 한 사람인지 아닌지 입증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제목 '율곡' 제정과정
  1974년 2월 18일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보고를 마치고, 2월25일 홍능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박정희대통령에게 최초 계획이 보고된 군사력건설8개년계획의 가제목(假題目) 작명 과정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

  1974년 1월 31일 합참 전략기획국 제1과장(임동원 대령)은 합동참모회의시 의장(한신 대장)이 강조한 계획의 보안문제에 유념하여 ‘국방 8개년계획 전력증강투자비’ 분야를 간략하고 보안상 유익한 가제목(假題目)을 붙이고, 채택된 사업에 사업번호를 붙일 것을 구상하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건의문을 기안하여 1974년 2월 4일 국장(이재전 소장) 및 본부장(이병형 중장), 1974년 2월 6일 의장(한신 대장)이 결재하고, 2월 25일 대통령께 보고하여 재가를 받은 것이다.

  가제목:
    A안: 율곡(栗谷) -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 발발 10년 전 장기적인 안목으로 국가 위기를 예견하고 십만양병론(十萬養兵論)을 주장한 율곡 이이 선생의 호를 딴 것이며 이것은 선생의 유비무환 사상을 본받고자 하는 의미임.
    B안: 아사달 -‘아사달’은 일설로 단군 개국시 수도이고, 우리나라의 옛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하며, 또한 신라의 모범적인 화랑의 한 사람으로 용맹스런 희생으로 나라를 구했다고 하는 신라 야사의 인물임.
    C안: 두꺼비 - 두꺼비는 비록 작지 마는 몸에 갑옷을 두르고 수명이 긴 양서동물로서 민첩하지는 않으나 칠전팔기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독사도 감히 접근치 못하는 강인한 동물이며 통상 복(福), 행운(幸運), 장수(長壽)의 상징물임.
    건의안: A안


  이렇게 해서 가제목 율곡(栗谷)은 1974년 2월 25일 ‘국방8개년계획 투자비분야’의 대통령 보고 시 구두로 보고하였던 바 대통령은 극구 칭찬하며 기꺼이 승인하였다.
결 언
  아사달(阿斯達)은 단군(檀君) 왕검(王儉)이 처음 나라를 연 도읍지로서 고대 우리민족의 오랫동안 중심이었던 곳으로 많은 역사서가 말 해 주고 있다.

  아사달이 신라 화랑의 한 사람의 이름이며 용맹스런 희생으로 나라를 구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불국사 삼층석탑(다보탑과 석가탑)을 건립한 백제의 석공의 이름으로 석가탑이 ‘무영탑’으로 불려지게 된 내력의 ‘아사달 아사녀 설화'에 등장하나 이는 우리 ‘아사달산악회' 명칭의 연원(淵源)과는 무관하다.

  ‘아사달’은 순수한 우리말로서 ‘아시’‘처음’, ‘새 것’등을 의미하는 ‘아사’‘땅’, ‘터전’을 의미하는 ‘달’의 합성어로 ‘처음 땅’, ‘새 땅’, ‘새 터전’을 뜻하는 말이 한자 阿斯達은 이두식 표기일 뿐 별다른 뜻이 없는 글자이다.

  초대 산악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에게 우리 산악회의 훌륭한 이름을 작명한 것을 늦었지만 감사해야 할 것 같다. 아사달산악회(阿斯達山岳會)! 그 이름은 우선 듣기에 아름답고, 순하며, 또 순수한 우리의 것이다. 그기에 금상첨화(錦上添花) 격으로 역사적으로나 말 뜻에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으니 이상 더 바랄 것이 또 무엇이겠는가?
첨부*1 전해지는 고조선(古朝鮮) 때 이야기들
1세 단군 왕검(王儉)은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진한(眞韓)은 직접 다스리고, 마한(馬韓)번한(番韓)에는 각각 왕을 두었다.
  또 나라의 일을 다음과 같이 몇 사람에게 주관하도록 분담시켰다.
    (1) 팽우(彭虞): 토지 개척
    (2) 고시(高矢): 농사
    (3) 신지(臣智): 글을 만들고 기록
    (4) 기성(奇省): 의약과 의술
    (5) 나을(那乙): 괘(掛)로 점치는 일
    (6) 우작(尤作): 병마(兵馬)
    (7) 비서갑(菲西岬)왕후: 양잠과 길쌈

  * 22세단군 색불루(索弗婁)때 진한진조선(眞朝鮮), 마한막조선(莫朝鮮), 번한번조선(番朝鮮: 奇子朝鮮)이라 고쳤다.

  * 고시(高矢)가 농사짓는 일을 맡아 백성들에게 가르친 고마움을 기리기 위해 지금도 들에서 밥을 먹을 때는 첫 술을 떠서 들판에 던지면서 ‘고시네-(高矢禮-)’라고 외치는 것이 이때부터 전해 오는 풍속이다.

1세 단군 51년(B.C 2282년) 운사(雲師)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강화도 정족산
(전등사가 있는 산)삼랑성(三郞城)을 쌓고, 마니산에 하늘에 제사 지낼 참성단을 쌓게 하였다.
마니산 참성단
2세 단군 부루(夫婁)는 치수에 능하여 태자로 있을 때 왕검(王儉)의 명에 따라 중국 도산(塗山: 안휘성 동북쪽)에서 순(舜)이 보낸 우(禹)에게 치수법(治水法)을 가르쳐서 황하의 치수를 잘 할 수 있게 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물을 잘 다스려서 백성들이 한 곳에 정착할 수 있게 하고, 재위 20년(B.C 2221년)에는 벼밭(稻田)을 만들어 경작하도록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 이러한 부루(夫婁) 임금의 고마움이 길이 이어지도록 비는 의미로 가을에 수확한 햇곡식을 담은 질그릇(단지)을 방이나 부엌 등 정한 곳에 놓아 두던 것이 점차 집안의 안녕을 지키는 업신(業神)으로 삼는 ‘부루단지(夫婁檀地)' 풍습이 되었다.

  * 부루 20년(B.C 2221년)의 도전(稻田
: 벼밭) 기록은 우리민족이 벼를 재배한 최초의 기록이며, 이는 아래와 같이 사실로서 입증되었다.
    - 1985년 경기도 강화군 우도와 광주군 궁평리 신석기 유적층에서 나온 토기에 볍씨 자국이 있었고,
    - 1991년 5월 김포군 계현리 선사유적지 토탄층에서 기원전(B.C) 2100년경의 볍씨가 발견되었고,
    - 동년 6월에는 고양시 일산읍 송포리 선사유적 토탄층에서 볍씨 4개가 발견되어 미국 베타스연구소에 보내어 탄소연대 측정결과 4340년전(B.C 2350년) 것으로 밝혀졌다.

5세 단군 구을(丘乙) 16년(B.C 2084년) 임금이 친히 장당경(藏唐京) 고역산(古曆山)에 행차하여 천제단을 쌓고 주변에 무궁화를 많이 심었다.
  * 무궁화근화(槿花) 또는 단화(檀花) 또는 훈화(薰花)라고도 한다.

6세단군 달문(達門)이 제후들을 모아놓고 환국(桓國)오훈(五訓)신시(神市)오사(五事)를 영구히 지켜야 할 일로 삼는다고 공포하였다.
            오훈(五訓)
    1. 성실하여 거짓이 없어야 한다.
    2.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아야한다.
    3. 효도하여 부모를 어기지 말아야한다.
    4. 깨끗하여 의로워 음란하지 말아야한다.
    5. 겸손하고 온화하여 다투지 말아야한다.

            오사(五事)
    1. 우가(牛加)는 곡식을 주관하고
    2. 마가(馬加)는 임금의 명령을 주관하고
    3. 구가(狗加)는 형벌을 주관하고
    4. 저가(猪加)는 병을 주관하고
    5. 양가(羊加)는 선악을 주관한다.

9세 단군 아술(阿述) 5년(B.C 1980년)에 전해 내려온 법을 정리하고, 보완하여 국법전서(國法全書)를 편찬하였는데, 이는 국문정음(國文正音), 배달유기(倍達留記
: 역사서)와 함께 고조선 3대 업적 중의 하나이다. 국문정음은 조선 세종 때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이어졌다.

송화강가에 작청(作廳
: 기계 만드는 공장)을 설치하고, 새로운 기계를 발명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었는데,
  발명품에는 양우계(量雨計), 측풍계(測風計), 자행륜차(自行輪車), 경기구(輕氣球), 자발뇌차(自發雷車), 천문경(天文鏡), 조담경(照膽鏡), 구석편(驅石鞭), 자명종(自鳴鐘), 경중누기(輕重漏器), 연적(涓滴),발뇌동용기(發雷動 器), 소금(素琴), 천리상응기(千里相應器), 목류마(木流馬),진천뢰(震天雷), 어풍승천기(御風昇天機), 흡기잠수선(吸氣潛水船), 측천기(測天機), 양해기(量海機), 양청기(量晴計), 측우기(測雨器), 측한계(測寒計), 측서계(測暑計), 황룡선(黃龍船), 양수기(揚水機) 등이 있어 나라를 크게 번창하게 하였다.

12세 단군 아한(亞漢) 2년(B.C 1833년) 임금이 요하에 이르러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세워 역대 임금의 이름과 호를 새겼다.(金石文字의 원조)
  후에 창해(滄海) 역사(力士) 여홍성(黎洪星)이 지나다가 이를 보고 시 한 수를 지었다.
    村郊稱弁韓別有殊常石(촌교칭변한별유수상석) 마을과 주변 땅이 변한이라 하는데 뚜렷이 구분되는 수상한 돌이 있네
    臺荒 足鄭 足蜀 紅字沒매苔碧(대황척촉홍자몰매태벽) 받침은 헐어지고 철쭉만 붉게 피었는데 글자는 깎이고 이끼만 푸르구나
    生於剖判初立了興亡夕(생어부판초립료흥망석) 천지가 처음 열릴 때 생겨나서 나라가 흥하고 망할 때 세워졌네
    文獻俱無徵此非檀氏跡(문헌구무징차비단씨적) 문헌으로 다 고증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단군의 자취가 아니리요

14세 단군 고불(古弗) 56년(B.C 1666년) 관원을 동원하여 인구조사를 하니 모두 일억팔천만명이었다.(최초의 인구조사 기록)

19세 단군 종년(縱年)
    3년(B.C 1433년) 곳곳에 국문서당(國文書堂)을 세웠고(서당의 원조 기록),
    10년(B.C 1426년) 조개엽전(貝葉錢)을 만들어 쓰게 했으며(화폐 원조 기록),
    16년(B.C 1420년)에 닥나무껍질종이를 만들고(종이의 원조 기록),
    칡껍질로 베를 짜서 옷감을 생산하였다.(옷감의 원조 기록)
첨부*2 상고사 연표(年表)
시대(時代)
국명(國名)
기간(年)
연대(BC) 임금 재위(在位)기간
    환인(桓因)   
환국(桓國)
3301년
      7197년     
-
-
-
-
-
-
      제1세환인 안파견(安巴堅)     
제2세환인 혁서(赫胥)     
제3세환인 고시리(古是利)
제4세환인 주우양(朱于襄)
제5세환인 석제임(釋堤壬)
제6세환인 구을리(邱乙利)
제7세환인 지위리(智爲利)
-
-
-
-
-
-
-
환웅(桓雄)
배달(倍達)
1565년
3897년
3803년
3717년
3618년
3511년
3418년
3320년
3239년
3166년
3070년
2970년
2878년
2773년
2706년
2587년
2508년
2452년
2380년
  제1세환웅 거발환(居發桓)  
제2세환웅 거불리(居弗理)
제3세환웅 우야고(右耶古)
제4세환웅 모사라(慕士羅)
제5세환웅 태우의(太虞儀)
제6세환웅 다의발(多儀發)
제7세환웅 겨련(居連)     
제8세환웅 안부련(安夫連)
제9세환웅 양운(養雲)      
제10세환웅 강고(葛古)     
제11세환웅 거야발(居耶發)
제12세환웅 주무신(州武愼)
제13세환웅 사와라(斯瓦羅)
제14세환웅 자오지(慈烏支)
제15세환웅 치액특(蚩額特)
제16세환웅 축다리(祝多利)
제17환웅 혁다세(革多世)  
제18세환웅 거불단(居弗檀)
  94
  86
  99
107
  93
  98
  81
  73
  96
100
  92
105
  67
109
  89
  56
  72
  48
단군(檀君)
조선(朝鮮)
2096년
2333년
2240년
2182년
2137년
2099년
2083년
2047년
1993년
1985년
1950년
1891년
1834년
1782년
1721년
1661년
1610년
1552년
1484년
1435년
1380년
1337년
1285년
1237년
1161년
1150년
1062년
  997년
  971년
  943년
  909년
  874년
  849년
  819년
  795년
  772년
  704년
  646년
  590년
  545년
  509년
  491년
  471년
  461년
  425년
  396년
  341년
  295년
  제1세단군 왕검(王儉)       
제2세단군 부루(夫婁)     
제3세단군 가륵(嘉勒)     
제4세단군 오사구(烏斯丘)
제5세단군 구을(丘乙)     
제6세단군 달문(達門)     
제7세단군 한속(翰粟)     
제8세단군 우서한(于西翰)
제9세단군 아술(阿述)      
제10세단군 노을(魯乙)     
제11세단군 도해(道亥)     
제12세단군 아한(阿漢)     
제13세단군 흘달(屹達)     
제14세단군 고불(古弗)     
제15세단군 벌음(伐音)     
제16세단군 위나(尉那)     
제17단군 여을(余乙)       
제18세단군 동엄(冬奄)     
제19세단군 종년(縱年)     
제20세단군 고홀(固忽)     
제21세단군 소태(蘇台)     
제22세단군 색불루(索弗婁)
제23세단군 아홀(阿忽)     
제24세단군 연나(延那)     
제25세단군 솔나(率那)     
제26세단군 추로(鄒魯)     
제27세단군 두밀(豆密)     
제28세단군 해모(亥牟)     
제29세단군 마휴(麻休)     
제30세단군 나휴(奈休)     
제31세단군 등올(登兀)     
제32세단군 추밀(鄒密)     
제33세단군 감물(甘勿)     
제34세단군 오루문(奧婁門)
제35세단군 사벌(沙伐)     
제36세단군 매륵(買勒)     
제37세단군 마물(麻勿)     
제38세단군 다물(多勿)     
제39세단군 두홀(豆忽)     
제40세단군 달음(達音)     
제41세단군 음차(音次)     
제42세단군 을우지(乙于支)
제43세단군 물리(勿理)     
제44세단군 구물(丘물)     
제45세단군 여루(余婁)     
제46세단군 보을(普乙)     
제47세단군 고열가(高列加)
  93
  58
  49
  38
  16
  36
  54
    8
  35
  59
  57
  52
  61
  60
  51
  58
  68
  49
  55
  43
  52
  48
  76
  11
  88
  65
  26
  28
  34
  35
  25
  30
  24
  23
  68
  58
  56
  45
  36
  18
  20
  10
  36
  29
  55
  46
  58
북부여
(北扶餘)
  239년 제1세 해모수(解慕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