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百濟)와 십제(十濟)
沙月 李 盛 永(2007.2.17)
  우리는 보통 백제를 삼국(三國: 고구려, 신라 ,백제)의 한 나라로 한반도 남서쪽에 위치하면서 주로 신라와 국토를 놓고 겨루다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한 나라로 학교에서 배웠다.

  그러나 김정산의 역사소설 「삼한지」(예담 간행)의 2권 부록에 <4. 백제와 십제>라는 글이 첨부되어 있는데, 백제 시조의 혈통에서부터 17대 아신왕(阿莘王)까지 백제십제가 따로 병존했다가 고구려 19대 광개토왕의 남진정책으로 백제는 왜국으로 망명하여 일본의 대화(大和)정권이 되었으며, 한반도의 백제 땅과 중국에 백제가 확보하고 있던 땅도 모두 고구려에 항복한 십제가 맡아서 다스렸다는 이야기다.
  지금 우리들이 배우는 백제역사의 반은 실제로는 십제역사이고, 실제 백제역사는 사라지고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김정산의 삼한지
제1권 밤이 깊을수로 별은 빛나고
제2권 마동왕자 서동대왕
제3권 살수에 뜨는 별
제4권 사비에 이는 서기
제5권 여왕시대
제6권 새로운 영웅들
제7권 도망가는 당태종
제8권 전란은 끝이 없어라
제9권 아아, 백제여!
제10권 나당대전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와는 너무나 다르다. 흥미로운 이야기이고, MBC 드라마 ‘주몽’을 시청하는데 끝부분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지만 비교해 보면 흥미를 더할 것 같아 사학적 진위를 떠난 이야기로서 전문(全文)을 소개한다.

◆ 부록 4. 백제와 십제
    동부여 사람 고주몽(高朱夢: 동명성왕)은 예시(禮氏) 여자와 혼인하여 유리(琉璃)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나이 스물 둘에 처자를 두고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부여비류국(沸流國)으로 와서 고구려를 세웠다.

    그는 그곳에서 비류국 왕자였던 우태의 미망인 소서노(召西奴)를 왕비로 맞아 온조(溫祚)를 낳았다. 이 때 이미 스물 아홉 살이던 젊은 과부 소서노는 먼젓번 남편 우태와의 사이에 구이(仇台)라는 아들을 두고 있었으니, 이 사람이 곧 지명을 따서 그 이름으로 부르게 되는 훗날의 비류(沸流)이다.

    이후 유리에게 왕위를 물려준 고주몽의 처사에 배신감을 느낀 소서노는 두 아들과 추종하는 세력을 이끌고 남하하여 옛날 대방 땅(帶方故地: 중국 남만주 요하 서쪽의 금주)에 나라를 세웠다가 다시 바다를 건너 한반도 서쪽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비류를 중심으로 한 졸본부여(卒本扶餘) 세력들은 항해에 능숙한 자들로 바다를 끼고 있는 미추홀(彌鄒忽:
현 아산 지역)에 도읍을 정하자고 주장한 반면, 온조를 띠르던 동부여(東夫餘)의 이민 세력들은 직산 위례성(慰禮城: 오리골)이 수도로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결국 비류와 온조, 두 이부(異父) 형제는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비류는 미추홀에, 온조는 위례성에 각각 무리를 나누어 살았는데 비류의 나라를 백제(百濟), 온조의 나라를 십제(十濟)라고 불렀다.

    백제(百濟)‘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너왔다’백가제해(百家濟海)의 뜻이고, 비류측에 비해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했던 온조는 스스로를 낮추어 십제(十濟)로 정했다.

    마한(馬韓)을 병탄한 비류는 수도를 마한의 도읍이던 웅진(熊津:
현 公州)로 옮기고 곰나루성을 축조하여 왕업을 튼튼히 하는 한편, 자신이 다스리는 땅의 곳곳에 담로를 설치하고, 왕실의 자제와 종친을 담로왕으로 삼아 파견하니 백제 특유의 담로제(擔魯制)가 이로써 시작되었다.

    벡제의 담로는 비단 한반도 내에만 국한되지 아니하고 황해를 건너 전날 자신들이 10여 년간 머물렀던 남만주 금주지역의 대방고토(帶方故土)와 남해의 탐라(제주도), 임나(부산지역), 더 나아가 서기 100년경에는 규슈지방까지 진출하여 야마토담로국을 설치하고, 숭신(崇神)으로 하여금 담로왕을 삼았는데, 중국의 담로국을 요서백제(遼西百濟) 또는 외백제(外百濟), 왜(倭: 규슈)에 설치한 담로국을 왜백제(倭百濟)라 불렀다.

    눈부신 항해술을 바탕으로 바다를 제압한 해상강국 백제는 아시아대륙 전역에 걸쳐 무려 스물 두개에 달하는 담로국을 지닌 거대한 나라로 성장하였다.

    이후 곰나루 웅진(熊津:
충남 공주)으로 도읍을 옮긴 백제와 역시 한산(漢山: 경기도 광주)으로 천도한 십제는 비류와 온조의 사후에도 나란히 지경을 접한 채 형제의 나라로 4백년 가까운 세월을 보낸다. 백제는 십제를 여러 담로국 가운데 하나쯤으로 여겼고, 십제 또한 백제를 형님의 나라로 섬겨 뜻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다만 백제는 비류의 후손들이 왕위를 세습하였고, 십제는 온조의 후손들인 부여씨(扶餘氏)가 대대로 왕위를 이어왔는데, 나라 밖에서는 이 두 왕실을 모두 한 나라로 보아 ‘백제(百濟)’라는 하나의 국호로 통칭하였던 것이다.
(중국 사가들이 쓴 역사서에 '십제'는 나오지 않고 '백제'만 나오는 것이 여기에 기인한 것 같다)

    그러나 백제와 십제 간의 이 같은 오랜 세력 균형은 서기391년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담덕(談德)의 등장으로 깨어진다. 고구려왕 담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곧바로 군사를 일으켜 십제와 백제를 침략한다. 지리상 고구려에 대한 1차적인 방비는 북쪽에 있던 십제의 몫이었다.

    이 때 십제의 왕은 근구수대왕(近仇首大王)의 차자이자 침류왕(枕流王)의 아우인 16대 신사왕(辰斯王)인데, 그는 담덕왕이 용병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응수조차 하지 않은 채 사냥터로 몸을 숨겼다. 이 바람에 관미성(關彌城:
백제의 북침 거점)을 비롯한 북방의 18개 백제 성이 일시에 함락되고 말았다.

    이 소식을 접한 웅진의 백제왕 응신왕(應神王)은 격노하였다. 곧 백제 장군들을 거느리고 십제왕실을 찾아간 응신왕은 십제의 진사왕이 몸을 피한 행궁으로 백제 장군 기각숙미(紀角宿彌)를 보내 진사왕을 죽이고 침류왕의 원자였던 아신(阿莘)을 십제의 17대 새 왕으로 세운 뒤, 군령을 정비하여 잃어버린 성곽들을 되찾고자 애썼다.

    그러나 백제의 응신왕(應神王)은 지략이 뛰어난 용병과 전술의 귀재 담덕왕의 적수가 못되었다. 향후 5년에 걸친 크고 작은 전투에서 번번이 패한 백제의 응신왕은 서기 396년 9월 고구려군이 수륙양면작전으로 백제의 수도 웅진을 공격해 들어오자 하는 수 없이 후일을 기약하며 도망하게 되었다.

    이 때 백제의 응신왕이 향한 곳은 백제의 숱한 담로국 가운데 하나였던 왜(倭) 규수의 대별국(大別國)이었다. 왕성이 함락되고 대왕이 해상으로 탈출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백제의 각 성을 지키던 성주들은 자연히 전의를 상실하고, 서둘러 지키던 성을 버리고 배에 올라 대왕의 일행에 합류하니 왜국으로 향하는 선단이 바다를 뒤덮을 정도였다.

    한편 십제의 아신왕(阿莘王)도 당초에는 고구려군에게 대항을 시도하였으나 곧 이를 포기하고, 남녀 포로 1천명과 세포 1천필을 바치며 담덕왕(談德王)에게 항복하고, 영원히 종이 될 것을 맹세하자 담덕왕은 십제의 신속(臣屬)을 허락하고 아신왕의 아우 십신을 인질로 삼아 귀환하였다.

    담덕왕에게는 백제와 십제는 격이 다른 존재였다. 백제는 우태의 아들 비류가 세우고 그 후손들이 역대 왕으로 있는 나라지만 십제는 고구려 동명성왕 주몽의 아들 온조가 세우고 대대로 그 후손이 왕으로 있는 나라이므로 담덕왕은 아신왕에 대하여 혈육의 정을 느껴서 고구려는 십제의 항복을 순순히 받아들였으나, 백제의 잔병들은 끝까지 추적하여 토벌하였던 것이다.

    왜로 피신한 백제의 응신왕(應神王)은 담로국의 제후들을 불러모았다. 그러자 이미 규슈로 진출해 있던 고규려인, 백제인, 임나인, 신라인 등이 응신왕을 찾아와 조공했다. 응신왕은 이들을 이끌고 나나와지역으로 이동하여 서기397년 정월, 새로운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바로 백제의 잔국(殘國)‘나라백제’ 이다.
(일본 사람들이 광개토대왕비에서 임나일본부설을 뒤바침 한다는 증거자료로 제시하고 있는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波百殘□□□羅以爲臣民」의 ‘百殘’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응신왕(應神王)은 왜(倭)를 평정하여 수중에 넣은 후 계속해서 사신을 보내 십제 왕실과 교통하여 언제고 웅진으로 돌아가 무너진 백제 왕실로 복귀할 기회만을 엿보았다.

    서기404년, 드디어 응신왕(應神王)은 나라백제의 전 해군력을 결집하여 담덕왕이 머물던 남만주의 요하로 향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요동의 비사성 부근에 연선(連船) 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갑자기 반격하여 오랜 항해에 지친 백제군을 거의 섬멸하였다.

    또다시 담덕왕에게 패한 응신왕은 나라백제에 머물며 그때까지 ‘왜(倭)’ 라고 불리던 지명을 ‘큰 왜’라는 뜻의 大和(다이와)로 바꾸고, 왕을 부르는 호칭을 ‘천황(天皇)’으로 고쳐 망명의 한을 달랬다.

    서기407년 응신왕(應神王)은 담덕왕을 상대로 마지막 결전을 준비했다. 나라백제에서 수군을 모으고, 십제와 요서백제에서 날쌘 보기병(步騎兵) 3만 명을 지원 받아 요동반도에 상륙하여 고구려 황성을 기습하려 했는데, 이번에도 고구려 군사 5만 명이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황성 주변에 대기하고 있다가 즉각 반격을 하여 어이없이 패하고 말았다.

    도망가는 백제군을 추격한 고구려 담덕왕은 사구성을 비롯한 5개의 요서백제의 성을 탈취하여 고구려 영토로 만들고, 군사 1만 여명을 참살하니 이로써 백제는 발해만의 비사성 하나만 남기고 요동반도 모두를 잃게 되었다.

    이 때의 패전으로 응신왕(應神王)은 담덕왕이 있는 한 본국으로 귀환하지 못할 것을 깨닫고 그대로 왜에 눌러 앉았으니 한반도에 살던 백제 구토의 유민 가운데 자신들의 임금을 찾아 배를 타고 왜로 건너가는 사람이 많았다.

    이후 한반도의 백제 영토는 십제왕이 맡아 다스렸으며, 십제와 왜국의 나라백제는 수시로 사신과 문물을 교환하며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중국에 확보하여 남아있던 외백제의 땅도 십제왕실이 고스란히 승계하여 자신들의 성씨인 부여씨(扶餘氏)로 담로왕을 교체하였다.
(끝)

    그런데 십제가 언제부터 국명을 백제로 바꾸었는지는 나와있지 않다. 서기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십제의 왕도 한성을 함락하고, 십제 21대 개루왕을 죽이자 십제는 문주왕이 즉위하고, 곧 웅진(옛 백제의 수도, 공주)로 천도하였는데, 이 때 명실공히 백제(百濟)란 이름으로 바꾼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이야기에서 보면 「일본은 서기 369년에 신라를 치고 낙동강유역의 가야 여러 나라를 평정한 후 서기 562년까지 거의 200년 동안 가야에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고 가야뿐만 아니라 신라, 백제까지도 지배하였다」는 주장.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주장인가를 쉽게 알 수가 있다.

임나일본부설:(클릭):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십오년 쯤 전에 역사소설 '고조선 상고사'(작자?)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에도 '십제'란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온조가 소서노의 보살핌을 받아 나라를 세우는데 처음 개국에 열 사람의 충직한 신하들이 기둥이 되었기 때문에 '십제국'이라 했다가 주변 소국과 마한을 정벌하고 나라가 커짐에 따라 '백제국'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다.

    1990년부터 2000년까지 10년 동안 대전 ADD에 근무하면서 활발한 동호인 모임인 다물회(多勿會) 모임 때 여러 번 들은 기억이 나는 말이 ‘비류백제의 역사를 찾아야 한다’ 는 말이었다. 그 때는 사실 무슨 말인지도 잘 몰랐다.

    지금 이 글을 읽고 보니 그 말이 곧 지금 백제 역사의 전반기 반은 곧 십제 역사일 뿐이고, 한반도 남서부와 중국 요서, 일본 규슈에 걸친 방대한 국가를 건설하고, 해상강국으로 부상했던 실제 '백제’ 는 우리 역사에서 사라지고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야 할 또 하나의 ‘다물’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