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蚩尤) 이야기(1)

2003. 4.  . 沙月 李    永 엮음

1부 순 서

중국에서 진시황이 숭앙 받는 이유(서언)

중국인의 조상 하화족의 중심은 서안

동이와 치우

치우는 우리 조상

치우는 어떤 사람인가?

(제2부 계속)

황제헌원과 치우와의 전쟁

중국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치우

우리 민족의 얼 속에 살아 있는 치우

중국 탁록의 중화삼조당에 모셔진 치우상의 의미

결언

                       첨부:1. 치우에 관한 기록 모음

                          2. 한, 중국사 연표 도해

 

 

중국에서 진시황이 숭앙 받는 이유(서언)

2002년 9월에 임관40주년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추진한 중국여행 중 서안(西安)에서 당 현종의 애첩 양귀비의 별궁 화청지(華淸池)에 이어 진시황병마용갱(秦始皇兵馬俑坑), 진시황릉(秦始皇陵), 황릉모형관 등 진시황의 유적들을 구경하였다. 이들을 둘러 보면서 항상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의문점이 하나가 있었다.

 

진시황릉과 진시황 옥상(玉像)

 

 

 

 

 

 

 

 

 

 

 

 

 

 

 

 

 

 

진시황 옥상(玉像) 뒤로 보이는 산이 진시황릉이다 원래 높이 133m, 현재 87m.

 

진시황병마용갱(위)과 진시황 호위전차(아래)

 

 

 

 

 

 

 

 

 

 

 

 

 

 

 

 

 

 

 

 

 


진시황은 재위 37년 내내 공역을 벌려 자기가 죽은 후에 묻힐 황릉을 축조하고 황릉을 지켜 줄 군사와 말들을 흙으로 빚어 구워 토용(土俑)으로 만들어 묻었는데 그 규모가 얼마인지 아직 예측하지 못하고 발굴된 것만 무려 8,000여 개가 된다고 한다.

 

그 의문은 ‘왜 진시황이 중국 사람들에게 숭앙을 받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에서 진시황을 찾아보면 「진시황(秦始皇)은 B.C 256- B.C 210년, 진의 제1세 황제, 성은 영(嬴) 이름은 정(政), 진(秦) 장양왕(莊襄王)의 아들로 진나라를 비롯한 7개 제후국이 쟁탈전을 벌이던 전국시대에 나머지 6국(六國: 楚,燕,齊,韓,魏,趙)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 진(秦)나라를 세웠다.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 일컫고 함양(咸陽: 峽西省)으로 도읍을 옮겨 법가(法家)인 이사(李斯)를 중용하여 법(法)을 중히 여기고, 형(刑)을 엄하게 하였다. 처음으로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고, 몽념(蒙恬)으로 하여금 흉노를 토벌케 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진시황을 말할 때 만리장성(萬里長城), 분서갱유(焚書坑儒), 아방궁(阿房宮), 진시황릉(秦始皇陵) 그리고 진시황병마용갱(秦始皇兵馬俑坑) 등 지금은 모두 관광자원으로 중국 경제에 한 몫을 하고 있지만 이들은 당시 과도한 공역, 사상과 학문의 탄압, 호화방탕, 개인 숭배 등 부정적인 것들을 먼저 머리에 떠 오르게 하는데 중국 사람들은 그 반대로 진시황을 중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황제의 한 사람으로 꼽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이유일까?

 

하기는 오래 전부터 중국에는 진황한무(秦皇漢武)’란 말이 있어 왔다. 진시황(秦始皇)과 한무제(漢武帝)가 중국의 강력한 군주의 표상이란 말이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은 고대로부터 중국 대륙의 북부에 살아 온 민족의 부족 또는 제후국들이 북쪽 흉노의 침략에 대비해서 구축한 성을 진시황 때  증축하여 동서 1만리를 연결한 대 역사(役事)였다.

전국시대 형세도

 

 

 

 

 

 

 

 

 

 

 

 

 

 

 

 


만리장성 공역(公役)에 동원된 수 많은 백성들의 참혹상의 한 단면이 진시황릉모형관에 전시되어 있었고, ‘하루 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이 때 생겨 났다고 한다. 아내가 징발담당관리에게 하루 밤 몸을 맡기고 남편이 공역에 동원되는 것을 빼 낸 데서 생긴 말이라 한다.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진시황이 유학의 경전인 육경(六經: 詩經, 書經, 易經, 禮經, 春秋, 樂經) 등을 모조리 불태우고 유학자를 잡아 모두 생매장한 일로서 분서갱유는 ‘학문과 사상의 탄압’을 말하는 대명사가 되었고, 아방궁(阿房宮)은 ‘호화방탕’의 대명사가 되었다.

 

진시황릉(秦始皇陵)과 진시황병마용갱(秦始皇兵馬俑坑)은 지금 한창 발굴작업이 진행되면서 '2200여년 전의 진시황이 오늘의 중국 인민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세계 관광객을 유치하는 관광자원으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그 현장을 둘러보면 정상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이 한 일이라 믿어지지 않는다.

 

결국 진시황의 이러한 폭정들이 중국인의 시조 황제 때로부터 2300여년 만에 중국 대륙을 통일하여 강건한 통일 제국 진(秦)나라를 건설했지만 겨우 3대 40년 밖에 지속되지 못하고 황권을 한(漢)에게 넘겨주고 만 것이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은 진시황 중국통일을 자랑스럽게 홍보하고 있다. 그 중국 통일은 국토통일 뿐만 아니라 민족통일, 문자, 화폐, 도량형의 통일에 까지 확대하여 홍보하고 있다.

 

진시황의 화폐 통일을 설명한 전시판(진시황릉 모형관)

 

 

 

 

 

 

 

 

 

 

 

 

 


아래 여섯 가지가 6국의 화폐, 위 엽전이 통일된 진나라 화폐

 

내가 국과연에 근무하는 동안 다물회 회원으로서 그 동안 모아 놓은 유인물 「多勿」지에 기획특집으로 게재된 민족의 영웅 치우(蚩尤)’와 1999년 「한배달」43호 특집부록 ‘치우는 살아있다’를 읽어가는 동안에 중국 서안 진시황릉에서 가졌던 의문점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중국에서 진시황이 숭앙을 받고 있는 이유는 바로 치우(蚩尤) 때문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중국인의 조상 하화족의 중심지는 서안(西安)

중국의 역사서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전설의 인물 삼황오제 중 황제(黃帝)를 중국 민족(夏華族=漢族)의 뿌리로 기록하고 있다.

 

삼황오제(三皇五帝),

고대 중국 전설시대의 임금

삼황(三皇): 태호복희(太昊伏犧氏), 염제신농씨(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

 

태호복희(太昊伏羲): 고대 중국 전설상의 임금, 처음으로 백성에게 고기잡이, 사냥, 목축 등을 가르치고, 팔괘(八卦)와 문자(文字)를 만들었다고 함.

 

염제신농(炎帝神農): 고대 중국 전설상의 임금, 농사짓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고, 팔괘를 겹쳐서 육십사괘(六十四掛)를 만들었다고 함.

 

황제헌원(黃帝軒轅): 중국 한족(漢族)의 시조, 소전(少典)의 아들. 원래 성은 공손(公孫), ‘헌원의 언덕’에서 출생하였다 하여 헌원씨((軒轅氏)라 불렀다. 기원전 2700년경 천하를 통일하고, 문자, 수레, 배 등을 만들고, 도량형, 악법(樂法), 역법(曆法), 음악(音樂), 잠업(蠶業) 등 많은 문물과 제도를 확립하였다 하며, 재위기간 100년이라 함.

 

오제(五帝): 소호(少昊), 전욱(顚頊), 제곡(帝곡), 당요(唐堯), 우순(虞舜)

 

원래 황제 헌원(軒轅)은 기원전(B.C) 2692년에 태어난 사람이다. 기울어진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를 대신하여 제위에 오르면서 공손씨(公孫氏) 성을 희(姬)로 바꾸었다고 하는데 희(姬)는 황하 중,상류의  한 갈래인 희수(姬水)에서 따 온 것이라 한다.

 

이는 곧 중국인의 뿌리인 황제가 황하의 중, 상류 지역에서 일어 난 족속임을 입증하는 기록이다. 즉 진시황에 의한 중국 대륙의 민족통일이 이루어지기 전 중국 대륙에는 황하 중, 상류인 서쪽에는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하화족(夏華族)이 있었고, 황하 하류인 동쪽에는 또 다른 족속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서들은 이들을 동이(東夷)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의 고대 국가로 하(夏) 나라와 주(周)나라가 하화족이 주도하여 세운 나라로서 이들은 황하 중,상류 지금의 협서성이 그 발상지이고 중심은 장안(長安), 우리의 관광코스에 들어있던 지금의 서안(西安)이다. 서안의 고대 신석기 반파유적(半坡遺跡)은 하화족이 남긴 문화 유적인 것이다.

 

그 이후로도 서안에는(秦), (漢), 당(唐)으로 이어지면서 15왕조 73황제가 이 곳에서 통치를 했고, 72황릉 있다고 한다.(황릉 수가 1개 적은 것은 당나라 때 여황제가 된 측천무후가 남편 고종과 합장 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 또한 고대 중국 하화족의 터전이 서안을 중심으로 한 서쪽이었던 것을 말해 준다.

 

중국의 역대 왕조가 증축 강화한 장안성 天下第一門

 

 

 

 

 

 

 

 

 

 

 

 

 

 

 

 

 

 


조선조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서 벽지 영월 땅으로 귀양 보냈을 때 단종 복위 기도를 하다가 발각되어 잡힌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익산을 순시 중에 들은 전라도 관찰사 이석형이 옛 동료들의 죽음을 착잡한 심경으로 지은 ‘次益山東軒韻(차익산동헌운)’이라는 제목의 짤막한 한시가 있다.

次益山東軒韻(차익산동헌운) 익산 동헌의 운에 따라 짓다

虞時二女竹(우시이녀죽) 순임금 때 이녀죽의 슬픈 일이 있었고

秦日大夫松(진일대부송) 진나라 때는 영화스런 대부송이 있었네

縱是哀榮異(종시애영이) 비록 슬프고 영광스러움은 다르지만

寧爲冷熱容(영위냉열용) 어찌 냉대하고 열렬히 환대할 수 있으리

 

이 시에서 진일대부송’이란 구절이 바로 진시황의 중국 통일과 관련된 구절이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중국 땅의 맨 동쪽 산동반도에 높이 솟은 태산(泰山)에 올라 하늘에 통일을 감사하는 제사를 지내려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미쳐 준비하지 못하여 비를 다 맞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주변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어 진시황이 그 소나무 밑에서 소나기를 피하고 무사히 제사를 마친 다음 그 소나무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여 대부(大夫) 벼슬을 내렸다. 사람들이 그 소나무를 대부송(大夫松)이라 부르니 그 때부터 대부송은 ‘영화로움’을 이르는 대명사가 되었다.

 

진시황이 중국통일의 마무리 의식을 중국 대륙의 맨 동쪽 태산에서 행한 것은 곧 동쪽 땅의 주인이었던 동이족을 평정한 것을 내외에 공식 선포하는 의식인 것이다.

 

동이(東夷)와 치우(蚩尤)

동이(東夷)는 협의의 동이와 광의의 동이로 구분한다. 협의의 동이는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 중국의 동부 황하 하류 지금의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등지와 만주 및 한반도에 퍼져 살던 족속으로 중국인들의 조상인 화하족(華夏族=漢族)과는 다른 이민족을 칭하는 말이다. ‘동이족(東夷族)’‘동쪽에 있는 이(夷) 즉 큰 활(大弓)을 잘 쓰는 족속’이란 뜻이다.

 

협의의 동이는 중국 사람들에게 시대와 그 분파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왔는데 견이(畎夷), 우이(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暘夷) 서이(徐夷), 서이(西夷), 남이(南夷), 회이(淮夷), 화이(和夷), 방이(方夷), 내이(萊夷), 왜이(倭夷), 사이(四夷), 도이(島夷), 도근(도근), 형이(형이), 개이(개이), 구이(九夷) 또는 구려(九黎) 등이다.

 

고대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동이의 활동 강역은 보면 다음 요도로 표시할 수 있고, 활동상은 그 아래 표와 같다.

 

동이의 강역

 

 

 

 

 

 

 

 

 

 

 

 

 

 

 

 

 

 

 


고대 중국역사에서 동이의 활동상

왕조

동이인

   

 

 

삼황오제

 

三皇五帝

복희

(伏犧)

복희

(伏犧)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최초의 동이족 인물, 백성에게 그물 뜨기와 고기잡이, 짐승 기르기를 가르쳤고, 35줄의 비파를 만들었다.

* 우리 선조들은 벼게 모에 복희씨를 수놓아 베고 잤다.

신농

(神農)

신농

(神農)

농사짓는 법과 약초를 찾아내고, 5줄의 비파를 만들고, 시장을 염. 강태공이 그의 후손이다.

황제

(黃帝)

치우.

(蚩尤)

하화족의 시조 황제(黃帝)가 가장 두려워한 동이족 군장, 구이(九夷) 또는 구려(九黎)의 임금으로 친형제가 8인, 일가형제가 73인, 현재 중국에 남아있는 묘족이 그의 후손이다.

(堯)임금

 

회중

회중은 요의 신하인데 요는 그를 양곡(陽谷: 해 뜨는 곳, 아사달, 朝鮮과 같은 뜻, 현재의 산동성, 동이족의 활동지역)에 살게 하였다..

(夏)

태강임금

 

동이족이 반(叛) 하였다.

상임금

 

견이(畎夷), 풍이(風夷), 황이(黃夷), 우이(嵎夷)와 싸웠다.

소강임금

 

방이와 싸웠다.

/망임금

 

구이(九夷)와 싸웠다.

설임금

 

견이(畎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형이(형이), 풍이(風夷), 양이(暘夷)와 싸웠다.

(殷)

중정임금

 

남이(南夷)가 침공해 왔다.

무을임금

 

정치가 무도하여 나라가 쇠하자 동이가 번성하기 시작하여 회하(淮河)와 태산(泰山) 지방인 강소성과 안휘성으로 옮겨와 (동이가) 점점 중토(中土)에 살게 되었다.

(周)

?

 

은나라 후손인 관숙과 채숙이 동이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키자 주공이 물리쳤다.

강임금

 

서이(西夷)가 구이(九夷)들과 손잡고 주나라를 물리쳐 서쪽 황하 상류까지 이르렀다.

목임금

서언왕

徐偃王

불꽃같이 일어나는 동이 사람들을 겁내어 주의 동방을 나누어 동이족인 서언왕(徐偃王)에게 맡겼다.

서언왕의 땅은 황지에 있는데 그 땅이 500리나 되었다.

서언왕은 인(仁)과 의(義)를 행하므로 56개의 나라들이 굴복해 왔다.

여임금

 

주의 정치가 무도하여 회이(淮夷)가 침공해 왔다.

유임금

 

음란하므로 사이(四夷)가 침입해 왔다.

제환공

 

제환공이 패권을 잡자 사이(四夷)가 산동의 낭야로  올라가 여허 하(夏: 화화족)을 무찌르고, 여러 작은 나라들을 멸망 시켰다.

?

 

주나라 초기에 청주(靑州)에 우이(嵎夷)가 있었는데 그들이 산 지역은 동주로 현재의 봉래이며,

내이(萊夷)는 내주(萊州)에 있었는데 제나라 땅으로 내이의 제후와 내이인들이 이 곳에 살았다. 내이는 목축으로 생활하였으며 산뽕나무를 키워 누에를 길러 비단을 짰다. 이 곳의 명주실은 특히 질기기 때문에 거문고와 비파의 줄을 만들었다. 재상 관중은 내이(萊夷) 사람이다.

*중국의 비단이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그 중에서도 산동의 명주가 가장 좋다고 하는데 이 기록으로 볼 때 중국의 비단은 동이족에게서 기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

 

기주와 양주에 도이(島夷),

서주에 회의(淮夷)와 서이(徐夷),

제에게 멸망 당한 개이(개이),

노에게 멸망 당한 도근(도근) 등이 있었다

(秦)

시황제

(始皇帝)

 

6국을 정복하여 통일한 뒤 회이(淮夷)와 서이(徐夷)가 모두 흩어져 일반 백성이 되었다.

 

반면 광의의 동이는 진나라 이후 만주와 한반도에 살고있는 동이, 숙신, 동호의 후신은 물론 일본, 유구 등지에 살던 족속들을 총체적으로 지칭하여‘동쪽 오랑케’란 뜻으로 비하한 말로서 화하족 우위의 사상(中華思想)에 의거한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과 같은 맥락으로 동이(東夷)라 하였기 때문에 민족의 갈래와는 관계가 없는 말이다. 광의의 동이에는 중국 대륙에 살다가 진시황의 중국 통일로 하화족에 흡수 동화된 동이 사람들은 이 범주에서 제외된다.

 

치우가 동이의 일파인 구이(九夷), 다른 이름으로 구려(九黎)의 임금으로 신시(神市) 또는 배달국(倍達國: 단군 이전의 고대 우리나라)의 14대 임금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으로 전해지고 있다. 치우와 동이와의 관계에 대한 중국측 기록들과 한국측 기록들을 모아 본다.

 

중국측 기록

치우는 옛날 천자의 호다.(史記 集解에서 應召+力)

- 구려(九黎) 임금의 호가 치우다. 구려(九黎)의 후예는 삼묘(三苗)가 되었는데 이는 구려의 덕을 회복한 것이다. 구려(九黎)여씨(黎氏)의 아홉 사람으로 치우의 무리다. (史記 索隱, 尙書의 呂刑)

- 삼묘(三苗)구려의 후예다.(國語의 楚語에서 偉昭)

- 삼묘족(三苗族)의 나라를 구려(九黎: 고려, Korear의 원음)라 하고 구려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 (중국의 사학자 왕동령 저 ‘중국 민족사’)

등과 같이 여러 기록에서 치우는 동이의 일파인 구이(九夷) 또는 구려(九黎: 九夷)의 임금이었고, 구려의 후손이 삼묘(三苗)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한국측 기록

- 규원사화(규원사화) 태시기(태시기): 「후세에 치우(蚩尤), 고시(高矢), 신지(神誌)의 후예가 가장 번성하였다. 치우씨 후손은 서남지방(중국 대륙의 화북지방을 말하는 듯)을 차지하고 살았으며, 신지씨 후손은 북동지방(만주지방을 말하는 듯)에 많이 살았는데 유독 고시씨의 후손만은 넓은 동남(한반도를 말하는 듯)으로 옮겨가서 진한, 변한의 여러 갈래가 되었다. 이것이 후세에 삼한인데 모두 그의 후손이다.

 

이 세 씨족의 후손은 또 아홉 파로 갈라졌는데 견이(畎夷), 우이(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暘夷)의 족속으로 나뉘어졌다. 그러나 조상은 같아서 서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夷)라는 것은 큰 활(大弓)을 말하는 것인데 치우씨가 칼과 창과 큰 활을 만든 후 사냥과 싸움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 때문에 우리겨레를 ‘이(夷)’라 한다. 「설문(說文)」에 동이(東夷)는 큰 활을 쏘는 동쪽 사람이란 뜻이다. 후세에 견이, 풍이는 서남으로 나뉘어 옮겨 살았다. 풍이(風夷)치우의 한 족속이다」라고 적고 있어 치우동이임을 말하고 있다.

 

하화족의 중심이 서안인데 반해 동이족의 중심은 황하 하류 산동지방이다. 고고학적으로 산동 일원에 나타나는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 용산문화(龍山文化), 청령강문화(청령강文化) 등이 동이족이 일으킨 문화이다.

 

지금까지 출토된 갑골(甲骨)이 산동지방의 용산문화를 비롯하여 만주, 한반도 그리고 일본에까지 분포되어 나타났고, 가장 오래된 갑골은 서요하 상류의 부하구문으로 신석기 후기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다. 또 갑골의 전통은 부여(扶餘), 마한(馬漢), 변한(弁韓) 등에서도 나타났다.

 

이렇게 갑골이 넓게 분포되어 나타나고 있는 지역은 이들을 사용한 종족의 동질성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즉 같은 동이족임을 말 해 주는 것이다.

 

또 갑골에 문자(文字)가 새겨진 은(殷)나라 갑골문(甲骨文: 뼈에 새긴 문자)이 한자(漢字)의 기원으로 보고 있는데 갑골문의 근원은 대문구문화의 토기에 새겨진 그림문자까지 소급되고, 최근 용산문화에서도 문자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한자의 형성은 대문구문화 토기의 그림문자→용산문화 문자→은나라 갑골문자→한자 순으로 발전하면서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자가 생겨나는 데에는 동이족이 주역을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치우(蚩尤)는 우리의 조상

환단고기(桓檀古記) 삼성기전(三聖紀全) 상편(上篇)에 「신시(神市: 倍達) 말기에 치우천왕이 있어 청구(靑丘)를 개척하여 넓혔다. 치우천왕은 14세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을 가리킨다」고 하였고,

 

하편(下篇)에는 「또 몇 대를 지나 자오지환웅이 나셨는데---- 천하가 모두 그를 크게 두려워 하였다. 세상에서는 그를 치우천왕이라 불렀는데 치우란 속말로 ‘우뢰와 비가 와서 산과 강을 크게 바꾼다’는 뜻이다. 또 그는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겨서 재위 109년에 151세까지 살았다」하여 치우가 동이족 사람이고 신시(神市: 倍達)의 14세 자오지환웅임을 말하고 있다.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자(慈)’다음(次)’란 뜻이고 ‘오(烏)’삼족오(三足烏)를 말하고, ‘지’는 ‘’로 변하기 전의 소리로 ‘이끄는 사람’이란 뜻이라 한다. 그러니까 자오지는 “다음의 해 즉 해의 아들로 민족을 이끄는 사람’이란 뜻이다.

 

치우’란 말은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이 있어‘치우다’의 어원이라는 주장도 있다. 치우가 후세에‘전쟁(戰爭)의 신(神)’,‘군신(軍神)’으로 받들어지면서 ‘전쟁을 통해 세상을 바꾼다’는 의미도 된다.

 

우리 조상들은 달의 신(月神)의 상징물은 두꺼비로 삼았고, 태양의 신(日神)의 상징물은 세 발 달린 까마귀 즉 삼족오(三足烏)로 삼아 왔다.

 

고구려 유적 집안의 오회분 4호묘의 벽화 그림에 달의 신을 상징하는 두꺼비와 함께 해의 신을 상징하는 삼족오가 들어있고,

 

조선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에 훈록된 연성군(延城君) 이곤(李坤)의 묘비(판교에 있음) 상부에 역시 삼족오가 들어 있다.

 

「삼한관경본기」에 따르면 치우“그대 헌구(헌원을 말함)야 잘 듣거라. ‘해의 아들’이라 함은 짐 한 사람 뿐이다하고 황제헌원에게 자기가 ‘해의 아들’임을 주장한다. 이는 우리 민족이 태양의 신을 섬겨 온 것과 맥을 같이 하며 자오지환웅의 ‘오(烏)’자의 의미와도 통하는 말이다.

 

삼족오(三足烏)

 

 

 

 

 

 

 

 

 

 

 

 

 


해의신(일신)이며 또한 자오지환웅인 치우 상징물

 

 고구려 고분 집안오희4호묘 벽화

                                            

 

 

 

 

 

 

 

 

 

 

 

 

 

 

 

 

 

 

 

달의신(月神) 상징 두꺼비

 

 정국공신 연성군 이곤의 묘비 상부

      

해의신(日神) 상징 삼족오(오른쪽)

 묘비 상부 중앙에 해의신의 상징물 삼족오가 조각되어있다.

 

치우‘신시(배달국) 14세 자오지환웅으로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겨서 재위 109년에 151세까지 살았다’는 기록과 관련하여 예로부터 우리 겨레를 지칭하는 호칭에도 ‘청구(靑丘)’와 ‘오륜상처(烏輪上處)’도 있다

 

우리 겨레의 호칭

유형

   

 

(단 계)

檀國(단국),  檀邦(단방),  震檀(진단),  神檀(신단)

 

(진 계)

震域(진역),  震方(진방),  震檀(진단),  震旦(진단), 東震(동진),  摩震(마진)

 

(기 계)

箕邦(기방),  箕域(기역),  箕甸(기전),  箕封(기봉), 箕城(기역),  箕子之封(기자지봉),   檀箕之邦(단기지봉)

 

(상 계)

扶桑(부상),   桑(부상),  搏桑(박상),  空桑(공상), 桑域(상역),  桑野(상야), 桑木之區(상목지구),  桑暾(상돈

 

(일 계)

日域(일역), 日邦(일방),  日出之邦(일출지방),  出日之邦(출일지방), 日出之分(일출지분),

日本(일본), 日處(일처), 日邊(일변),  日下(일하),  日宅(일택),  日出墟(일출허),

日君(일군), 日+易 谷(역곡),  烏輪上處(오륜상처)

 

(해 계)

滄海(창해),  遼海(요해),  海國(해국),  海甸(해전), 海嶠(해교), 海表(해표), 海東(해동),

東海(동해), 海左(해좌), 左海(좌해),  海北(해북),  海畔(해반),  海隅(해우)

 

(청 계)

靑丘(청구),  靑邱(청구),  靑域(청역),  靑土(청토), 靑 (청요),  靑社(청사),  靑陸(청륙), 

靑海(청해), 靑藩(청번),  蒼陸(창륙)

 

(동 계)

東國(동국),  東邦(동방),  東域(동역),  東土(동토), 東陸(동륙),  東垠(동은),  東區(동구), 

東요(동요), 大東(대동),  海東(해동),  東海(동해),  東瀛(동영), 東溟(동명),  東方(동방), 

東表(동표),  東隅(동우), 東極(동극),  東邊(동변),  東 (동수),  東濱(동빈), 東韓(동한), 

東 日+施(동이),  東藩(동번)

+葉系

(접 계)

+葉 域(접역),    魚+葉 國(접국),    魚+葉 墟(접허),    魚+葉 海(접해),

+葉 水之鄕(접수지향)

+是系

(제 계)

 魚+是 岑(제잠),    魚+是 壑(제학),    魚+是 海(제해),    魚+是 溟(제명)

 

(오 계)

鰲岫(오수),  鰲封(오봉),  鰲山之路(오산지로)

槿  系)

(근 계

槿花鄕(근화향),  槿原(근원),  槿域(근역),  槿邦(근방)

 

「 한국사 산책 」의 저자 박현 씨는 한배달 특집부록 ‘치우는 살아있다’에 기고한 ‘단군은 치우의 후예’에서

 

「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서 첫 단군인 왕검(王儉)은 한님(桓因: 하늘)의 손자이며, 환웅의 아들로 표현되어 있다. 즉 왕검이 하늘의 후예임을 자처했는데 이는 치우와 공통이다. 최근 발굴되는 단군 유물의 분포에서도 치우계의 그것과 거의 일치한다. 왕검은 바로 치우의 후예로서 치우 이후 동아시아계 기마종족(騎馬民族)을 크게 통일 시켰던 인물이다 」

 

소결론: 치우(蚩尤)는 동이족(東夷族) 구려(九黎)의 임금으로 신시(神市: 倍達, 단군 이전의 우리나라)의 14대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이며, 단군왕검은 치우의 후예이다. 따라서 치우 또한 우리겨레의 조상이다.

 

치우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치우의 형상에 관해서는 중국측 기록에 많이 등장하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사람의 형상과는 거리가 멀다. ‘동두철액(銅頭鐵額: 구리 머리와 쇠 이마), 인신우수(人身牛首: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 인신우제(人身牛蹄: 사람의 몸에 소의 발), 사목육수(四目六手: 눈이 4개, 손이 6개)이고, 돌과 모래와 쇠 가루를 먹으면서 인간의 말을 하고, 머리에 두개의 뿔, 귀 옆에 칼날 같은 빳빳한 털, 입으로 안개를 뿜는 재주’ 등이다.

 

이러한 치우의 형상에 관한 범상(凡常)하지 않는 중국측 기록들이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치우상(蚩尤像)도깨비상, 장승 등으로 형상화되고, 불교와 접속하여 사천왕상(四天王像) 으로 등장하게 되는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치우의 능력에 관한 기록 또한 중국측 기록에 많이 등장하는데

치우노산(盧山)의 금(金=鐵)을 캐어 오병(五兵: 다섯 가지 병기-날카로운 세모창, 단단하고 뾰족한 갈대창, 가벼워서 민첩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활과 화살, 시퍼렇게 날이 선 도끼, 견고한 방패)를 만들어 사용하고,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어 군사들에게 입혔다’는 등의 기록은 치우가 청동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들어서는 시기에 다른 어느 족속보다 먼저 철기를 개발하여 사용하였다는 것을 말 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외 치우에 관한 중국측 기록으로 들어 보면

- 모든 제후들은 헌원에게 복종하였으나 다만 치우 만은 가장 포악하였으므로 헌원도 그를 토벌 할 수가 없었다.

- 탁록전쟁의 초기 전투에서 황제는 치우와 아홉 차례를 겨루어 모두 패하였다. 치우는 풍백(風伯) 우사(雨師)를 청하여 큰 바람과 비를 일으켰다. 한번은 원야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치우가 갑자기 마법을 부렸다. 콧구멍으로 안개를 온 천지에 내 뿜어 황제의 군대를 포위하였다

- 황제(黃帝)가 치우를 무척 두려워하여 도읍을 옮겨 왕래하며 지냈고, 항상 한 곳에 거처하지 못하고, 군사들로서 숙위(보초)를 서게 하였다.

- 치우를 죽일 때 다시 살아날까 두려워 시체를 둘로 나누어 묻었기 때문에 치우의 무덤이 동평군 수장현 감향성과 산양군(山陽郡) 거야현(鉅野縣) 두 곳에 있다.

- 중국의 창조신화에 나오는 치우가 ‘힘이 센 사람’이었음을 말해 주는 이야기가 있다.

「황하 중류에 사는 강족(羌族)의 두령 공공(共工)이 걸핏하면 홍수를 일으켜 하류에 살고 있는 치우와 이족(夷族)을 괴롭혔다. 이에 치우가 화가 나서 공공을 붙잡아 실컷 두들겨 패 주었다. 공공은 치우에게 얻어맞은 분풀이로 부주산(不周山)을 머리로 들이 받아 하늘을 받히는 네 개의 기둥 중에 하나를 부러 뜨려 중국 땅이 서쪽은 높고 동쪽은 낮게 기울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국 기록들은 치우는 날래고, 용맹하고, 청동과 철을 캐어 다섯 가지 병기를 만들어 잘 다루었지만 교만하고, 포악하고, 무도한 군주였다고 설명하는 반면 황제헌원은 덕(德)으로 천하의 백성을 교화(敎化)시켜 황제의 부족(部族)은 물론 염제의 부족들 까지도 시조로 받들어졌다. 그래서 중국 민족은 황제의 자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치우의 능력에 관한 한국측 기록으로 규원사화에는

- 치우는 병기를 만들었는데 칼(刀), 창(戟: 끝이 좌우로 가라진 창, 미륵창), 큰 활(大弓), 큰 도끼(臣斧),긴 창(長槍)의 다섯 가지였다.

- 치우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을 만들었다

- 치우는 사나운 짐승과 독한 벌레를 다스리는 일을 맡았다.

- 조선시대 힘 센 장사를 지위(智爲)라 하였는데 이는 ‘치우’가 와전된 것이다.

- 황제는 치우를 죽이지 못한 탓으로 평생 베개 한번 높이 베고 눕지를 못했다 한다. 등이다.

 

「 환단고기(桓檀古記)」태백일사 신시본기(太白逸史 神市本紀)에

「 치우천왕이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고 싸움을 독려하였다.----치우천왕은  만고의 무신용강(武神勇强)의 조상으로서 큰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부리며 또 만세의 도술(道術)의 근본이 되어 바람과 비를 불러 일으키고 만신(萬神)을 부렸다.」고 하였다.

 

한배달사무국장 조옥구씨는 한배달 특집부록 ‘치우는 살아있다’에 기고한 ‘천하장사 씨름꾼에게 황소를 상으로 주는 까닭’에서 치우와 관련된 중국측 자료 「管子, 五行篇」,「路史, 后紀四 蚩尤傳」,「韓非子, 十過」,「尙書, 呂刑」,「國語, 楚語」,「述異記」,「太平御覽」,「龍魚河圖」,「帝王世紀」,「逸周書 」,「大載禮, 五帝德」,「山海經, 大荒南經」,「呂氏春秋」,「皇覽, 塚墓記」를 토대로 치우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치우는 구려(九黎)의 천자로서 중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역으로 알려진 회대(淮岱) 지역에 터를 잡았다. 일찍이 청동과 철을 이용하여 갑옷과 투구를 만들어 썼다. 기록에 비친 치우의 모습은 동두철액(銅頭鐵額: 구리 머리와 쇠 이마), 인신우수(人身牛首: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 인신우제(人身牛蹄: 사람의 몸에 소의 발), 사목육수(四目六手: 눈이 4개 손이 6개), 머리에 뿔이 있고---등으로 가히 정상적인 사람의 모습으로 볼 수 없도록 과장하고 있는데 이는 중무장을 하고 전장에 나선 치우장군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이 모습만 보아도 적들은 기가 질려 겁을 먹게 되었다고 전한다 」

 

육군본부 발간 「국군의 맥」에서 ‘최초로 갑옷과 투구를 만든 군신(軍神) 치우’에서

「그런데 환웅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치우(蚩尤), 고시(高矢), 신지(神誌), 주인(朱因) 등 여러 인물들을 시켜 군사, 농사, 문자, 결혼 등 여러 행정을 맡게 하였다. 군사를 맡은 치우는 창, 칼, 활, 도끼 등의 무기를 만들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특히 치우가 만든 활은 중국을 비롯한 이웃 민족이 두려워 하는 바 되어 우리 민족을 동이(東夷)라 부르게 만들었다.---그래서 우리는 치우를 용감하고 굳센 장군의 대명사로 알게 되었고 또 오래도록 군신(軍神)으로 모시게 되었다.」

 

(제2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