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蚩尤) 이야기(2)

2003. 4.  . 沙月 李    永 엮음

2부 순 서

황제헌원과 치우와의 전쟁

중국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치우

우리 민족의 얼 속에 살아 있는 치우

중국 탁록 중화삼조당 치우상의 의미

결언

                             첨부:1. 치우에 관한 기록 모음

                                 2. 한, 중국사 연표 도해

 

● 황제헌원과 치우와의 전쟁

중국 사마천의 「 사기(史記) 」권1 오제본기(五帝本紀)에 치우천왕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신농씨(神農氏)의 나라가 쇠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툴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사납게 짓밟았으나 신농씨는 이를 휘어 잡지 못하였다. 이때 헌원(軒轅)이 무력으로 제후를 치니 모두 와서 복종하였다.

(원문) 神農世衰 諸侯相侵伐 暴虐百姓 而神農氏弗能征 於是軒轅乃習用干戈 以征不亭 諸侯咸來賓從

 

그러나 치우(蚩尤)가 가장 사나워 칠 수가 없었다. 염제(炎帝: 神農)는 제후들을 쳐서 복종시키려 하였으나 이 들은 모두 헌원에게로 돌아갔다.

(원문) 而蚩尤最爲暴 莫能伐 炎帝欲侵陵諸侯 諸侯咸歸軒轅

 

헌원은 이에 덕으로 다스려 병사들의 전력을 떨쳤으며 오기(五氣: 다섯 천기, 雨,陽, 暑, 寒, 風)를 다스리고, 오곡(五穀: 다섯 가지 곡식, 쌀, 수수, 보리, 조, 콩)을 심게하여 백성을 어루만졌다-----

(원문) 軒轅乃脩德振兵 治五氣 治五種 藝五種 撫萬民 度西方----

 

판천(阪泉) 들에서 염제와 세 번 싸운 후에야 이길 수 있었다. 이 때 치우가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키므로 헌원은 여러 제후들을 불러모아 탁록(涿鹿)의 들에서 치우와 싸웠다. 드디어 치우를 사로잡아 죽이고 제후들이 헌원을 높이므로 신농씨를 대신하여 천자가 되었다.

(원문) 以與炎帝戰於阪泉之野 三戰然後得其志 蚩尤作亂 不用帝命 於是黃帝乃徵師諸侯 與蚩尤戰於涿鹿之野 遂禽殺蚩尤 而諸侯咸軒轅爲天子 代神農氏

 

그러나 우리측 기록은 이와 전혀 다르다.

환단고기(桓檀古記)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는 다르게 쓰고 있다.

 

공상(空桑)전쟁

(시대적 배경) 복희(伏犧)가 다스리던 나라가 그의 여동생 여와(女媧)가 다스리다가 소전(小典)의 아들 신농(神農)가 다스려 왔는데 유망(楡罔: 신농의 6세손)에 이르러 정치를 어지럽게 하여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많아 백성들이 흩어지는 등 혼란하였다. 이 때 서쪽에 있던 동이겨레의 헌원(軒轅: 黃帝)이 서쪽 토착민의 우두머리가 되어 동쪽으로 진출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치우의 전쟁준비) 치우도 유망을 토벌하여 서쪽 땅을 안정시키기로 하였다. 치우는 잘못된 제도를 개혁하여 하늘을 받들며 삶을 알게 하고, 땅을 일궈 사는 법을 알게 하는 등 내치부터 튼튼히 하여 병사를 양성하여 용맹스럽게 키우고, 밖으로는 정세의 변화를 살피다가 유망의 정치가 쇠약해지자 드디어 군사를 출정시키기에 이르렀다.

 

치우는 형제 친척 중에서 81인 뽑아 장수를 삼아 군사를 나누어 지휘하게 하고, 이들을 데리고 갈로산(葛盧山: 지금의 葛石山 부근)에 들어가 광석을 캐어 청동으로 칼, 투구, 창, 그리고 화살촉을 만들었다.

(탁록 전투) 치우의 군대는 청동제 무기로 무장하고 일제히 탁록부터 공격하여 승리하니 그 기세가 질풍과 같았다고 한다. 이 전쟁에서  한 해 동안에 아홉 제후의 땅을 평정하였다.

(공상 전투) 치우의 군대는 다시 옹호산(雍狐山)에 들어가 수금(水金)과 석금(石金)을 캐어 아홉 개의 야금소를 설치하고 거기에서 예과(芮戈:예리한 병기)와 옹호극(雍狐戟:)을 만들어 무장을 강화하고 군대를 새롭게 정비하였다.

 

치우는 군대를 이끌고 유망을 토벌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진군하여 양수(洋水)를 거쳐 유망이 도읍하고 있는 공상(空桑: 현 중국 하남성 陳留)으로 물밀 듯 쳐들어갔다. 이 때 유망은 소호(小昊)를 시켜 항전하였으나 치우는 예과와 옹호극을 휘두르며 크게 싸워 이기니 소호는 항복하고, 유망은 도망하였다.

 

이 해에 치우는 열 두 제후의 나라를 굴복시켜 합병하였다. 이 때 죽은 시체가 들에 가득하였으며 서토(西土) 사람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도망가 숨지 않는 자가 없었다.

 

탁록(涿鹿)전쟁

공상전투에서 승리한 치우는 하늘에 제사 지내고 천하가 태평하게 하기를 맹세하고 다시 군사를 진격 시켜 탁록으로 향하였다. 이 때 헌원(軒轅)은 치우가 공상에 입성하여 새로운 정치를 편다는 말을 듣고 자기도 천자(天子)가 되겠다는 뜻을 품고 (탁록에서)크게 군사를 일으켜 대항하려 하였다.

 

치우는 공상전투에서 항복한 소호를 보내어 탁록을 포위하고 쳐들어가게 하였다. 그러나 헌원은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려 하였다. 이에 치우는 친히 전쟁에 나서기로 하고 구군(九軍)에 동원령을 내렸다. 구군 중 8군은 2군씩 나누어 4방향으로 포위, 진격하게 하고 천왕은 나머지 1군(보병과 기병 3천)을 직접 거느리고 헌원의 진 중앙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치우 군대는 헌원을 향하여 사방에서 조여 들어 갔으나 굴복하지 않자 크게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하고 싸움을 독려하였다. 이에 적군은 두려움에 떨며 목숨을 걸고 도망치니 백리 사이에 병마를 볼 수 없었다.이렇게 하여 기주(冀州), 연주(兗州), 회대(淮岱)의 땅이 모두 평정되어 탁록에는 성을 쌓고, 회대에는 집을 짓자 헌원의 족속들이 모두 신하라 하며 공물을 바쳤다.

 

치우가 군대의 진용을 정비하여 사면으로 진격한 지 10년 동안 헌원과 싸운 것이 73회나 되었다. 그런데도 장수들은 피로한 기색이 없고 군사들은 뒤로 물러설 줄을 몰랐다.

 

그러나 헌원이 여러 차례 싸워 치우에게 패하고도 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키고 치우를 본받아 병기와 갑옷을 만들고 지남거(指南車)를 만들어 감히 백번이고 싸움을 걸어왔다.

 

치우가 불같이 노하여 장수들에게 크게 싸워 위력을 보이도록 하였다. 치우의 군사는 헌원이 다시는 싸울 마음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한 판 큰 싸움을 벌려 한 개의 진을 완전히 초토화 하였다. 이 때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를 처음 사용하였는데 이 무기로 진을 이루고 진격하니 헌원의 군대는 끝내 저항하지 못하였다.

이 후에야 싸움이 그쳤다.

 

전쟁에 패한 헌원은 치우를 뵈러 가는 길에 당시 명성이 높았던 자부선인(紫府仙人)을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였다. 이는 치우의 영걸스럽고 불가사의한 전법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 였다.

 

자부선인은 헌원에게 「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을 주면서 공연히 싸움을 좋아하지 말고 마음을 고쳐 먹으라 고 가르쳤다.

 

삼황내문경은 예로부터 내려오던 동이겨레의 심신수련(心身修鍊)으로 치신득도(治

身得道)하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동이겨레 고유의 사상과 철학과 종교에 관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경전이었다.

 

헌원은 이를 자부선인으로부터 배우고 익혀서 서토(西土) 사람들에게 전하였는데 이것이 동이 문명이 처음으로 서토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된 계기인 것이다.

 

「한비자(韓非子)」 십과편(十過篇), 「태평어람(太平御覽)」,「노사(路史)」의 치우전(蚩尤傳), 「술이기(述異記)」, 「서경(書經)」의 여형편(呂刑篇), 「통전(通典)」의 악전(樂典) 등을 참조하여 엮었다는 「중국고대신화」는 황제헌원과 치우와의 탁록전쟁 전투과정을 실감나게 묘사하면서 소설화 하여 설명하고 있다.

 

황제시대에 일대 변란이 일어났으니 바로 황제와 치우와의 전쟁이다. 치우는 본래 염제(炎帝)의 후예로 염제와 황제가 탁록 벌판에서 전쟁을 벌릴 때 염제와 함께 참여하였다. 염제는 그 전쟁에서 패하여 남방으로 쫓겨났고, 치우는 포로가 되어 황제의 신하가 되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황제는 천하의 모든 신들을 태산(泰山: 산동에 있음)에 불러 모았다. 그 때 황제는 코끼리가 끄는 수례(寶車) 위에 앉고, 외 다리 필방조(畢方鳥)가 황제의 시중을 들고, 여섯 마리 교룡(蛟龍)이 수레 양측을 호위하고, 봉황(鳳凰)이 춤을 추고, 날개 달린 등사(騰蛇)가 땅에 엎드리고, 천신 풍백(風伯)과 우사(雨師)가 황제가 탄 수레가 지나갈 길을 청소하듯 가랑비를 뿌리고, 각양각색의 신들이 황제가 탄 수레 뒤에 행렬을 이루며 따르고 있어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더욱 볼만한 것은 이번 전쟁에서 포로가 된 치우를 대오의 맨 앞에 내세워 길을 뚫게 한 것이었다.

 

염제의 후예인 치우는 본디 남방 거인 부족의 수령으로 그의 형제는 모두 81인이나 되는 데 모두 하나같이 키가 여러 장(丈)이 되고, 불사신처럼 용맹스러웠다. 또 그들의 머리에는 두 개의 견고한 뿔이 나 있으며, 귀 밑 털은 마차 칼 날처럼 빳빳이 서 있고 눈이 네 개나 되며, 손이 여섯 개나 되고, 발은 마치 소의 발처럼 생겼다. 치우의 형제들은 생김새가 괴이할 뿐만 아니라 모래와 쇳덩이, 바위 등을 먹었다.

 

또 그들은 무기를 제조하는 능력이 탁월하여 예리한 창(矛), 날카로운 미늘창(戟), 거대한 도끼(斧), 견고한 방패(盾), 날렵한 활과 화살 등을 만들었다. 이 외에도 그들은 초인적인 신통력을 지니고 있었다.

 

황제는 태산 서쪽에 천하의 모든 신들을 모아 놓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포로가 된 치우로 하여금 길을 내게 하였다. 황제는 자신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그렇게 했지만 실패를 모르는 불굴의 치우는 마음 속 깊이 수치스러움과 심한 모욕감을 느껴 몹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면서도 황제는 혹시 치우가 자기를 배반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풍백과 우사에게 치우의 행동을 감시하라 시켰기 때문에 그들은 치우를 따라 다니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셋은 진정 마음을 터 놓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풍백과 우사의 도움으로 치우는 탈출구를 찾아 내서 쏜 살같이 남방으로 도망쳤다.

 

치우가 남방으로 도망쳐 염제를 만나 황제의 힘이 별 것 아니므로 다시 군사를 일으켜 황제를 쳐서 복수를 하자고 부추겼으나 염제는 노쇠하여 그냥 남방의 천제로 남아 있기를 바랬다.

 

치우는 염제의 나약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고 자신이 직접 거사할 것을 결심하고 7, 80명으로 형제들을 동원하였다. 치우는 남방 묘민(苗民)을 동원 하였다. 묘민은 본시 황제의 족속이었으나 황제가 자기들을 업신여기고 차별대우 하는데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를 무너뜨리려는 치우의 계획을 찬동하였다.

 

이 외에 남방의 산림과 소택지에 사는 괴물과 잡귀, 황제의 가혹한 통치에 반감을 품고 있던 인간세계에 횡행하는 온갖 귀신을 다스리는 신도(神茶)와 울루(鬱壘)도 치우가 황제를 치는 대열에 가담하였다.

 

치우는 염제의 명호를 빌어 ‘염제(炎帝)’라 칭하고 대군을 거느리고 남방을 출발하여 북쪽으로 진군하였다.

 

황제는 곤륜산 궁원(宮園)에서 치우가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놀랐다. 황제는 처음 도덕과 인의로서 치우를 감화시키려 하였으나 치우가 워낙 완강하여 감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무력으로 맞서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전쟁은 치열하였다. 치우의 군대는 구리머리에 쇠이마(銅頭鐵額)를 한 81인의 용맹스러운 형제들을 비롯하여 용감하고 전투를 잘하는 묘민(苗民)이 합세하였다.

 

황제의 편에는 천녀(天女) 발(魃)과 응룡(應龍), 사방의 신들과 요괴들, 또 큰 봄, 작은 곰, 크고 작은 호랑이, 여우, 승냥이 등 맹수들을 동원하였다. 그들이 주로 싸운 곳은 탁록(涿鹿)인데 그 곳은 예전에 염제가 황제에게 패한 곳이기도 하다.

탁록전쟁에 등장하는 주역들(치우편)

치우                             풍백                          우사

 

 

 

 

 

 

 

 

 

 

 

 


탁록전쟁에 등장하는 주역들(황제편)

신도와 울루                       응룡                          등사

 

 

 

 

 

 

 

 

 

 


양쪽 군대의 전투가 벌어지자 과연 치우 군대는 용맹스러움을 당해 낼 자가 없었다. 비록 황제의 용감무쌍한 야수들, 사방의 신들과 요괴들, 인간 세계의 여러 족속들이 있었지만 치우의 적수가 아니었다.

 

황제는 연전 연패하여 전황은 황제가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한번은 원야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치우가 갑자기 마법을 부렸다. 콧구멍으로 안개를 온 천지에 내 뿜어 황제의 군대를 포위하였다.

 

황제의 군대는 사방을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안개 속에서 구리머리 쇠 이마에다 뿔이 돋은 치우들은 매서운 공격을 퍼부었다. 그들은 짙은 안개 속에서도 신출귀몰하듯 나타났다 사라지면서 닥치는 대로 황제의 군사들을 찍어 죽여서 황제의 군대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갔다.

 

황제는 전거위에서 보검을 빼어 들고 “포위를 뚫고 앞으로!”를 외쳤지만 황제군대는 짙은 안개 속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안개는 온 천지를 뒤덮은 흰 장막과도 같았다. 황제의 군대는 이 장막 안에 갇혀버린 것이다.

이 어려운 때에 황제 진영에 풍후(風后)라는 신하가 북두칠성의 자루가 계절에 관계없이 한 방향을 가리키는 원리를 생각하며 궁리한 끝에 ‘지남거(指南車)’를 고안하여 황제에게 바쳤다. 지남거의 앞에는 쇠붙이로 만든 작은 신선(神仙)을 붙였는데 이 신선의 손가락은 항상 정남향을 가리키도록 되어 있었다. 황제는 이 지남거에 의존하여 비로소 군대를 이끌고 무사히 치우의 포위망을 뚫고 나올 수가 있었다.

지남거(指南車) 모형

 

 

 

 

 

 

 

 

 

 

 

 

 


중국 오제사에 보관된 탁록전쟁 복원도

 

 

 

 

 

 

 

 

 

 

 

 


왼쪽이 황제헌원군, 오른쪽이 치우군이다. 황제군은 용맹스럽게, 치우군은 원시적이고 볼 품 없게 그리고, 치우군이 밀리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조선 숙종1년(1675)에 북애노인(北厓老人)의 「규원사화(揆園史話)」에는 치우가 단군왕검의 고조선 보다 300여년 앞선 신시(神市)시대의 우리 조상이었다고 기록하고, 치우가 포악한 야만인으로 기록한 중국의 기록과 이를 그대로 믿는 사람들의 주장을 통렬히 반박하고 있다. 규원사화 태시기(太始記)에 황제헌원과 치우와의 싸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치우는 황하 북쪽에 살면서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을 관망하다가 황하유역을 차지 했던 염제 유망씨(楡罔氏)가 무도해서 제후들이 배반하고 민심이 떠나자 씨족 내 장수 81명과 병사를 이끌고 직접 출전하여 유망의 본거지인 공상을 쳐서 1년 만에 12제후국을 얻고 이 곳에서 황제(皇帝)의 자리에 올랐다.

유망이 패주하고 치우가 황제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황제헌원이 난을 일으키니 치우와 탁록에서 일전을 벌리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치우는 대승하여 지금의 희수 유역, 산동, 북경, 낙양을 모두 차지하였으며 황제헌원은 그 후 10여년간에 70여 회나 치우에게 도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또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황제헌원이 치우를 잡아서 죽였다고 한 기록에 대하여

‘치우의 한 부장이 공을 탐 내 무리하게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잡혀서 죽은 것을 마치 치우가 잡혀 죽은 것으로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 세종 때 수양대군이 총재관(總裁官)이 되고, 정인지, 사육신 4명 등 집현전 학자 19명이 참여하여 편찬한 전사집(戰史集) 「역대병요(歷代兵要)」의 맨 처음에 ‘황제가 치우를 정벌함’이라는 제목으로 탁록전쟁 경과와 결과가 나오는데 중국측 기록에 따라 쓰고 있다.

 

   황제(黃帝)가 치우(蚩尤)를 정벌함.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발간 역대병요 제1권)

여묘족(黎苗族)의 수령 치우(蚩尤)는 전쟁을 좋아하였다. 칼과 창, 큰 활을 만들어 천하에 포악스러움을 끼치고 다른 부족을 병탄하였는데, 그 탐욕스러움이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염제유망(炎帝楡罔)은 이를 저지할 능력이 없었다. 이에 염제는 그를 황제의 아들 소호(少昊)가 있는 지역에 거주 시켜 서부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치우는 날이 갈수록 악행을 마음대로 자행하여 공상산(空桑山)에서 염제유망을 공격하였다. 치우의 공략에 견디다 못한 유망은 제위를 사양하고 탁록산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이에, 황제 공손헌원(公孫軒轅)은 하족 부락의 병력을 소집하여 탁록 평원에서 치우군과 싸웠다. 치우는 풍운 조화를 부려 짙은 안개를 일으켜 헌원군을 공격하였다. 군사들은 길을 잃고 헤맸으나 헌원이 미리 만들어 두었던 지남거(指南車)를 이용하여 사면의 방위를 찾아 대오를 정돈하고 포위를 벗어났으며, 마침내 여묘족을 격파하여 궤멸시키는 한편, 여묘족의 수령 치우를 사로잡아 중기(中冀)에서 처형하였다.

 

역대병요 전사를 쓴 사람들은 공자의 가르침 즉 유학(儒學)에 심취한  유학자(儒學者)들로서 공자가 쓴 역사서 춘추(春秋)에 ‘황제는 덕으로서 백성을 다스린 성군’이고, ‘치우는 포악 무도하고 전쟁을 좋아한 인물’이라는 기록에 따라 중국측 기록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다.

 

한국문자학회 부회장 김대성씨는 한배달 특집 부록 ‘치우는 살아있다’에 기고한 ‘우리의 웃음’이란 글에서 ‘중국의 과거 기록들이 탁록전쟁의 결과에 대하여 황제의 승리라고 기록되어 있고 현 중국의 학계는 황제와 치우시대를 ‘신화전설의 시대’로 단정하는 것이 정설인데 이를 뒤엎고 이 시대를 <역사실재시대>라 주장하며 이를 증명해 보이려 했던 중국인 학자 낙빈기(駱賓基: 1917-1994)의 저서「금문신고(金文新攷)」 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국의 과거 기록이나 지금 학자들의 주장처럼 황제가 치우를 이긴 것 같지 않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 낙빈기의 금문신고의‘(신농, 황제, 치우 간의 복잡한 인척관계 생략) BC2517년 신농이 지금의 산동성 곡부에서 나라를 세우고 43년간 통치하다가 말년에 사위인 황제와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전쟁을 하는데 황제에게 패하여 임금자리를 외손자이자 황제의 아들인 소호김천(少昊金天: 신농의 또 다른 사위이기도 함)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지금의 호남성 쪽으로 내려가 살게 된다. 여기서 문제는 황제는 한 번도 임금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임금자리는 황제의 아들이며 신농의 외손자 겸 사위인 소호김천-신농의 손자 전욱고양(顓頊高陽)-소호김천의 손자 제곡고신(帝嚳高辛)으로 이어지는데 이 기간동안 각종 중국의 기록에는 황제에 관한 기록은 꼬리를 감추고 대신 신농의 손자 전욱고양이 할아버지 신농을 위하여 아들 축융을 호남의 제후로 봉하여 할아버지 신농을 돕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중국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치우(蚩尤)

중국 사람들은 그들의 많은 역사서들은 치우‘포악 무도한 구려족의 군장’으로 기록하고, 동두철액(銅頭鐵額)이니, 돌과 모래와 쇠 가루를 먹으면서 인간의 말을 하고, 머리에 두개의 뿔, 귀 옆에 칼날 같은 빳빳한 털, 소의 발,  눈이 네 개, 손이 여덟 개, 발이 여덟 개, 입으로 안개를 뿜는 재주를 가졌다는 등  정상적인 인간이 아닌 도깨비 형상으로 비하하여 기록하면서 치우를 그들의 조상 황제를 받들고 미화하는데 조연격으로 등장시키면서 ‘중국인의 적’으로 생각하며 대체로 부정적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에게도 치우는 군신(軍神)으로서 병사(兵事)와 관련하여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祭祀)를 지내는 대상(神)으로 삼고, 치우기(蚩尤旗) 깃발, 치우기(蚩尤冀) 별 이름, 치우희(蚩尤戱) 또는 각저희(角低戱) 놀이, 붉은 색의 치우혈, 도철(饕餮)의 호족(虎族) 형상 등 긍정적인 면도 있다.

 

또 최근에 중국인들은 치우  자기의 조상이라며 모시는 변화까지 보이고 있다. 중국인들에게 치우가 긍정적인 존재를 남아있는 기록들을 찾아본다.

- 병주(兵主)는 치우를 제사지낸다.(史記의 奉禪書)

- 유방(劉邦)이 풍패(豊沛)에서 군사를 일으킬 때 치우씨에게 제사를 올렸다.(抱朴子)

- 치우총(蚩尤塚)은 산동성 수장현 관향성에 있는데 높이는 7장이다. 사람들은 10월이면 제사를 모시는데 붉은 기운이 비단 필처럼 펼쳐졌다. 세상에서 이름하여 치우기(蚩尤旗)라고 한다.(皇覽의 塚墓記)

- 치우기(蚩尤旗)는 마치 혜성(慧星)과 같은데 뒷부분이 굽어서 마치 깃발과 같다. 이 별이 보이는 곳의 아래는 군사가 있다. 이는 치우천왕을 위로하여 하늘의 별자리로 삼은 것이다.(晉 天文誌)

치우청황의 능은상동성 동평군 수장현 감향성(門+敢 鄕城) 가운데 있다고 하는데 높이가 7척이고 진(秦), 한(漢) 때 주민들이 10월에 여기서 제사를 지냈는데 제사 때는 반드시 붉은 기운이 마치 붉은 깃발 모양 같이 뻗어나와 사람들이 ‘치우기(蚩尤旗)’라 하였다고 한다.(漢書地理誌)(皇覽 塚墓記)

* 감향성 치우총이 있었다는 자리는 소설 수호지(水滸誌)의 주무대 양산박으로 변하여 지금은 치우총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 치우신(蚩尤神)이 있으니 세상에서는 사람의 몸에 소 발굽이라 하고, 4개의 눈에 6개의 손을 가졌다.

 

진나라와 한나라 때 전해지는 말로 치우씨는 귀에 검극(劍戟)을 달고, 머리에 뿔이 있는데 헌원과 싸울 때에 뿔로 사람을 맞닥드리니 사람이 제대로 달려들지 못했다.

 

지금 기주악(冀州樂)에는 치우전(蚩尤戰) 풍속이 있으니 그 곳 사람들은 둘씩 셋씩 소뿔을 쓰고 서로 맞닥드린다.---  한(漢) 때에 만들어진 각저전(角抵戰)은 그 치우전(蚩尤戰) 풍속이 남아서 만들어진 것이다. (述異記)

- 탁록전쟁의 무대가 되었던 기주(冀州)지방에서는 쇠머리를 쓰고 씨름 하는데 이를 치우희(蚩尤戱)라 한다고 하였다. 각저희(角低戱)의 다른 말이다.(中國舞踊史)

* 각저희는 한(漢)나라 때의 이름이고, 치우희는 진(晉)나라 때의 이름이다.

- 송산(宋山)의 붉은 뱀은 그 이름을 육사(育蛇)라고 한다. 그 산 위에는 풍(楓)이라고 하는 나무가 있는데 치우가 잡혀서 묶였다가 수갑과 사슬을 풀고 간 나무이기에 풍(단풍나무)이라 한다.

중국 하북성 탁록현에 있는 치우가 만들었다는 치우채(蚩尤寨)에 느릅나무 신목이 있는데 마을 주민들은 치우목(蚩尤木)이라 부르면서 지금도 당제를 올린다.(山海經 大荒南經)

 

치우채 유적 표지

- 태원(太原)의 촌락에서는 치우에게 제사를 모시는데 소머리를 쓰지 않는다.---한무제 때 태원에 치우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었는데 거북이 다리에 뱀 머리였다.(述異記)

- 해주(解州)에 염택(鹽澤)이 있는데 120리 되는 물이 모두 붉어서 사람들이 치우혈(蚩尤血)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 곳에서 여름과 가을 사이에 부는 큰 바람을 치우풍(蚩尤風)이라 한다.(宋나라 때 沈括이 지은 夢溪筆談 )

- 상대(商代)에서 전승된 치우 또는 도철의 형상을 보면 호족의 형상을 하고 있다.(중국 고대사회-동문선)

- 최근에 와서 중국 사람들이 치우를 중국인의 조상이라는 염황치(炎黃蚩) 삼조문화(三祖文化)가 제창되면서 탁록의 삼조당(三祖堂)에는 황제 신농과 함께 치우 석상(石像)을 만들어 모시고 있다.(상세 후술)

 

우리민족의 얼 속에 살아 있는 치우(蚩尤)

▶ 도깨비상(鬼面像): 민족의 무신(武神) 치우천왕이 눈을 부릅뜨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도깨비상으로 오래 동안 ‘국난을 당할 때마다 어떤 침략자에게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우리 민족의 얼굴’로 여러 곳에 새겨져 전해 왔다. 도깨비상들은 무서운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악의 없이 호탕하게 웃는 모습을 지니고 있어 우리 민족의 근엄하고 강건하고 호탕한 기상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도깨비(치우상)의 유래에 관한 기록

-         (殷)나라 도철(饕餮: 상상의 짐승)→독각기(獨脚夔: 외다리 무서운 짐승, 괴물)→고구려 사신도의(使臣圖: 사신의 얼굴에 도깨비얼굴을 씌움)

-         중국의 설화집 「유양잡조(유양잡조)」의 기록에 도깨비에 관한 이야기는 중국이나 일본이나 간에 모두 신라에서 간 것이다.

-         우리나라 도깨비는 복을 주는 신으로 도깨비가 사람을 해친다는 이야기는 없고 부드럽고 친근하며 왕도깨비는 귀신을 쫓는 벽사신으로 인식되어 온 것은 치우가 황제와 싸울 때 치우부대는 도깨비로, 황제부대는 귀신으로 기록되었는데 치우부대가 황제부대를 제압하고 이긴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         중국 사람들은 신라의 도깨비 방망이 대신 송곳으로 바꾸었다.

-         일본 사람들은 당나라에서 유양잡조를 가져 다가 도깨비 망치를 손잡이가 짧은 망치로 변형치켜 칠복신(七福神)의 하나로 절대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칠복신의 복장이 신라인의 복장(싼타크로스처럼)을 하고 있다.

-         일본에은 화산, 지진, 태풍 등의 재해가 많은 관계로 항시 귀신이 눈 앞에 있는 형국이라 이를 쫓는 도깨비도 신라의 얌전한 도깨비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무소 뿔처럼 뿔을 크게 세우고 험상궂은 얼굴로 바뀌었다.

-         고구려 벽화에 용(龍)과 봉(鳳)도 도깨비 가면을 쓰고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도깨비상을 들어본다.

 

고구려 치우 도깨비상 유물

-         안악 3호 고분에서 출토된 귀면 돌기둥(4세기)

-         안악궁 성터에서 출토된 암키와막새

-         평양 대성구역 안악동 안악궁 성터에서 출토된 귀면판

-         평양 대성구역 청암리성에서 출토된 귀면판

 

          안악3호고분 돌기둥                  안악궁성터 암키와악새

                               

                                    

 

 

 

안악궁 성터 귀면판                       청암리성 귀면판

 

                                

신라 치우 도깨비상 유물

-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되어 경주박물관에 소장된 녹유 귀면와(鬼面瓦)

 

                                   녹유 귀면와

 

 

 

 

 

 

 

 

 

 

 

 

 

 

 


녹유귀면와는 신라 30대 문무왕 15년에 8년 동안 힘겨운 싸움 끝에 이 땅에서 당군을 몰아내고, 3년 후인 서기 679년에 당나라가 다시 넘보지 못하게 해 달라는 염원으로 경주 배반동 낭산 밑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을 때 지붕에 얹은 도깨비상을 새긴 기와이다.

한국문자학회 부회장 김대성씨는 한배달 특집 부록 치우는 살아있다’에 기고한 ‘우리의 웃음’이란 글에서 이 귀면와의 도깨비를

「눈을 부릅뜨고 있다. 입을 활짝 벌려 호호탕탕하게 웃고 있다. 눈썹도 콧구멍도 웃고 있다. 섬뜩하게 무서운 칼날 같은 송곳니와 이도 입과 함께 웃음을 머금고있다. 얼굴 전체가 자신만만한 힘이 넘쳐 있다. 힘은 넘쳐 있지만 해치려는 살기가 없다. 당당하고 흔쾌한 모습이다. 얼굴 주위에 구름모양, 불꽃모양의 무늬를 둘렀다. 그리고 바깥에는 알이 박힌 둥근 원으로 죽 둘러 새겨 놓았다. 알은 태양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리고 태양의 알, 불의 알은 신농계(神農系) 동이족(東夷族)을 의미한다--(중략)-- 도깨비상은 전쟁의 신이자 우리 민족의 수호신인 ‘치우(蚩尤) 장수’」라고 설명하고 있다.

 

조선조 치우 도깨비상 유물

-         창덕궁 교각에 새겨진 귀면상

-         창덕궁 안을 지나는 개울을 건너는 다리 중심부 귀면상

-         육사박물관에 소장된 무장의 투구에 장식된 도깨비상

-         육사박물관에 소장된 쇠도리깨와 쇠몽둥이 손잡이에 새겨진 도깨비상

-         도깨비상 깃발

-         막새기와

 

          창덕궁교각(우)과 다리중심부(좌)에 새겨진 도깨비상

                                

 

                             무장의 투구 장식품에 도깨비상

               

 

        쇠도리깨 손잡이(좌)와 쇠몽둥이 손잡이(우)에 새겨짐 도깨비상

                                        

 

치우기 도깨비상(육사박물관 소장)              막새기와 도깨바상

   

 

현대의 치우 도깨비상

-         한국전쟁기념관(서울 용산 삼각지) 본관 입구 상단에 새겨진 도깨비상

-         축구 응원단 붉은악마의 깃발

전쟁기념관 본관 입구 상단                          붉은악마의 깃발

                                      

                                      

 

 

 

 

 

 

 

 

축구응원단 붉은 악마는 1999년 치우천왕을 공식 캐릭터로 정하고 그 해 3월 29일 한국-브라질 경기가 열린 잠실경기장에 가로 4m, 세로 3m의 대형 깃발로 첫 선을 보였다. 4500여년 만에 깨어난 치우천왕은 세계 최강 브라질을 1:0으로 이기면서 불패의 신화를 보여 주었다. 붉은 악마는 치우천왕에 대해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 축구의 빛나는 승리를 지켜주는 상징’이라고 자랑한다.(2002. 6. 15일자 한겨레)

 

승리를 목표로 하는 축구경기에서 전쟁의 신, 승리의 상징 치우를 캐릭터로 선정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 깊이 내재한 치우의 발로인 것이다.

 

▶ 장승

-         장승의 특징은 ‘왕방울 눈’인데 이는 모든 악귀에게 위협하여 겁을 주고 접근을 막는 액막이 역할을 하는데 치우천황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

지리산 실상사 석장승                                    목장승

    

 

치미(蚩尾)

치미는 궁궐, 능원, 사찰 등 건물의 지붕 위에서 용마루를 지키고 있는 새의 날개처럼 생긴 망새라는 장식물을 흔히 치미라고 부른다. 원래 용(龍)의 아홉 아들 중 불을 제압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이문(虫+离 蚊)인데 언제부터인지 치우(蚩尤)를 말하는 치미라 불러왔다.

                                    치미(蚩尾)

                

 

▶ 둑=독(纛)

이의실록(貳義實錄)에 의하면 둑(纛, 독이라고도 발음함)은 치우 형상을 넣어 만든 깃발인데 마름모꼴의 뿔이 달린 투구 형상을 중심으로 활 모양의 받침대를 그린 것으로 치우를 가리키는 또 하나의 표상이다.

 

둑기를 세워 놓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둑제라 하는데 둑제는 물을 다스리는 신에게 올리는 제사다. 이순신 장군은 상강(霜降)과 경칩(驚蟄)에 물 가에서 둑제를 지냈다.

 

서울의 뚝섬은 원래 둑제를 지내던 둑신사가 있었는데 뚝섬’은 이 둑신사에서 온 이름이다. 둑신사에는 높이 6자 폭 36자의 벽화가 있었는데 치우와 황제와의 싸움 탁록전을 그린 그림이었다.왜정 말기까지 있었으나 분실되었다.

 

둑신사에서 제사를 지내는 둑신이 곧 치우신이고 둑신을 표상하는 둑신기(纛神旗)가 있는데 이 둑신기가 태극기의 원형이다.

둑신기

조지용 저「三神民考(삼신민고)」에 실린 둑신기. 저자는 이 둑신기를 안곽(安郭)의 ‘황제전쟁의 전설 벽화’에서 얻었다고 기록하고있으며 치우천황을 모신 사당인 둑신사에 그려진 것으로 이 둑신기가 태극기의 원형이라고 말하고 있다.

 

‘논둑’, ‘밭둑’의 어원이 이 둑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치우’라는 말이 산림과 하천을 관리한다는 말로도 통하고, 둑기에 치우가 그려진 것은 을 만든 주인공이 치우임을 말하는 것이다.

 

독(纛)’자에 ‘독(毒)’자가 들어 간 것은 두꺼비가 독을 품고 있어 자가 방어를 한다는 뜻이 되며 독(纛) 두꺼비를 말하면서 치우를 가리키는 글자이다.

 

튼튼한 몸에 씩씩한 기상이 있는 사람을 ‘뚝심이 있다’고 표현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때‘독하다’고 말하는 것 등은 모두 치우를 말하는 또는 둑 (纛)에서 유래된 말이다.

 

중국측 기록에 황제는 탁록전쟁이 끝난 후에도 시국이 안정되지 않자 치우의 형상을 그려서 천하를 평정하였다 하고, 중국의 천자가 직접 이끄는 친정대에 이 둑기(纛旗)를 걸었다고 한다.

 

▶ 민속에 남아있는 치우

-         음력 5월 5일 단오날에 문설주에 붙이는 단오부적

우리나라 세시 풍속에 5월 단오날에 각 가정에서는 불길한 것을 제거하는 뜻으로 주사(朱砂) 로 벽사문(僻邪文)을 지어 문설주에 붙이는데 이것을 단오부적이라 한다. 조정에서도 관상감에서 해마다 단오부적을 만들어 대궐 안 문설주에 붙여 불길한 재액을 막는다. 부적으로 지은 글에 치우가 들어있다.

 

五月五日 天中之節 上得天祿 下得之福 蚩尤之神 銅頭鐵額 赤口赤舌 四百四病 一時消滅 急急如律令

(오월오일 천중지절 상득천록 하득지복 치우지신 동두철액 적구적설 사백사병 일시소멸 급급여율령)

 

5월오일 천중절(단오날)에 위로는 하늘의 녹을 받고 아래로는 땅의 복을 얻어 치우신의 구리머리 쇠 이마 붉은 입 붉은 혀로 사백 네 가지 병 일시에 없애라. 빨리빨리 법 데로 시행하라

-         둑신사의 치우부적

단오 치우부적(왼쪽)과 둑신사 치우부적(오른쪽)

「동국세기」에 ‘5월 5일 적두적설의 부적으로 백병(百病)을 쫓는다’고 기록되었다 함.

 

▶ 두무(兜 務아래)=투구

두껍의 고대어가 두무인데 오늘날의 투구를 말한다. ‘인두껍’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아주 황당한 사람 이하의 일을 할 때 ‘사람이 인두껍을 쓰고 어찌 그럴 수 있나’라고 한다.

 

두무 또는 두껍은 중국 역사가들이 치우구리머리 쇠이마(銅頭鐵額)’라고 기록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또 치우 군사는 갑옷도 만들어 입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두무의 ‘두(兜)’와 갑옷의 ‘갑(甲)’이 합하여 ‘두갑’이 되고, 변음하여 ‘두껍’, ‘두꺼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임신한 여자에게 덕담으로‘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라’고 하는데 ‘떡’은 ‘뚝’이 변한 것이고, 뚝은 ‘둑(纛)’으로 치우를 말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민족은 은연중에 치우를 남자의 표상으로 흠모하면서 ‘치우 같은 아들을 낳아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병사가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모양이나, 투구 쓰고 갑옷 입으니 자연 걸음이 느릿느릿 한 것이 두끼비와 닮았기 때문에 ‘두꺼비’란 동물의 이름이 여기서 생겨났고, ‘느린 걸음’을 뜻하는 글자 ‘치(蚩)’도 생겨났다고 하는데 투구와 갑옷으로 중무장한 치우의 군사들이 느릿느릿 걷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중국측 기록에 치우의 머리에는 소처럼 ‘두 개의 뿔’이 났다 하였는데 이는 투구에 두개의 뿔이 있는 것으로 풀이 되며, 치우의 뿔 달린 투구는 고구려 군사의 투구와 고려 군사의 투구로 이어진 것이다. 소뿔 달린 투구는 ‘용맹을 상징하고, 싸움에서의 승리를 상징하는 치우 모습이다.

 

▶ 천하장사 씨름과 황소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오는 고구려 씨름 모습(4세기 말)

 

힘이 센 장사를 지위’ 즉 ‘치우’라 하였다.  소는 힘의 상징이고, 농경사회에서 제일 상징적인 짐승이기 때문에 때로는 치우를 상징하기도 하였다. 씨름에서 우승한 장사 에게 상으로 소를 로 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치우상

치우상(그림)

강화도 마니산 환단학회(桓檀學會) 대성전에 모셔진 치우상 그림

▶ 사천왕상(四天王像):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 오면서 치우는 절의 입구에서 절과 부처를 지키고, 불법에 귀의하는 중생의 안전을 지켜주는 네 신 사천왕에 등장한다. 네 사천왕은 네 가지 형상으로 다르게 조형되었지만 공통적인 것은 배 부분에 도깨비 치우상이 조각되어 있다.

 

사천왕은 수미산(須彌山) 중턱 사왕천(四王天)에 있으면서 사방(四方)을 진호(鎭護)하는 네 신(神)이다.

지국천(持國天)은 동쪽, 광목천(廣目天)은 서쪽, 증장천(增長天)은 남쪽, 다문천(多聞天)은 북쪽을 맡아 지키며, 위로는 제석천(帝釋天)을 섬기고, 아래로는 팔부중(八部衆)을 지배하여 불법에 귀의하는 중생을 지켜준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나라 불교에서 사천왕에 치우상을 등장시킨 것은 절 문간 청지기로 격하한다는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부처의 세계에서도 역시 치우를 강하고 싸움을 잘하는 강자로 인정한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밀양 천황산 표충사 사청왕상

 

 

 

 

 

 

 

 

 

 

 

 

중국 탁록(涿鹿)의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에 모셔진 치우상(蚩尤像)의 의미

1999년 6월 5일부터 17일까지 13일간 한국역사천문학회 13명이 중국 하북성 탁록현을 여행하고 돌아와 부회장 소설가 노고담씨가 쓴 탁록기행한배달43호 특집 ‘치우는 살아있다’에 게재되었다.

 

이 기행에서 탁록의 황제, 염제, 치우의 여러 유적들을 탐방하였는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귀근원(歸根苑)’이란 이름으로 조성된 거대한 성역화구역 중앙에 건립된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이다.

 

삼조당에는 중앙에 황제상(黃帝像)이 있고 그 오른 쪽에 신농상(神農像), 왼 쪽에 치우상(蚩尤像)이 나란히 모셔져 있고, 벽에는 탁록전투 묘사도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고 한다.

 

중국 탁록현에 조성한 귀근원 전경(좌)과 삼조당(우)

삼조당에 모신 치우석상

 

 

 

 

 

 

 

 

 

 

 

 

 

 


삼조당의 탁록전투 묘사도 벽화

 

 

또 이 곳 탁록에는 1990년대에 들어와 중공탁록현위(中共涿鹿縣委) 부서기(副書記)이며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涿鹿中華三祖文化硏究會) 집행회장(執行會長)이며, 중화염황문화연구회(中華炎黃文化硏究會) 이사(理事)인 임창화(任昌華)라는 사람이‘삼조문화(三祖文化)’를 제창한 것을 계기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될 뿐만 아니라 총건설비 230만 위안 중 100만 위안을 재외화교(싱가폴)의 도움을 받아‘귀근원(歸根苑)’이라는 성역화 지역을 건설하고 그 중심에 ‘중화삼조당’이 건립 하였다고 한다. 그 내력을 보면,

1993년 10월 임창화는 염제, 황제, 치우가 함께 탁록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사서(史書)와 유적을 찾아 연구한 결과를 모아 1차로 염황치(炎黃蚩) 삼조문화(三祖文化)의 관점이라는 논문을 완성하여 중하염황문화연구원, 중국선진(先秦)사학회, 대만중화논리교육학회등에 제출하였다.

 

1995년 9월 탁록삼황삼조문화학술연구토론회를 개최하면서 삼조문화가 중국 전국에 소개되고 중국민족문명의 근원적 명제로 널리 사회적 관심을 끌게 되어 국내외에서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들은 삼조문화가 다음 세 가지 의미를 지녔다고 주장한다.

(1)         중화민족의 문명을 시작한 시조는 염제, 황제 뿐만 이니라 치우를 포함한 셋이다.

(2)         중화만족의 문명을 창시한 염제, 황제, 치우 삼조가 그들이 있는 곳에 대표적인 마을과 마을 연맹공동체를 만들었다.

(3)         염제, 황제, 치우 삼조는 처음으로 중화문명을 이룩하였는데 그 발자취가 전국 대부분 지역에 남아 있으며 그 중 가장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사건이 탁록전쟁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러니까 중국 사람들은 중국 역사가 시작된 이래 1980년대 초까지는 그들(선조들) 기록한 역사서를 통해서 한결같이 유일 조상 황제의 자손(黃帝之孫)이라고 하여 왔는데, 1980년대 말부터 황제헌원과 함께 염제신농을 추가하여 염제와 황제의 자손(炎黃之孫)이라 바꾸더니,  1993년 위 임창화의 논문을 계기로 1990년대에 들어와서 치우까지 그들의 조상에 추가하여 염제, 황제, 치우 삼조의 자손(炎黃蚩之孫)이라고 그들의 조상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 초까지 황제를 중국 민족의 유일한 조상으로 받들어 온 것은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비롯한 중국측 역사서에 근거하여 몇 천년 간을 중국 사람들이 믿어 온 바이고, 1980년대 말 염제신농을 그들의 조상으로 추가 한 것은 중국의 삼황오제 전설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다고 수긍이 가는 바도 있지만 지금까지 중국의 사서들이 ‘치우는 구려족의 군장, 포악무도하고, 전쟁을 좋아하고, 동두철액(동두철액) ---’등과 같이 온갖 부정적인 표현으로 폄훼하면서 ‘중국인들의 적’으로 생각하던  치우를 어느 날 갑자기 ‘중국인들의 조상’이라 주장하고 삼조당을 지어 염제, 황제와 함께 치우의 석상을 만들어 모시며 떠 받들고 나서는 것이다.

 

그들이 5000년에 가까운 긴 세월에 걸쳐 부정하고, 자기네들의 적으로 간주하고, 포악 무도한 자  폄훼하던 치우를 갑자기 자기들 조상이라 하는 저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진실 보다는 어떤 목적을 위한 전략, 전술이 아닌가 생각되며 다음 두 가지 측면을 추정 해 본다.

 

첫 번째는 현 중국인을 형성하는 민족의 단합을 목적으로 한 정치적 전술의 전환’일 것이라는 점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이민족에 대해 유화정책을 써 왔다. 형제지국으로 결의를 맺거나, 귀화하는 이민족의 족장에게는 사성(賜姓) 특히 그 왕조의 성씨를 하사하는 등의 방법으로 달래 왔다.

 

지금도 중국에는 한족(漢族)을 제외한 56개에 달하는 소수 민족들이 실존하고 있는데 이들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자치(自治)를 허용하는 등 말성이 없도록 달래는 정책을 써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제 그들은 한족 자체의 구성원에 대하여 눈을 돌린 것이라 생각된다. 엄연히 그 옛날 그들 보다 먼저 중국 대륙의 중요부를 차지하고 이른바 황하문명을 창출에 주역을 했던 치우가 통솔했던 구려족을 포함한 동이족의 핏줄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터인데 이를 계속 외면하는 것은 중국의 단합과 발전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저해요인으로 평가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피 속에는 동이족의 피가 섞여있음을 인정하고 동이족의 가장 뛰어났던 조상 치우를 중국인의 시조에 포함하여 받들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고대 황하문화와 중국역사를 확보하려는 장기 전략적 포석’일 것이라는 점이다. 고고학의 발달로 중국대륙과 동아사아에서 발굴되는 유물들로 인하여 고대 황하문하의 주인에 대한 베일이 점차 벗어지면서 지금까지 그들의 조상으로 생각해 온 하화족 보다는 동이족이 더 크게 기여 하였다는 것이 사실로 나타날 것에 대비하여 치우와 그 족속(진시황의 중국 통일로 하화족에 동화된 동이족)을 중국 민족으로 흡수해 두려는 속셈일 것이라 생각된다.

 

중국 사람들이 치우를 자기들의 시조 황제와 같은 반열에 올려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환영할 일이기는 하지만 자기들 조상으로 둔갑시키는 것은 진실을 외면하는 얄팍한 전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제대로 찾아 받들지는 못했지만 엄연히 우리 민족의 정신 구석구석에 살아있는 우리의 조상 치우를 어느날 갑자기 족보를 날조하면서 자기네 조상이라 하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지금 중국에는 공식으로 인정된 56개의 소수민족이 있지만 수적인 면에서 그야말로 소수이고 13억 인구(실상은 15억이라함)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한족(漢族)이다. 한(漢)나라가 있기 전에는 그들을 하화족(夏華族)이라 했다.

 

이른바 하화족(夏華族)이라 부르는 중국인들의 조상들은 밖으로는 북쪽의 흉노의 위협을 받아왔고, 안으로는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조건의 동쪽 황하 유역에 자리잡고 있던 동이족(東夷族)과 삶의 터전을 놓고 쟁탈전을 벌여왔던 것이다.

 

이 쟁탈전은 중국 사람들이 그들의 뿌리(시조)로 삼아 온 삼황의 하나인 황제헌원(黃帝軒轅)과 이 때 치우(蚩尤)라는 동이족의 호전적인 군장과의 싸움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황제헌원과 그 족속(하화족)은 치우와 그 족속(동이족)에게 워낙 크게 혼 줄이 났기 때문에 그들은 물론 그 후손들의 마음 속에는 항상 치우와 동이족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을 품고 2300여 년을 흘러 진시황까지 내려 온 것이다. 물론 일부 중국 사람들은 치우를 존경하기도 하였다.

 

중국측 기록으로는 황제가 치우를 죽이고 이겼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동이족에게 항상 밀렸기 때문에 하화족은 2300여년 동안 황하 중,상류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것이 진시황에 이르러 강력한 힘을 길러 동진을 거듭하면서 밀어 부쳐서 중국대륙 전체를 그들 하화족의 확실한 터전으로 만드는 국토통일을 달성하고, 중국대륙의 동이족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거나 동화시켜 민족통일을 이룬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이러한 진시황의 업적이 그가 저지른 인류 역사상 엄청난 반 인류적 만행도 모두 묻어버리고, 중국의 국토, 민족, 문자, 화폐, 도량형을 통일한 강력한 군주로서 그 후의 한(漢)나라 무제(武帝)와 함께 진황한무(秦皇漢武)로 숭앙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눈을 우리에게 돌려보면 중국 사람들이 적으로 생각하던 치우를 자기 조상이라 받들고 나서는 판국인데 우리는  5000년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자기 조상을 버린 족속이란 혹평을 면할 수 없다.

 

앞에서 열거한 것처럼 치우는 우리의 역사가 기록으로 확실히 증명되는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 고려, 조선,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치우의 얼이 우리 민족정신 속에 맥맥히 흐르고 있음을 은연중에 표출해 왔는데도 우리 조상들은 유학(儒學)에 젖은 나머지 유학의 비조 공자의 평가를 쫓아 황제를 덕치(德治)의 임금으로 숭앙하고, 치우포악무도한 군장으로 깎아 내려 왔다.

 

또 일제는 식민사관으로 아예 우리 민족의 역사를 삼국시대 이후로 축소하고 신시(神市)는 물론 단군(檀君)의 시대도 한 낱 신화로 돌렸는데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지 58년이 지난 지금도 독일 학자들의 실증사학일제 식민사관의 수제자인 우리 사학자들은 저들의 기득권(?) 권위(?)에 흠집이나 날까 하는 우려 때문인지 환단고기(桓檀古記)나 규원사화(揆園史話) 등 우리측의 기록에 대하여 위서(僞書) 논란이나 벌리면서 인정하기는커녕 연구 대상으로도 삼으려 하지 않는다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 사람들이 자신들의 더 오랜 역사를 내세우고 조상을 미화하기 위하여 유물을 조작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는 것은 지탄을 받아 마땅하겠지만 자기 조상에 관한한 만분의 일의 가능성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기어코 그 꼬투리를 찾아 내고자 하는 것이 사학자의 마땅한 길이요 자세가 아니겠는가.

 

치우와 그 후예들은 중국인의 조상 하화족을 척박한 중국 대륙의 서쪽에 묶어 두고 기름진 땅 황하 하류를 차지하여 청동기에서 철기시대로 진입하는 시기에 황하문명을 일으켰던 우리의 조상이다. 최근 중국 사람들도 그 사실을 인식하고 치우를 자기들 조상이라며 염황치 삼조문화를 주장하고 있다.

 

진시황의 중국 대륙과 민족통일 이후 우리 민족은 만주와 한반도로 그 강역이 좁아졌고, 지금은 한반도로 내몰린 작은 나라가 되어버렸다. 지금 와서 치우의 강역을 찾자느니 하는 말은 어불성설이겠지만 적어도 진실을 알고, 우리의 영광스러운 조상을 조상으로 받들 수 있도록 치우에 관한 연구가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안띠꾸스(ANTIQUUS) 2005.6/7월호에 실린 '황제(黃帝)의 이름으로- 민족, 역사, 그리고 신화'(글 김선자) 중에서 치우와 관련된 부분을 옮겨 놓는다.(2005. 9. 13)

                                   < 황제와 염제, 그리고 치우의 전쟁 >
  황제는 소전씨(少典氏)의 자식이다. 그리고 소전씨에게는 염제라는 또 다른 아들이 있었다. 신화 속에서 중앙를 다스리던 황제, 그리고 남방을 다스리던 연제는 역사책 속에서 같은 아버지를 둔 형제로 등장한다.

  남방지역 불의 신이면서 농사의 신인 자애로운 염제는 이제 역사 속에서 황제와 피를 나눈 형제이며 동시에 그에 대항하여 <판천(阪泉)의 전쟁>을 벌이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 전쟁에서 염제는 패하고 황제의 그늘에 편입된다.

  그리고 뒤 이어 일어난 <탁록의 전쟁>에서 황제는 치우라는 강한 신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된 이마 를 가졌으며 쇠와 돌을 먹는, 사이보그처럼 생긴 치우는 온 세상의 도깨비와 귀신들, 그리고 비와 바람을 부릴 줄 아는 신들을 이끌고, 또 묘족(苗族)이라고 하는 인간 세상의 부족을 이끌고 황제와 싸운다.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에서 결국 황제가 승리하게 되고 치우는 황제에 의해 목이 잘린다.

  치우의 죽음과 더불어 그의 용맹스런 이름도 사라지고 중국의 역사책 속에서 치우는 이제 황제라는 정통세력에 반항한 반란의 신으로 남게 된다. 고대 동이족(東夷族)의 땅이었던 산동성(山東省)에 치우를 전쟁의 신으로 떠받드는 제사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사마천의 <사기(史記)> 이후 중국의 정통 역사서에서 치우는 언제나 탐욕스러운 반란자, 기괴하게 생긴 괴물 같은 이미지로 남아 있다.

  그러나 21세기로 접어들면서 2천년 동안 고정되어 있었던 치우의 이미지가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이러니칼하게도 그 작업은 중국의 주류 학자들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황제의 자손에서 염황치(염제, 황제, 치우)의 자손으로
  황제가 신화 속의 신인가 역사 속의 영웅인가 하는 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중국의 모든 기록에서 황제는 유일한 중심이었다. 사마천의 붓끝에서 황제가 모든 신들의 아버지로 자리매김된 이후, 2천여 년간 중국인은 늘 '황제의 자손'이었다. 그것은 20세기 초까지도 그러했다.

  중국이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에 시달리던 청(淸)왕조 말기, 혁명을 꿈꾸던 젊은 지식인들은 황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국가와 민족의 통합과 단결만이 생존의 유일한 길이라 여겼던 그들은 자신들이 황제의 자손임을 새삼스럽게 주장하면서 이민족인 만주족정권을 끝장내고 한족(漢族)의 땅을 되찾아야 한다소 목청을 높였다.

  이런 혁명론자들과 관점을 달리하던 지식인들은 아예 중국이라는 지리적 영역 내에 살고 있는 모든 민족들이 다 황제와 혈연관계를 갖고 있는 한 민족이라고 하면서 황제를 중심으로 단결할 것을 주장했다. 그 시기의 '중화민족(中華民族)' 이 한족만을 일컫느냐 이민족도 모두 포함되느냐 하는 문제를 뛰어 넘어 황제는 '중화민족'의 단결을 산징하는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민족의 근원에 관한 신화는 종종 민족의 동질성을 담지하는 담지체가 되며 민족 단합이 필요한 시기에 매우 큰 힘을 발휘한다. 민족 단결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시기, 황제 신화를 재조명하여 그들이 동일한 시조의 위대한 자손임을 강조하면서 상상적 공동체, 즉 '중화민족' 개념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바로 민족 공동의 추억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집단의 추억을 통해 그 구성원들은 강한 결속감을 확인하게 되는데, 중국 근대 시기의 민족이나 국가는 바로 이러한 집단의 추억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한편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황제의 상징성에 약간의 변화가 온다. 개혁과 개방을 표방하며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 중국에 한동안 잠잠했던 신화 연구 열기가 일어나면서 중국인들은 이제 황제만의 자손이 아니라 '염제와 황제의 자손(炎黃之孫)' 이 된다.

  물론 지역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신화를 이용한 흔적이 포착되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남방지역의 통치자라고 여겨졌던 염제에게 황제와 동등한 신격을 부여하면서 중국 남부지방에 살고 있는 민족들을 포섭하기 위한 의도가 다분히 엿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다가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마침내 치우가 새로운 개념 '중화민족'의 범주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탁록에서 황제에게 패하여 목이 잘리고흘러내린 붉은 피가 단풍나무로 변했던 바로 그 치우가 이제 하북성 탁록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21세기의 '중화민족'은 이제 더 이상 황제만의 자손이 아니라 '황제와 염제와 치우의 자손'이다. 중원 땅을 주름잡던 황제 뿐만아니라 남방지역의 신 염제, 그리고 동이족의 위대한 전쟁의 신 치우까지 모두가 새로운 중화민족 안으로 포획되어 들어가게 된 것이다.

거대한 건축물들, 강한 중국을 위하여
  하남성(河南省) 신정시(新鄭市)에는 황제가 태어났다고 하는 마을 <황제고리(黃帝故里)>가 있다. 신화 속의 신 황제의 고향은 아직도 노새가 짐을 끄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작고 허름한 마을이다. 황제가 태어난 곳이라는 이름만 남아 있을 뿐, 황량한 터에 새롭게 조성된 패방(牌坊)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크다. 황제를 위하여 만들어진 사당과 거대한 황제의 상(像) 앞에는 중국 56개 민족의 이름을 새겨 넣은 기둥들이 서 있다. 모두가 황제의 후손이라는 얘긴데, 황제의 이름 하에 55개 소수민족들을 포섭하려는 의도가 적라라하게 드러나 있다.

  거기서 가까운 곳에 <염황광장(炎黃廣場)>이 있다. 그저 넓기만한 광장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는 염제와 황제의 상은 그들이 '의좋은 형제'임을 보여주고 있다. 황제와 전쟁을 벌였던 염제는 황제에게 패배한 뒤 황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고 해석되고 있다. 만들어진 새로운 상징물들을 보면서 자라난 아이들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게 되고그것은 다시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가는 바탕이 된다.

  1998년, 하북성 탁록에 세워진 <중화삼조당. 역시 마찬가지다. 황토고원지대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그 건물은 21세기의 경제대국, 군사대국을 꿈꾸는 중국의 염원을 담고 있다. 그 건물 안에 반란의 신이었던 치우가 황제와 나란히 앉아있는데, 그 의도는 매우 명확하다. 자신들의 시조라고 여기는 1천만 묘족, 치우를 자신들의 위대한 전신(戰神)이라고 여기는 동이계통의 여러 민족 모두를 포섭하기 위한 전략적인 배치인 것이다.

  민족통합은 강하고 거대한 중국을 만들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중화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현재 중국이라는 지리적 영역 안에 살고 있는 모든 민족을 하나의 혈연으로 묶어내는 것, 그것은 중국이 위기에 처해있던 20세기 초에 젊은 지식인들이 황제의 이름으로 꾸었던 꿈이었다.

  이제 새로운 상황에 차하게 된 중국, 거대하고 강한 중국의 도래를 선포하고자 하는 그들의 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고국(文明古國)'이 되고자 하는 그들의 소망은 56개 민족 통합의 상징인 <중화삼조당> 앞에서 거행되는 올림픽 성화 채화식에서 그 화려한 완성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황제와 염제와 치우가 아무리 사이좋게 앉아 있다고 해도 그 중심은 언제나 황제라는 점이다. 기념비적 건축물들의 벽에 새롭게 그려진 벽화에도 황제는 늘 품위있는 문명인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치우는 촟기는 괴물 혹은 동물의 가죽을 걸친 모습으로 등장한다. <중화삼조당.의 가운데 앉아있는 인물도 여전히 황제이고 황제보다 약간 작게 만들어진 염제와 치우가 좌우에 앉아있다.

  중국정부가 최근 들어 강조하는 '다민족일체론'은 중국 내에 거주하는 다양한 민족들이 모두 하나라는 것이지만 그 중심은 언제나 한족이다. 소수민족은 통합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언제나 주변부에 머문다. 사마천에 의해 발견된 황제, 그는 지금도 민족통합의 상징이지만 여전히 중심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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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6월 30일자 조선일보 '이덕일 舍廊' 에 실린 '고조선과 漢'나라의 금속기술(글 김덕일) 글을 옮겨 놓는다.

                                    < 고조선과 漢'나라의 금속기술 >
  한국사 연구의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중국보다 문명 수준이 낮았다'는 고정관념이다. 사대주의적 유학자과 일제(日帝) 식민사학자들이 만든 이 신화는 아직도 살아 있다.

  청동은 구리, 주석, 아연의 합금인데, 중국 것은 주석 성분이 많은 반면 고조선 것은 아연 성분이 많다. 과학자들은 아연-청동(?, 구리-주석) 합금을 세계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청동은 섭씨 1000도까지 가열해야 용융(鎔融)이 되면서 주물로 이용되지만 아연은 섭씨 900도 정도에서 끓으면서 날아가기 때문이다.
  서로 비등점이 다른 아연-청동 합금은 고도의 합금(合金)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고조선보다 훨씬 뒤인 한(漢)나라 때에나 나타났다.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多 金丑 細文鏡: 고조선 유물)은 청동 주조기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20Cm가 안 되는 원내에 깊이 0.7mm, 폭 0.22mm로 구성된 1만 3300개의 원과 직선이 새겨져 있는데, 선의 굵기는 머리카락 같다.
  현대의 컴퓨터 기술로도 재현이 물가능한 이런 청동거울을 기원전 4세기 경에 어떻게 만들었는지 여전히 수수께끼다.

  제철기술도 마찬가지다. 철은 탄소 함유량에 따라 연철, 선철, 강철로 구분한다. 탄소가 많은 선철이 유럽에서 널리 사용된 것은 서기 14세기경 이후이고, 선철에서 강철을 얻는 제련 방법도 대략 이 때부터 사용된다. 그 전에 사용했던 강철은 연철을 단조하여 얻은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 사람들은 기원전 수백년 전에 연철과 선철을 재련하고 강철도 제련하여 사용했다. 이는 철에 대한 지식과 가공기술이 매우 높았음을 말해 준다.
  사마천(중국의 사학자)의 '사기'(史記)는 동이족(東夷族)의 수령인 치우(蚩尤) 집단이 '머리는 동(銅)이고, 이마는 철(鐵)' 인 동두철액(銅頭鐵額)이라고 전하는데, 이는 이미 그 때(기원전 2600년 경)에 이미 금속문명기에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사기'에서 동이족이 화하족(華夏族=漢族)보다 빨리 금속문명기에 접어들었음을 증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중국보다 문명이 낮았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MBC TV드라마 '주몽'이 한사군(漢四郡)의 제철기술을 우리 민족의 그것보다 월등한 것으로 그려져 논란이다. 역사적, 과학적 사실에 근거해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 2007년 7월 18일자 조선일보 '이덕일 舍廊' 에 실린 치우(蚩尤)의 족속(族屬) (글 김덕일) 글을 옮겨 놓는다.

                                    < 치우(蚩尤)의 족속(族屬) >
  사마천의 ‘사기’황제(黃帝) 헌원(軒轅)치우(蚩尤)가 맞서 싸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황제는 예부터 중국인(漢族)의 조상으로 인정됐지만 치우는 아니었다.
  치우가 중국 남부 삼묘(三苗)족의 시조라는 기록들이 있는데, 황제치우의 싸움터인 북경 서북쪽 탁록(琢에서王대신水변 鹿) 부근에서 남방으로 이주한 결과로도 해석한다.

  ‘사기’ 삼가(三家) 주석의 하나인 당(唐)나라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正義)’에는 ‘구려족의 임금 칭호가 치우이다(九黎君號蚩尤)’라는 공안국(孔安國)의 설명이 실려 있다.
  구려족은 중국 산동(山東)·하북(河北)·하남성(河南省) 등지에 살던 민족으로서 구이(九夷·동이족의 별칭)족과 같은 뜻이다.

  ‘후한서’동이열전“이(夷)에는 아홉 종류가 있다”고 설명하면서 “공자(孔子)도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논어(論語)’ 자한(子罕)편의 글을 인용하기도 했다.
  중국의 서욱생(徐旭生) 교수는 1940년대 출간한 ‘중국 고대사의 전통시대(中國古代史的傳統時代)’에서 치우를 동이족의 영수라고 주장했다.

  치우가 한족(漢族)의 조상이 아님은 어의(語義)를 보면 분명해진다. ‘광아석고(廣雅釋 言古)’“치(蚩)는 난리이다(蚩,悖也)”라고 썼으며, ‘방언(方言)’“치는 어그러진 것이다(蚩,悖也)”라고 썼고,
  심지어 “치우의 우(尤)는 유우(由尤)인데, 뱃속의 벌레이다(腹中之蟲)”라는 기록까지 있다. 이는 자신들과 싸웠던 이민족들에 대한 한족(漢族) 특유의 비칭(卑稱)이 분명하다.

  홍콩의 친중국계 ‘문회보(文 水변匯 報)’‘중국 민족의 조상 중 한 명인 치우를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한다’고 비난하는 중국 기류를 전하는 기사를 최근 보도했다.
  자기 조상을 ‘뱃속의 벌레’라고 표현해 왔다는 자백(?)인지 몰라도 중국은 동북·서남공정의 이론적 틀을 만들기 위해 치우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편입시키는 환부역조(換父易祖
: 자기 애비와 할애비를 바꾸는 일)를 진행해 왔다.
  치우 문제를 시작으로 한·중 역사논쟁이 고조선·고구려가 중국 역사라는 저질스런 차원에서 중국 특유의 역사왜곡 사실들을 밝혀내는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야 할 때이다.(역사평론가)


◆ 네이버(Naver) 백과사전의 치우(蚩尤) 대한 설명을 옮겨 놓는다.

                                    < 치우(蚩尤) >
  중국의 여러 고서와 한국의 《환단고기(桓檀古記)》등에 등장하는 전설적 인물이다. 흔히 군신(軍神)·병주(兵主) 등 '전쟁의 신'으로 통한다. '치우천왕(蚩尤天王) ',·'자오지천왕(慈烏支天王)',·'자오지천황(慈烏支天皇)',·'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중국 먀오족[苗族] 신화에서는 먀오족의 옛 이름인 구려(九麗)의 군주로 등장하고,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봉선서(封禪書)〉에는 한(漢)의 고조 유방(劉邦)이 패공(沛公)으로 칭한 뒤, 곧바로 치우에게 제사지내고 피로 북과 깃발을 붉게 칠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치우는 탁록의 싸움에서 황제(黃帝)와 싸우다 응룡(應龍)에게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기록에서는 중국의 자료에 보이는 것과는 많은 점에서 다르다. 치우가 기록되어 있는 대표적 문헌은 1675년(숙종 1) 북애노인(北崖老人)이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규원사화(揆園史話)》(상권)와 계연수(桂延壽)가 1911년에 편집한 것으로 보이는 《환단고기(桓檀古記》이다.

  두 문헌에 따르면, 치우는 배달국(倍達國)의 제14대 천황(天皇)인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이다. 기원전 2707년에 즉위하여 109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6개의 팔과 4개의 눈, 소의 뿔과 발굽,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銅頭鐵額)를 하고, 큰 안개를 일으킬 수 있었다. 81명의 형제가 있었고, 병기 제작 능력이 뛰어나 활·화살·창·갑옷·투구 등 각종 무기를 만들어 신농(神農)을 무찔렀다. 또 12개의 제후국을 합병하였는데, 70여 회의 전쟁에서 한번도 패하지 않았고, 헌원(軒轅)을 황제(黃帝)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한국의 문헌에서는 치우를 우리 민족 최고의 전쟁 신으로 받들고 있다.
  하지만 치우의 강인한 인상과 믿음이 해학적으로 표현하면서 도깨비처럼 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대 왕릉, 기와, 민담 등에 나타나는 도깨비 문양은 귀신인 도깨비가 아니라 용감하고 매서운 인상을 지닌 '치우' 환웅을 표현한 것이다.

  한편, 일부 학계에서는 위의 두 문헌을 신빙성이 없는 저술로 여겨 치우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2002년 제17회 월드컵축구대회(한일월드컵) 때 한국 대표팀의 응원단인 붉은악마의 트레이드마크 도안도 치우(도깨비)의 이미지에서 딴 것이다.


첨부# 1.
치우(蚩尤)에 관한 기록 비교

중국측 기록

한국측 기록

1.헌원(軒轅) 때에 이미 신농(神農)이 쇠하자 여러 제후들이 (신농)을 침략하여 백성을 포악하게 다스렸다.

그러나 신농씨는 이들을 정벌 할 수가 없었다. 이에 헌원은 창과 방패 등 무기 사용법을 익혀서 신농씨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은 제후들을 정벌하였다.

  그 결과 모든 제후들은 헌원에게 복종하였으나 다만 치우 만은 가장 포악하였으므로 헌원도 그를 토벌 할 수가 없었다.---

  염제(炎帝)가 제후들을 침범하려 하였으므로 제후들은 모두 헌원에게 귀순하였다. 헌원은---(선정)---곰, 비, 비, 휴, 추, 범 등 사나운 짐승들을 훈련시켜 판천(阪泉)의 들에서 염제와 싸웠는데 여러 번 싸운 후에야 비로소 뜻을 이루었다.

  치우가 또 다시 난을 일으키며 황제의 명을 듣지 않았다. 이에 황제는 제후들의 군대를 징집하여 탁록(涿鹿)에서 싸워서 결국은 사로잡아 죽였다.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받들어 천자로 삼아 신농씨를 대신하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황제(黃帝)이다. (사마천의 史記의 五帝本紀)

 

2. 응소(應 召+力)가 말하기를 치우는 옛날 천자(天子)의 호라고 하였다.(史記의 集解)

 

3. 관자는 치우가 노산(盧山)의 금을 얻어 5병(五兵)을 만들었으니 보통사람이 아니라 하였다. (索隱)

 

4. 공안국(孔安國)은 말하기를 구려(九藜) 임금의 호를 치우라고 한다고 하였다.(史記의 索隱)

 

5. 병주(兵主)는 치우를 제사지낸다.

(史記의 奉禪書)

 

6.판천씨(阪泉氏) 치우는 강씨(姜氏) 성으로 염제(炎帝)의 후예다. 군사로 난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했다. 제를 따라 탁록에  살면서 봉선(奉禪)을 하고 호를 염제라 하였다.

(路史 后紀四 「蚩尤傳)

 

7. 치우가 군사를 일으켜 황제를 토벌 하였다. 이에 황제가 응룡(應龍)에게 명하여 기주(冀州)의 들판에서 공격 하였다. 응룡은 물을 관장하였다.

치우는 풍백(風伯) 우사(雨師)를 청하여 큰 바람과 비를 일으키니 이에 황제가 발(魃)이라는 천녀에게 비가 멈추게 하고, 이어서 치우를 살해하게 하였다. 응룡은 이미 치우를 살해하고 또 과부(夸父)를 살해하였다.(山海經의 大荒北經)

 

8. 대황(大荒)의 동북쪽 모퉁이에 흉려토구(凶犁土丘)라고 부르는 산이 있는데 응룡은 남쪽 끝에 이르러 치우와 과부를 살해하였다.(山海經의 大荒東經)

 

9. 송산(宋山)에 적사(赤蛇)가 있는데 그 이름을 육사(育蛇)라 한다. 그 산 위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풍목(楓木)이라 하는데 그것은 치우가 잡혀 있다가 풀고 간 나무라서 그 이름을 풍목이라 하였다.

(山海經의 大荒南經)

 

10. 옛날 신농은 부수(衣+保 遂)를  벌(伐)하였고, 황제는 탁록을 벌(伐)하여 치우를 잡았다.(戰國策의 秦策)

 

11. 구려(九黎)는 치우의 무리인데 치우가 죽은 뒤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황제는 치우의 형상을 그려서 천하에 보이니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치우가 죽지 않았다고 알고 사방의 모든 나라들이 모두 복종하였다.(尙書)

 

12. 치우는 난을 처음 일으켰다. 공안국전에 구려의 임금(君)의 호를 치우라 한다 하였다.(尙書 의 呂刑)

 

13. 소호(少昊)가 쇠약한 때에 이르러 구려는 덕(德)을 어지럽히고---그 후예는 삼묘(三苗)가 되니 이는 구려의 덕을 다시 회복된 것이다.   

위소(偉昭)의 주(注)에 이르기를 구려는 려씨(黎氏) 아홉 사람으로 치우의 무리이다. 삼묘(三苗)는 구려이 후예이다.

(國語의 楚語)

 

14. 옛날 황제는 서태산 위에서 귀신과 합방(合房)하였는데 코끼리 수레를 6마리의 이무기로 끌게 하여 화방(華方)으로 가게 하고, 치우는 그 앞에 서고, 풍백은 나아가서 청소하고, 우사는 길에 물을 뿌렸다.

(韓非子의 十過)

 

15. 치우는 천도(天道)에 밝았다. 그래서 황제는 당시(當時)를 맡겼다.(管子의 五行篇)

 

16. 헌원이 처음 제위에 올랐을 때 치우씨 형제 72인이 있었는데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하였다.(銅頭鐵額) 돌과 쇠를 먹었다. 헌원은 치우탁록(涿鹿)들에서 죽였다. ---   

치우신(蚩尤神)이 있으니 세상에서는 사람의 몸에 소 발굽이라 하고, 4개의 눈에 6개의 손을 가졌다 한다.

  진나라와 한나라 때 전해지는 말로 치우씨는 귀에 검극(劍戟)을 달고, 머리에 뿔이 있는데 헌원과 싸울 때에 뿔로 사람을 맞닥드리니 사람이 제대로 달려들지 못했다.

  지금 기주악(冀州樂)에는 치우전(蚩尤戰) 풍속이 있으니 그 곳 사람들은 둘씩 셋씩 소뿔을 쓰고 서로 맞닥드린다.---

  한(漢) 때에 만들어진 각저전(角抵戰)은 그(치우전) 풍속이 남아서 만들어진 것이다.

태원(太原)의 촌락에서는 치우에게 제사를 모시는데 소머리를 쓰지 않는다.---한무제 때 태원에 치우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었는데 거북이 다리에 뱀 머리였다.

(述異記)

 

17. 황제가 섭정하기 전에 치우의 형제 81인이 있었는데 모두 짐승의 몸에 사람의 말을 하고, 구리머리에 쇠 이마를 하고(銅頭鐵額) 모래와 돌을 먹었다.

(太平御覽의 券七十九引 龍魚河圖)

 

18. 태백음경(태백陰經)에 보면 치우는 ‘쇠를 녹여 병기를 만들고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었고,---삼병(三兵)의 제도를 두었고, 기치를 세웠다’고 하였다.

(太平御覽의 券三百三十)

 

19. 해주(解州)에는 염택(鹽澤)이 있는데 그 색이 참으로 붉어서---세상 사람들이 치우혈(蚩尤血)이라 한다.(夢溪筆談 券三)

 

20. 치우총(蚩尤塚)은 산동성 수장현 관향성에 있는데 높이는 7장이다. 사람들은 10월이면 제사를 모시는데 붉은 기운이 비단 필처럼 펼쳐졌다. 세상에서 이름하여 치우기(蚩尤旗)라고 한다.(皇覽의 塚墓記)

 

21. 치우는 유망(愉罔)에 이어 스스로 황제를 세우니 호를 염제라 하였는데 역시 판천씨(阪泉氏)이다.(逸周書의 史記篇)

 

22. 이어서 적제(赤帝)를 따라 탁록의 들에서 싸우니 사방에 남은 것이 없었다. 적제가 크게 놀라 황제에게 말하여 치우를 잡게 하니 황제는 치우를 중기(中冀)에서 죽였다.(逸周書의 嘗麥篇)

 

23. 유방(劉邦)이 풍패(豊沛)에서 군사를 일으킬 때 치우씨에게 제사를 올렸다.

(抱朴子)

 

24. 치우기(蚩尤旗)는 마치 혜성(慧星)과 같은데 뒷부분이 굽어서 마치 깃발과 같다. 이 별이 보이는 곳의 아래는 군사가 있다. 이는 치우천왕을 위로하여 하늘의 별자리로 삼은 것이다.(晉 天文誌)

 

25. 청구(靑邱)는 산동(山東) 청주부(靑州府) 낙안현(樂安縣) 북쪽에 있다.

(讀史方輿紀要)

 

26. 청수박(淸水泊)은 옛날 청구인데 일명 청구낙이라고도 한다.(淸一統誌)

 

27. 옛날 치우가 무도하자 황제가 그를 탁록의 들판에서 토벌하니 서왕모(西王母)가 도인을 파견하여 그에게 부(符)를 주었다.

황제가 단에서 기도를 올리고 친히 부를 받았다. 이를 살펴보니 바로 이전에 꿈에서 보았던 것이다. 이에 그날로 치우(蚩尤)를 사로잡았다.

(黃帝出軍訣에서 再引用한 北堂書)

 

28. 황제가 치우와 탁록의 들판에서 싸울 때 항상 오색 구름과 금지옥엽이 황제의 머리 위에 감돌았는데 아름다운 꽃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로 인하여 화개(華蓋)를 만들었다.(중국의 옛 신화에서)

 

29. 신농씨가 쇠하자 치우가 반란을 일으켜 제왕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황제는 덕으로 다스리고 백성을 어루만지나---제후들이 모두 신농을 배반하고 황제에게 귀복하여 치우씨를 토벌하자고 하였다. 탁록의 들판에서 치우를 사로잡았다.(帝王世紀)

 

30. 불주풍은 모든 것을 시들어 죽이는 바람이다. 현명은 북방에서 불주풍을 주관하였다. 이로써 중국 신화 중에 서왕모, 치우, 욕수를 제외한 네 번째 죽음의 신이 된 원인 중의 하나다.(神의 起源-五方帝와 五方神)

 

31. 호랑이는 가뭄의 여신인 한발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상대(商代)의 그릇들 중에 도철문들이 대부분 호랑이의 모습에서 그 형상을 따오고 있다. 도철은 치우라고 할 때 도철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호랑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황제가 한발의 힘을 빌려 치우를 쳤다고 한다. 그렇다면 상대의 그릇들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상대에서 전승된 한발과 호랑이의 전설은 황제의 승리를 기록하고 있는 「사기」나「산해경」과 다른 계보에서 전승된 것인지도 모른다.

치우가 곰족인지 황제가 곰족인지에 대해서는 기록들 마다 다른 이야기를 한다. 치우는 웅족(熊族), 호족(虎族) 그리고 신농과 같은 양족(羊族)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상대(商代)에서 전승된 치우 또는 도철의 형상을 보면 호족의 형상을 하고 있다.

(중국 고대사회-동문선)

 

32. 전설 속의 황제는 서쪽 지역을 호령할 수 있는 패권을 얻고 나서 하북의 탁록지방에서 강하고 사나운 웅족(熊族) 치우를 물리치고 전 중국을 호령하였다.

탁록은 서부문화구의 가장자리로 동방의 사람들이 서부의 이익을 침입하여 일으킨 전쟁이었을 것이다.(중국 고대사회-동문선)

 

33. 치우는 중국에서 금속무기를 발명한 전설 속의 인물이다.(周策縱)

(漢) 대의 화석 중에서 치우의 형상은 항시 머리와 사지에 다섯 가지 병기를 든 인물로 그려져 있다.(水野淸)

치우는 비록 진보된 예리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끝내 황제에게 패하였다. 이 전설은 전국시대에 유가(儒家)의 왕도사상(王道思想) 아래서 생겨난 것으로  황제는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킨 성군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완전히 상상에서 나온 것만 아니라 근거가 있을 것이다. 지금의 산동 호남 경내에는 여전히 동과 아연이 혼합된 광물이 많이 있다.(北京鋼鐵學院)

  전설의 치우는 B.C2700년의 인물로 태국과 마가요문화의 청동유적지보다 늦다. 그러므로 그 때 청동무기가 있었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전에는 지하 고고자료의 방증이 없었으므로 치우가 병기를 주조했다는 전설은 역사를 좀 더 옛날로 돌이키려는 사람들이 날조했다고 생각해 왔다. 지금은 이미 치우의 시대에 청동무기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 전설을 흘려 버릴 수가 없으며 응당 그 가능성에 관하여 조심스럽게 탐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 고대사회-동문선)

 

1. 신시(神市) 말기에 치우(治尤)천왕이 있어 청구(靑邱)를 개척하여 넓혔다.(桓檀古記 三聖紀全 上篇)

* 임승국의 주석

원래 치우(蚩尤)라고 적는다. 이른바 동두철액(銅頭鐵額) 즉 구리머리와 쇠 이마 를 가지고 모래와 쇠가루를 먹고 산다는 치우장군은 그의 시대가 철기시대나 청동기시대였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중국 삼황의 하나인 황제 헌원과 싸워서 번번히 이겼으나 황제의 지남차(指南車)의 위력 때문에 치우는 패사한 것으로 「이십오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도 의심스러운 바 있으니 치우는 황제가 죽은 뒤 80년이나 생존하면서 지금의 티벳(西藏)으로 판명된 장당경(藏唐京)에서 왕노릇을 했다는 설이 있기 때문이다.

  치우천왕은 「삼성기전」하편 신시역대기에 의하면 14세 자오지한웅(慈烏支桓雄)을 가리킨다. 치우천왕은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동방의 군신(軍神)이다. 그의 무덤에서 연기 같은 것이 휘날리면 난리가 난다는 전설이 널리 퍼져 있고, 그 연기 같은 것을 치우기치우의 깃발이라 한다 하며 우리나라에도 여러 곳에 치우사당이 모셔져 있다.

  치우는 한마디로 우리 민족이 강력함을 상징하는 고대 제왕의 이름이다. 앞의 티벳 장당경설은 서경보 스님의 주장이다. 중국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십오사」에 古天子之名(고천자지명)이라 하였고, 왕동령이라는 중국 사학자는 “삼묘족(三苗族)의 나라를 구려(九黎: 고려, Korea의 원음)라 하고 구려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고 그의 「중국민족사」에 썼다. .(桓檀古記 三聖紀全 上篇 임승국 注釋)

 

2. 단군(檀君)은 --- 희(羲)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 하고, 우(尤)에게는 군대를 관장케 하였다.(桓檀古記 三聖紀全 上篇)

 

3. 또 몇 대를 지나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이 나셨는데 귀신 같이 용맹이 뛰어났으니 동두철액(銅頭鐵額)을 하고 능히 안개를 일으키듯 온 누리를 다스릴 수 있었고, 광석을 캐고(採鑛) 철을 주조(鑄鐵)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그를 크게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치우천왕이라 불렀는데 치우란 속말로 우뢰와 비가 와서 산과 강을 크게 바꾼다는 뜻이다.(桓檀古記 三聖紀全 下篇)

 

4. 치우천왕게서 염제신농의 나라가 쇠함을 보고 마침내 큰 뜻을 세워 여러 차례 천병(天兵)을 서쪽으로 일으켰다. 또 색도(索度)로부터 병사를 진격시켜 회대(淮岱)의 사이에 웅거하였다.

황제헌원이 일어나자 즉시 탁록의 벌판에 나아가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뒤에 오장군을 보내 서쪽으로 제곡 고신(高辛)을 쳐 공을 세우게 하더라.(桓檀古記 三聖紀全 下篇)

 

5. 한 때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대치하고 있었으니 탁(涿)의 북쪽은 대효(大撓)가 있었고, 동쪽에 창힐(倉頡)이 있었으며, 서쪽에 황제헌원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군대를 가지고 승리를 차지해 보려고 했으나 아무도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 황제헌원이 치우보다 일어남이 조금 늦더니 싸움마다 이로움이 없자 대효에 의존코자 하였으나 이룰 수 없었고, 또 창힐에 의존코자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안되었으니 이는 두 나라가 모두 치우의 무리였기 때문이다.( 桓檀古記 三聖紀全 下篇)

 

6.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말하기를 “제후가 모두 다 와서 복종하여 따랐다. 그 때에 치우가 지극히 횡포하여 천하에 능히 벌 할 자 없을 때 헌원이 섭정하였다.

치우형제81인이었는데 모두 몸은 짐승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모래를 먹으며 오구장(五丘杖) 도극(刀戟) 태노(太弩)를 만드니 그 위세가 천하에 떨쳤다. 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桓檀古記 三聖紀全 下篇)

 

7. 14세는 자오지한웅(慈烏支桓雄)인데 세상에서 치우천왕이라 하며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겨서 재위 109년에 151세까지 사셨다.

(桓檀古記 三聖紀全 下篇)

 

8. 치우는 청구에 우뚝 서 만고에 무력으로 명성을 떨치니 회대(淮岱)지방이 치우천왕에게 돌아오더라.

(檀君世紀, 6세단군 달문 임자 35년 B.C 2049)

 

9. 서방의 사명을 태금(太金)이라 한다. 그의 다스림은 백(白)이니 호를 청정견허(淸淨堅虛)라 한다. 그를 보조함은 치우라 하고 구화의 하늘에 있으며 이를 대희리(大喜利)라 한다.(太白逸史 三神五帝本紀)

 

10. 군사를 주관하는 자는 치우씨에게 제사를 지냈다. 치우씨는 만대에 걸쳐 굳세고 용감한 군사의 조상이 되고, 큰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물리치므로 길이 도술의 근본이 되었다.---

  한나라 고조가 풍패에서 군사를 일으킨 후에 치우에 제사 지내니 북과 깃발에 상스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드디어 10월에 이르러 제후들과 함께 함양을 평정하고 한나라 왕이 되었다.--4년 후 천하가 안정되자 축관에게 명하여 장안에 치우씨의 사당을 짓게 했다.---

  「진서(晉書)」천문지에 치우의 깃발을 닮은 혜성 꼬리의 꾸부러진 방향으로 가보면 적병이 반드시 있었다 고 했다. 이것은 치우씨가 별 중에서도 윗자리 별리 된 것이라 하였다.(檀君紀)

 

11. 여섯째는 송악의 진주인데 큰 용기와 힘이 있어 신병을 맡아 언제나 나라의 도성을 지켜 외적을 쫓는 옛 치우의 신이다.(檀君紀)

 

12.영종25년 기사년(1749) 우역(牛疫)의 전염이 심하여 전관목장(箭串牧場) 안에 단을 쌓고 선목에 제사지냈다. 마제단(마祭壇)은 동북교(東北郊)에 있으며 치우신(蚩尤神)을 향사하는데 강무(講武)하기 하루 전날 제사를 지낸다.(燃黎實記述)

 

13.치우가 군사를 일으켜 황제를 치니 황제가 응룡을 시켜 공격하게 하였다. 치우가 풍백(風伯), 우사(雨師)에게 일러서 큰 비바람을 불러일으키니 황제가 가뭄의 신 발(魃)이라 하는 천녀를 내려 보내어 비를 그치게 하고 마침내 치우를 죽였다. 발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였으므로 그녀가 있는 곳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靑莊館全書-目耳口心書)

 

14. 계사년 5월 북극에 치우기(蚩尤箕)가 나타났다.

(大東野乘-亂中雜錄)

 

15. 정축년(선조10년, 1577) 안주의 청천강과 정선의 대음강이 물이 끊어져 흐르지 못한지 수개월이나 되었고, 치우기(蚩尤旗)가 기성(箕星)과 미성(尾星)사이에 나타나 그 길이가 하늘에 뻗치어 서남쪽으로부터 동쪽으로 걸치어 있었다. 기성과 미성의 위치는 북경지방과 우리나라이고 치우기는 전쟁이 일어날 형상이다.(大東野乘-再造藩邦誌)

 

16.기사년 11월 정시(庭試)가 있었는데 서제(書題)는 치우송(蚩尤頌)이었으며, 방(榜)이 나오니 이상질이 문과의 장원이고, 오희철이 무과의 장원이었다. (大東野乘-凝川日記)

 

17. 신미년(신라벌휴왕8년, 고구려고국천왕13년, 백제초고왕26년) 치우기(蚩尤旗)가 각(角), 항(亢)의 사이에 나타났다.(東史綱目)

 

18. 임금의 말 한마디에 별이 3사(1사: 30리)를 뒷걸음질쳤다는 따위의 얘기는 나는 믿을 수 없다. 꽁지별, 패(孛), 치우 따위가 여러 날 계속되어 온 나라에서 다 볼 수 있는 것은 곧 시국 운명과 관계가 있는 것이며 하늘에 속한다.(星湖僿說-天地門 灾異)

 

19. 사전(祀典)에 또 영성(靈星), 마제(마祭), 독제(纛祭)란 명칭도 있다. 영성이란 별은 천전(天田)으로 각성(角星) 왼쪽에 위치하여 천자의 기내(畿內)와 봉강(封彊)을 맡은 귀신이고, 마(마)란 것은 치우의 신인데 병기(干 )를 처음으로 만든 자이며, 독(纛)이란 것은 무엇을 가리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자서(字書)에는 군중(軍中)에 쓰는 대조기(大早旗)인데 군사가 출발하려면 이 기에 제사 지내며 검은 비단으로 만든다고 하였다. (星湖僿說-萬物門 馬祖)

 

20. 송서에 이르기를 이우 꼬리로 말(斗)처럼 크게 만든 기를 왼쪽에서 달리는 말 멍에 위에 꽂는다 하였으니 이 것이 좌독(左纛)이라는 것이다. 상고하건데 도(纛)이라는 기는 본래 군중(軍中)에서 쓰는 대조기(大早旗) 이름인데 검은 비단으로 치루 머리와 같이 만들어서 군사가 출발할 때 독(纛)에 제사지내는 것이다. 좌독이라는 것은 본래 좌도(左도)라는 것이다. (星湖僿說-人事門 關王廟)

 

21. 여형(呂刑)에 옛날부터 교훈이 있는데 치우가 최초로 난을 일으켰다 하고, 이어서 삼묘(三苗)의 백성이 착한 행동을 하지 않으므로 형벌을 마련하여 다섯 가지 학형(虐刑)을 사용했다 하였다.

  그 주의 국어(國語)에 소호(少昊)가 쇠해질 무렵에 구여(九黎)가 혼란을 일으키자 백성과 귀신이 서로 뒤섞여서 집집마다 무당이 생기게 되었는데 나중에 와서 삼묘가 구려를 회복시켰다 하였다. 이 문맥으로 본다면 이 구려(九黎)는 치우의 나라였던 것이다.

  공안국(孔安國)도 구려의 임금 이름은 치우이다. 치우는 큰 안개를 잘 일으켜서 군사를 혼미하게 만들므로 헌원이 지남거(指南車)를 만들어 정벌했는데 치우는 남쪽이었다. 남쪽을 향해 정벌하게 되었던 까닭에 이 지남거 제도를 만들었다.이는 주공(周公)이 월상(越裳)에 지남거를 하사 한 것과 같은 의미다. 라고 하였으니 구려가 삼묘였다는 것을 더욱 증거 할 만하다.

관자(管子)는 황제가 치우를 얻어 천도(天道)를 밝혔고, 태상(太常)을 얻어 지리(地利)를 살폈고, 청제(靑帝)를 얻어 동방(東方)을 분별했고, 축융(祝融)을 얻어 남방(南方)을 밝혔고, 대봉(大封)을 얻어 서방(西方)을 분별했고, 후토(后土)를 얻어 북방(北方)을 분별했다. 황제가 육상(六相)을 얻어서 천하가 화성(化成)했다 하였다. 치우는 바로 황제의 신하로서 난리를 일으켜 베임을 당한 것이다.

(星湖僿說-經史門 蚩尤)

 

22. 고시씨 또한 곡식을 주관하는 직책을 맡았으며, 후세에 치우(蚩尤), 고시(高矢), 신지(神誌)의 후예가 가장 번성하였다.

  치우씨 후손은 서남지방을 차지하고 살았으며, 신지씨 후손은 북동지방에 많이 살았는데 유독 고시씨의 후손만은 넓은 동남으로 옮겨가서 진한, 변한의 여러 갈래가 되었다. 이것이 후세에 삼한인데 모두 그의 후손이다.

  이 세 씨족의 후손은 또 아홉 파로 갈라졌는데 견이(畎夷), 우이(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暘夷)의 족속으로 나뉘어졌다. 그러나 조상은 같아서 서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夷)라는 것은 큰 활(大弓)을 말하는 것인데 치우씨가 칼과 창과 큰 활을 만든 후 사냥과 싸움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 때문에 우리겨레를 ‘이(夷)’라 한다. 「설문(說文)」에 동이(東夷)는 큰 활을 쏘는 동쪽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나 공자가 「춘추(春秋)」를 쓰면서 이(夷)를 융(戎), 적(狄) 등과 함께 상스럽고 더러운 이름으로 뒤집어 놓았다.

  후세에 견이, 풍이는 서남으로 나뉘어 옮겨 살았다. 풍이(風夷)치우의 한 족속이다.---지금도 사람들이 힘센 장사를 지위(知爲)라 하는 것은 치우라는 말이 잘 못 전해진 것이다.(揆園史話 太始記)

 

23. 회대(淮岱)와 강희(江淮)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차지하고 살아 온 지 오래되었으나 온 나라에 도가 시들어감에 따라 남후가 제후들과 더불어 공격해 들어갔다. 바닷가 백성들이 모두 그 군사를 반갑게 환영했다. 치우씨가 거기에서 물러 나온 후 그 곳에 그렇게 왕성해지는 것을 다시 보게 되었다.

  우리 치우씨는 백성과 함께 황하 이북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안으로는 용감한 군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바라보다가 유망(愉罔)이 쇠하여 약해진 것을 보고군사를 일으켰다. 이 때 형제와 친척 중에서 우두머리 될 만한 사람 81명을 뽑아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갈로산(葛盧山)에서 쇠를 캐어 칼과 창, 화살촉을 꾸준히 만들게 했다. 군사를 한데 모아 정비하여 탁록(涿鹿)을 떠나 구혼(구혼)에 가서 계속 싸워 이겼다. 그 기세는 마치 비바람 같아서 세상 만물이 두려워서 떨게 하여 그 위력을 천하에 떨치었다.

  그는 일년 동안에 아홉 제후의 땅을 빼앗고, 다시 옹호산(옹호산)에 가서 수금(水金)을 캐서 예과(예戈)와 옹호창(옹호槍)을 만들었다. 다시 군사를 정비하여 양수(양수)를 떠나 공상(공상)으로 쳐들어갔다. 공상이란 지금의 진류(진류)인데 유망이 도읍했던 곳이다.일년 동안에 다시 12제후국을 빼앗았는데 시체가 들에 가득 차서 중국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도망가거나 숨어버렸다.

  이 때 유망은 소호(少昊)에게 치우씨를 막게 했다. 치우씨는 옹호창을 휘둘러 소호와 크게 싸우며 안개를 일으켰다. 소호는 넋을 잃고 혼란에 빠져 크게 패하여 공상으로 달아났다.

  소호는 유망과 함께 달아나다가 탁록 들로 들어갔다. 이 때 치우는 공상에서 제위(帝位)에 올랐다. 이어 군사를 탁록 들로 돌려 유망을 포위하니 유망은 또 크게 패하고 말았다. 관자(管子)가 천하의 임금이 칼을 들고 노하면 쓰러진 시체가 들에 가득하다고 한 것은 이것을 말 한 것이다.

  이 때 헌원(軒轅)이란 사람이 유망이 패하여 달아나고 치우씨가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 임금이 되고자 하였다.헌원은 군사를 일으켜 치우씨에게 도전했다. 치우씨는 탁록 들에서 헌원을 맞아 크게 싸웠다. 이 때 군사를 풀어서 사방을 치니 죽은 자가 헤아릴수 없었다. 또 안개를 일으켜 적군의 마음이 흐려지고 손이 떨려 급히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리하여 치우씨는 회대(淮岱: 淮水와 岱山 사이의 땅)와 가연(가연)을 모두 차지하게 되자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 때 중국 사람들은 활과 돌의 힘만 믿고 투구와 갑옷을 사용할 줄 몰랐다. 또 치우씨의 높고 강한 법력에 놀라 간담이 서늘해져서 싸우면 지고 만 것이다.

  운급(운급)의 「헌원기(軒轅記)」에 치우씨가 비로소 투구와 갑옷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여 구리머리에 쇠이마(銅頭鐵額)라 했다고 한 것이 그 말이다.

  치우씨가 더욱 군사를 가다듬고 사방을 쳐 나갔다. 10년 동안에 헌원과의 싸움만도 70여 회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장수는 피로한 기색이 없었고, 병사들 또한 후퇴하지 않았다.

  헌원은 이미 여러 번 패했으나 다시 병마를 크게 부흥시켰다. 그리고 치우씨를 본받아 갑옷을 만들어 널리 입게 하고 지남차를 만들어 날을 잡아 싸웠다.

  이 때 치우씨는 하늘을 우러러 형상을 보고 사람의 마음을 살피니 중국의 왕성한 기운이 점점 번창하고 또 염제의 백성이 굳게 단결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다 잡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더구나 사람이 각각 제 임금을 섬기는 것인데 쓸데없이 죄 없는 백성을 죽일 수 없구나 하고 되돌아 왔다.

  이리하여 치우씨는 형제와 친척에게 적과 크게 싸워 위엄을 세워 적이 다시는 쳐들어 올 생각을 못하게 하고 헌원과 싸워 한 진을 모두 죽인 후에 물러나왔다. 이 때 한 부장이 공을 서둘러 싸우려 하다가 진 안에서 죽었다. 「사기(史記)」에 치우씨를 사로잡았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글이다.

  치우씨는 회대 땅을 굳게 지키고 있으면서 헌원이 동쪽으로 나오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마침내 치우가 죽자 점점 뒤로 물러났다.「한서지리지(漢書地理誌)」에 의하면 그 무덤이 산동성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長縣) 관향성(關鄕城) 안에 있다고 하며 높이가 다섯 길이라고 하였다.

  진한 때 백성이 시월이 되면 제사를 지내는데 반드시 비단폭과 같은 붉은 기운이 일어났다. 백성들은 이것을 치우기(蚩尤旗)라 하였다. 그 뛰어난 혼과 씩씩한 넋은 보통 사람들과 달라서 천년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치우씨가 비록 물러나 돌아 왔지만 중토는 이 때문에 쓸쓸해지고 유망이 다시 복위하지 못하여 염제의 뒤는 이로써 끊어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헌원이 대신 중토의 주인이 되어 황제(黃帝)가 되었다. 그러나 치우씨의 형제 여러 명이 오래도록 유청(유청)에 살면서 그 명성과 위엄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황제는 편안치 못했다.

  「사기(史記)」에 소위 산을 해쳐 길을 만들어도 편안하게 살지 못하고 탁록에 도읍을 정하고 이리저리 쫓겨 다니느라 한 곳에 살지 못했으며 군사와 병졸들로 영문을 지켰다고 한   것은 그가 얼마나 치우씨를 두려워하고 겁냈는가를 말 해 주는 것이다.

  「상서(尙書)」여형(呂刑)편에 옛부터 내려 오는 교훈에 치우씨가 난을 일으킨다고 했다. 이는 그의 위엄을 두려워 하여 그러한 훈계를 세상에 전한 것이다.

  그 후 삼백여 년간 아무 일 없었으나 다만 소호씨와 싸워 이겼으며 단군(檀君) 원년에 이르기까지 전후가 궐천년(궐千年: 오랜 세월을 말한다.궐은  만이란 말이다)이나 된다.

궐천세(궐千歲)라 한 것은 신시씨(神市氏)의 나라가 만천세 이르도록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신시씨 이후 고시씨(高矢氏)와 치우씨(蚩尤氏)가 서로 이어 임금이 되었다.

(揆園史話 檀君記)

 

첨부 #2. ,중국사 연표 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