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영(大祚榮)의 아버지는?
沙月 李 盛 永(2007.2.20)
    발해를 건국한 것으로 알려진 대조영은 한 사람인데 그 아버지 이름이 요즈음 방영되는 드라마와 역사서에 3개 씩이나 나타나니 혼란스럽다. ‘대중상’, ‘대걸중상’. ‘걸걸중상’등이다.

    SBS TV 연속극 「연개소문」, KBS 1TV에 「대조영」이 방영되고 있는 데, 「연개소문」 이 조금 앞서고, 「대조영」이 조금 늦지만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배우는 다르지만 등장하는 인물이 중첩돼서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대조영의 아버지가 양쪽에 모두 출연하는데 「대조영」 에서는 ‘대중상’으로 등장하고, 「연개소문」 에서는 ‘대걸중상’으로 등장한다. 어느 것이 맞는 이름일까?

    뿐만 아니라 1984년 중국인 사학자이며, 길림성 고고학계의 1인자라고 하는 왕승례(王承禮)가 쓴 「勃海 簡史」를 번역한 「발해의 역사」(宋基豪 역)에는 대조영의 아버지는 ‘걸걸중상(乞乞仲像)’이고, 속말말갈인(粟末靺鞨人)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먼저 대조영의 아버지이며 고구려 장수로서 혁혁한 활동을 하는 KBS 1TV 드라마 「대조영」에서 ‘대중상’의 큰 활약들을 보면
      (1) 최초 대중상은 중국 만리장성과 대치하고 있는 고구려성 성주로서 고립무원의 상태에 있을 때 연개소문의 집에 하인으로 있던 대조영(당시 호칭은 개동이)이 천신만고 찾아가 부자간임을 확인하고, 탈출로를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 땅으로 들어가 산동반도에서 백제유민의 도움을 받아 배로 복귀하면서 당시 고구려를 공격중이던 설인귀, 소정방 등의 후방 보급을 교란시켜 패주하게 하는 눈부신 활약을 한다.

      (2) 평양성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서토(당나라)공격 문제로 요동 안시성의 양만춘과 갈등이 있을 때 대중상은 양만춘 수하장수로 있으면서, 연개소문 사후에도 마찬가지로 양만춘의 신임을 얻는 부하장수로 있다.

      (3) 양만춘 사후 대중상은 요동의 안시성 성주가 되어 고구려 평양성이 함락되어 보장왕 등이 모두 당나라에 포로로 잡혀 가고, 안동도호부(설인귀가 도독)가 설치되고 요동의 대부분의 고구려 성이 함락된 후에도 대중상의 안시성은 요동성과 함께 잔존하면서 대조영, 걸사비우, 흑수돌 등의 활약으로 중국으로 끌려가던 특기소지자 고구려 유민 1만 명을 빼돌린 것을 안시성으로 받아들인다.

      (4) 설인귀가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안시성을 공략할 때 대중상은 유민과 성민들을 이끌고 감쪽같이 도피하여 건모잠, 대조영 등이 고구려 부흥운동의 일환으로 ‘고구려국’을 선포한 한성으로 옮겨 가서 거기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

    다음은 SBS 「연개소문」은 ‘대걸중상’은 아직 젊은 장수로서 큰 활약은 나오지 않지만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주장으로 있는 북한산성을 공략하기 위한 전초기지 고봉산성(高峰山城)의 주장으로 나오며, 연개소문이 영류왕에 의하여 궁궐호위대장으로 발탁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앙숙인 숙부 연태수의 계략으로 왕명을 받고 전선 경험을 쌓기 위해 아리수전선의 전초기지 이곳 고봉산성으로 온다. (도중에 연태수가 보낸 호위군의 습격을 받으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연개소문이 고봉산성에 와서 이곳 주장‘대걸중상’과 북한산성을 공격할 방책을 협의하고, 연개소문이 김유신에게 사자를 보내 장수대결을 제의하여 일전을 치르는데 김유신의 칼이 부러지고, 연개소문은 김유신 부하가 쏜 화살을 어깨에 맞는 데까지 진행되었다.(지금까지 대조영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왕승례(王承禮)의 「勃海 簡史」를 번역한「발해의 역사」 제1장(말갈의 발전과 발해왕국의 건립) 제2절(당 왕조 초기 중국 동북지방의 정치형세와 발해완국의 건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왕승례의 「발해의 역사」
1984년 王承禮의 「勃海簡史」를 번역하여 1987년 초판, 1988년 재판
저자: 중국 동북사대 역사계 졸업, 중국 길림성 사회과학원 부원장, 문물국 부국장, 고고학회 이사장

    측천무후(則天武后) 만세통천(萬歲通天) 원년(서기696년), 영주도독 조홰가 거란 등 여러 민족을 잔혹하게 통치함으로써 거란, 말갈 등 여러 민족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거란추장 굴가(窟哥: 당 태종에게 귀속하여 송막도독부 도독에 임명되고 李氏 성을 하사 받음) 손자이며, 송막도독인 이진충(李盡忠)과 처남 손만영(孫萬榮)이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반항하면서 급기야는 조홰를 죽이고 영주를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이진충은 스스로 무상가한(無上可汗)이라 부르고, 손만영을 대장으로 삼았는데, 이르는 곳마다 모두 항복하여 열흘만에 병사는 수 만에 이르렀다. 측천무후는 조인사, 장현우 등 28명의 장수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진압하도록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거란의 병사는 단주(檀州: 현 하북성 밀운현)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9월에 이진충이 죽자 손만영이 그의 병사를 이끌고 싸워 익주(翼州: 현 하북선 익현)를 공격하고, 영주(?州: 현 하북선 하간현)를 함락시켰으며, 유주(幽州)를 탈취하였다.

    만세통천(萬歲通天) 2년(서기697년), 측천무후는 왕의종, 루사덕을 보내 20만 대군을 이끌고 포위 공격케 하였다. 이에 거란 대장 이해고(李楷固), 낙무정이 투항하였다. 결국 당군은 돌궐(突厥), 해(奚) 군대와 연합하여 697년에 이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고, 손만영을 피살되었다.

    영주 일대에 옮겨 살던 말갈인과 고구려인은 이진충이 당 왕조에의 반항 대열에 참가하였다. 이에 측천무후는 반당대열을 나누어 말갈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허국공(許國公)에, 속말말갈(粟末靺鞨)의 걸걸중상(乞乞仲像)진국공(震國公)에 봉하고, 당왕조에 반항하였던 죄상은 사면시켜 주었다.

    그러나 걸사비우는 이를 받기를 거부하였다.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는 말갈인과 고구려인을 이끌고 당 왕조의 세력이 쇠약해지면서 영주가 탈취되고, 말갈의 옛 땅이 비어있게 되는 유리한 시기를 틈 타 영주 일대를 떠나 동쪽으로 요수를 건넜다.

    측천무후는 거란에서 항복해 온 장수 이해고로 하여금 추격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걸사비우는 이해고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이 무렵 걸절중상도 죽었다.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은 사람됨이 용맹스러웠고 용병술이 뛰어났는데, 말갈인과 고구려인을 규합하여 천문령(天門嶺)에서 이해고와 크게 싸웠다. 여기서 대조영은 당 왕조의 추격병을 격파하자 이해고는 추격에 실패하고 돌아갔다.

    성력(聖曆)원년(서기698년) 돌궐이 당 왕조를 침범하여 위주(女爲 州: 현 하북성 회래현), 단주(檀州: 현 하북성 밀운현), 정주(定州: 현 하북선 정현), 조주(趙州: 현 하북성 조현)를 점거하였다. 이 때 거란은 다시 돌궐에 붙게 되었고, 이에 따라 중원에서 중국 동북지방에 이르는 도로가 차단되었다.

    대조영은 이 틈을 타서 말갈인과 고구려인을 이끌고 동쪽으로 진군하여 태백산(장백산) 동북쪽 기슭의 오루하(奧婁河: 목단강) 상류 일대로 되돌아 왔는데, 이 일대는 원래 읍루(말갈)의 옛 땅이다.

    영주에서 중원지방의 고도로 발전된 봉건문화에 영향을 받은 대조영동모산(東牟山) 아래에 성을 쌓고 거주하였으니 이것이 최초의 도성 - 뒤에 구국(舊國)이라 부름 - 으로 현재의 길림성 돈화현성(敦化縣城)의 오동성(敖東城)이 이에 해당한다.

    서기 698년 대조영은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 되었고, 말갈의 칭호를 그대로 썼다. (中 略)

    대조영은 당 왕조의 민족 압박정책에 대항하고자 말갈 각 부족과 고구려 유민에 대한 통치력을 강화하였다. 이에 사방에 흩어져 있던 말갈 각 부락과 고구려인을 수습 통합하면서 속말말갈의 귀족과 일부의 고구려 귀족을 중심으로 하여 현재의 목단강 상류의 돈화(敦化)와 영안(寧安)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다.

    이 나라는 서쪽으로는 거란에 접하고, 동쪽으로는 동해에 다다르며, 남쪽으로는 니하(泥河)를 경계로 신라와 접하였다. 병사는 수 만 명이 되었고, 가호는 10여만 호가 되었으며, 크기는 사방 2천리나 되었다.

    서기 713년 당 현종은 대조영발해군왕(渤海郡王),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으로 봉하였으니 이 후로는 말갈의 호칭을 버리고 발해(渤海)란 명칭만 사용하였다.

    발해왕국은 중국의 당 시기에 속말말갈 귀족이 중심이 되면서 일부분의 고구려 귀족을 규합하여 세운 나라이다. 당 왕조는 그 통치지역에 홀한주를 두었고, 발해의 통치자는 당 왕조가 준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의 봉호(封號)를 받아들였으니 발해는 당 왕조의 일부분이 되었다. (以下 略)


    또 주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주 33) 대조영의 건국에 대해서는 주로 <<신당서>> 권219 <발해전>과 <<구당서>> 권199下 <발해전> 에 의거하였다. 백조고길(白鳥庫吉: 일본의 「類聚國史)의 저자인 듯)발해를 고구려인이 세운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역사 사실과 부합되는 것이 아니다.

(첨부) 발해의 강역
발해의 강역도
    발해의 건국에 관한 기록이 가장 앞서는 것이 <<구당서(舊唐書)>>이고, 다음은 <<신당서(新唐書)>>이다.
    <<구당서(舊唐書)>> <발해전(渤海傳)>을 요약하면
    “고구려 멸망 후에 대조영(大祚榮)은 가족들을 이끌고 영주(營州)에 와서 살았다. (대조영이 고구려인임을 말해 주는 대목이다.)

    서기696년 거란의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진충이 패하여 죽은 후에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이해고(李楷固)로 하여금 이진충의 잔당을 치게 하였다. 먼저 걸사비우(乞四比羽)를 죽이고,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대조영을 추격하였다가 고려와 말갈을 합친 대조영에게 패하였다.

    대조영은 군중들을 이끌고 동쪽 계루고지(桂樓故地)에 자리잡았다.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자립하여 진국왕(震國王)이라고 하였다.”


    <<신당서(新唐書)>> <발해전(渤海傳)>을 요약하면
    동모산(東牟山)은 영주(營州)로부터 2천리 되는 곳이다.

    서기696년 거란의 이진충(李盡忠)이 영주도독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사리(舍利) 걸걸중상(乞乞仲像)과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라는 자는 고려의 유민을 이끌고 요수(遼水)를 건너 태백산(太白山) 동북 오루하(奧婁河) 변에 자리하였다.

    측천무후(則天武后)는 걸사비우(乞四比羽)허국공(許國公)에, 걸걸중상(乞乞仲像)진국공(震國公)에 봉하고 용서하였으나 걸사비우가 말을 듣지 않았다.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이해고(李楷固)를 시켜 걸사비우(乞四比羽)를 쳐서 죽였다. 이 때 걸걸중상(乞乞仲像)은 이미 죽었고, 그 아들인 대조영이 잔여부대를 이끌고 도망을 쳐서 이해고(李楷固)가 천문령(天門嶺)까지 쫓아갔다가 패하고 돌아왔다.

    이후 거란족이 다시 돌궐국에 투항하며 영주(營州)를 돌궐이 차지하니, 중국과 길이 끊어져 발해를 토벌하지 못했다.”


    광무15년(서기1911년) 선천 사람 인경(仁卿) 계연수(桂延壽)묘향산 단굴암(檀窟庵)에서 썼다는 「환단고기(桓檀古記)」범례에 의하면 ‘고기(古記)를 책에서 인용한 것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가 처음이다. 그러나 지금 그 고기(古記)를 구해 볼 수 없으니 삼성기(三聖紀: 安含老와 白寬默 저), 단군세기(檀君世紀: 杏村 紅? 편), 북부여기(北夫餘紀: 休崖居士 范樟 저), 태백일사(太白逸史: 一十堂主人 李陌 편)를 한 책에 합쳐 「환단고기(桓檀古記)」라 이름하였다,’고 하였다.

    「환단고기(桓檀古記)」태백일사(太白逸史) <대진국본기(大震國本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조대기(朝代記: 조선 역대 기록을 말하는 듯) 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개화(開化: 고구려 보장왕의 연호) 27년(서기668년) 9월 21일에 평양성이 함락되니 그때 진국장군(振國將軍) 대중상(大仲像)이 서압록을 지키다가 변을 듣고 드디어 무리를 이끌고 요해처(要害處)로 달아나는 길에 개원(開原: 고조선 시대 藏唐京의 옛터)을 지나게 되었는데 소문을 듣고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8천명이었다.

    곧 동쪽으로 함께 돌아가 동모산(東牟山)에 이르러 도읍하고 튼튼한 성벽으로 자위(自衛)하여 국호를 후고구려(後高句麗)라 일컫고, 연호를 중광(重光)이라 하며,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원근의 여러 성의 많은 사람들이 돌아와 많이 붙좇았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따르다)

    오직 옛 땅 되무름(되찾음)을 자기의 임무로 삼다가 중광(重光) 32년 5월에 붕하니 묘호는 세조(世祖)요 시호는 진국열황제(振國烈皇帝)이다.

    태자 조영(祚榮)이 부고를 전하는 사자를 따라 영주(營州) 계성(?城)으로부터 무리를 거느리고 이르러 제위(帝位)에 나아가서 홀한성(忽汗城: 단군조선시대 辰韓 땅, 고구려 때 桂婁部에 속한 寧古塔 부근)을 쌓아 도읍을 옮기고 군사 십만을 모으니 위력 있는 명성이 크게 떨쳤다.

    이에 정책을 세우고 관제를 정하여 당(唐)나라에 대항하여 적으로 삼고, 복수하기를 스스로 맹세하였다. 말갈의 장수 걸사비우(乞四比羽), 거란 장수 이진영(李盡榮)과 손을 잡고 군사들을 연합하여 당나라 장수 이해고(李楷固)천문령(天門嶺)에서 크게 쳐부수고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배치하여 군현을 지키며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위로하고 두루 보호하여 정착시키니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얻어 여러 가지 벼리(綱領)를 혁신하였다.

    나라 이름을 정하여 대진(大震)으로 삼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으며, 고구려의 옛 강토를 의지해 6천리의 땅을 개척하였다. 천통(天統) 21년(서기 719년) 봄에 대안전(大安殿)에서 붕하니 묘호는 태조(太祖)이고, 시호는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이다.

    태자 무예(武藝)가 (서기719년) 즉위하여 연호를 고쳐 인안(仁安)이라 하고, 서쪽으로 거란과 더불어 오주목(烏珠牧) 동쪽 십리에 경계를 정하니 황수(潢水)에 이르렀다.(中略)

    인안 16년(734년)에 구다(句茶), 개마(蓋馬), 흑수(黑水) 여러 나라들이 거국적으로 와서 항복하니 거둬들여 성읍으로 삼았다. 이듬해 송막(松漠)에 12성을 쌓았고, 또 요서에 6성을 쌓음으로써 드디어 5경, 8십주, 1군, 38현을 영유하게 되어 넓이가 9천 여 리였으니 국세가 융성했다고 할 만하다.

    이 해에 당나라와 왜 및 신라가 모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니 천하가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일컬었으며 ‘발해(渤海) 사람 셋이면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해낸다’는 말까지 있었다. "


    위와 같은 사서(史書)에는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아버지를 신당서에는 걸걸중상(乞乞仲像)이라 했고, 한단고기에서는 대중상(大仲像)이라 하였으며, 대걸중상이란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구당서>와 <신당서>의 중요한 차이점은
    ① <구당서>에는 없는데 <신당서에> ‘대조영의 아버지가 걸걸중상’이라고 한 것이다.
    신당서에 아들 대조영과 아버지 걸걸중상은 성씨가 다르다. 사실이라면 이는 (1) 양부자(養父子)간이거나 (2)대조영이 성씨를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더구나 ‘걸걸(乞乞)’ 말갈족 성씨이고, ‘대(大)’는 조선족 성씨이다. 후자 즉 대조영이 성을 ‘걸걸(乞乞)’에서 ‘대(大)’씨로 바꾸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고구려 시조 주몽이 성씨를 해(解)에서 고(高)로 바꿨다는 기록이 명확한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난다)

    ② <구당서>에는 대조영이 추격하는 이해고를 천문령에서 물리치고, 계루고지에 자리를 잡아 동모산에 성을 쌓고 진국왕이되었다고 했다. 즉 대조영에 의한 천문령전투 후, 동모산에 정착 진국왕이 되었으니 천문령 전투가 먼저이고, 다음에 발해 건국이다.

    이에 비하여 <신당서는>는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고려의 유민을 이끌고 요수(遼水)를 건너 태백산(太白山) 동북 오루하(奧婁河) 변에 자리잡았는데 이해고가 추격해와서 걸사비우를 죽이고, 걸걸중상을 이미 죽고, 대조영천문령에서 이해고를 물리쳤다는 것이다. 걸걸중상에 의하여 태백산동북 오루하에 정착한 후(건국), 걸걸중상은 이미 죽고, 걸사비우와 대조영에 의한 천문령전투가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이 두 기록만으로는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가 없다.

    이 한단고기 태백일사의 기록에 따르면 대조영이 서기698년에 홀한성에 나라를 세우기 30년 전에 대중상에 의하여 동모산후고구려가 건국되어 있었다. 구자일(具滋一)저 「고구려발해지리사」에서는 ‘<신당서>도 이를 인정하여 천문령전투 이전에 후고구려대진국 전신으로 표기하기 위하여 걸걸중상을 등장시킨 것’으로 보았다,

    왕승례(王承禮)의 「발해의 역사」는 곧 <신당서>에 따른 것 같다. 그는 또 사서(史書)에 “발해는 중국의 당 왕조 시기에 속말말갈 귀족이 중심이 되면서 일부분의 고구려 귀족을 규합하여 세운 나라”라고 속단을 하였고, 나아가 “당 왕조는 그 통치지역에 홀한주를 두었고, 발해의 통치자는 당 왕조가 준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의 봉호(封號)를 받아들였으니 발해는 당 왕조의 일부분”이라면서 사가의 영역을 넘어 마치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정치가가 떼를 쓰는 것같은 말을 역사책에다 기록하고 있다.

    중국 왕조로부터 봉호를 받으면 모두 중국 왕조의 일부분인가?
    신라 태종무열왕은 당나라 태종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에 책봉되었다.
    고려 충선왕(忠宣王) 원나라 무종으로부터 「정동행중서성우승상고려국왕개부의동삼사태자태사상주국부마도위심양왕(征東行中書省右丞相高麗國王開府儀同三司太子太師上柱國駙馬都尉瀋陽王)」이라는 긴 봉호로 책봉되었다.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는 책봉사를 중국(명나라)에 보내서 뿐만 아니라 왕후, 세자까지 중국 명나라 황제의 승인을 받는 절차를 밟았다.
    이 신라, 고려, 조선이 모두 중국 당(唐), 원(元), 명(明) 각 왕조의 일부인가?

    저들 중국인은 발해가 고구려인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이미 나라도, 종족도 중국에 흡수되어 없어져버린 말갈인이 세운 나라로 단정함으로써 발해역사를 중국역사로 둔갑시키는데 장애를 없애자는 저의가 숨어 있는 것 같다.
    중국의 소위 동북공정(東北工程: 東北邊彊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약칭, 즉 吉林省, 遼寧省, 黑龍江省등 중국 동북 3성의 역사와 현실 문제 등 제반 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국가적 프로젝트)은 이미 이 때(1984년)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니 10세기경 송나라 때 구양수 등이 황제의 칙명을 받고 신당서(新唐西)를 집필할 때부터 동북공정은 태동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단단히 정신 차리지 않으면 멀쩡한 나라가 역사에서 없어지는 불상사가 없으란 법도 없을 것 같다. 속담에 ‘눈 뜨고 코 베가는 세상’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