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조선역사 왜곡, 조작의 시작 

昔有桓因(석유환인)

沙月 李 盛 永

  일제가 우리나라 역사의 왜곡(歪曲), 조작(造作), 말살(抹殺) 하는 정책은 크게 세가지로 진행되었다.
    첫째는 우리 역사서의 분서(焚書)이고,
    둘째는 역사의 조작(造作)이며,
    셋째는 조작된 역사의 보급(補給)이다.
  일제의 초대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가 1910년 11월 초부터 국내의 행정력과 군, 경찰을 동원하여 우리나라 방방곡곡에서 근 1년 2개월 동안 소위 그들이 말하는 불온문서(不穩文書) 일체를 수색(搜索), 압수(押收), 분서(焚書)하는 범 국가적인 시책을 군사작전처럼 전개하였다.

 

  당시 서울 종로 일대의 서점을 비롯해서 지방의 대, 소 서점, 향교, 서원, 구가(舊家), 양반 사대부가 등 불온서적이 있을 만한 곳은 가리지 않고 수색, 압수하였다. 이를 시행하는 과정에서‘단군’이란 글자가 들어있는 국내의 사료는 물론 심지어는 대마도 구석까지 손을 뻗쳐 찾아내기도 하였다. 그들이 불온서적이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1차적인 것이 단군 관련 사료이고, 다음은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내용의 서적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압수한 서적의 물량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당시 총독부가 발행한 관보(官報)를 근거로 하여 판매금지 책자와 압수한 사료가 무려 20여만 권에 달했다고「제헌국회사(制憲國會史)」는 밝히고 있으나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추정이다. 압수한 서적 가운데 그들이 우리의 역사를 왜곡, 조작하는데 유익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태워버리는(焚書)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이렇듯 우리나라 사료를 분서(焚書), 인멸(湮滅) 해 놓고는 그들이 독일인 리스(Riess: 실증사학의 거두 Ranke의 제자)를 초빙하여 회원 40명으로 된 「사학회(史學會)」를 조직하여 그에게서 배운 소위 실증사학(實證史學)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사실(史實)의 고증자료 없이는 한 줄의 역사도 기술할 수 없게 하는 간교를 부렸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사이또오(齊藤實)총독은 조선 사람들에게 본격적인 우민화(愚民化), 반(半)일본인 화 시책을 다음과 같이 전개하였다.

    ①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역사, 전통, 문화를 알지 못하도록 하여 민족의 얼과 문자를 잊어버리게 한다.

    ② 조선사람 선인(先人)들의 무위(無爲), 무능(無能), 악행(惡行)을 많이 들추어내서 이를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 그들 스스로가 선인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는 것을 기풍화 한다.

    ③ 조선의 청년들이 조선의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한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되면 실망과 허무감에 빠질 것이므로 그 때에 일본의 인물, 사적, 문화를 가르치면 쉽게 동화하여 반(半)일본인 화 되게 한다.

  이러한 식민정책을 뒷받침 하기 위해서 조선역사의 왜곡, 조작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단군사 조작, 한사군 관련 역사 조작, 임나 일본설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역사를 왜곡, 조작하였다.

 

▲ 단군사(檀君史))의 조작

  단군 관련 사료(史料)를 철저히 압수, 분서를 단행한 후 그들은 역사를 조작하는 사업에 착수하였는데 그 효시가 단군사(檀君史)의 조작이다.    단군사의 조작은 삼국유사(三國遺事) 단군고기(檀君古記)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전말은 이러하다.

 

    - 역사서 특히 단군 관련 사료의 압수, 분서 만행이 있은 후  단군 관련 내용이 관심을 끄는 역사서가 삼국유사 정덕본(正德本: 順庵 安鼎福의 주해본)이었는데 이는 조선 역사학자들도 구해 볼 수가 없었다.

 

      * 단재 신채호는 「朝鮮上古史(조선상고사)」에서 ‘10년을 두고 삼국유사 정덕본(正德本)을 구해 보았으면 하였으나 부득이하였다’고 하였고,
        육당 최남선도 ‘삼국유사 정덕본을 아직까지 보지 못하였으며 결국 정덕본의 진본(眞本)이 한 권도 없음이 이 나라 사학계의 상식인 것 같다’고 하였다.

 

    - 1926년 일본 경도제국대학 후찌후지도라(內藤虎次郞) 교수와 이마니시(今西龍) 조교가 공모하여 〈삼국유사 정덕본〉을 극비리에 사개(詐改: 남이 속도록 개조하는 것), 영인(影印: 서적 등을 사진으로 복사하여 인쇄하는 것)하여 관계 요로에 다수 배부하였다. 이것을‘경도제국대학 영인본’이라 한다.

 

      * 후찌후지도라가 쓴 서문에 의하면 명(明) 정덕(正德) 임신년(壬申年: 서기1512년)에 경주 부윤 이계복이 중간한 삼국본사(사기)와 삼국유사 양본이 다른 곳에서 간행한바 없는 귀한 것인데 임진왜란 때 왜장들이 일본으로 가져가 당시에는 미장(尾張)의 덕천후(德川侯)와 동경의 신전남작(神田男爵)이 각 1본씩 소유하고 있었다.          신전 소유본 삼국유사 정덕본을 동경대학에서 소량 영인 한 것을 경도재국대학 조교 이 마니시(今西龍)가 1부 소장하고 있어서 이를 경도제국대학에서 다시 대량 영인하였는데 이를 경도제국대학 영인본이라 한다고 하였다.

 

    - 삼국유사 정덕본 경도제국대학 영인본이 출간된 후 1932년 9월 서울의 고전간행회에서 이 영인본을 원형 크기로 발행하였고, 조선사학회명의로 활자본의 삼국유사를 상당량 발간 보급하였다.

 

      * 이와 같이 축소 영인본, 원형 크기 영인본, 활자본 등 여러 가지 형태 로 다랑 보급한 것은 그들이 삼국유사 정덕본(正德本)을 개서(改鼠: 쥐 뜯어 먹은 것처럼 글씨를 고치는 것)한 것을 감추기 위한 술책이었다.

 

    - 이 영인본들은 모두 교묘하게 개서, 조작한 것인데  대표적인 부분이 「昔有桓國(석유환국)」「昔有桓因(석유환인)」으로‘國(국: 口자 안에 玉자가 든 글자)’자를 因(인)’로 개서(개鼠)한 것이다. 즉 자 안의 자를 긁어서 자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 이는 육당 최남선에게 발각되어 1932년 7월 21일 조선사편수회 회의석상에서 문제를 제기하면서 ‘고서의 인용을 함부로 개서(改鼠)한다는 것은 심히 부당한 일이다’ 라고 하며 이를‘천인(淺人)의 망필(妄筆)’이라고 엄숙히 항변하자 일본인들은 크게 당황하였다.

 

    - 변조된 삼국유사는 최남선의 항변이 있은 후에도 원상회복 됨이 없이 유통되었는데 변절자 육당 최남선도 그 후로는 이 문제를 논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을 보면 일제로부터 엄청난 압력과 위협과 회유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 삼국유사 정덕본의 조작이 뜻하는 것

‘昔有桓國(석유환국)’‘옛날에 환국(桓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라는 뜻이다.
  이는 삼국유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 이전에 이미 환국(桓國) 이라는 실체적인 나라가 존재하였으므로 우리 민족의 역사는 중국 한족(漢族)에 못지않게 유구(悠久)하고 찬란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는 이것을 「昔有桓因(석유환인)」으로 개서(改鼠), 조작한 것이다.
  ‘옛날에 환인(桓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로 바뀌는데 이는 고조선의 존재사실은 사라지고, 단군(檀君), 환웅(桓雄)에 이어 환인(桓因)이라는 신화(神話)적 인물의 존재로 바뀌는 것이다.
  이렇게 일본인들이 역사서를 개서(改鼠)하는 모험을 하면서까지 조작한 것은 반만년의 유구한 조선역사를 삼국시대 이후로 축소시켜 일천하고 보잘 것 없는 역사로 비하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의도는 곧 단군사를 개서, 조작한 장본인인 이마니시(今西龍)의 박사학위 논문 「단군신화설(檀君神話說)」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악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계에 널리 유포되므로서 상당한 사람들이 조작된 단군신화를 그대로 믿게 된 것이다.

 

  또 식민지판 《조선사대계(朝鮮史大系)》상세편에 일본인 어용학자 수우다(少田省吾)가‘단군전설을 몽고의 압박 받은 시대적인 반동(反動)으로 일어난 것이다’라고 씀으로써 일제 어용학자들이 단군의 존재를 한국사에서 국난과 결부시켜 그럴듯하게 부정하는 간교를 부렸던 것이다.

 

  일제의 단군사 조작에 있어서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광복이후에도 일부 단군조선을 신화가 아닌 정사(正史)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고, 일제 식민사관에 젖은 자들이 국내 사학계(史學界)를 장악함으로써 일제에 의하여 조작된 단군신화는 오히려 각급 학교에서 가르치는 등 건재해 왔으며,
  심지어는 1960년대 국내 일간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게재될 정도로 우리 민족의 가슴에 뿌리깊게 물들여 놓았던 것이다.

 

  『단군은 실제 인물이 아니며, 단군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하나의 신화이지 결코 사실이 아닌 이상 단군의 「이미지」가 현대인에게 어떤 감명이나 공감을 주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단군신화는 고려후기 몽고 점령하의 고려인에게 천손민족(天孫民族)이라는 긍지와 독립정신을 고취한 것으로 암담한 현실이 주는 민족정신의 위축을 막는 낭만이었다』

 

▲ 본격적인 조선역사 조작작업

  단군사(檀君史)의 ‘단군신화(檀君神話)’조작은 조직적인 조선역사조작의 첫 단계 작업이었다. 이렇게 조작된 삼국유사의 단군사는 다른 역사조작과 함께 다음과 같은 조직적인 조선역사 조작작업으로 이어졌다.

    - 1922. 12월 조선총독부 훈령 제64호로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설립되었는데 고문에 이완용, 박영효, 권중현, 위원에 어윤적, 이능화, 정만조, 유맹, 이마니시, 이나바, 마쓰이, 가시하라 등이 임명.

 

    - 1925. 6. 6일본 천황 칙령 제28호로 「조선사편수회」가 독립관청으로 설치.

    고문 이완용, 박영효, 권중현, 구로이따, 핫또리, 나이또, 야마다, 이윤용, 

    위원 최남선, 이능화, 어윤적, 윤필구, 현채, 홍희, 유맹, 이진호, 이마니시, 도리이, 마쓰이, 시하라, 오따니, 후지다,

    간사 김동준, 정교원, 손영목, 엄창섭, 이대우, 이동진, 홍희, 신필구, 이병욱,

    수사관 이나바, 후지다, 나까무라, 스에마쓰, 신석호,

    수사관보 이병도 등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정무총감을 회장으로 하여 위원회에서 편찬방침을 결정하고, 실제 편찬업무는 수사관과 수사관보가 담당하였다.

 

    - 1931. 12월에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朝鮮史)」일부가 인쇄 시작.

 

    - 1937년에는 「조선사(朝鮮史)」 35책으로 완성.

      16년 동안에 무려 100만원이라는 거액이 투자된 것이다.

 

단군사 조작에 기여한 사람들

어윤적

1935년에 동사연표(東史年表) 출간

윤필구

1938년 조선사편수회가 끝난후 고향 나주로 돌아가 민족의 정사(正史)가 말살된 것을 애통해 하며 1938년에 제자 서계수와 함께  조선세가보(朝鮮世家譜)를 간행함

이마니시

삼국유사의 桓國(환국)을 桓因(환인)으로 개작하여 조선 상고사 역사를 신화로 조작함으로써 환국과 단군의 실체를 부정함

이나바

한국사가 단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식민지로부터 시작하였다고 강조

스에마쓰

임나흥망사를 지어 가야지방이 고대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조작

이병도

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여 吉田東伍, 津田左右吉 등에게 자극을 받아 한국사를 연구하고, 조선사편수회에 관여하면서 이마니시, 이나바, 구로이따 등과 접촉하였다.

이마니시와 함께「조선사」의 신라이전-고려시대까지를 편찬해 한국고대사를 조작하는데 매우 공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