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다물(多勿) 전쟁(1)
<시조 동명성제- 제6대 태조>
沙月 李 盛 永(2006.12.2)
  요즈음 MBC 월화드라마로 ‘주몽’이 방영되고 있는데 원래 드라마라는 것이 역사성에만 충실할 수는 없기 때문에 작가나 제작진이 흥미를 돋구는 내용을 가미하다 보면 좀 과장이 심하여 종종 역사성 논란이 이는 경우가 많다.

  ‘주몽’에 방영된 내용을 놓고도 금속문화의 선후(先後)에 관한 논란이 일고 있다. 드라마에서는 부여국이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의 철 제련기술을 빼내 철제 검을 제작하여 옥저와 밀거래 하다가 들켜 부여 금와왕이 현도군 태수로부터 수모를 당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즉 한(漢)나라 금속기술이 부여(고조선) 보다 월등이 높은 것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2006년 6월 30일자 조선일보 '이덕일 舍廊' 에 실린 '고조선과 漢나라의 금속기술' 이라는 글에는
  금속문화는 중국의 사가 사마천이 사기(史記)에 이미 동이족 배달국의 14대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 BC 2600년경)인 치우천왕(蚩尤天王)을 ‘동두철액(銅頭鐵額)’‘구리머리에 쇠이마’를 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동이족은 고조선 이전부터 이미 금속문화에 들어간 것을 의미하는데 중국의 금속문화는 BC 4세기경 한대(漢代)에 와서야 철을 제련해 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라는 것이다.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금속기술에 관한 것은 아니라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다물’ 에 대한 것이다. '주몽' 드라마에
  금와왕이 세 왕자 대소, 영표, 주몽에게 부여의 시조의 유물이며 부여를 상징하는 ‘다물활’ 이 봉안된 시조산의 동굴을 찾아 그 다물활의 시위를 걸어 시위를 당기고 오라고 과제를 주는데, 대소와 영표는 활시위를 걸지 못하고 돌아오고, 뒤 늦게 찾은 주몽을 활 시위를 걸고 시위를 당기다가 활을 부러뜨리는 장면이 나온다.

  또 부여국의 금와왕은 태자로 있을 때 주몽의 혈통상 아버지인 해모수와 함께 한무제가 고조선의 강역을 침범하여 한사군을 설치하여 조선을 압박하는 과정에서 한나라에 저항하는 동지로서 함께 ‘다물군’ 을 지휘했다는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온다.

  또 드라마는 주몽이 조선 유민을 이끌고 대소가 집권하는 부여를 탈출하고,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유민들을 끌어 모아 ‘다물군’을 편성하고, 주몽이 다물군 대장이 되어 본계산(?)을 근거지로 한나라로 가는 조공대열을 공격하여 탈취하는 등 반한(反漢)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나라를 건국할 준비를 하는 과정도 나온다.

  다물(多勿)이란 말은 지금까지 알려지기로는 세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일제가 우리 역사의 말살을 목적으로 하는 소위 식민사관(植民史觀)으로 일제 때는 물론 해방이후에도 일제의 주구(走狗)에 의한 역사 왜곡 때문에 신화(神話) 운운하면서 흐지부지 취급해 온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제38세 단군(BC 590년 - 546년)이 다물(多勿)이다.(桓檀古記)
    두 번째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편에 多勿(다물)이 고구려 말로 ‘옛 땅을 되찾는다(復舊土)’ 라는 뜻이라고 하며, 동명성왕이 된 고구려 시조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고 내세운 국시(國是)라는 것이다. 즉 고구려는 ‘고조선의 강역을 회복하는 것’ 을 국시의 제1로 내 걸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오늘날 사회 일각에서 일고 있는 소위 ‘다물운동(多勿運動)’의‘다물(多勿)’은‘우리 조상들이 살았고 이루었던 모든 정치, 문화, 역사, 철학 등을 발굴, 복원하여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개척, 창조하는 역사활동’ 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이 ‘고구려의 다물’ 이야기는 곧 두 번째인 고구려가 시조 주몽이 국시로 내 걸었다는 ‘옛 땅을 회복한다’는 뜻의 다물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주몽)이 내건 ‘다물’ 을 역대 임금들이 이를 위하여 얼마나 노력했으며, 그때의 고구려 강역이 어떻게 변천하였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요즈음 중국이 소위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미명아래 ‘고구려 역사가 중국의 역사’ 라고 공작을 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볼 때 ‘고구려의 다물’ 은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한마디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박영규 지음「고대 삼국의 역사발굴. 그 첫번째 시도! 新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에서 고구려 역대 왕들이 시조 동명성왕의 국시를 어떻게 받들어 강역을 회복하는데 노력했는지를 그 요도와 함께 제시하고 있다.

  이 저서는 한국측 사료로 고려 때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史)를 근거하였고, 중국측 사료로는 한(漢)나라 무제 때 사마천의 사기(史記), 후한(後漢) 명제 때 반고의 한서(漢書), 송(宋)나라 범엽의 후한서(後漢書), 진(晉)나라 진수의 삼국지(三國志), 당(唐)나라 태종 때 이연수 등 20여명의 진서(晉書), 제(齊)나라 무제 때 소자현의 남제서(南齊書), 당(唐) 태종 때 요서렴의 양서(梁書), 북제(北齊) 문제 때 위수의 위서(魏書), 당(唐) 태종 때 이연수의 남사(南史)와 북사(北史), 당(唐) 태종 때 위징의 수서(隨書), 후진(後晉) 출제 때 유구의 구당서(舊唐書), 송(宋)나라 인종 때 구양수의 신당서(新唐書), 송(宋)나라 태조 때 설거정의 구오대사(舊五代史), 송(宋)나라 때 구양수의 신오대사(新五代史), 원(元)나라 순제 때 달탈 등의 요사(遼史)와 금사(金史), 원(元)나라 순제 때 송령, 왕위 등의 원사(元史) 등을 근거하였고, 일본측 사료로는 일본서기(日本書記). 일본고사기(日本古事記) 를 근거하였다고 열거하고 있다.

  또 이 저서에서는 고구려 역대 임금을 ‘왕(王)’ 이란 호칭를 쓰지 않고, ‘제(帝)’ 라는 칭호를 쓰고 있는데, 아마 중국의 ‘황제(皇帝)’ 동격으로 격상시킨 호칭이라 생각된다. 중국에서 임금과 귀족의 호칭으로 ‘황제(皇帝)’. ‘왕(王)’,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이 있는데, 황제가 다스리는 강역을 ‘천하(天下)’ 라 했고, 제후가 다스리는 곳을 ‘국(國)’ 이라 하였다.

  제후국의 임금에는 격이 높은 제후국은 ‘왕(王)’, 격이 낮은 제후국 임금은 ,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으로 봉해졌다. ‘왕’,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은 제후국 임금이 아닌 사람에게도 귀족 칭호로 부여하였다.
  SBS주말 드라마 ‘연개소문’ 에 보면 수나라 문제의 아들 중에 진왕(秦王: 제2자), 한왕(漢王: 제6자) 등의 호칭이 나온다.

  역사서는 통상 본기(本紀), 세기(世紀) 그리고 열전(列傳)으로 구분하여 쓰여지는데 역대 임금을 중심으로 사적(事蹟)을 기록한 기전체(紀傳體)의 역사를 ‘본기’라 하고, 속국의 역사를 , 개인이나, 지방, 기타에 대한 전기(傳記)를 한데 모아 기록한 역사책을 ‘열전’이라 한다.
박영규 지음 新삼국사기 고구려 본기(1997년 초판)
저자는 고구려 역대 왕(王)의 호칭을 ‘제(帝)’ 라 하였다.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당당한 독립국가로서 중국의 황제(皇帝)와 동일한 격으로 기록한다는 뜻인 것 같다.
  박영규 지음 新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수록된 고구려 각 왕조의 '고조선 고토회복 정책(다물정책)'의 수행 내용을 간추리고, 각왕조의 강역도를 옮겨 본다.
◆ 제1대 동명성제 본기
  주몽이 구려국의 왕위에 오르면서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로 개칭하고, 자신의 성을 ‘해(解)’ 에서 ‘고(高)’ 로 고쳐 부르고, 국가 위상을 일신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고조선 영토 회복정책(다물정책)을 폈다.

  동명성제 재위간 중요한 다물활동은 다음과 같다

      - 우선 변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동북 변방에 흩어져 살고 있는 말갈(靺鞨) 부락을 평정하여 더 이상 고구려 국경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 고구려가 개국 된 해인 BC37년에 동명성제 자신이 직접 나서 비류수 상류에 있던 비류국왕 송양을 직접 찾아가 담판하여 비류국(沸流國)을 고구려에 복속시키고, 비류국을 ‘옛 땅을 회복한다’ 는 뜻의 고구려어인 ‘다물(多勿)도’ 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다물후(多勿侯)에 봉하였다.

      - BC 34년 7월에 졸본성을 완공하고, BC 32년 10월에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방에 있는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하였다.

      - BC 28년에는 부위염으로 하여금 북옥저(北沃沮)를 쳐서 멸망시킴으로써 동부여(東扶餘: 金蛙王)와 대등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제1대 동명성제 시대 고구려 강역(B.C16년경)
◆ 제2대 유리명제 본기
  유리명제는 동명성왕의 장남으로 동부여 출신의 예씨 소생이며, BC38-37년에 동부여에서 태어나 장성한 후 고구려로 망명하여 BC19년 4월에 태자에 책봉되고, 9월에 동명성제가 40세를 일기로 죽자 고구려 제2대 황제에 즉위하였다.

  유리명제는 즉위한 이듬해인 BC18년 7월에 다물후 송양의 장녀를 황후로 맞아들였으나 이듬해 죽자 다시 송양의 둘째 딸을 황후로 삼았다. 고구려에 기반이 없던 유리명제는 혼인을 통하여 지지기반을 확대하려 하였다.

  유리명제 재위간 중요한 다물활동은 다음과 같다.
      - 즉위후 11년, BC9년에 부분노에게 대군을 주고, 직접 참가하여 선비족 토벌을 감행하여 항복을 받아내어 군주로서 위엄을 갖추게 되었다.
      - 이무렵 동부여 대소가 왕이 되면서 고구려를 적대시하여 침략을 자행하였기 때문에 동부여와 고구려 간에 전쟁이 계속되었다. 유리명제14년(BC6년)에 동부여 대소가 화친을 제의 하였다가 고구려의 강경론자들의 반대로 화친이 성립되지 않자, 그 해 11월에 대소는 부여군 5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폭설로 동사자가 많이 발생하자 스스로 퇴각하였다.

      - 동부여의 계속된 침공과 BC1년 8월 소위 ‘교사사건’
(부여의 화친 제의에 강경론자 탁리와 사비를 교제에 쓸 돼지를 이용하여 제거한 사건) 과 이듬해 1월 태자 도절이 죽자 백성들이 불안해 하면서 민심이 유리성제에게서 등을 돌리자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기3년 10월 졸본에서 위나암으로 천도하여 조정을 완전히 장악 함으로서 부여의 전쟁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 정권장악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 서기12년 중원의 내분을 틈타 동호와 흉노가 대거 남하하고, 한(漢)에 예속되었던 요서지방의 예맥(濊貊)이 봉기하자 당황한 신(新)의 왕망이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였다가 고구려가 거절하자, 요서의 대윤 전담을 시켜 고구려를 치게 하였으나 고구려는 반격을 가하여 한군을 격파하고 전담을 죽였다.
      전담의 전사 소식을 접한 왕망은 엄우를 시켜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여 엄우의 계략에 말려든 고구려 장수 연비가 죽자 유리명제는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다.

      - 고구려가 한나라와 전쟁을 벌리는 틈을 타서 부여군이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부여군은 태자 무휼이 이끄는 수비대의 전략에 말려 전멸한다.

      - 고구려군이 승전을 거듭하자 서기14년 8월, 유리명제는 오이와 마리에게 군사 2만을 주어 고구려 서쪽 양맥을 쳐서 아우르고, 다시 진군하여 한나라의 고구려현을 정복하였다.
      고구려현은 한의 동방정책의 요서 전초기지였기 때문에 고구려가 한의 고구려현의 정복한 것은 한의 동방정책을 무력화 시키는 획기적인 성과였다.
제2대 유리명제 시대 고구려 강역(A.D16년경)
◆ 제3대 대무신제 본기
  대무신제는 유리명제의 제3자 무휼로써 장자 도절과 차자 해명이 유리명제와의 갈등으로 죽거나 자살하는 바람에 제위에 올랐다. 대무신제는 신동으로 불릴 만큼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다.

  대무신제가 제위에 오를 즈음, 중국에는 전한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왕망의 신(新)나라에는 부패한 정권에 봉기하여 농민을 주축으로 한 백성들이 일어난 산동의 ‘적미(赤眉)의 난’, 녹림산의 ‘녹림의 난’ 등 반란이 일어나 혼란기에 접어들었다가 한왕조의 후예인 유연과 유수 형제가 한(漢)의 재건을 기치로 세우고 일어나 신의 왕망을 제거하고, 동생 유수가 제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후한(後漢 또는 東漢)의 광무제(光武帝)다.

  대무신제 재위간 중요한 다물활동은 다음과 같다
      - 왕망의 정권이 붕괴하자 동북의 두 맹주 부여와 고구려에게는 영토확장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 중에서도 부여가 먼저 속내를 들어내 대무신제 3년(서기20년) 부여의 대소가 먼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시비를 걸어오자 고구려 대무신제는 이듬해 12월에 부여를 선제공격하여 그 이듬해 2월에 부여왕 대소의 목을 베자 대소의 막내 동생은 부여를 탈출하여 압록곡 부근에 갈사부여를 세우고, 사촌동생은 부여 백성 1만여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귀순하였다.

      - 중원이 급격한 변화를 겪고있는 가운데 고구려는 안으로는 관제를 정비하고, 밖으로는 팽창정책윽 꾸준히 지속하여 대무신제 9년(서기26년) 10월에는 대무신제가 직접 정벌에 나서 개마국왕을 죽이고, 복속시켰으며, 12월에는 구다국을 복속시킨다.

      - 고구려가 팽창정책을 가속화하고 있을 무렵인 대무신제 11년(서기28년) 7월에는 후한의 광무제가 요동태수를 앞세워 10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여 위나암성이 포위되어 수성전(守城戰)이 전개되면서 시일이 지날수록 물의 고갈로 고구려가 어려워질 때 재상 을두지의 이른바 ‘잉어계책’(잉어를 수초에 싸서 적장에게 보냄)이 주효하여 한군이 스스로 물러갔다.

      - 한군이 물러간 후 고구려 대무신제 20년(서기37년) 전한의 무제가 설치했던 한사군 중의 하나인 낙랑(樂浪)을 정복하는데, 낙랑정복에는 둘째 아들 호동(好童)이 낙랑공주와 결혼하는 등 활약이 컸으나 끝을 보지 못하고, 첫째 왕후가 시기하여 꾸민 계략에 걸려 대무신제 25년(서기32년)에 자결하고, 낙랑정벌은 그 5년 후에 이루어진다.

      - 고구려의 낙랑의 복속은 동한의 반발에 부딪혀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고구려가 응하지 않자 동한의 광무제는 (서기44년)에 바다를 통해 낙랑지역에 대병력을 투입하여 이에 밀린 고구려는 낙랑지방을 동한에게 다시 빼앗긴다. 그 해 대무신제는 41세를 일기로 죽는다.
제3대 대무신제 시대 고구려 강역(A.D40년경)
일제는 마치 한사군의 낙랑이 지금의 평양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꾸며 우리역사를 왜곡, 조작하였다.
◆ 제4대 민중제 본기
  민중제는 유리명제의 제2왕후 송씨 소생으로 제4왕자로 이름은 해색주(解色朱)다. 서기44년 10월에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는 ‘형인 대무신왕이 죽었을 때 그 태자(대무신제의 제2자 解憂) 가 너무 어려서 백성들이 해색주를 왕으로 세웠다’ 고 기록하였다.

  서기45년 5월 동부지역긔 큰 홍수, 서기46년 겨울 위나암 일대의 혹심한 겨울 가뭄 등 천재지변으로 많은 어려움이 계속되자 서기47년 10월 잠우락부의 대가 대승이 1만여호를 이끌고 낙랑으로 가서 한나라에 투항하였다.(그래서 민중제 때는 대무신 때보다 국토거 줄어들었다)

  이러한 어려움으로 민중제는 고민하다 서기47년에는 병으로 드러눕게 되고, 서기48년에는 병이 악화되어 죽었는데 ‘민중원에 있는 석굴에 묻어달라’ 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유언대로 하고, 묘호(廟號)를 ‘민중제’라 하였다.
  * 고구려 28조 중 능의 위치를 묘호로 삼은 것은 12번이다. 4대 민중제, 5대 모본제, 9대고국천제, 10대 산상제, 11대 동천제, 12대 중천제, 13대 서천제, 14대 봉상제, 15대 미천제, 16대 고국원제, 17대 소수림제, 18대 고국양제)

  민중제 재위간 중요한 다물활동은 다음과 같다
      - 민중제 재위 가간 중에는 국토확장의 실적이 없고, 오히려 요수 서편의 땅(옛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과 요수 동편 땅 일부도 한나라에 내주어 국토가 축소되었다.
제4대 민중원제 시대 고구려 강역(A.D48년경)
◆ 제5대 모본제 본기
  대무신제의 정비는 오랫동안 이이를 낳지 못했다. 새로 입궐한 후궁은 갈사왕(부여 대소의 막내 동생으로 대소가 대무신제에게 죽자 부여를 탈출하여 압록곡 부근에 갈사부여를 세우고 갈사왕이도됨)를 의 손녀 금씨였는데 입궐한지 얼마 안되어 아들을 낳으니 대무신제는 득남한 기쁨으로 이름을 ‘호동(好童)’이라 지었다. 호동은 장성하면서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나 주변국에까지 소문이 나 알려지게 되었다. 호동의 명성이 높아질 때 제1왕후(정비)가 아들을 낳았는데 대무신제는 그 아들 이름을 ‘해우(解憂)’ 라 지었다.

  제1왕후는 호동의 명성이 태자 자리를 넘본다고 생각하고, 대무신제에게 “호동이 무례하게 대하며, 욕보이려 하였습니다” 고 하며 모함하여 결국 호동이 자결하게 하고, 서기32년 12월에 나이 1-2세의 해우를 태자에 봉했으나 12년 뒤에 대무신제가 죽었지만 태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숙부 해색주가 왕위에 올라 민중제가 되었다. (이 때즘은 정비도 죽고 없어 섭정도 할 수 업었던 것으로 짐작)

  태자 해우는 서기48년 민중제가 죽을 때까지 4년 동안 부단히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자랐다. 그래도 용캐 생명을 부지하여 서기48년 왕위에 올라 모본제가 되었는데, 초년에는 한을 공격하는 등 다물정책을 성실히 이행하려 하였지만, 한나라와의 화친이 맺어져 안정이 되자 삐뚤어진 성격 때문에 사람이 포악해져 혹심한 폭정을 자행하다가 결국 충직했던 신하 두로의 칼을 맞고 서기53년에 죽었다.

  모본제 재위간 중요한 다물활동은 다음과 같다
      - 서기49년 2월 대군을 동원하여 한의 북평, 어양(현재의 북경 근처), 상곡, 태원(현재의 화북지방, 황하 동안에 있음) 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즉위 초년에 요서지역을 정벌하고 황하동쪽을 장악함) 이에 당황한 한은 요동태수를 고구려에 보내 화친을 제의하고, 모본제가 받아 들임으로써 한과 고구려는 한 동안 충돌 없이 평화가 유지되었다.
제5대 모본제 시대 고구려 강역(A.D49년경)
◆ 제6대 태조제 본기
  모본제가 부하 두로의 칼을 맞아 죽은 후 유리명제의 여섯째 아들 고추가 재사의 부여 출신의 태후 금씨의 장남으로 서기47년에 태어난 궁(宮)이 7세의 어린나이로 제(제)에 옹립되었는데 이가 태조이다. 태조는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모후 금씨의 수렴청정을 받으면서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는 운동 즉 다물운동에 주력하여 고구려가 요서를 완전 장악하는 한편 산동반도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여 동한과 함께 명실공히 동북아 맹주로 부상하였다.
  '태조(太조)'라는 묘호(廟號) 사용한 것은 중국, 한국, 일본을 통털어 고구려가 처음이다, 보통 '태조'라는 칭호는 나라를 처음 세운 임금에게 붙여지는 묘호인데, 고구려 제6대 임금에게 붙여진 것은 '태조 대에 고조선 고토회복을 거의 완성'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저자는 풀이하고 있다.

  태조 재위간 중요한 다물활동은 다음과 같다. 태조는 '고토회복전쟁'이라 하였다.
      - 태조는 고조선의 고토회복(다물) 위하여 동한과 많은 전쟁을 치르는데 고토회복의 일차적인 목표는 현도군의 수복이다. 서한 무제가 설치한 한사군 중 현도는 맨 북쪽에 있는 군으로 임둔과 진번은 태조 대에 폐지되어 없어졌고, 낙랑은 대무신제 때 호동이 낙랑공주와 혼인하는 등 앞장서 고구려에 복속하였다가 민중제 때 환속하였으나 낙랑군이 복원되지 않고 그 영역은 현도에 복속시켰기 때문에 현도의 수복은 곧 고조선의 고토회복의 핵심이 되는 것이었다.

      - 태조는 현도수복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서기55년 2월에 요서지역에 10개의 성을 쌓아 동한의 침략에 대비하면서 후방 안정을 위하여 서기56년 7월에 동옥저를 멸하여 동쪽 국경을 창해(동해)까지 확대하였다.

      - 서기68년 현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갈사국을 복속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서기72년에는 조나, 서기74년에는 주나를 쳐서 현도수복의 전초기지를 만들고, 발해만을 따라 남쪽으로 세력을 뻗어 산동반도까지 진출하여 이곳에 자치국으로 남아있던 연안 소국들을 차례로 복속하였다.

      - 요서지역에 10개 성을 쌓은 이후 50여년간의 치밀한 전쟁준비를 한 고구려는 서기105년 동한을 상대로 본격적인 고토회복전쟁에 돌입한다. 즉 이렇게 고구려의 세력이 커지자 부여는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하였고, 동한은 위기감을 느끼고 고구려에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할 조짐이 보이자 고구려 조정은 ‘고조선 고토회복(故土回復, 다물)’을 선언하고, 서기105년에 요동을 선제공격하여 6개 현을 뺏으니 이에 당황한 동한은 급히 군사를 파견하여 요동태수로 하여금 대적하게 하였다. 요동에서 동한과 고구려의 싸움은 상당기간 지속되면서 동한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고구려는 산동반도 쪽으로 진출하여 동해국을 점령하고, 화북평원 쪽으로 세력을 넓혀갔다.

      - 이에 앞서 서기101년에는 예맥과 함께 현도를 공략하였고, 서기118년에는 다시 현도로 진출하여 화려성유주자사 풍환, 현토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으나 태조의 아우 수성의 활약으로 동한군 2천여명이 죽고, 채풍 등의 군사는 퇴각하였다. 이렇게 되자 동한 조정은 광양과 어양, 우북평, 탁군 속국 등에 병력을 결집하여 대항하여 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 서기121년 4월에는 고구려가 북방의 선비군 8천과 연합하여 동한의 요대현을 공격하자 요동태수 채풍이 대항하다가 신창에서 전사하고, 채풍을 호위하던 공조 경모와 공조연 용단, 병마연 공손포 등이 함께 몰살 당하고, 그들과 함께 죽은 관리가 100여명에 이르렀다.

      - 고구려는 여세를 몰아 지속적으로 현도를 공략하여 서기121년 12월에는 마한과 예맥 기병 1만 여명을 동원하여 현도성을 포위하여 현토군의 수복을 눈앞에 두고, 부여왕이 아들 위수태에게 군사 2만을 주어 고구려군의 후미를 치는 바람에 현도 수복이 실패하였다. 서기122년에 고구려는 또 예맥과 마한군을 이끌고 요동을 공략하였으나 이 때도 부여군이 동한을 돕는 바람에 현도 수복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 그리하여 고구려는 비록 현도 수복은 실현하지 못하였지만 고토회복전쟁을 통해
          (1) 요서지역글 완전히 장악하여 동한세력을 위축시켰고,
          (2) 나아가 동한의 요동지역을 일부 점유하였고,
          (3) 남족으로는 산동반도와 화북평야 일대를 차지하였고,
          (4) 북방의 선비와 연합세력을 구축함으로써 부여와 동한 통교로를 완전히 차단하게 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태조가 병으로 드러눕자 고토회복 전쟁은 일시 중단하였다.

      -태조가 노환으로 드러눕자 관나부 우태 미유와 환나부 우태 어지류, 비류나 조의 양신 등이 태조의 아우 수성을 부추켜 모반을 획책하여 수성이 제위 찬탈의 뜻을 갖게 되나 태조가 죽기만을 기다렸다. 이 때 동한이 화의조약을 어기고 현도에 둔전육부를 설치하여 고구려를 압박하므로 태조는 서기146년 8월 군사를 동원하여 한나라 요동 서안평을 공략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와 아들을 붙잡아 오는 등 조정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기회를 엿보던 수성이 제위찬탈을 결행하여 수성이 제7대 차제에 오르고, 태조는 상황(上皇)으로 물러나 별궁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년 후인 서기165년 3월에 11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고구려와 동한이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에도 고구려는 조정과 백성들은 매우 안정된 반면, 동한은 심한 내분이 일어났다. 농민봉기 일어나 전국적으로 혼란에 휩싸였는데 서기107년에 시작된 농민봉기는 이후 80여년간 100여차례 계속되어 결국 사기184년 황건군의 대봉기로 발전되었다. 이 같은 내분과 함께 외척세력이 조정을 장악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왕이 환관과 결탁하는 바람에 환관세력의 횡포가 더해졌다.(삼국지의 삼국시대의 시작) 따라서 고구려와는 한인포로 1인당 비단 48필, 어린아이는 그 반을 환속 값으로 주겠다는 굴욕적인 화친제의를 해 오기도 하였다.
제6대 태조 시대 고구려 강역(A.D125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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