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광개토제(廣開土帝) 능비
沙月 李盛永(2010. 2. 6. 옮김)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나이 든 사람들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 만주의 허허벌판에 큼직한 돌 하나 높다랗게 세워진 사진을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라고 배우기는 했는데 사실 내력과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 같다.

  그런데 이 위대한 우리 민족의 한 영웅 광개토대왕의 성스러운 업적을 기록한 비석을 일본인이 먼저 발견하여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저들이 의도하는 바에 맞도록 고치고, 해석하여 우리민족의 역사를 말살(抹殺) 내지 축소(縮小), 비하(卑下) 하려는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십분 활용하였고, 지금도 그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있다.

  마침 박영규 지음 新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제19대 광개토제본기편에 광개토제 능비에 관한 내력과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게 실려 있어 옮기고(청색 글씨) 현재 한, 중, 일 3국간의 주요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을 정리하여 다물(多勿)이야기에 올렸다.
  * 저자는 '대왕(大王)', 태왕(太王)' 등으로 불리던 고구려 역대 왕들의 호칭을 '황제(皇帝)'의 호칭에 해당하는 '제(帝)'를 쓰고 있다.
광개토제 능비의 현재의 모습
중국 길림성 통화전구 집안현 태왕촌 대비가 소재
  광개토제는 고국양제의 장남 담덕(談德)으로 서기375년에 태어나서 12세에 태자에 책봉되고, 서기391년에 고국양제가 지병이 악화되자 제위를 물려 줌으로서 17세에 고구려 제19대 태왕에 올라 서기413년 10월에 39세를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광개토제는 짧은 생애였지만 주변국가들은 모두 평정하여 영토를 넓이고, 위상을 높여 국력을 크게 떨쳤다. 묘호(廟號) 중의 ‘광개토(廣開土)'는 여기에 연유된 것이다.
광개토제 때 각국 영토와 세력판도 요도(서기412년경)
요도에서 고구려의 수도는 요동지역에 있는 평양(平穰)이고,
한반도 남진 정책의 교두보로 부수도에 해당하는 하평양(下平穰)은 현 평양(平壤)인 것으로 추정
<능비 개요>
  광개토제(廣開土帝) 능비의 정확한 명칭은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이다. 이 비석은 광개토제의 아들인 장수제가 선황의 공적을 기리고, 묘지를 지키는 연호(烟戶: 일종의 관노비)들에 대한 규정을 남기기 위해 서기 414년에 능(陵)의 동쪽에 건립한 것이다.

  이 비석의 모양은 아래와 위가 넓고, 가운데가 좁은 형태다. 높이 6.39m, 아랫부분 너비 제1면이 1.48m, 제2면이 1.35m, 제3면이 2m, 제4면이 1.46m이고,
  아랫부분을 받치고 있는 좌단(座壇)은 화강암으로 되어있으며, 길이는 3.35m, 너비는 2.7m, 두께는 고르지 못하여 동남측이 0.16m, 서죽측이 0.63m로 불규칙한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이 비에는 사면에 비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비문 글자 총 수는 1,775자이나 판독할 수 없는 글자가 141자이다. 판독할 수 없는 141자 중에 앞뒤 문맥으로 추측 가능한 글자가 9자이고, 전혀 추측이 불가능한 것이 132자이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부분은 고구려의 건국과 관련하여 추모(주몽), 유류(유리), 대주류(대무신) 등 3대에 제위 계승에 대한 것과 광개토제의 즉위에 대한 내용이다.
  둘째 부분은 광개토제의 치적을 적은 것으로 백제 정벌, 신라 구원, 부여 정벌, 등에 대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셋째 부분은 광개토제가 생시에 내린 교시에 근거한 묘비와 연호(烟戶
: 일종의 관노비)의 규정을 적고 있다.

  이 같은 비문의 내용은 그 어느 사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사료로서 고구려와 그 주변 국가의 역사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내용의 일부는 지워지고 없으며, 또한 확인되는 글자 중에도 판독에 따라 그 내용을 달라질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 때문에 해석 문제를 놓고 학자들 간에 심각한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초기 일본학자들의 아전인수격 억지 해석이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다)

  이에 여기에서는 능비의 발견과 탁본과정을 간략하게 기술하고, 비문의 내용 중 광개토제의 치적과 관련된 부분의 원문과 번역문을 옮긴다.

<발견과정>
  광개토제 능비는 현재 중국 길림성 통화전구 집안현 태왕촌 대비가에 있다. 이곳 집안(輯安)은 압록강 중류 만포진에서 마주 보이는 곳이며, 그 주변에는 고구려의 고분과 유적지가 발견되고 있다.

  이 능비는 장수제(長壽帝)에 의해 414년 건립된 이래 발해(渤海) 때까지 제대로 보전되다가 요(堯)를 세운 거란(契丹)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곳을 차지하면서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그리고 요를 멸망시킨 여진족이 금(金)을 세운 후에는 광계토제의 능비가 금 왕조의 능비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집안은 후대인들에게 금의 왕성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고, 명(明) 대를 거치면서 그 같은 인식은 굳어져 갔다.

  그리고 명(明)을 멸망시킨 만주족이 청(靑)을 세우면서 그 곳을 자기 나라 발상지라 하여 세인들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이 때문에 조선의 학자들은 당연히 이 능비를 금 왕조의 묘비로 여기게 되어 이수광(李 日卒 光) 같은 학자는 「지봉유세(芝峯類說)」에 금(金)나라 시조의 비라고 기록하였다. 물론 이 무렵 비각은 이미 사라지고 능비는 땅 속에 뭍인 상태였다.

  19세기에 이르러 청(靑)은 집안의 봉금명령(奉禁命令)을 풀고 그곳에 회인현을 설치하면서 민가가 들어서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1880년경 땅을 개간하던 한 농부가 이 비를 발견하여 관아에 신고함으로써 능비는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탁본과 판독>
  농부의 신고를 받은 그곳 수령 장월이라는 관리가 금석학(金石學)에 조예가 있던 부하 직원 관월산을 시켜 처음으로 탁본을 시도하여 부분적인 탁본이 만들어져 북경의 금석학계에 소개되자 이 때부터 이 능비는 금석학계의 비상한 관심거리가 되고, 중국의 금석학계는 정교한 탁본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공을 기울였으나 쉽게 이루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1882년) 중국을 여행하던 일본군 밀정 하나가 능비를 발견하고 탁본을 떴다. 사카와(사쿠오: 酒句景信)라는 이 육군 중위는 탁본 작업 중에 일부 글자를 변조하였으며, 이 탁본을 기초로 하여 이른바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 마련된다. 그리고 일본은 이 쌍구가묵본을 입수하게되자 군의 참모본부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판독을 시작하여 1889년에 판독 내용을 세상에 공포하였다.

  한편, 중국에서도 1885년부터 비문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1889년에 일본이 비문 내용을 공포하자 양국이 경쟁적으로 탁본작업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좀 더 값비싸고 정교한 탁본을 얻으려는 노력이 가속화되어 비면에 석회칠이 되는 등 변조가 이뤄진다. 이런 까닭으로 비문은 오독(誤讀)되고, 비면은 마모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1890년대 이전의 탁본이 거의 사라져 능비 연구에 차질을 초래한다. 그리고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 이후 자유롭게 능비에 접근하여 능비 연구는 물론이고, 능비 주변의 유적지 연구를 독점하게 된다. 이에 따라 비문과 유적에 대한 해석이 일본의 시각에 한정되는 경향을 띄게 된다.

  그로부터 오랜 공백기를 거쳐 1957년에 이르러 임지덕 등 중국 학자들에 의해 능비 주변의 유적지 연구가 새롭게 시작되고, 1963년에는 박시형 등 북한 학자들이 거기에 가담함으로써 능비 연구는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러나 1882년 사카와가 비문의 일부 문자를 변조한 까닭에 아직까지 그 내용을 정확하게 판독하지 못하고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비문의 주요내용>
  전술한 바와 같이 비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동명성제, 유리명제, 대무신제 등의 이야기로부터 광개토제에 이르는 과정과 비의 건립 경위를 간단하게 기술한 첫째 부분은 능비 제1면 1행에서 6행에 기술되어있고,
  광개토제의 정복전쟁을 기술한 둘째 부분은 1면 7행에서 제3면 8행까지며,
  능비 및 연호에 관한 내용을 기술한 셋째 부분은 제3면 8행에서 제4면 9행에 기술되어있다.

  첫째 부분은 표현상 차이는 약간 있으나 김부식의「삼국사기」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고,
  셋째 부분은 고구려사 연구의 자료적 가치는 있으나 별도로 언급할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광개토제의 정복전쟁을 기술한 둘째 부분은 해석의 접근방법에 따라 많은 논란이 될 수 있으며 사료적 가치도 가장 높다.
  둘째 부분의 내용을 연도별로 분리하여 원문, 음역, 번역문을 옮긴다. 내용 중 □은 지워진 부분이고, [ ]안은 다른 관점에서의 번역문이다.

      * 원문(漢文) 글자를 단원별로 띄워 쓴 것은 저자(박영규)가 편의상 구획한 것 같다.

  (1) 영락태왕(광개토제) 5년 을미년(서기395년) 기사
  「永樂五年 歲在乙未 王以碑麗 不歸□人 躬率往討 過富山 負山 至鹽水上 破其三部落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于是施駕 因過襄平道 東來□城 力城 北豊 王備차游觀土境 田 犬변에昔 而還」
  (영락오년 세재을미 왕이비려 불귀□인 궁솔왕토 과부산 부산 지염수상 파기삼부락육칠백영 우마군양 불가칭수 우시시가 인과양평도 동래□성 역성 북풍 왕비저유관토경 전차이환)

  (번역) 영락 5년 그 때는 을미년이었다. 왕은 비려(碑麗)가 붙잡아 간 사람들을 귀환시키지 않자 몸소 군대를 인솔하고 토벌에 나섰다. 부산(富山)을 지나 산을 등지고 염수(鹽水)의 상류에 이르러 3개 부락 600-700영(마을) (600-700명의 군영들)을 격파하고, 수없이 많은 소와 말 그리고 양떼를 노획하였다.
  거기서 돌아오면서 양평도를 거쳐 동쪽으로 □성, 역성, 북풍(北豊)에 이르렀다. 왕은 사냥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국토를 즐기며 구경도하고(국경을 둘러보고) 사냥도 하면서 돌아왔다.


  (2) 영락태왕 6년 병신년(서기396년) 기사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 □□新羅 以爲新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軍至 穴아래果 南功取 壹八城 臼模盧城 各模盧城 于 氏아래一 利城 □□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古舍 艸아래鳥 城 阿旦城 古利城 □利城 雜 王爾 城 奧利城 句□城 古模耶羅城 須鄒城 □□城 □而耶羅城 王篆(竹제외) 城 於利城 □□城 豆奴城 農賣城 沸城 比利城 彌鄒城 也利城 大山漢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赤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종城 林城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杉(木제외)穰城 曾拔城 宗古盧城 仇天城 □□□□ 逼其國城 殘不服義 敢出迎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殘兵歸穴 就便圍城 而殘主困逼獻出 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足危 王自誓 從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始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 五十八城村七百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施師還都」
  (백잔신라구시속민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래 도해파백잔 □□신라 이위신민 이육년병신 왕궁솔수군 토벌잔국 군지과남공취 일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우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고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미성 오리성 구□성 고모야라성 수추성 □□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농매성 비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대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적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종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승발성 종고로성 구천성 □□□□ 핍기국성 잔불복의 감출영전 왕위혁노 도아리수 견자박성 잔병귀혈 취편위성 이잔주곤핍헌출 남녀생구일천인 세포천필 궤왕자서 종금이후영위노객 태왕은사시미지건 록기후순지성 어시득 오십팔성촌칠백 장잔주제병대신십인 시사환도)

  (번역)백제와 신라는 옛날에는 (우리)의 속민이었기 때문에 (고구려에)조공을 해 왔다. 그런데 신묘년 이래 왜(倭)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치고, 신라를 공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일본측 견해)
        [신묘년에 왜가 (조공을 해)오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백제를 치고, 신라를 □□(구원,설득, 협박)하여 신민으로 삼았다](한국측 견해)

  * 식민사관(植民史觀)에 빠진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광개토태왕 능비문의 밑줄 친 신묘년(辛卯年)조 부분을 일본측 견해대로 번역하여 소위 일본서기에 나온다는 ‘4세기 후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한반도 남부지역을 정벌’ 주장과 나아가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뒷받침하는 근거의 하나로 삼고 있다.
* 임나일본부설 바로가기(클릭): : 임나일본부설
  * 고구려의 태왕능비에 무엇 때문에 「而倭以辛卯年 來渡海破百殘 渡海破百殘 □□新羅」 즉 ‘그런데 신묘년 이래 왜(倭)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치고, 신라를 공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와 같은 왜(倭)의 공적에 해당하는 내용을 새기겠는가? 그리고 아래 위 문맥으로 봐서도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후술하는 비문 논쟁 참조)

  (영락태왕) 6년 병신년(서기396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백제를 낮추어 부른이름)을 토벌했다. 우리(고구려) 군사가 백잔의 국경 남쪽에 도착하여 일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우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고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미성, 오라성, 구□성, 고모야라성, 수추성, □□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농매성, 비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대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누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적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종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발성, 종고로성, 구천성, □□□□ 핍기국성을 공격하여 취했으며 백잔의 도성에 접근하였다,
  그러나 백잔은 의(義: 우리의 의로운 정복)에 항복하지 않고, 나와서 응전하였다. 태왕은 위엄을 떨치며 크게 노하여 아리수(阿利水; 한강)을 건너 군대를 보내 백제의 도성을 압박하였다. 백제군은 그들의 소굴(도성)로 퇴각하였으나 곧 도성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백잔 군주는 곤핍(困逼)하자 남녀 1천명과 세포(細布: 가는 베) 1천 필을 바치고, 태왕 앞에 무릎을 꿇고. “지금부터 이후로는 영원토록 (태왕의) 노객이 되겠노라”고 맹세를 하였다. 이에 태왕은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여 후에도 그가 성의를 다하며 순종하는지 지켜보겠다고 하였다.
  이번에 모두 백잔의 58개성, 700개 마을을 얻었다. 또 백잔 왕의 동생과 대신 10인을 데리고, 출정했던 군대를 이끌고 국도(國都)로 귀환하였다.


  (3) 영락태왕 8년 무술년(서기398년) 기사
  「八年戊戌 敎遣偏斯觀 帛愼土谷 因便抄 得莫斯羅城 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論事」
  (팔년무술 교견편사관 백신토곡 인편초 득막사라성 가태라곡 남녀삼백여인 자차이래 조공논사)

  (번역) (영락태왕) 8년 무술년에 일부 군대를 백신(帛愼)의 토곡에 보내서 순찰하도록 했다. 그 결과 막사라성과 가태리곡의 남녀 300여명을 잡아왔으며, 이때부터 조공을 하고, 정사(政事)를 보고해 왔다.

  (4) 영락태왕 9년 기해년(서기399년) 기사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順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稱其忠誠 特遣使還 告以密計」
  (구년기해 백잔위서 여왜화통 왕순하평양 이신라견사백왕운 왜인만기국경 궤파성지 이노객위민 귀왕청명 태왕은자 칭기충성 특견사환 고이밀계)

  (번역) (영락태왕) 9년 기해년에 백잔이 맹세를 위반하고 왜(倭)와 화통(和通)하였다. (이에) 태왕은 하평양을 순시했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태왕에게 아뢰기를 “그 나라(신라)에는 왜인이 가득하여 성들을 모두 파괴하고, 노객(신라왕)을 천민으로 삼았으니 (고구려에) 의탁하여 태왕의 지시를 듣고자 한다”고 하였다.
  태왕은 인자하여 그 충성심을 칭찬하고 (신라)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밀계를 내렸다.


  (5) 영락태왕 10년 경자년(서기400년) 기사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 從南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 拔新羅城 □城 倭寇大潰 城內十九 盡拒隨倭 安羅人戌兵 新羅城□□其□□□□□□□言□□且□□□□□□□□□□□□□□□□□□□□□□□辭□□□出□□□□□□□殘倭遺逃 拔□城 安羅人戌兵 昔新羅寢錦 未有身來論事□□□□廣開土境好太王□□□□寢錦□家僕句請□□□朝貢」
  (십년경자 교견보기오만왕구신라 종남거성지신라성 왜만기중 관군방지 왜적퇴 자왜왜배급추지임나가라종발성 성즉귀복 안나인술병 발신라성 □성 왜구대궤 성내십구 진거수왜 안나인술병 신라성□□기□□□□□□□언□□차□□□□□□□□□□□□□□□□□□□□□□□사□□□출□□□□□□□잔왜유도 발□성 안나인술병 석신라침금 미유신래론사□□□□광개토경호태왕□□□□침금□가복구청□□□조공)

  (번역) (영락태왕) 10년 경자년 (태왕은) 교시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그때)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인(倭人)이 가득했다. 관군(고구려군)이 그곳에 이르자 왜적은 퇴각하였다.
  이에 왜적의 뒤를 추적하여 임나가야(任那加羅)의 종발성에 이르자 그 성은 즉시 항복하였다. 이에 신라인을 안치하여 병사(兵使)를 두고 지키게 하였다.
  신라성, □성 등에서 왜구가 크게 함락되었다. 성 안에 있던 10분의 9의 신라인들은 왜(倭)를 따라가기를 거부했다. 이에 신라인들을 안치하여 병사(兵使)를 두게 하였다. ---(지워져 내용 알 수 없음)--- 나머지 왜군은 궤멸되어 달아났다.
  지금껏 신라 매금(매금: 이사금 또는 임금)은 스스로 와서 명령을 청하고 조공논사(朝貢論事)하지 않았다. 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임금은 명령을 청하고 조공하였다.


  (6) 영락태왕 14년 갑진년(서기404년) 기사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和通殘兵□石城□連船□□□ 王躬率往討 從平穰 □□□鋒相遇 王幢要截?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십사년갑진 이왜불궤 침입대방계 화통잔병□석성□연선□□□ 왕궁솔왕토 종평양 □□□봉상우 왕당요절탕자 왜구궤패 참살무수)

  (번역) (영락태왕) 14년 갑진년에 왜(倭)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帶方)지역을 침략하였다. (그들은) 백제군(百濟軍)과 연합하여 석성(石城)을 공략하였다. (늘어선 배에서 많은 적들이 몰려왔다-추론)
  왕은 몸소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평양(平穰)을 출발하였다. 그리고 □□□봉에서 적과 조우하였다. 왕은 적을 막아서며 대열을 끊고 좌우에서 공격하였다. 왜군은 궤멸되었고, 참살된 적은 수없이 많았다.

  (7) 영락태왕 17년 정미년(서기407년) 기사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 王師四方合戰 斬煞蕩盡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沙溝城 婁城 牛田城 □城 □□□ □□□城」

  (십칠년정미 교견보기오만 □□□□□□□□ 왕사사방합전 참살탕진 소획개갑일만여령 군자기계 불가칭수 환파사구성 누성 우전성 □성 □□□□□□성)

  (번역) (영락태왕) 17년 정미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출병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지워져 내용을 알 수 없음)--- 왕은 사방 포위하여 합동작전을 하도록 지시하였다.
  적은 대부분 참살되었으며 개갑(갑옷) 1만여 령과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군수물자와 기계들을 노획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 누성, 우전성, □성 □□□□□□ 성을 격파하였다.


  (8) 영락태왕 20년 경술년(서기410년) 기사
  「卄年庚戌 東扶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擧國駭服 獻出□□□□□□ 王恩普覆 于是施還 又其慕化隨官來者 味仇婁鴨盧 木변山아래而 社婁鴨盧 肅斯舍鴨盧 □□□鴨盧 凡所攻破城六十四村一千四百」
  (입년경술 동부여구시추모왕속민 중반불공 왕궁솔왕토 군도여성 이여거국해복 헌출□□□□□□ 왕은보복 우시시환 우기모화수관래자 미구루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압로 범소공파성육십사촌일천사백)

  (번역) (영락태왕) 20년 경술년, 동부여는 옛날 추모(주몽)왕의 속민이었으나 중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다.
  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군대가 부여성에 이르자 부여는 거국적으로 두려워하여 굴복했다. 그리고 ---(지워져 내용을 알 수 없음)--- 를 바쳤다.
  왕의 은덕이 모든 곳에 미치자 환국하였다. 또 그 때에 왕의 교화에 감화되어 관군(고구려군)을 따라 미구루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압로 등이 왔다.
  (왕은)일생 동안 64개 성, 1,400개 촌을 공격하여 무너뜨렸다.


  <능비문 신묘년조(2)의 논쟁>
  ▶ 1882년 만주지역에서 정보수집활동을 수행하던 일본 육군 포병 중위 사쿠오(酒句景信)가 1883년에 가져온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기초로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1888년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가 아세아협회의 기관지인 『회여록(會餘錄)』 제5집에 게재한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에는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를“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 로 해역 하여 이 신묘년 기사가 ‘4세기 후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한반도 남부지역을 정벌했다’는 『일본서기(日本書記)』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기록으로 간주하여 일본인들에게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정설로 정착하게 하였다

  ▶ 이에 자극을 받아 한국학자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 1908년 간행된 『증보문헌비고』에 비문이 수록되었고,
      - 1909년에는 박은식신채호가 언론에 간단히 소개했고,
      - 민족주의사학자 정인보는 1930년대 말에 저술한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에서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고구려/광개토대왕)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와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일본인들과는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 1972년에는 재일동포 사학자 이진희(李進熙)는 그의 저서 『광개토왕비의 연구』에서 참모본부의 이른바 ‘석회도부작전설(石灰塗付作戰說)’을 주장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즉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현대사는 물론 고대사까지 조작 왜곡하여 정당화하기 위한 조작극이라고 주장하면서 과거 불분명했던 자획까지도 분명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석회도부(石灰塗付: 석회를 칠해 다시 쓴 것)의 결과로서, 고마쓰[小松宮] 탁본을 참고하여 미다쿠[三宅米吉]가 쓴 「고려고비고추가(高麗古碑考追加)」가 이를 증명한다고 주장하고,
      ‘倭以辛卯年來渡海破’(왜이신묘년래도해파) 부분도 확신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 1981년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근거로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 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공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된다. 이 주장대로라면 일본 사학계의 이른바 ‘남조선경영론’(임나일본부설)이 근거를 잃게 된다.
      - 김병기는 '渡海破(도해파)' 부분이 정상적 비문과 다르며, 획의 부분을 따졌을 때, 원래 글자는 '入貢于(입공우)'라고 주장하였다.

  ▶ 지리적 잇점이 큰 중국 학자들은 최근에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 1984년에는 중국의 왕젠췬(王建群)이 장기간의 실지조사를 토대로 『호태왕비연구(好太王碑硏究)』를 발표했는데, 그는 이제까지 잘못 읽은 부분은 시정하고 탈락된 문자를 복원했다고 주장하고, 비문의 총 글자를 1,775자로 확정했다.
      그리고 비문에 등장하는 왜(倭)를 일본 기타큐슈[北九州]의 해적집단으로 보아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진희의 석회조작설도 비판했다.

      * 그러나 왕젠췬(王建群)의 연구에도 한계가 발견되고 있다. 도회부분은 탁공(拓工)들이 고가판매를 위한 무지의 소치라고 주장하였는데, 발견 초기의 탁본(예: 쌍구가묵본)은 고가 판매를 위한 것이 아닌 것임에도 조작된 것이 나타나는 부분에 대한 해명이 부족하다.
      - 경철화(耿鐵華)는 '來渡海破'의 海에서, 부수인 삼수변(?)이 종선 밖의 부분에 위치 있음을 통해 '海'가 아니라 每라고 주장했다.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의 해역 비교
  ▶ 일본: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 (요코이 다다나오 橫井忠直)
  ▶ 한국:
      - “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고구려/광개토대왕)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와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정인보)
      -‘倭以辛卯年來渡海破’ 자체를 조작이라며 불신(제일교포학자 이진희)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後以辛卯年不貢因破百殘倭寇新羅以爲臣」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 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 왜구, 신라를 공파 해 신민으로 삼았다”(이형구)

  <결론>
  한, 중, 일 3국간의 협동연구가 보다 심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아직은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광개토왕릉비의 내용의 모든 부분에는 그 주체가 고구려(광개토태왕)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왜(倭)나 그 외의 것이 주체가 될 수는 없다.
  이 비는 사료가 부족한 한국 고대사의 실상을 풀어줄 수 있는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내용의 정확한 판독이 이루어짐으로써 한국 고대사를 분명하게 해줄 것이다. 나아가 한, 중, 일 3국간 특히 일본과의 관계를 극명히 해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 <첨부> 광개토대왕 연표(年表: 西紀)
  374년 태왕 탄생
  391년 고구려 제19대 태왕으로 등극
           백제를 공격해서 관미성 등지를 점령
           만주 요하 상류 지방의 거란을 정복
           신라가 불모로 왕족인 실성을 보내옴
  393년 고승 아도(阿道)를 시켜 평양에 영명사(永明寺) 등 아홉개 절을 지음
           백제 군사가 침입해 오자 그들을 격퇴함
  394년 백제군사가 수곡성(신계)을 공격해 오자 그들을 격퇴함.
  395년 내몽고 지역의 비리국을 정벌함
           봉천 지방과 요동반도를 회복함
  396년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의 58성 700촌을 차지하고, 백제로부터 조공을 받음
  398년 군사를 보내서 숙신국(肅愼國)을 정복함
  399년 백제가 맹세를 위반하고 왜(倭)와 화통하므로 대왕이 평양에 순행함.
  400년 5만 병력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고 왜병을 섬멸함.
           고구려 군사가 왜병을 추격하여 대가야성을 정복함. 신라가 조공함.
           고구려 군사가 왜병을 섬멸하고 아라가야(함안) 군대를 정복함.
           연왕(燕王) 모용성이 신성(新城: 만주 회덕)에 침입하자 이를 격퇴함.
  402년 군병을 보내 연(燕)의 평주(平州: 중국 동북 조양 부근)의 숙군성(조양 동북)을 점령함
  404년 군사를 보내 연의 연군(조양 동북)을 점련함.
  405년 왜인이 대방(帶方)에 침입하자 대군으로 그들을 섬멸맘.
           황해도 지방에 7개의 성을 쌓음
           연왕 모용회가 요동성에 침입하자 그들을 격퇴함
  406년 연왕 모용회가 목재성(장춘 부근)에 침입하자 그들을 격퇴함.
  407년 왜적이 평양 부근에 침입하자 5만의 군사를 보내 적병을 섬멸함.
           국내성의 궁궐을 대대적으로 수리함.
  408년 고구려 왕족 고운이 연나라 왕회를 죽이고 부연천왕이 되자 사신을 보내 통교함.
  409년 평양 동쪽에 6개의 성을 쌓음
  410년 대왕이 대군을 동원해 부여를 공격해서 속국으로 만듬.
           만주족 압로(鴨盧) 5부가 모두 항복해와 흑룡강 이남 전부가 고구려 영토가 됨.
  411년 64개성 1400촌을 점령함
           대동강에 다리를 가설함.
  412년 태왕 붕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