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漢)나라와 조선의 전쟁과 한사군(漢四郡)의 실체
沙月 李盛永(2010. 5. 10)
  중국에는 오래 전부터 진황한무(秦皇漢武)라는 말이 전해져 왔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황제는 ‘진(秦)나라 시황(始皇)과 한(漢)나라 무제(武帝)’ 라는 말이다.

  진시황(秦始皇)은 주(周)나라 후기 BC770년부터 BC403년까지 267년 간의 춘추시대(春秋時代)와 BC402년부터 BC221년까지 181년 간의 전국시대(戰國時代), 합해서 449년 간의 중국 역사상 가장 극심했던 혼란기를 종식시키고 중국을 국토는 물론이고, 민족, 문자, 화폐, 도량형, 심지어는 수레바퀴의 간격까지 모든 분야에서 하나로 통일했던 중국 최초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군주였기 때문에 그의 많은 폭군적인 학정에도 불구하고 중국사람들은 그를 위대했던 군주로 꼽는다고 한다.

  한무제(漢武帝)는 BC206년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초(楚)나라 항우(項羽)를 꺽고 한(漢: 前漢)나라를 세운지 229년 만인 서기 8년에 왕망(王莽)의 신(新)으로 대체된 것을 17년 만에 다시 한(漢: 後漢)나라를 일으킨 광무제(光武帝)를 말한다.
  한무제는 동, 서, 남으로 영토를 확장 또는 이민족의 침공으로부터 방어하여 통일 중국을 유지하였다.

  서쪽으로는 전통적인 중국식 거주지의 서쪽 끝 돈황(敦煌)에 양관(陽關)옥문관(玉門關)을 설치하고, 이를 전진기지로 삼아 장건(張騫)월지국(月支國)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서역(西域)을 개척하므로써 소위 실크로드를 열었었다.

  2007년 6월, 실크로드 관광여행 때 돈황에서 복원된 양관(陽關) 요새를 구경하였는데 옛날 유적 원형으로는 봉화대(烽火臺)만 남이 있고 요새 중앙에 큼직한 장건(張騫)의 동상을 세워놓고 있었다.
2000년전 양관요새의 봉화대 원형
양관요새 중앙에 세워진 서역개척의 선구자 장건 동상
<양관요새 이모저모>
복원된 양관요새 주문 밖과 안
복원된 막사
복원된 성벽
봉화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
  한무제는 남쪽 남만(南蠻) 월국(越國: 베트남)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금의 광서성(廣西省) 계림(桂林)에 복파장군을 파견하여 국경 방어를 튼튼히 하여 월인(越人)들의 침공을 물리쳤다.

  2002년 9월, 계림(桂林) 관광여행 때 계림의 신, 구 시가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 산을 한무제가 파견하여 남쪽을 개척하고 월인들의 침공으로부터 나라를 지켰다는 복파장군을 기념하여 그 이름을 복파산이라 하였다 한다.

  복파산 아래 동굴 입구에 밑부분이 잘린 석주가 세워져 있는데 중국사람들은 이 석주를 복파장군이 칼을 시험한 '복파장군 시검석(試劍石)'이라 부른다 하였다.

  또 복파산에서 건너다 보이는 천산(遷山) 중턱에는 큰 동굴이 관통하고 있는데 이 동굴은 복파장군이 복파산에서 월인(베트남인)을 향해 쏜 화살이 이 산을 뚫고 나가 다음 두 개의 산을 더 뚫은 후에 날아가 월남에 가서 떨어졌단다. 그래서 이 산이 복파장군의 화살이 '꿰뚫고 지나간(遷) 산(山)'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중국사람들의 허풍들이긴 하지만 자기네 나라의 자랑스러운 일을 이렇게 과장해서 표현하는 것도 중국사람다운 면이다.
복파장군이 지휘소로 썼다는 복파산 전망대
복파산 밑 동굴의 복파장군 시검석
복파장군 시검석의 잘린 부분을 만지면 자식과 손자들이 공부를 잘하고,
시험에도 합격한다고 전해져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하두 만져서 반질반질하다.
복파장군이 쏜 화살이 뚫고 지나갔다는 천산(遷山)
계림 근교 이강 뱃놀이
양제(羊蹄: 양의 발굽)
죽순봉(竹荀峰)
이강 오보(五寶)의 하나 봉미죽(鳳尾竹: 봉의 꼬리같은 대나무)
이강 어부의 고기잡이 도구 가마우지
  한무제는 동쪽 동이(東夷) 조선(朝鮮; 위만의 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한사군(漢四郡: 진번, 임둔, 낙랑, 현도)를 설치하여 다스렸다.
  동쪽에서 한무제는 위만조선을 멸하고 자비령 이남-한강 이북 지역에 진번(眞番), 함경남도의 대부분-강원도의 일부지역에 임둔(臨屯), 대동강 유역에 낙랑(樂浪), 압록강 중류 지역에 현도(玄 艸하兎), 등 이른바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해 옛 조선땅조선민족을 통치(식민지)했다는 것은 우리도 학교에서 배워서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따금 한무제가 설치한 한사군이 한반도 땅에 있던 것이 아니라 요하 서쪽 중국 땅에 있었던 것이란 주장이 제기 돼 왔었다.

  한무제의 서역이나 남방 개척은 그 유적이나 전해오는 지형지물의 명칭과 사연 등이 있지만 한무제가 동쪽에서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다는 사실은 일제가 쓴 역사기록 밖에 없고, 실체를 인정할 수 있는 다른 증거가 없다.
  일제(日帝) 때 일본의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과 이에 주구(走狗)가 된 조선의 친일식민사학자(親日植民史學者)들이 우리 역사를 식민지 경영에 이용하기 위해서 왜소(倭小)하게 왜곡(歪曲), 조작(調作)하는데 혈안이 되었던 사실도 알고 있는 만큼 일제가 쓴 우리의 역사 기록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마침 박시인교수 지음 <샘이 깊은 물은 국사개정의 방향>이라는 책에는 지금의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를 개정해야 할 부분을 다음과 같이 3개 카테고리에 25개 항목을 제시하고 있다.

  II 사실과 다르게 실은 잘못
      1. 국사상의 우리 영토와 민족
      2. 국사학 분야
      3. 우리는 단일민족, 지상천국 이념
      4. 기자조선은 오늘의 중국 본토 안에 있었다.
      5. 위만은 연에 살다가 조금 동쪽으로 온 조선인
      6. 조선 창해군은 천진 남쪽 해안지방
      7. 한나라와 조선의 전쟁에서 한나라가 졌다.
      8. 낙랑왕국과 낙랑군
      9. 고구려의 발상지는 중국 동북면
      10.삼한은 만주에서 한반도 끝까지
      11.삼국의 위치와 건국연대
      12.삼국의 해외 진출
      13.신라의 전승과 발해의 건국
      14.일본 민족과 일본문화의 유래
      15,여진은 고구려, 발해계통의 우리 민족
      16.몽고와 싸워 나라를 지킨 고려
      17.임진왜란과 풍신수길군의 괴멸
      18.갑오경장은 일본군이 일으킨 정변
      19.일제시대
      20.제1,2,3,4,5공화국


  III 싣지 않을 것을 실은 잘못
      1. 유물사관적 역사 서술
      2. 계급투쟁의 고취
      3. 정치불신의 고취


  IV 실을 것을 싣지 않은 잘못
      1. 우리 민족의 계통-샘이 깊은 물
      2. 건국 이념과 국호


  위의 책 내용 중에 II장의 7항 <한나라와 조선의 전쟁에서 한나라가 졌다.>가 한나라와 조선 간의 전쟁과 한사군의 실체에 관한 내용이다.

  한무제(漢武帝)의 사관(史官) 이었던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史記)』의 기록을 들어 일제 이후 지금까지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한사군(漢四郡)의 이름과 위치가 전혀 다른 한사군(漢四郡)의 실체를 밝히고 있다.
  결론적으로 사마천(司馬遷)『사기(史記)』 기록은 ‘한(漢: 武帝)나라와 조선(朝鮮; 衛滿朝鮮)의 전쟁에서 한나라가 졌다’고 하였고, ‘한사군(漢四郡)은 진번(眞番), 임둔(臨屯), 낙랑(樂浪), 현토(玄 艸하兎)가 아니라 추저(萩 艸하且), 홰청(水변晝 淸), 기(幾), 날양(溫陽)이었으며, 위치는 현 중국 하북성(발해, 제, 하동, 제)에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다음은 박시인교수 지음 <샘이 깊은 물은 국사개정의 방향> 중에 한나라와 조선간의 전쟁과 한사군(漢四郡)의 실체에 관한 내용이다.
<샘이 깊은 물은 국사개정의 방향>
7.한나라와 조선의 전쟁에서 한나라가 졌다.
박시인교수 저
  지금의 중,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는 아직도
  『고조선을 멸한 한나라는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4군을 두고,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렸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계속 그들과 싸워 임둔군과 진번군을 곧 철패시키고, 이어서 현도군도 통구 지방에서 요동방면으로 몰아 냈다. 낙랑군은 여러 차례 우리 민족의 저항을 받으며 지속하다가 결국 313년에 고구려에게 망하였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중14-15, 고 11-12)

  한나라 무제 때의 한(漢)조선(朝鮮)의 전쟁에 관해서는 한무제 자신의 사관(史官)이었던 사마천(司馬遷)《사기(史記)》원인, 경과, 결과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실려 있다.

  다음은 그 사마천(司馬遷)《사기(史記)》의 글을 우리 말로 번역해서 싣고(청색), 중간에 설명이 필요한 부분을 괄호 안(흑색)에 넣어서 구분하였다.

  「원봉 2년(B.C. 109) 한나라는 섭하(涉何)를 파견하여 조선왕 우거(右渠)를 유유(誘諭)하였다.
  (조선왕 우거는 지방 수천리의 큰 나라를 소유하고 한나라에서 귀순해 간 사람도 많이 가지고 있으며 한나라와 왕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진번의 이웃에 있는 다른 나라들이 한나라와 왕래하려고 하여도 길을 막고 통과시키지 않으므로 그러지 말도록 앞서 창해군을 둘 때처럼 유혹하고 설유하였다.)

  그러나 우거왕은 거절하였다. 섭하는 되돌아 오다가, 패수(浿水)에 이르러, 거기까지 자기를 호송해 온 조선의 장군을 살해시키고 패수를 건너 돌아와서, 조선의 장군을 죽였다고 보고 하였다. 무제는 장하다고 칭찬하고, 섭하요동군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임명하였다.
  (패수의 서쪽이 한나라 요동군 동부이고, 패수의 동쪽이 조선이었다. 패수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임을 알 수 있다.)     * 패수는 대동강이 아니라는 뜻임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고, 군대를 보내어 섭하를 공격하여 죽였다. (패수 서쪽 요동군 동부도위) 그래서 한의 무제는 죄인들을 모아서 조선으로 출정시켰다. (이것이 한나라와 조선 전쟁의 시발이다)
  즉 그 해 가을, 누선장군 양복(樓船將軍 楊僕)은 제(齊: 지금의 산동)에서 해군을 이끌고 발해로 나가고, 좌장군 순체(左將軍 筍체)는 요동을 떠나 나갔다. (이것이 지상군이었다.)

  조선의 우거왕은 군대를 출동시켜 험한 곳에서 막고 있었다. 좌장군의 졸정(卒正)인 다(多)가 요동군을 이끌고 먼저 공격하였다가 패하였다. 다(多)는 도주하여 왔으나, 법에 의하여 사형에 처해졌다.

  누선장군이 제(齊)의 군대 7천으로 먼저 왕험성(王險城)에 도착하니, 조선군은 누선군의 수가 적은 것을 보고, 성에서 나와 공격하여 누선군을 패주시켰다. 누선장군은 군대를 잃어버리고 십여일 동안 산중에 숨어 있다가, 패잔병을 좀 모아 가지고 배에 올랐다.

  좌장군은 패수 서쪽의 조선군을 공격하였으나, 격파하고 전진할 수가 없었다.

  무제는 두 장군이 다 불리(不利)하므로, 위산(衛山)을 조선에 파견하여 왕을 설유시켰다. 왕은 이 사신을 만나고,
  「태자를 한나라로 보내어 화친하겠다. 말 5천과 군량과 무장을 갖춘 군대 1만여명을 태자에게 주어 패수를 건너 들여 보내겠다」라고 말하였다.
  위산은 이것은 변을 일으키려는 속임수라고 의심하고, 태자를 보내어 화친하려면, 무장은 하지 말고 보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조선 태자는 위산과 좌장군이 자기를 속이고 살해하려는 것이라고 의심하여, 패수를 건너오지 않고 되돌아 갔다.
  위산이 돌아와서 이런 경위를 보고하니, 무제는 위산을 사형에 처하였다.

  그 후 좌장군은 패수의 조선군을 격파하고 전진하여 왕험성에 이르러 성의 서북쪽을 포위하고, 누선군은 성의 남쪽 바다에 떠 있었다.

  (발해 연안의 험한 곳에 조선왕의 성이 있고, 연(燕)과 대(代)에서 요동을 지나서 패수를 건너 동쪽으로 향한 한의 지상군이 왕험성의 서북을 포위하고, 산동에서 발해로 나온 한의 누선군이 왕험성의 남쪽 바다에 있는 곳이라면, 지금의 산해관 자리 뿐이다. 그 곳 이외에는 발해 북안에 험한 산이 있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왕험성은 산해관 지구에 있었고, 패수는 그보다 서쪽에 있으며, 북에서 남쪽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가는 강이었고, 그 강의 서쪽이 요동이고, 요동 서쪽에는 요동과 요서 및 연을 나누는 요수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패수는 지금의 백하라고 밝힌 바 있다.)

  조선왕 우거는 왕험성을 굳게 지키고, 여러 달이 지나도록 항복하지 않았다. 좌장군의 군대는 연(燕)과 대(代)의 출신이므로, 전쟁경험이 많아서 교만하였다.
  그리고 누선장군이 제(齊)에서 데리고 온 수군은 이미 조선군에게 패한 바 있으므로 겁을 집어먹었고, 장군은 수치를 당하였으므로 포위에 참가하고 있기는 하였으나 늘 화친하자는 표시(和節)를 내걸고 있었다.

  이 때에 좌장군이 공격하자, 조선의 일부 대신들은 누선장군에게 몰래 사자를 보내어 화친하기로 사약(私約)하고, 교섭하고 있었다. 그러나 휴전협정(休戰協定)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좌장군은 누선장군과 협동작전을 하려고 여러 번 꾀하였으나, 누선장군은 자기와 몰래 내통하고 있는 조선대신들과 휴진협정을 성사시키려고 좌장군과 협력하지 않았다.

  좌장군도 조선에 사자를 보내어 항복시키려고 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두 장군이 서로 방해가 되어 아무 일도 되지 않았다. 누선장군이 처음에 조선군에게 패하여 군대를 많이 잃은 죄가 있고, 지금은 조선과 몰래 내통하고 있으며, 귀순시킨다고 하면서 못하는 것을 보고, 좌장군은 누선장군을 의심하였다.

  두 장군이 왕험성을 포위하고 있으면서 의견이 맞지 않아 오랫동안 아무런 전과도 없으므로, 무제는 제남태수 공손수(濟南太守 公孫遂)를 전지로 파견하였다.
  공손수가 도착하자 좌장군은 조선이 아직까지 항복하지 않은 것은, 여러 번 협동작전을 하자고 하여도 누선장군이 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그를 의심하는 까닭도 말하면서, 이런 상태로 나가면 누선군 뿐만 아니라 자기가 이끄는 좌군도 위태롭다고 말하였다.

  이 말을 믿고 공손수는 누선장군을 좌장군의 진영에 불러들여, 좌장군의 부하를 시켜서 체포하고, 그 군대를 병합하였다. 그리고 무제에게 보고 하니, 무제는 공손수에게 사형을 내렸다.

  (무제도 누선장군의 노력-휴전협정-에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좌장군은 이미 병합된 수륙 양군을 가지고 조선에 급하게 공격을 가하니, 조선의 대신 노인(路人)과 대신 한음(韓陰)과 니계(尼谿)의 대신 삼(參)과 장군 왕겹(王 口夾)이 서로 상담하기를,
  「우리가 화친하려던 누선장군이 체포되고, 좌장군이 누선군도 함께 지휘하고 급히 공격을 해오니
  우리 측에 승산이 없는데, 왕께서는 항복하려고 하지 않으니 큰 일이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삼을 제외한 네 사람은 한나라로 귀순하였다. 귀순해 오는 길에서 노인(路人)은 죽었다.

  원봉 3년(B.C.108), 삼은 사람을 시켜서 우거왕을 시해하고 한나라로 귀순하였다. 그러나 왕험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대신 성기(成己)가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래서 좌장군은 우거왕의 왕자인 장(長)과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로 하여금 부하를 시켜서 성기를 죽이게 하였다.

  이리하여 드디어 조선이 평정되니, 4군으로 만들었다. 삼은 홰청후(水변晝 淸侯)로 봉하고, 한음은 추저후(萩 艸하且 侯)로 봉하고, 왕겹은 평주후(平州侯)로 봉하고, 왕자 장은 기후(幾侯)로 봉하고, 최는 온양후(溫陽侯)로 봉하였다.
  좌장군은 장군끼리 서로 질시하고 작전계획이 실패되게 한 죄로 사형에 처하여 시체를 거리에 내걸었고,
  누선장군은 열수(列水)의 어구
(즉 패수의 어구)에 가서 좌장군의 군대를 기다려야 할 것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군대를 움직여서 많은 군인을 잃은 죄로 마땅히 사형에 처할 것이지만, 죄를 감하여 장군직을 박탈하고 서인으로 만들었다.」

  《사기》의 이 기록에 의하면, 이 전쟁 중에 한나라 무제는 조선에 보낸 자기의 사신과 장군들은 모두 실패하였다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 버리고, 그 대신에 조선에서 한나라로 귀순한 대신, 장군, 왕자 등 다섯은 공을 세웠다고 후(侯)로 봉하였다.

  그 다섯 사람 중에서 다음 해(107)에 사망한 평주후를 제외한 추저, 홰청, 기, 날양 등 4후의 고을이 《사기》에 기록된 조선의 4군(四郡)이다.
  그들의 연표가 《사기》에도, 《한서》에도 실려 있으므로, 다음에 옮겨 싣는다.
  다음 연표의 좌 3단은 《사기》에서, 우 2단은 《한서》에서 따온 것이다.
표. 《사기》와《한서》에 기록된 한사군의 명칭과 약사, 소재지
이 름     약사(사기)        약사(한서)        소재지   
왕겹
(王 口夾)
평주후
(平州侯)
원봉 3년(108) 4월 후가 되고,
4년(107)에 사망, 고을이 없어짐.
- 양 부
한음
(韓陰)
추저후
(萩 艸하且 侯)
원봉 3년(108) 4월 후가 되고, 정화 2년(91)후가 사망,
고을이 없어짐
발 해

(參)
홰청후
(水변晝 淸侯)
원봉 3년(108) 6월 후가 되고, 천한 2년(99) 조선인 포로를
숨긴 죄로 투옥되어
후가 옥사, 고을이 없어짐

(長)
기 후
(幾侯)
원봉 4년(107) 3월 후가 되고,
6년(105) 조선인을 모반 시키고
후가 사망, 고을이 없어짐
- 하 동

(最)
날양후
(온양후)
(溫陽侯)
원봉 4년(107) 3월 후가되고,
태초3년(102)사망, 고을이 없어짐
-
  전쟁이 끝난 해 (B.C. 108)에 3후(평주, 추저, 홰청)를 봉하고, 다음 해(B.C.107)에 셋중의 하나 평주후가 사망하고, 새로 2후(기, 날양)를 봉하여, 추저, 홰청, 기, 날양(온양)의 4후가 있게 되었는데, 이것이 《사기》에 기록된 조선의 4후이고, 그들의 고을이 조선(朝鮮) 4군(四郡)이다.

  4후는 무제의 정화(征和) 2년(B.C. 91)까지 이르는 사이에 다 사망하고, 4군이 모두 없어졌다. 군(郡)의 소재지는 연표의 맨 끝 단에 보이는 바와 같이 발해(渤海), 제(齊), 하동(河東), 제(齊)로서, 그 곳은 20년 전에 창해군(滄海郡)을 두었던 바로 그 지방이다.

  《사기》의 이러한 기록을 약 200년 후에 베껴서 《한서(漢書)》에 전재(轉載)한 반씨(班氏)는 《사기》의 「遂定朝鮮爲四郡,封參 水변晝 淸侯,陰爲萩 艸하且 侯,陰爲平州侯,長爲幾候,最以父死頗有功爲溫陽侯」라는 부분을 베낄 때에,
  「遂定朝鮮爲眞番臨屯樂浪玄 艸하兎 四郡,封參 水변晝 淸侯,陰爲萩 艸하且 侯,陰爲平州侯,長爲幾候,最以父死頗有功爲沮陽侯」라고 하였다.

  《사기》의 원문에 없는 진번, 임둔, 낙랑, 현도라는 4지명을 새로 써 넣고, 《사기》의 세 글자를 비슷한 다른 글자로 잘못 베꼈다.
  사마천의 《사기》의 원문대로가 옳고, 반씨가 잘못 베껴 《한서》에 실은 것이 틀린 것이다.

  반씨(班氏)진번, 임둔, 낙랑, 현도라는 4지명을 어디서 가져 왔는가?

  진번임둔은 《사기》의 「조선전」처음에서 가져 온 것이다. 이 두 지명은 한(漢)과 조선의 전쟁(한사군을 설치했다는 시기)보다 약 90년 전, 한무제의 증조부 한고조 유방(漢高祖 劉邦)과 우거왕 조부 조선왕 위만 때에도 이미 조선에 있던 두 고을이었다.

  위만의 조선은 오늘의 중국 하북성(河北省)에 있던 작은 나라였음은 이미 아는 바이다. 진번, 임둔은 그 조선안에 있었다.

  현도한 무제가 사망한 후, 아들 소제(昭帝) 때(B.C. 75)에 요동에 현도성을 쌓았다는 《한서》의 「소제본기」의 기사에서 처음 사상(史上)에 나타난다.

  낙랑은 그 보다도 나중에, 왕망(王莽)이 한나라를 없애고, 신(新) 나라를 세운 건국 원년(서기 9)에 부여, 고구려, 낙랑, 현도 등 동방의 여러 왕국에 사신을 보냈다는 《한서》의 기사에서 처음 사상(史上)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진번, 임둔, 낙랑, 현도는 모두 한무제가 설치한 4군이 아님이 분명하다.

  조선, 낙랑의 위치는 《위서》「지형지」에 있은 다음 기사가 단적으로 보여준다.
  『北平郡(奏置)領縣二 戶四百三十 口一千八百三十六 朝鮮(二漢 晋屬樂浪. 後罷. 延和元年(432) 徒朝鮮民於肥如 復置屬焉.) 新昌(前漢屬 水변豕. 後漢晋屬遼東. 後屬.)

  遼東郡 領縣二 戶一百三十一 口八百五十五 襄平(二漢晋屬. 後罷. 正光(520~4)中復. 有靑山.)新昌(二漢晋屬. 後罷. 正光中復)

  樂浪郡(二漢晋曰樂浪屬. 後改, 罷. 正光末復. 治連城.)領良二 戶二百一十九 口一千八永洛(正光末置) 帶方(二漢晋屬帶方. 後罷. 正光末復屬.)』


  북평(北平)은 지금의 북경(北京)으로, 북평군에 조선, 신창의 2현이 있는데, 조선은 전한, 후한, 진 시대는 낙랑군에 속하였고, 신창은 전한 때는 탁군에 속하였다는 것이다. 탁군은 지금의 천진(天津)지구다.

  요컨대 요동, 조선, 낙랑과 낙랑군의 일부였던 대방은 지금의 하북성 북부 북경-천진 지구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동과 요서 사이의 요수(遼水)도 그 지방의 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요수라는 이름을 요하로 고치고, 남만주의 강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쓰게 된 것은 보다 후세의 일임을 알 수 있다.

  현도에 관해서는, 《자치통감》에『玄 艸하兎 在遼東北二百里』라고 있다. 천진, 북경지방에 있은 옛날의 요동 북방 200리에 현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즉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북동 끝 산악지대에 현도가 있었다.

  그런데 1972년의 《통일한 국사 교육 내용》에
  『한 사군의 위치에 관해서는
    ㄱ. 진번 : 자비령 이남~한강 이북의 지역
    ㄴ. 현도 : 압록강 중류 지역
    ㄷ. 임둔 : 함경남도의 대부분~강원도의 일부지역
    ㄹ. 낙랑 : 대동강 유역지역
으로 한다.』
라고 하였으며, 현재의 국사교과서에도 이렇게 써 있다.

  《사기》에 의하면, 진짜 4군은 추저, 홰청, 기, 날양(온양)이었으며, 이들은 하북성 천진 남쪽 (발해, 제, 하동, 제)에 있었고, 조선왕의 서울 왕험성(왕검성)산해관에 있었고, 진번, 임둔도 그 부근에 있었다.
  《한서》에 의하면 낙랑, 현도하북성 동북부에 있었고, 《위서》에는 하북성 북평군에 있다고 하였다.

  지금의 우리나라 국사 교수들은 평양, 서울지구, 강원도까지 한나라 식민지였다고 일제가 지어낸 허위의 식민사관을 따라 말하고 있다.

  공자님의 말씀에 「述而不作(술이부작), 信而好古(신이호고)」라는 말이 있다. '역사가는 옛 기록에 있는 대로 기술하고, 말을 지어내지 않으며, 옛 기록을 믿고, 그것에서 배우기를 즐긴다'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