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왕이 백제왕의 후손(외손)임을 인정한 배경
沙月 李盛永(2010. 4. 6)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明仁) 일본 국왕이 그의 68세 생일을 맞아 기자회견에서 한-일 양국의 인적, 문화적 교류의 중요성에 대하여 언급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는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記)에 기록된 것과 관련해 한국과 인연(因緣)을 느낀다”고 말하였다
아키히토(明仁) 일본국왕의 발언 장면(클릭): 일본국왕 백제후손 발언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하기 전까지 “일본의 천황(天皇)은 아마테라스 오카미(天照大神)로부터 한 계통으로 계승되었다는 소위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신성한 군주” 라는 일관된 주장으로 일본 민족의 우수성으로 내세우면서 이민족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 했던 것이 모두 허구였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속일본기(續日本記)에 일본의 간무(桓武)천왕의 생모가 백제의 무령왕의 자손(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전에는 이를 인정하지 않다가 현 아키히토(明仁) 일본 국왕이 이를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일본천왕이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딸’임을 인정한 발언의 그 배경에 대해서 잘 모른다.

  마침 국과연 다물회지 <多勿> 제186호(2009. 12. 1. 발행)에 문정창 저 『삼국사 제1권 - 백제사』중에 일본천왕의 이 발언의 배경을 명확히 설명해 주는 부분을 옮겨 게재하였기에 간추려 본다.

  어떻게 해서 백제 왕녀가 왜국(倭國)에 건너가 왜왕(倭王)과 혼인을 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약 230여 년 앞선 서기270년(백제 고이왕 37년)부터 서기 661년 백제 멸망 다음해까지 391년간 이어졌던 소위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의 건국과 백제(百濟), 부여(夫餘) 간의 관계사 전반에 대한 줄거리를 먼저 알아보아야 할 것 같다.

◆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은 부여왕자 의라(依羅)가 건국, 백제가 적극 후원
  일제 식민사관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조작 근거의 하나로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왕후(神功王后) 49년(서기369년)조의 7국4읍 평정기사' 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일본서기(日本書紀)신공(神功) 다음 대(代)를 응신(應神)이라 하였다.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은 1세기 초엽부터 일본열도로 건너간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조선인들이 건설한 수 많은 소 부족국가들을 지배한 일본열도 내에서 최초의 중앙집권적 국가이며, 그 세력이 한창일 때 강역(疆域)은 지금의 일본 규쥬(九州)-시고꾸(四國)-혼쥬(本州)의 비탄산맥(飛彈山脈: 일본의 알프스라 칭함) 이서(以西)의 넓은 지역을 지배하였으며, 국도(國都)는 지금의 오오사카(大阪)-나라(奈羅) 지방이었다.

  이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은 부여의 마지막 왕자 의라(依羅)가 부여가 망하자 당시 백제 관할하에 있던 요동반도의 옥저 땅으로 도피했다가 백제 고이왕(古爾王)의 적극적인 주선과 지원으로 북구주(北九州)로 건너가서 나라를 건국하고, 점차 동쪽으로 확장해 나간 것이다.

  이는 당시 역사의 흐름과 그 기간에 일어난 여러 가지 사실(史實)과 일본인들이 기록한 일본서기(日本書紀) 곳곳에 이 주장의 근거가 기록되어 있다.
  이제부터 부여왕자 의라(依羅)의 행적과 그 후세들이 이어가는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엮어려 한다.

  ▶부여 멸망과 왕자 의라(依羅) 옥저로 도피
  부여(夫餘)는 지금의 북만주 할빈 서남쪽 300여리 지점에 위치하여 2,000여년간 사직을 유지한 나라다. 『규원사화(揆園史話)』(서기1678년에 北崖老人 저술)와 『동사강목(東史綱目)』(안정복 저) 에 의하면 부여국(夫餘國)은 단군의 아들 부여(夫餘)가 건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余守己 爲濊君 夫蘇 夫虞 及 小子 夫餘 皆封于國西之地 句麗 眞番 夫餘 諸國是也(揆園史話)
  * 檀君封支子餘地 後世因自號曰夫餘 又曰夫餘 始封之名(東史綱目)

  이 시기에 중원에는 전한(前漢), 왕망의 신(新), 후한(後漢), 서기 220년 후한(後漢) 혼란기에 위(魏), 촉(蜀), 오(吳)의 소위 삼국지(三國志)시대를 지나, 40년 동안의 조위(曹魏)를 거쳐, 사마씨(司馬氏)의 진(晉: 西晉)이 등장한 시기이다.

  선비족의 일파인 모용괴(慕容槐)는 일찍부터 요서지방과 고구려를 자주 침략하다가 진(晉: 西晉) 무제(武帝)에게 포습되어 평주자사(平州刺使: 평주는 현 북경)가 된 후에는 갑자기 부여(夫餘)를 급습하여 부여성(夫餘城)을 함락하자 부여의 마지막 왕 의려(依慮)는 자결하고, 왕자 의라(依羅)는 그 가신들을 데리고 요동반도의 옥저(沃沮) 땅으로 도주하여 그곳에 머물면서 백제에 몸을 의탁하였다.

  부여왕자 의라(依羅)가 옥저(沃沮) 땅에 머물면서 백제에 몸을 의탁할 수 있었던 것은
    (1) 백제왕과는 같은 성씨의 부여씨(夫餘氏)이고,
    (2) 20년 전 조위(曹魏)의 모구검(母丘儉)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부여가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하여 고구려는 요동반도의 옥저 땅은 물론 국도 환도성까지 함락되는 곤경을 당하게 하였기 때문에 부여와 고구려와는 원수지간이 된 반면, 백제는 이로 인하여 낙랑변지(樂浪邊地: 남만주, 금주, 옥저 땅을 포함한 요동반도 등)를 손쉽게 차지하였기 때문에 부여와 백제 간에는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이 때 백제왕은 제8대 고이왕(古爾王: 서기 234-285년 재위)이었다.
<부여왕자 의라(依羅)가 옥저 땅으로 망명할 때까지 동북아 정세>
  조위(曹魏: 서기220-265년)의 낭중(郎中)을 지낸 어환(魚환)이 조위가 망한 후에 쓴 『위략(魏略)』과 당(唐) 태종(太宗)의 명을 받아 방현령(房玄齡)(李延壽?)이 쓴 『진서(晉書)』에 따르면
  “부여는 나라가 부유하고, 선대 이래 일찍이 격파(擊破) 된 적이 없는 나라다” (夫餘,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皮破) 고 하였다.

  그러나 부여국(夫餘國) 해모수(解慕漱)유화부인 몸에서 주몽(朱蒙)이 태어나 동부여(東扶餘) 금와왕(金蛙王)에게 의탁하고 있다가 주몽의 재능을 시기하던 장자 대소(帶素)가 왕위에 올라 생명이 위험해지자 졸본부여로 망명하여 고구려(高句麗)를 세웠다.

  고구려 제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때(서기18년) 부여왕 대소(帶素)가 패사(敗死)한 후 부여는 고구려에 복속되어 조공을 바치는 상태가 80여 년간 계속되었다.
  고구려 제6대 태조왕(太祖王) 5년(서기121년) 한(漢)의 현토성(玄토城)을 공격하고, 부여(夫餘)를 앞장세워 낙랑군(樂浪郡)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부여(夫餘)는 서기120년 왕자 위구대(尉仇臺)가 한(漢)과 내통하여 안제(安帝)의 초청을 받아 융숭한 대접과 봉책(封冊)을 받았다.
  다음해 고구려 태조왕이 백제 기루왕과 합세하여 현토성(玄토城)을 포위하였을 때 부여는 왕자 위구대가 병력 2만으로 고구려군을 급습하여 격파하므로서 부여는 고구려의 구속에서 벗어났으나, 고구려와의 사이가 급속히 나빠졌다.
  그러나 후한(後漢)이 약화되자 요동지역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後漢書夫餘傳)

  서기132년 북경지방에 근거를 둔 선비족 단석괴(檀石槐)가 15세에 일어나 동, 서, 몽고 전부를 흡수하여 대제국을 건설하였다가 45세(182)에 사망하자 제국은 붕괴되고, 선비족은 북경(北京)지방의 모용씨(慕容氏), 천진(天津)지방의 단씨(段氏), 산서성(山西省)지방의 척발씨(拓拔氏), 열하성(熱河省)지방의 우문씨(宇文氏) 등으로 분파되었다.

  서기220년 후한이 망하고, 조위(曹魏: 曹操의 아들 曹丕가 건국)가 등장하여 40년을 이어가면서 서기238년 위(魏) 명제(明帝)가 50년간 요동에 세력을 펴 온 공손씨(公孫氏)를 없애고 요동지역을 차지하면서 고구려와 대치하게 된다.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조위의 요동군 서안평(西安平)을 습취(襲取)하여 먼저 공세를 취하자, 조위는 현토태수 왕기(王기)를 부여(夫餘)에 보내 지원을 요청하자 부여왕 위거(位居)는 왕기를 환대하고, 군량을 지원하였다.

  서기 245년 조위의 유주자사(幽州刺使) 모구검(母丘儉)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초기에는 고구려가 대승을 하였으나, 갑자기 전세가 역전되어 고구려군 18,000명을 잃고 수도 환도성(丸都城)까지 함락되었는데 사서에는 고구려가 졸패(猝敗)한 원인을 기술하지 않았으나 현토태수 왕기와 밀약한 부여왕이 대병으로 고구려군의 배후를 급습한 때문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 환도성까지 함락했던 조위는 이후 급격히 국세가 약화되어 40년 만에 망하고, 중원에는 사마씨(司馬氏)의 진(晉: 西晉)이 일어난다.

  서진을 세운 무제(武帝)는 서기 275년 지금의 북경지역에 세력을 펴고 있는 모용씨(慕容氏: 선비족 檀石槐의 일파)를 포섭하기 위하여 북경지역을 평주(平州)라 하고, 모용괴(慕容槐)평주자사(平州刺使)에 임명하였다.

  모용괴(慕容槐)는 일찍부터 요서지방과 고구려를 자주 침략하였는데 갑자기 부여(夫餘)를 공격하여 부여성(夫餘城)이 함락되자 부여왕 의려(依慮)는 자결하고, 왕자 의라(依羅)는 가신들을 데리고 요동반도의 옛 옥저(沃沮) 땅으로 도피하였다.  

  ▶부여왕자 의라(依羅), 북구주(北九州)로 건너가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 건국
    백제 고이왕(古爾王)은 이보다 20년 전부터 남으로 진출하여 대마도(對馬島) - 일기(一岐)와 부근 도서(島嶼)를 입수하고, 이어서 북구주(北九州) 해안에 상륙하여 신공(神功: 卑彌呼)의 사마대국(邪馬台國)을 공취(攻取)하여 그곳에 지국(枝國)을 설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 고이왕이 부여왕자 의라(依羅)를 왜국으로 끌어들여 고이왕37년(서기270년)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건국토록 하였다.
  이 때 의라(依羅)가 처음 도착하여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의 건국에 착수한 곳은 북구주(北九州) 축자(筑紫: 현 福岡縣,후쿠오카)지방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서기(日本書紀)'신공(神功) 다음 대(代)를 응신(應神)'이라 하였는데, 위사(魏使) 장정(張政)은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서 응신(應神)신공(神功)의 아들이 아니다” 고 하였다.

  응신(應神)부여계(夫餘系)임을 입증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1) 대판부(大阪府) 하내지방에 위치한 부여계 능총형식의 거대한 응신능총(應神陵塚)
    (2) 응신(應神)13년(서기283년) 에 부여국 구신(舊臣)들의 방문
      “(우리는) 제현(諸賢)의 군우(君牛: 六大臣 중의 하나)들입니다. 비록 늙었으나 옛 조정의 님(任)을 잊지 못하여 찾아 온 것입니다” 하였다. (日本書紀 應神十三年記)
    (3)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전하는 서기727년 후고구려(발해) 무왕(武王)일본국 성무제(聖武帝)에게 보낸 국서의 다음 구절
      “대왕은 천조(天朝: 부여를 말함)의 명(命)을 받아 일본국을 건설했습니다. 세대가 비록 머나 우리는 동성(同姓) 백대지친(百代之親)입니다. 우리에게는 부여의 유풍이 있지만----
      다만 하늘 끝에 길이 막혀 소식을 통하지 못하고, 길흉(吉凶)의 상문이 끊어졌던 것입니다.”


  응신왕(應神王)이 부여왕자 의라(依羅)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실도 여러 가지가 있다.
    (1) 위에 언급한 응신(應神)13년(서기283년) 부여국 구신 방문과 계기(繼起)되는 역사적 사실.
    (2) 응신조(應神朝) 이래 일본국의 풍속이 부여국과 동일하게 되었다.(後漢書 夫餘傳)
    (3) 1920년경 헬싱키대학 언어학자 Pope교수의 언어학적 증언.
      원시일본어(原始日本語)부여어(夫餘語)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4) 응신왕(應神王)이 부여계임을 입증하는 물적 증거 - 하월용빙(夏月用氷: 여름에 어름을 사용한다)
      「인덕(仁德)62년(374) 여름 6월, 액중대언황자(額中大彦皇子)가 투계국(鬪鷄國)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들 가운데 땅을 파고 만든 움집이 있는지라--- 투계국주에게 물으니 빙실(氷室)이라 하였다.--- 땅을 10장(丈) 파고 그 위에 풀을 두텁게 깔고 어름을 그 위에 넣고 덮어두면 여름이 다 가도 녹지 아니합니다. 하였다.」(日本書紀)
  중국의 모든 사서(史書) 중에는 '하월용빙(夏月用氷)) 하는 나라는 부여국(夫餘國) 뿐이다.
  부여계 일본왕실은 친왕(親王) 및 삼위(三位) 이상의 사람이 여름에 죽으면 그 장례에 빙(氷)을 사용하였다.
(日本 喪葬令)

    부여왕자 의라(依羅)가 북구주 복강현(福岡縣: 후쿠오카) 지역에서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을 건설했다는 추정을 뒷받침하는 기록은 일본서기(日本書紀)의‘應神三年 冬十月 東蝦夷悉朝貢’ 구절 중에 ‘東蝦夷悉朝貢’(동하이실조공)인데, 하이(蝦夷)아이누족을 말한다. 그 뜻은 “동쪽의 아이누족들이 (성심을) 다하여 조공을 해왔다”는 뜻이다.
      그런데 복강현(福岡縣: 후쿠오카현) 동쪽 대분현(大分縣: 오이타현)아이누계 승문토기(繩文土器)가 대량으로 출토된 아이누족의 본거지였다.

      그리고 복강현(福岡縣: 후쿠오카현)은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의 건국을 적극 지원하던 한반도 백제와 통교하는데 가장 가깝고 편리한 곳이다.
      또 후에 이곳은 일본열도의 서부를 통괄하던 다이자이후(大宰府)가 위치했고, 백제가 멸망한 다음해(서기661년) 백제 복국군(復國軍)을 이곳에서 편성하여 출병시켰던 곳이다.
      이러한 여러가지 정황을 종합할 때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의 최초 건국 위치는 복강현(福岡縣: 후쿠오카현)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이지이후(大宰府) 유허(遺墟)
* 후쿠오카현(福岡縣) 다이자이후(大宰府)(클릭) : 일본속의 漢民族史 탐방(후쿠오카-아소산)
  ▶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의 영토 확장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의 응신왕(應神王)은 먼저 동쪽 대분현(大分縣: 오이타현) 북부지방의 아이누족의 근거지를 석권하고, 이어서 세토나이키이(瀨戶內海) 연안지방을 공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들을 모아보면
    (1) 응신왕(應神王) 건국 3년 되는 해부터 세토나이키이(瀨戶內海) 연안지방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응신(應神) 3년(서기272년) 11월 침해를 받은 내해지방 곳곳의 해인(海人: 아이누사람)들이 산방(言山 口尨): 비방하고 욕함, 소란)을 일으키며 복종하지 않음으로 아담연조(阿曇連祖)대빈숙미(大濱 宿 示爾)를 보내 그 소란을 평정하였다.(應神三年十一月 處處海人 言山 口尨 之不從命 則遣阿曇連祖 大濱宿 示爾平其 言山 口尨 因爲海人之宰)

    (2) 응신왕(應神王) 건국 5년 되는 해에 대형 선박을 건조하여 세토나이키이(瀨戶內海)의 연안지방을 공략에 활용한다.
      응신(應神) 5년(서기274년) 겨울 10월에 과이두국(科伊豆國)에게 배를 건조하도록 명하였다. 길이 10장이나 되는 배가 완성되어 바다에 띄우는 시험을 하였더니 가볍게 떠서 수레처럼 줄달음 쳐갔다. 그 배 이름을 고야(枯野)라 명명하였다. (應神五年冬十月 科伊豆國令造船 長十丈船成之試浮于海 便輕泛疾行如馳 故命其船曰枯野)

    (3) 응신왕(應神王) 건국 6년 되는 해에 오오사카만(大阪灣)으로 진출하였다.
      응신(應神) 6년(서기275년) 봄 2월에 천황은 강국(江國) 가까이 행차하여 토도야상(艸하兎 道野上: 지금의 滋賀縣지방)에 이르니 백성들이 노래 부르기를--- (應神六年春二月 天皇行近江國 至?道野上而歌之曰---)

    (4) 응신왕(應神王)은 건국 9년 되는 해에 오오사카(大阪) 지역에 머물면서 북구주 지역에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보내 통괄하게 하였다.
      응신(應神)9년(서기278년) 4월에 무내숙미(武內宿彌)축자(築紫: 북구주, 구 도읍지)에 보내 백성들을 감찰하게 하였다.(應神九年四月 遣武內宿彌於築紫 以監察百姓)

        * 복강현(福岡縣: 후쿠오카)의 다이자이후(大宰府)가 이 때부터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됨

  ▶ 오오사카(大阪)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에 대한 백제 고이왕의 지원
  응신왕(應神王)이 오오사카(大阪) 지방으로 천도한 것은 백제 고이왕(古爾王) 45년(서기275) 이며, 응신왕이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자 부여국(夫餘國) 구신(舊臣)들이 찾아왔다.(위에 언급),

  백제 고이왕이 응신왕(應神王)의 건국과 나라의 기반을 다지는 사업을 적극지원한다.
    (1) 응신왕(應神王) 14년(서기283년) 봄 2월에 백제왕(古爾王)이 봉의공(縫衣工: 피복 기술자) 진모진(眞毛津)을 보낸다. 이 때 진모진은 많은 피복과 방직기술자들을 대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고문서에 따르면 당시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은 의복이 발달하지 못하여 조신(朝臣)들도 형편없는 옷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 응신왕(應神王) 15년(서기284년) 백제왕(古爾王)이 아직기(阿直岐)를 보내면서 양마(良馬: 種馬인 듯) 2필을 함께 모냈다.
      이후 일본에 말이 급속도로 늘어나 후세의 강상파부(江上波夫)‘천왕기마족설(天王騎馬族說)' 주장이 나오게 되고, 양마관(養馬官) 아직기의 자손들은 대대로 세습하여 마동관(馬 人同 官)이 된다.
      아직기는 사기(史記)에 능하여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세습하여 왜국의 사관(史官)이 되며, 이 자료를 기초로 하여 400년 후에 안만려(安萬侶)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편찬한다.

    (4) 응신왕(應神王) 16년(서기285년) 봄 2월에 백제로부터 왕인(王仁)이 왔다. 왕인은 오경박사(五經博士)로서 천자문(千字文), 논어(論語) 등을 가지고 와서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 왕실의 스승이 되었다.

  ▶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 주요 조신(朝臣)과 지배층은 백제인
    응신왕(應神王)은 부여국 왕자 의라(依羅)이지만 부여국은 이미 멸망하였기 때문에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의 주요 조신과 지배층은 모두 백제인이었고, 한반도의 백제는 왜국 백제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의 제2대 인덕왕(仁德王)은 백제 목씨(木氏)인 습진언(襲津彦)의 사위가 되었는데, 인덕2년(서기 년) 백제의 갈성(葛城) 목씨(木氏)는 왜국의 소아씨(蘇我氏)가 되고,
    인덕왕이 죽은 후에는 백제모계(百濟母系)의 제3대 이중왕(履中王)이 등장하게 되면서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 390년간을 백제가 지배하는 체제가 된다.

    * 아스카(飛鳥)에 있는 '이시부타이(石舞臺)'라 불리는 70톤 이나 되는 거대한 바위들로 된 돌무덤을 백제의 목씨(木氏)가 변성한 소하씨(小河氏)의 실력자 소하마자(小河馬子)의 무덤으로 추정한다고 하였다.
* '이시부타이(石舞臺)'(클릭) : 일본속의 漢民族史 탐방- (나라 - 아스카)

    그래서 고대 왜국인들은 백제를 ‘백제(百濟)’라 부르지 못하고, ‘구다라(クダラ)’라 불렀는데, 이는 우리말로 ‘큰나라’라는 말이 일본어화 하여 백제의 호칭 또는 대명사가 되었다.

    백제의 목씨(木氏)가 왜국으로 건너가 목각(木角: 木角宿彌), 목토(木 艸하兎: 木 艸하兎 宿彌), 목만(木滿: 木滿致), 목라(木羅: 木羅斤資) 등으로 변성하여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의 지배층을 형성한다.

    습진언(襲津彦)이 데리고 온 기국(己國)의 용사들은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에서 자칭 중국 진시황(秦始皇)의 후예라고 하면서 성을 진(秦) 또는 진조(秦造)로 창씨(創氏)하여 역시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의 지배층에 들어갔다.

  ▶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은 백제분국(百濟分國)
  앞에서 살펴본 바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면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은 백제분국(百濟分國)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을 건국한 국조(國祖) 부여왕자 의라(依羅)는 백제국 왕실과 동성인 부여씨(夫餘氏)이고,
    (2)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의 건국 초부터 백제의 목씨(木氏) 등 백제인들이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3) 봉의공(縫衣工), 방직공(紡織工), 목공(木工), 토공(土工), 의약사(醫藥師) 일상생활의 필수 기술자는 모두 백제인들이었으며,
    (4) 오경박사(五經博士: 王仁), 사관(史官), 마관(馬官) 등은 모두 백제인들이 대를 이어 세습적으로 전담하였다.

  백제와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의 이러한 관계 때문에 백제국은 일찍부터 왜국왕 또는 그 대리인을 백제국에 불러다가 섬기게(宰) 한 사실이 다음과 같은 일본서기 웅략(雄略) 20년기에 나타나 있다.
    「웅략(雄略)20년(서기474년) 겨울 고려(고구려)국왕이 군사를 크게 징발하여 백제를 거의 다 토벌하니 백제군이 조금 남아 있어 창하(倉下)에 모였으나 양식이 이미 다하여 울상을 지어 깊이 근심하였다.
    이 때 고려 제장이 왕에게 말하여 가로되 “백제 삶들의 마음보가 비상합니다. 신이 매양 보건대 자기네의 과실을 깨닫지 못하니 다시 이런 일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무리들을 제거하소서” 하니, 왕이 가로되
  “옳지 아니하다. 과인이 듣건대 백제국은 일본국(日本國)의 관가(官家: 皇室)가 되어 있다. 그 유래한 바가 오래되었으며, 또한 일본국(日本國) 왕(王)이 백제국에 들어와 벼슬하였음은 이웃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다” 하고 군대(무리)를 정지시켰다. 」
  「雄略二十年冬 高麗王大發軍兵 伐盡百濟 爰有少許遺衆 聚居倉下 兵粮旣盡 憂泣玆深 於是高麗諸將言於王曰 百濟心許非常 臣每見失 不覺自失 恐更蔓生 請隊除之 王曰 不可矣 寡人聞 百濟國者 爲日本之官家 所由來遠久矣 又其王入仕天皇 四隣之所共識也 隊止之」
(日本書紀 雄略二十年記)

  위 일본서기 웅략20년기에서
  ‘百濟國者 爲日本之官家’(백제국자 위일본지관가)는 ‘백제는 일본의 관가(官家: 皇室)가 되어있다’‘백제가 왜국을 다스린다’ 또는 ‘왜국이 백제를 섬긴다’는 뜻이다.

  ‘所由來遠久矣’(소유래원구의)는 ‘유래한 바 멀다’즉 ‘오래 되었다’는 뜻이다. 이는 이보다 200여 년 전에 부여국 왕자 의라(依羅)가 백제 고이왕(古爾王)의 도움을 받아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을 건국한 사실을 말한 것이다.

  ‘其王入仕天皇 四隣之所共識也’ (기왕입사천황 사린지소공식야)중에 ‘天皇’‘百濟’를 후인이 개작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雄略(웅략)년대에는 왜국에 ‘天皇’이라는 칭호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일본서기에는 일본의 왕들이 백제왕을 섬긴 사실을 분명히 하는 대목이 또 있다.
  「민달(敏達) 6년(서기577년) 여름 5월 1일 소흑길사(小黑吉士)와 함께 대별왕(大別王)을 보내서 백제국을 섬기게(宰) 하였다」
  「敏達六年夏五月一日 遣大別王 與小黑吉士 宰於百濟國 王人奉命爲使三韓 自稱爲宰」
(日本書紀)

  위 일본서기 ‘宰於百濟國----自稱爲宰’(재어백제국----자칭위재)에서 재(宰)‘섬긴다’는 뜻이다. 일본서기 저자는 사신(使臣)을 보내는 경우 모두 ‘견(遣)’이라 기록하였고, ‘재(宰)’라 쓴 적이 없다.

  '王人奉命爲使三韓’(왕인봉명위사삼한)에서 ‘三韓’百濟를 말하며, ‘爲使’‘심부름꾼이 된다’는 말이다.

◆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은 백제의 부마국(駙馬國) 내지 외손국(外孫國)
  백제 제25대 무령왕(武寧王: 서기501-522년 22년 재위) 대에 이르러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은 백제의 부마국(駙馬國)이 되고, 이어서 5대 년 66년 동안 백제국의 외손이 왕위에 올라 외손국(外孫國)이 된다. 마치 고려가 말기에 원나라 부마국 내지 외손국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무령왕(武寧王)의 딸 수백향(手白香)이 왜국으로 건너가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의 계체왕(繼體王: 서기507-531년 25년 재위)과 결혼하여 제29대 흠명왕(欽明王; 서기540-571년 32년)을 낳았고, 흠명왕은 아들 민달(敏達), 용명(用明), 숭준(崇俊) 등이 잇달아 왕위에 오fmsek.

  또 백제28대 무왕(武王: 서기600-640 41년재위) 의 딸 보황녀(寶皇女)가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 제34대 서명왕(舒明王)에게 출가하였으나 서명왕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보황녀(寶皇女)가 물려 받아 11년간 직접 왕위에 올라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을 통치하였다.

  이렇게 해서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 6대 91년에 걸쳐 백제국의 서랑(壻郞: 사위)과 외손(外孫)의 나라가 되었고, 심지어 중국 당(唐) 고종(高宗) 황후 측천무후(則天武后)처럼 백제의 성씨 부여씨(夫餘氏)인 백제 무왕의 딸 보황녀(寶皇女)가 왜왕의 자리에 올라 11년이나 통치하게 된 것이다.
백제국 서랑 및 외손 왜왕
구 분 왜왕명     재위기간(서기)        재위년수(년)   
    백제 무령왕 서랑   
(딸)
    27대 계체왕(繼體王)   
[수백향(手白香)]
507-531 25
백제 무령왕 외손 29대 흠명왕(欽明王) 540-571 32)
백제 무령왕 외손 30대 민달왕(敏達王) 572-585 14
백제 무령왕 외손 31대 용명왕(用明王) 586-587 2
백제 무령왕 외손 32대 숭준왕(崇俊王) 588-592 5
백제 무왕  서랑
(딸)
34대 서명왕(舒明王)
[보황녀(寶皇女)]
629-630
(631-641)
2
(11)
91
  이와 같이 백제는 무령왕으로부터 무왕에 이르는 동안 백제 왕실과 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의 왕실과 혼인 및 외척관계가 확대됨에 따라 이들 관계를 원활히 관리하기 위하여 외관(外官)으로 ‘日宮部(일궁부)’ 라는 관청까지 두게 되었다. 이는 방현령(이연수?)의 「晉書」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백제국(白濟國)응신조왜국(應神朝倭國)의 이러한 관계가 지속되던 그 시기인 서기369년부터 562년까지 193년 동안 왜(倭)가 한반도 남단 가야지방에 일본부(日本府)를 두고 가야는 물론, 신라, 백제까지 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일제 식민사관의 표본적인 허구였던 것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졌다.

  최근 한-일 역사 공동연구에서 일본 역사학계는 이 설을 '폐기'한다고 공표하였으니 사필귀정이다. 그러나 독도영유권을 주장에서 볼 수 있듯이 보수 일본 정계 인사나 국민들도 일국왕이나 학계와 같은 생각이라고 하기는 아직 이른 것 같다. 이키히토(明仁) 국왕도 '개인적으로는'이라는 단서를 붙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일본 왕실의 혈통이 어머니 쪽이 백제인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데 이어 한걸음 더 나아가서 아버지 혈통도 부여계 조선인이었음을 인정할 날도 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日학계 '일본의 가야지배說' 폐기
조선일보(2010. 3. 23) 유석재 기자
  일본이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양국 학자들에 의해 학문적으로 공식 폐기됐다.

  본지가 입수한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최종 보고서 요약본에 따르면, 양국 학자들은 서기 4-6세기 왜(倭)가 가야에 군대를 파견해 정치기관인 '임나일본부'를 세웠다는 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데 합의했다.

  식민사관의 하나로 일제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 하는 역할을 해 왔던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학계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아 왔으나, 최근까지 후소샤(扶桑社) 등 일부 역사 교과서에 마치 정설인 것처럼 실렸다.

  양국 정부 지원으로 지남 2007년 이후 공동 연구를 계속해온 2기 한-일역사공동위는 이같은 내용의 최종보고서를 23일 양국 정부에 제출한다.

  양국 학자들은
    ▲ 왜구(倭寇)의 주요 구성원이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으며
    ▲ 일본의 벼농사와 금속문화가 한반도에서 전래되었다는 등에 합의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 조선통신사 문제
    ▲ 을사늑약의 성격
    ▲ 일제 강점기 노동자 강제동원
등 근,현대사 부분에 대해서는 크다란 시각차를 보였다.

  특히 독도, 종군위안부(성노예), 한일강제병합의 불법성 등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아 논란이 예상된다.

  공동위 보고서는 양국 역사교과서 집필자가 '참고자료'로 활용하게 돼 있으나 일본측의 교과서 왜곡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장치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日, 한국침략 정당화 핵심논리 스스로 철회
조선일보(2010. 3. 23) 유석재 기자
  23일 발표될 제2기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 최종 보고서는 고대-중세사에서 상당한 '성과'를 담아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그 동안 식민사관의 상징처럼 여겨졌으며,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일본 스스로 철회했디는 점이 주목된다.

◆ "일본의 고대 한반도 지배는 없었다" 인정 이번 공동위 최대의 성과는 '임나일본부설'의 공식 폐기다. 지난 2005년 1기 보고서 때 한-일 학자들 모두 이 설을 부정적으로 보는 의견에 접근한 데 이어 이번에 "사실이 아니다"고 못박음으로써 이 설은 역사 현안에서 제외되는 운명을 맞게 됐다.
  공동위는 현재 일본 교과서에서 이 내용을 빼도록 권고할 예정이다.

  보고서에서 일본측은 "임나일본부를 군사적 성격으로 보거나 정치기관으로 보는 견해는 부인되고 있으며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밝혔다.

  또 " '일본서기' 신공기(神功記) 49년조의 해당 기록 중에서 왜(倭)가 가야 7국을 평정했다는 내용은 사실로 볼 수 없다" "광개토대왕비문에서 고구려와 전쟁을 치렀다고 기록된 '왜군'이란 왜가 백제, 가야와 연합한 군대였을 것" 이라고 했다.

  14-15세기 한반도를 침탈했던 왜구(倭寇)의 정체가 사실은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가짜왜구'였다는 일본 학계 일각의 주장도 부정됐다.

  일본측 위원은 "쓰시마-이키(壹岐)-마쓰우라(松浦) 지역의 해민(어민)과 영주가 왜구의 중심을 이뤘다는 공통된 인식"이라고 말했다.

  일본측은 일본의 벼농사와 금속문화가 한반도로부터 전해졌다는 것도 인청했다.

◆ 왜곡 파문 9년만에 일부 성과 내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출범은 2001년 4월 일본 후소샤(扶桑社) 역사교과서 왜곡 파문이 계기가 됐다.
  양국간 역사 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르자 김대중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그해 10월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부 주도로 역사공동연구를 시작한다는데 합의했다.

  이에 따라 2002년 3월 제1기 공동위가 출범해 2005년 6월 최종보고서를 내놓았지만, 양국의 심한 시각차를 확인하는 데 그쳤다.

  2006년 독도 영유권 문제 등으로 다시 양국 관계가 긴장되면서 설립이 연기되던 2기 공동위는 2007년 6월에 출범, 학자들로 구성된 34명의 위원이 연구를 진행해 왔다.
  공동위원장은 조광 고려대 교수와 도리우미야스이(鳥海靖) 도쿄대 명예교수가 맡았고, 24개 공동연구주제에 대해 모두 67회의 회의를 거쳤다.

  공동위 관계자는 "1기가 쟁점을 확인하는 자리였다면 2기는 그중에서 상당부분 같은 의견에 접근했다는 의미가 있다""몇차례의 위원회로 양국의 역사 현안이 모두 해결된다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내용이 교과서에 얼마나 반영될지는 의문이다. 당초 우리 정부는 공동위의 연구 결과를 교과서에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일본측의 반대로 '참고자료 활용' 수준에서 그치게 됐다.
  교과서 집필에 대한 권고문도 만들지 못했다. 독일-프랑스독일-폴란드가 만들었던 공동 역사교과서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3기 공동위의 출범 여부도 현재로선 확실하지 않다. 한 연구자는 "지난 1월 보고서를 발표한 중-일(中-日) 역사공동연구위원회와 연계해 한-중-일 3국이 공통된 역사인식에 접근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