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또 하나 역사조작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沙月  李 盛 永(增補)

임나일본부설의 경위와 내용

 

일본인들의 임나(任那) 연구는 에도시대(서기1603-1867년)의 국학자(國學者)들에서부터 비롯되었는데 그 때 국학자들은 전대에 선호했던 주자학(朱子學)을 외면하고 기기(記紀: 古事記, 日本書紀의 약칭)나 기타 일본 고전을 비판 없이 추종하면서 신국(神國) 일본의 자랑으로 삼아 ‘일본의 조선지배’를 주장하게 되었다.

 

메이지(明治)시대는 (管政友), (津田左右吉), 이마니시(今西龍), (鮎貝房之進) 등이 ‘일본의 임나지배(任那支配)’를 전제해 놓고 임나 관련 문헌과 지명고증에 치중했다. 이를 이어받은 (末松保和)는 1949년에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체계를 완성하여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를 내 놓았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 표와 같다.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 내용(요약)

근거

연대

내용

三國志魏志倭人傳序頭

(삼국지위지왜인전서두)

3세기중엽

일본은 이미 변진구야국(弁辰狗耶國)을 점유하고 있으면서 왜왕은 그 중계지(中繼地)를 통해 삼한에 통제력을 미치고 있었다

日本書紀神功王后

(일본서기신공왕후)49년조 7국4읍평정기사

서기369년

일본은 경상남북도 대부분을 평정하고, 전라남북도와 충청도 일부를 복속(服屬)시켜 임나지배체제를 구축하고 백제왕의 조공을 약속 받아냈다

廣開土王陵碑文

(광개토왕릉비문) 기사

서기400년

일본은 고구려군과 전쟁을 벌려 임나를 공고히 하고, 백제에 대한 복속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宋書倭國傳(송서왜국전),

倭五王爵號(왜5왕작위)

5세기

일본은 외교적인 수단으로 왜·신라·임나·가라에 대한 영유권을 중국 남조로부터 인정받고, 백제의 지배까지 송나라로 하여금 인정시키고자 하였다

南齊書(남제서)伽羅國傳(가라국전)日本書紀繼體

天皇代(일본서기계체천황대)

5세기후반

6세기초반

5세기후반 임나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어 6세기 초반 백제에게 전남북 땅을 할양해 주고, 신라에게 남가라를 약탈당하면서 임나는 쇠퇴해졌다

日本書紀欽明天皇代

(일본서기흠명천황대)

서기540년대 이후

백제와 임나일본부는 임나의 부흥을 꾀하였으나 562년에 신라가 임나관가(任那官家)를 토멸함으로써 임나는 멸망하였다

 

서기646년

일본은 임나의 고지(故地)에 대한 연고권을 가져서 신라에게 임나조(任那調: 조공)를 요구하였다

 

위 표의 내용을 축약(縮約)하면 일본은 서기 369년에 신라를 치고 낙동강유역의 가야 여러 나라를 평정한 후 서기 562년까지 거의 200년 동안 가야에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고 가야뿐만 아니라 신라, 백제까지도 지배하였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칠지도(七支刀) 명문(銘文), 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 남제서(南齊書), 송서(宋書) 등을 그 근거 사료로 들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일본 교과서 반영 예

 

또 일본 사학계의 임나일본부설이 일본 교과서에 수록된 내용 몇 가지만 예시하면

  고구려 광개토왕 비문에 의하면 대화정권(大和政權)은 군대를 조선에 보내어 고구려와 싸웠다고 볼 수 있다. 이 무렵부터 대화정권은 가라지방(加羅地方)에 세력을 떨쳐 그 세력 하에 들어갔다고 간주한 지역을 임나(任那)라 불렀다.

 

  5세기초부터 거의 1세기 동안 5대의 왜왕(倭王: 倭의 五王은 중국의 남조(南朝)에 조공했고 조선 남부에 대한 군사지휘권을 표시하는 높은 칭호를 얻으려고 하였다.

 

  이것은 중국 황제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조선의 여러 나라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유리하게 꾀한 것이다.

 

  이러한 조선반도에의 진출에 의해 대화정권은 대륙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큰 힘을 지니게 되었다.

 

  4세기 말엽부터 5세기에 걸쳐 대화정권은 백제와 연합하여 통일이 늦어진 변한을 발판으로 하여 신라에 침입, 고구려와도 싸운 것으로 생각된다.

 

  대화정권은 그 후에도 백제와는 우호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변한의 땅을 임나라고 칭하면서 세력하에 넣었다

 

  대화정권이 거의 국토(일본열도)를 통일하고 조선반도에도 세력을 뻗쳤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후 조선반도의 제 민족 사이에 민족적 자각이 높아져서 통일국가 형성의 기운이 높아졌다.

 

이러한 내용들은 동경서적(東京書籍), 실교출판사(實敎出版社), 자유서방(自由書房), 삼성당(三省堂) 등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일본사 교과서에는 하나같이 똑 같은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사료(根據史料)에 대한 비판

 

칠지도(七支刀) 명문(銘文)

 

백제왕이 왜왕에게 보냈다는 보도(寶刀) 칠지도(七支刀)에 새겨진 글 중에서 일본 사학계는「供侯王(공후왕)」과「故爲倭王旨造(고위왜왕지조)」의 해석에서 ‘일본의 백제 지배’를 주장하는 근거로 삼고있다.

 

‘供侯王(공후왕: 侯王에게 供했다)’을‘백제왕이 상국인 왜왕에게 바쳤다’로 해석하고,  ‘爲倭王旨(위왜왕지)’를 ‘왜왕 지의 명을 받들어’라고 해석하여 ‘백제왕이 보도(寶刀)를 왜왕에게 봉헌(奉獻)한 것은 백제가 왜에게 신속(臣屬: 신하의 나라처럼 복속) 해 있던 증거’라는 주장이다.

 

그러나供侯王(공후왕)’‘속국의 왕에게 보낸다’ 는 뜻이지 결코  ‘상국의 왕에게 바친다’는 뜻이 될 수 없다. 또 ‘爲倭王旨(위왜왕지)’‘왜왕 지를 위해’로 해석하는 것이 정상적인 해석이지 결코 ‘왜왕 지의 명을 받들어’ 라고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칠지도명문(七支刀銘文)은 백제가 왜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왜(倭)가 백제의 하위(下位)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증거인 것이다.


  2004년 1월 8일자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에 칠지도(七支刀)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한일간에 역사의 쟁점이 되어 온 일본의 국보 칠지도(七支刀)가 10년 만에 공개된다는 보도가 있었다. 길이 75Cm의 양날 도검으로 좌우에 세 개씩의 가지가 돋아 있는 신통력을 부르는 주술의 신검(神劒)이다.

  이 칼은 일본 나라(奈良) 이시가미(石上)신궁의 신체(神體)로 이를 모신 성역에 금줄을 쳐놓고 접근만 하려 해도 신발을 벗게 하는 등 일본에서 이를 본 사람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로 소중히 여겨온 귀물이다.

  이 칠지도의 도신(刀身)에는 금박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워낙 오래되어 해독할 수 없는 글자가 있고 또 글자를 조작한 흔적도 완연하여 백제와 일본 간의 역사 해석에 문제를 제기해온 백제 신검이다

  탈락문자가 있는 고대 금석문이나 명문(銘文)은 여러 갈래 해석이 가능하게 마련이다. 광개토대왕비처럼 한두 글자만 변조하면 고대사를 유리하게 변조할 수가 있다.

  일본의 한국침략 아래 그 명분으로 삼국시대에 일본이 한반도의 남반부를 지배했었다는 역사변조에 눈이 어두웠을 때 이 칠지도의 명문이 부각된 것이다. 그리하여 아전인수격으로 해석, 이 칼을 백제왕과 세자가 왜왕(倭王)에게 헌상한 것으로 해석, 일본의 모든 책에서 이를 따르게 해왔다.

  한데 양심적인 일본 학자는 헌상했으면 그 말투가 위로 바친다는 공손한 상행(上行)문서형식이어야 할 텐데 칠지도 명문은 '이를 받들어 후세에 길이 전할지어다'---하는 아래로 내리는 하행(下行)문서양식에 주의 한 것이다. 그리하여 연대로 보아 백제왕인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아래로 내리니 받들어 모시라는 이 하행 어투가 창피했던지 일본 어용학자 가운데 한 사람은 명문에 나오는 '성음(聖音)'을 '성진(聖晉)'으로 해석, 중국의 동진(東晉)이 백제왕을 통하여 왜왕에게 내렸다고 궁색한 해석을 하기도 했다.

  예로부터 일본인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한반도에 대한 우월사상이 올 정초에 일본 전통옷인 하오리 입은 일본 총리로 하여금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시킨 것이다.

 

廣開土王陵碑文(광개토왕릉비문)

 

일본사학계가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서 제시하는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문의 문제의 부분은「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波百殘□□□羅以爲臣民(백잔신라구시속민유래조공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라이위신민) 이다.

 

이 부분을 일본 사학계는 ‘백제와 신라는 본시 속민이었음으로 조공을 해 왔었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서기391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무찌르고 그로써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억지 해석을 해 온 것이다.

 

이 해석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문이 제기 된다.

① 광개토왕 비문에 나온 (倭)는 임나일본부설의 주체가 되어 있는 일본  대화정권(大和政權)이 아니고 가야민족 일부가 서일본과 구주 일원에 세운 나라이다.

따라서 설사 왜가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에 쳐들어 왔다 하더라도 그것은 늘 있어온 왜의 노략질에 불과할 뿐이며 그것이 일본의 대화정권이 조선경영을 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 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② 위 구절의 해석에서 ‘而倭以辛卯年來渡’(이왜이신묘년래도해) 의 앞과 뒤에 구두점을 찍어 떼어내고 보면 그 다음 문장의 주체(주어)는 이 비를 만든 고구려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波百殘□□□羅以爲臣民」의 해석은 ‘(고구려는) 백제를 치고, 신라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간의 관계이지 결코 왜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한정된 공간에 비문을 쓰면서 고구려와 관계가 없는 백제, 신라, 왜 간의 하찮은 사건을 비문에까지 기록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③ 비문의 문장 중 마멸된 부분은 비의 발견자 일본군 (酒勾景信)중위에 의하여 개삭(改削)된 것으로 의심되어 왔는데 이 것이 사실이라면 역사를 조작해서라도 일본의 우월성을 주장하려는 것이 일본 사학계 일부의 생각이 아니라 모든 일본 사람들의 잠재한 의식이 아닌가 생각된다.

 

전체 문장을 다시 새겨보면 ‘백제와 신라는 전에는 속민으로서 (고구려에)조공을 받쳐왔었다.(그러나 그 후로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신묘년(서기391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 (조공 해)왔다. (고구려는) 백제를 치고, 신라를 □□(설득, 협박)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가 된다.

 

이상의 제 의문점으로 볼 때 광개토왕릉비문의 내용이 일본의 대화정권에 의하여 전개되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을 말 해 주는 것이다.

 

南齊書(남제서)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중국의 남제서(南齊書) 東南夷傳(동남이전) 倭國(왜국) 편에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육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왕무)라는 문장이 있는데 이를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등 6국의 제 군사를 통괄하는 지절도독에 안동대장군 왜장 무를 임명하였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이 문장에서 왜왕은 조선의 신라군사와 가야군사까지 지휘하였다 하여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한 것이다.

 

이는 후술하는 ‘임나본부설의 역설’에서 자연히 이해될 것이다. 여기 기술된 신라, 가야는 조선의 신라와 가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가야, 신라, 백제 사람들이 대마도, 구주 등 서일본 일대에 이주하여 소국가 형태의 집단을 이루고 살았는데 그들을 칭하여 ‘가라사람 집단 또는 소가라국’, ‘신라사람 집단 또는 소신라국’등을 말하는 일본 구주지역의 작은 여러 부족국가의 이름이지 결코 조선에 있는 가야, 신라, 백제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宋書(송서)

 

송서(宋書: 중국 송나라 역사서)에 나오는 왜왕 무(武)의 상표(上表: 서기478년)에 ‘(왜가) 부조(父祖) 때부터 --- 바다 북쪽(海北) 95국(國)을 도평(渡平)했다’는 한 구절에서 ‘왜가 남선(南鮮: 조선의 남부지역 즉 가라와 백제, 신라의 일부지역) 경영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주장하면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해북(海北) 95국 도평(渡平)’은 왜가 늘 상 해온 조선의 남쪽 해안 곳곳에 출몰하여 노략질 하면서 괴롭힌 것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일 뿐, 그들이 말하는 임나일본부에 의한 2백년간에 걸친 조직적인‘남선경영’의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역설(逆說)

19세기말부터 일본 사학계가 제기한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 1945년까지는 조선사람이나 일본사람이나 간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곧 천황(天皇)의 절대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세일계(萬世一系: 단절없이 한 핏줄로 이어져 온 계통)로 믿었던 천황가의 혈통에 대한 비밀이 조금씩 밝혀지고, 일부 양심적인 일본사학가들에 의하여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의한 임나사(任那史)의 조작, 왜곡에 대한 역설(逆說)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예로서일본 천황가(天皇家)의 기마민족설(騎馬民族설)’, ‘왜국(倭國)은 가야족이 세운 구주왕조(九州王朝)’, ‘건국신화와 언어학에서 밝혀지는 천황가의 실체’ 등의 지론들이 대두되고 있는데 이들 주장은 일본이 가야, 신라, 백제를 200년간이나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거꾸로 뒤집는 즉 일본 열도 내에 가야, 백제, 신라 민족들이 건너 가 분국(分國)을 세웠다거나, 일본 천황가도 가야민족이라는 등의 주장들인 것  이다.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

 

전후 일본은 경제대국의 경제력에 힘입어 ‘원점(原點: 뿌리) 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한일고대사연구 붐이 일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서양문물에 휩쓸리면서도 ‘조국회귀(祖國回歸)’의 성향을 보인 하나의 흐름이었는데 그 연구의 귀착점은 곧 천황(天皇)이었다. 즉 천황의 뿌리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이다.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국사관(皇國史觀)에 의한 천황상(天皇像)이 무너지고, ‘천황이 조선에서 건너왔다’,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일본과 조선은 한 조상이다)’ 등 야마대국(邪馬台國: 大和政權)에 관한 논문만 해도 5백 여 편이 넘었으며, 또 북한의 김형석(金亨錫)은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설(分國說)을 내놓았다.

 

이러한 연구들은 대부분 ‘왜(倭)의 삼국(三國) 지배(支配)’가 아니라 ‘삼국(三國)의 왜(倭) 지배(支配)’가 일치점이다. 임나일본부설과는 정반대 되는 역설(逆說)인 것이다.

 

대표적 연구인 (江上波夫)교수의「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오호(五胡: 중국 漢, 晉 때 북방의 다섯 이민족 즉 匈奴 흉노, 鮮卑선비, 羯갈, 氐저, 羌강)가 중국의 화북지방에 침입하고, 기마민족인 고구려가 한반도에 강역을 확대했을 때 고구려와 같은 북방 기마민족의 일파가 한반도로 남하하여 남단의 구야(狗邪: 가야) 지방의 왜(倭)를 정복한 후 일본으로 잠입하였다.

 

  이러한 물결에 따라 4세기 초 천황을 중심으로 한 기마민족은 구주(九州)에 상륙하여 4세기말 내지 5세기 초에는 기내(畿內)에 강대한 왕권을 확립하였다’고 하면서  임나 김해(金海)에서 일본으로 건너 간 것이 실제 인물 숭신천황(崇神天皇)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일본 천황가가 가야족(伽倻族)의 후예라는 주장이다

 

또 북한의 김형석의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내 분국설’은 일본의 통일정권 성립시기를 7세기초로 보고, 그 이전에 일본열도에는 왜오왕(倭五王)을 책봉했던 신라(新羅), 백제(百濟), 임나(任那), 가라(加羅), 진한(秦韓), 모한(모한) 등 육국(六國)은 본국(本國: 한반도에 있는)의 동족들이 일본열도 내에 세운 소국(小國)의 명칭이라는 주장이다.  이 또한 ‘왜의 삼 국 지배’가 아니라 ‘삼국의 왜지배’를 주장한  것이다.

 

가야족(伽倻族)이 세운 구주왕조(九州王朝)

 

임나일본부설에서임나(任那)’란 말은 주국(主國), 왕국(王國)이란 뜻으로 왜(倭: 후에 일본)의 모국(母國)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일본 사학계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제시한 문헌 외에도 「삼국사기(三國史記)」권46 강수(强首) 열전 중에「臣本任那加良名字頭」(신본임라가라명자두 *加良은 가라로 읽어야함) ‘신은 본래 임나가라인으로 이름은 두(頭)입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임나(任那)’는 출신지(出身地)를 나타내는 말이지 국명(國名)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대마도 또는 구주에 살던 ‘임나 가야’의 사람이란 뜻이지, 조선에 있던 ‘가야국(伽倻國)’의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 기록이 가야국이 멸망한지 이미 백 여 년이 지난 뒤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다.

 

고대 한일관계를 풀어줄 새로운 고리가 발견되었는데 1784년 구주 북단의 지하도(志賀島)에서 발견된「漢倭奴國王」(한왜노국왕)이라 새겨진 금인(金印)이 하나 발견된 것과  구당서(舊唐書) 의 왜국전(倭國傳)과 일본전(日本傳)의 기록이다.

 

이들은 (古田武彦), (神西秀憲) 등 일본 학자에 의하여 연구되었다. 금인(金印)은 후한 광무제(光武帝)가 왜노국왕(倭奴國王)에게 하사한 것인데, 중국 한나라 황제가 왜노국왕에게 금인을 주었다는 것은 당시 왜노국왕이 일본열도를 대표하는 종주적(宗主的) 왕임을 뜻한다. 이는 일본 사학계가 인정하려 하지 않던 구주왕조(九州王朝)의 실체를 입증하는 유물인 것이다.

 

또 구당서(舊唐書)의 왜국전(倭國傳)과 일본전(日本傳)의 기록을 보면 아래 표와 같다

 

구당서(舊唐書) 기록 

구분

왜국전(倭國傳)

일본전(日本傳)

 

倭國者古倭奴國也

  (왜국자고왜노국야)

世與中國通

  (세여중국통)

其王姓阿每氏

  (기왕성아매씨)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

  (일본국자왜국지별종야)

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爲名

  (이기국재일변고이일본위명)

惑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爲日本

  (혹왈왜국자악기명불아개위일본)

惑云日本舊小國倂倭國之地

  (혹운일본구소국병왜국지지)

 

① 왜국은 옛 날의 왜노국이다

② 대대로 중국과 통교했다.

③ 그 왕성(王姓)의 성은 아매씨다

① 일본국은 왜국의 별종이다.

② 그 나라가 일변(日邊)에 있음으로 해서 일본으로 이름을 지었다.

③ 혹자는 왜국이 스스로 그 이름이 아름답지 못한 것을 싫어하여 일본으로 하였다고도 한다.

④ 혹자는 일본은 옛 날에는 소국이었는데 왜국의 땅을 병합하였다고 말한다.

 

왜국전 기록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첫째 한 개의 역사서 구당서(舊唐書)에 왜국전일본전이 따로 따로 서술되었다는 것은 두 왕조는 서로 다른 왕조라는 사실을 반증해 주고 있다.

 

둘째 왜국전에서 ‘옛 날의 왜노국(倭奴國)’이란 후한서(後漢書) 왜전(倭傳)에 나오는 ‘광무제의 건무(建武) 중원(中元) 2년에 조공했다’는 것은 서기 57년에 광무제에게 조공하여 앞의「漢倭奴國王」이 새겨진 금인(金印)을 하사 받은 그 왜노국을 지칭하는 것이다.

 

셋째 대화정권의 천황가(天皇家)는 이름 지(旨)는 있어도 은 없었지만 왜노국왕은 스스로 아매(阿每)라는 성을 쓰고, 대 중국 외교에 힘써 중국과 통교하였다는 점이다.

 

일본전 기록에서도 중요한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첫째 ①항에서 일본국은 왜국에서 분파된 지파(支派)의 하나라는 것을 뜻하고 있다.

 

둘째 ②③항에서 일본열도 내에서 ‘일본(日本)’이란 국명을 어느 정권이 먼저 사용하기 시작하였느냐? 에 대하여「왜국작명설」과「일본(대화정권)작명설」두 가지가 있음을 기술하고 있다.

 

이 두가지 설에 대하여 ‘왜국 작명설’의 주장(이종항)은「삼국유사」신라 진평왕대(서기579-632년)에 이미 왜병을 ‘일본병(日本兵)’이라 지칭한 구절이 있고, ‘일본’이라는 표기가 일본 역사서「古事記(고사기)」에는 없고,「日本書紀(일본서기)」에만 나온다는 점 등 다섯 가지를 이유로 들어 ‘일본(日本)’이란 국호는 왜국이 스스로 대내적으로 쓰기 시작하였고 뒤에 대화천황가(大和天皇家)가 구주의 왜 왕조를 병합한 뒤부터 대외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상의 사실들로서 일본열도 내의 두 왕조가 존재했음을 인정되었으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에 있어서의「倭(왜)」는 누구인가? 하는 ‘왜를 규정하는 문제’가 남는다.

 

삼국시대 때 왜는 해로(海路)를 통하여 신라를 침공(노략질)한 경우도 있었지만 더 많은 경우가 육로(陸路)를 따라 신라에 침입하였다. 후자의 왜(倭)는 동해 바다 건너온 일본열도에 있는 왜가 아니라 한반도 남단 일대에 상주하고 있는 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라보다 더 남단에 위치했던 가야는 왜와 충돌한 사실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또 신라 초기에는 가야도 신라의 적이 되어 자주 충돌하였다는 사실은 왜와 가야가 정치적으로 표리일체(表裏一體)였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왜인(倭人)

  원래 한반도 남단과 남해 여러 섬, 대마도, 구주 북부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 세력을 뻗치고 살던 사람들의 총칭인 것이다. 처음에는 가야와 왜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는 동족이었으나 점차 낙동강 하류의 여섯 개 가야부족이 연맹체를 형성하여 가야국(伽倻國)이 되면서 이에서 제외된 그 밖의 부족들은 왜인(倭人)로 남은 것이다.

 

  일본 사가들이 말하는 소위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이렇게 하여 남은 왜인세력을 대표하는 중심지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삼국유사」등 역사서에 등장하는 왜(倭)는 일본 천황가(天皇家)의 대화정권(大和政權)과는 무관한 가야  동족의 사람들인 것이다.

 

일본 사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제시한 위 광개토왕릉비의而倭以辛卯年來渡海(이왜이신묘년래도해)에 나오는 왜(倭)도 당시 반도 남단과 남해의 섬들을 점거하고 있던 왜를 말하는 것이며, 그들은 고구려세력의 남하에 즈음하여 살아 남기 위한 외교활동으로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조공)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건국신화와 언어학에 밝히는 일본 천황가(天皇家)의 실체

「고기서」와「일본서기」에 있는 일본의 건국신화 니니기설화

중에 ‘천신(天神) 다까미 무스히는 천손(天孫) 니니기에게 진상부금(眞床覆衾)을 씌워주면서 그를 일본 땅에 하강케 하였다. 니니기가 구름을 해치고 내린 곳은 공자( 紫)의 구지후루(혹은 소호리)봉(峰)이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내용을「삼국유사」에 전하는 가야국 수로(首露)의 건국설화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다음 표와 같이 세 가지 점에서 일치한다. 이 같은 건국설화의 일치는 가야족이 일본열도 특히 구주지역에 대거 이주한 것을 말해준다.

설화내용비교

구분

수로(首露)

니니기

천신의 명을 받아 하늘에서 내려왔다.

천신의 명을 받아 하늘에서 내려왔다

붉은 천에 싸여서 내려왔다.

진상부금이라는 천에 싸여서 내려왔다

구지봉에 내렸다

구지후루봉에 내렸다.

 

또한 언어학 연구에서도 고대 일본어가야어 그리고 고대 인도의 드라비다어의 언어가 동일계 임을 밝혀냈으며, 일본말의 뿌리는 경상도 사투리가 소리변화의 법칙에 따라 규칙적인 변화를 거쳐 이루어진 것이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귀결

 

일본의 에도시대(서기1603-1867년)부터 전해 내려오던 단편적인 임나사의 조각들을 1949년에 (末松保和)가「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로 체계화 한 일본 사학계의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우리 민족에 대한 일본의 역사적 열등을 극복하고 일본 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불순한 저의로 진실을 외면하고, 적합치 않는 사료를 무리하게 해석하면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의 역사조작이다.

 

임나사의 연구가 진행될수록 그 허구성은 더욱 더 들어 나고 오히려 역설(逆說)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왜와 가야와는 동족이며 나아가서 일본의 천황가는 가야족의 후예라는 사실이 점점 더 진실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들이 그들이 자초한 임나일본부설의 귀결인 것이다.

 

일 왕이 백제왕의 자손임을 인정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明仁) 일본 국왕이 그의 68세 생일을 맞아 기자회견에서 한·일 양국의 인적, 문화적 교류의 중요성에 대하여 언급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는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記)에 기록된 것과 관련해 한국과의 연(緣)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위 임나일본부설의 역설(逆說) 즉 ‘일본 천황가는 가야족의 후예’라는 주장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마는 적어도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하기 전까지 일왕은 ‘아마테라스 오카미(天照大神)로부터 한계통으로 계승되었다는 소위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신성한 군주’라는 주장이 허구였음을 인정한 것이다.

 

일왕의 ‘개인적’이라는 전제를 달고 모계가 백제왕의 후손임을 인정하는 선에서 그쳤지만 멀지 않아서 일왕이 가야든 백제든 우리 조선족의 후예라는 것이 밝혀질 날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임나일본부설' (任那日本府說) 근거 여부 밝혀지나?

    2005년 10월 31일 서울 강동문화원이 백제문화연구회에 의뢰한 지표조사 결과를 KBS가 단독 입수하여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서울 강동구 일대에서 전체 길이 1백 - 5백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고분 10기가 발견땠다. 지중레이더, 자기장 탐사 를 이용한 두 가지 지하탐사 결과 10여개 고분 가운데 7개 고분에서 석실(石室)이 확인된 것은 물론 금과 구리, 옥, 철 등의 매장물이 묻혀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는 택지개발을 앞둔 서울 강동구 강일동 일대에 대한 문화재 지표조사를 위해 지난 한 달 동안 지하 매장물 조사를 실시한 결과 밝혀졌으며, 백제문화연구회는
    "이번 발견된 고분은 네모난 제단과 원통형 봉토분이 뚜렸이 식별된다" 면서 "그 형태가 일본의 왕릉인 이른바 '장고형 고분'(일본측 명칭 '전방후원분' 前方後圓墳)으로 거의 확실시됩니다" 고 전했다.

    한편 한성(漢城) 백제시대 초대형 고분이 발견되면서 '임나일본부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여부를 밝힐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문화연구회의 오순제 명지대 교수는
    "한성 백제가 초대형 고분을 만들 정도의 국력을 가진 강력한 고대왕국이었음이 증명 됐다" 고 밝히면서 "'일본의 장고형고분'
(전방후원분)과의 교류 과정이 발겨질 것이다" 고 덧붙였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장고형 고분이'이 1980년대 초부터 고성과 나주지역에서 발견됐지만, 정작 한성 백제의 수도 주변에서는 고분이 발견되지 않아 고대사 연구과제아 돼 왓다.
    규모나 연대가 일본보다 늦어 일본 학계에서는
    "이 고분 양식
(장고형 또는 전방후원분)이 일본에서 전래됐고, 고대 일본이 한반도 일부(남부)를 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다"고 주장해 왔다.

    또 일본은 이 같은 '장고형고분'
(전방후원분)이 일본에 2천5백기나 되고, 크기가 수백 미터에 이르는 고분이 많아 일본 야마토(大和) 정권이 강성했다는 것을 뒷받침한더고 주장해 왔다.

    이처럼 한-일 양국이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가운데 현장을 답사한 서울대 임효재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강동구 고분은 앞부분이 넓적하고 뒷부분이 둥근 형태를 하고 있다. 그 주위에는 환후를 파고 있어서 일본에서 발견되는 '장고형고분'
(전방후원분)과 똑 같은 형태다" 며
    "우리나라에서는 남해안에서 십여 개 정도 발견됐기 때문에 그 기원 문제를 따지는 데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번에 백제지역 한강지역에서 발견됨으로 인해 그 기원 문제를 연구하는데 있어 획기적인 재료라고 생각항다" 고 말했다.

    한편 서울 강동문화연구원은 이번 지표조사결과를 토대로 대규모 학술대회와 발굴방법 등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2005년 11월 1일 마이데일리 남안우 기자(2009년 5월 국방과학연구소 多勿 통권 179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