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도(李丙燾)의 결자해지(結者解之)의 글
沙月 李 盛 永(2010.7.27)
  오늘 비때문에 모처럼 기회를 얻은 운동도 못하고, 대신 불참할 생각이었던 종친회 회의에 가려고 억수로 쏟아지는 비속에 버스정류장으로 나갔는데 횡단보도 신호등이 켜지기 전에 버스가 지나갔으니 다음 차를 기다리는 시간이 족히 20분은 될 것 같다.

  그런데 버스정류장에 낯선 철사 책꽂이 하나가 보이고, 맨 위에 ‘무료대여’라고 쓰여있다. 책은 네권인가 다섯권인가 꽂혀있는데 ‘한민족의 뿌리역사와 종교, 그 진실을 밝힌다’라는 제목의 얄팍한 책이 내 눈길을 끌었다. 다물(多勿) 냄새가 나기 때문이었을까---

  비닐에 잘 싸여있어서 비가 들이치는데도 책은 젖지 않았다. 증산도(甑山道)에서 발간하는 ‘월간개벽 2003년 10월호 별책부록’이라 씌어있어 별 관심이 없는 '종교서적’인 것 같아 그냥 꽂아놓으려다가 차가 올 때까지 너무 오래 무료할 것 같아 책장을 넘겨봤다.
< 증산도 발간 월간개벽 2003년 10월호 별책부록 >

  우리 민족의 역사 흐름을 삼성조시대(환국-배달-조선)- 열국분열시대(북부여, 남삼한, 최씨낙랑국, 동옥저)-사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남북국시대(대진국, 통일신라)-고려-조선-임시정부-남북분단시대(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된 ‘한민족사의 국통(國統)’이란 제목의 도표를 그려놓고 있다.
< 한민족사의 국통(國統)

  현 학교교육에서의 국사교육의 실태를 한탄하면서 지금 사학계에서는 사서(史書)로 인정하지 않고 위서(僞書)로 몰아 부치는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 「환단고기(桓檀古記)」등에 입각하여
    - 한민족의 뿌리역사, 환국시대와 배달환웅시대,
    - 47대를 이어온 단군조선시대,
    - 북부여를 비롯한 열국시대,
    -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사국시대,
    - 대진국(발해)와 통일신라의 남북국시대를 간단 간단히 설명하고,

  배달환웅시대의 대표적인 우리민족 인물로
    - 인류문명의 조종, 태호 복희,
    - 경농(經農)과 동양의학의 아버지, 신농,
    - 배달국14대 자오지환웅천황, 치우를 소개하면서
* 치우(蚩尤)이야기(1)(클릭) : 치우이야기 I부
     치우(蚩尤)이야기(2)(클릭) : 치우이야기 II부

  한민족 고대사를 왜곡한 세가지 해독으로
    - 중독(中毒): 사대주의 역사관,
    - 왜독(倭毒): 식민주의 역사관,
    - 양독(洋毒): 실증주의 역사관을 설명하고 있다.

  도표 마지막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나란히 놓고 '남북분단시대' 라고 하면서 북한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듯한 견해에 속이 좀 뒤틀리지만 북부여, 가야, 발해 등을 언급해 놓은 것은 분명히 다물(多勿) 성격이 짙은 것 같아 좀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책을 ‘무상대여’하려고 가지고 왔다.

  그런데 왜독 식민주의 역사관을 설명하는 가운데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회개’라는 제목의 부분이 눈길을 끈다. 그래서 전반적인 ‘월간개벽 2003년 10월호 별책부록’의 내용 소개는 다음으로 미루고 이병도 반성문에 관련된 이야기를 먼저 하려 한다.

  일제 식민사관의 앞잡이 이병도의 우리역사 왜곡 행각을 설명하고, 그가 죽기 직전 자신의 식민시학 행각의 반성문에 해당하는 글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다는 1986년 10월 9일자 조선일보 기사 사진을 인용해 놓았다.

< 이병도의 식민사학 행각 설명 >
  이병도는 이마니시 류의 수사관보(修史官補)가 되어 ‘조선사편찬(朝鮮史編纂)’이라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거대한 우리역사 왜곡 프로잭트에 적극 참여했다. 광복후에는 서울대 역사학과 교수, 문교부장관까지 지냈다.

  그는 「조선사」편집에 참여하여 일제의 식민사관 수립 사업에 직접 기여하였고, 일제가 유포시킨 식민사관을 해방 후까지 이어주는 중대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한국 사학계에는 직접간접으로 이병도의 제자 아닌 사람이 드물다.

  일본은 한국 침략을 정당화 하기 위해 한국 역사는 주체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주변국에 의해서만 유지되어 왔다는 요지의 이른바 반도사관론(半島史觀論)을 대량 유포시켰으며, 우리 역사 사료들을 전부 빼앗아가고, 불태우고서는 증거가 있어야만 인정한다는 식의 소위 실증주의 역사방법론을 채택하였다.

  1920년대 '조선사편수회’의 학풍을 이어받은 이병도는 나중에 고대사 연구에 “일본 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바 적지 않다”고 스스로 회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병도는 죽기 직전, ‘단군은 신화가 아니라 우리의 국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반성문을 발표한다. 그간 최태영박사, 송지영 KBS사장, 이희성박사 등의 설득으로 과거 자신의 역사관을 크게 수정하여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심정으로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에 논설을 게재하였다.
< 1986년 10월 9일자 조선일보 >

< 그 스승에 그 제자들 >
  그런데 인터넷 네이버 ‘이병도’ 검색에 ‘나의 벗’ 역사스크랩 (543)에 「이병도의 마지막 뉘우침」이라는 글에 위 1986년 10월 9일자 조선일보와 똑 같은 사진을 스크랩 해놓고 아래 다음과 같은 간단한 설명이 붙어있다.

  단군은 신화 아닌 우리 국조, 역대 왕조 단군제사는 일제 때 끊겼다.
  윗 글의 제도권 사학자의 대부 이병도씨가 조선일보(1986년 10월 9일자)에 특별기고한 내용을 보면 '단군은 신화가 아닌 우리 국조'라 했다. 그리고 '역대 왕조 단군제사는 일제 때 끊겼다' 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 제자들은 ‘선생님이 망령이 드셨다’고 망말(妄言)을 하면서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한국사 교과서는 끝내 수정되질 못했다.
  젊은 시절 얼마나 많은 망말(妄言)을 서슴지 않았던 이병도씨가 마지막 죽기 전에 옳은 소리, 쓴 소리를 했으나 그의 제자들에게는 전과 같은 망말(妄言)로 들렸을 것이다. 그가 반도사관에 목 매였던 시간과 강도가 너무 큰 탓이다.

  그러나 단군은 신화가 아니고 실존인 것은 사실이나 우리의 국조는 아니다. 단군조선의 윗대 배달의 환웅천황이 있었고, 그 윗대에는 대한민국의 최초 국가 환국이 있었는데, 그 환국을 세운 환인이 우리의 국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병도(李丙燾)의 제자(弟子)들은 선생이 일제(日帝)의 식민사관(植民史觀)에 미쳐 우리 역사왜곡(歷史歪曲)에 앞장 섰을 때는 물론, 일제 해방 후까지도 계속된 그의 식민사관 행각을 금지옥엽(金枝玉葉) 처럼 진실(眞實)로 곧이 듣더니, 죽기직전 반성하여 결자해지(結者解之) 하려고 진실(眞實)을 말하는 것은 '노망이 들어 망령된 말'을 한다면서 귓전으로 흘려버리고, 왜곡된 국사교과서 바로잡는 것을 외면하니 다분히 역(逆)청개구리 기질들인 모양이다.
  청개구리들은 엄마의 진실을 안 믿고 반대로만 행동하다가 엄마가 죽으면서 유언한 거짓을 진실로 믿어 물가에 엄마 무덤을 만들어 놓고는 날씨가 비만 내리려하면 엄마 무덤이 떠내려갈까봐 걱정돼서 울어재낀다는 '청개구리 우화'와는 정 반대이니 말이다.

< 이병도(李丙燾) >(네이버 백과사전)
< 이병도(李丙燾) >

  두계(斗溪). 189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19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약 7년 동안 근무하였다.

  1925년 일제가 한국민의 민족의식을 배제하고 그들의 통치목적에 부합하도록 한국사를 편찬하기 위하여 설립한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이 되어 10여 년 동안 일하였다.

  1933년 불교전문학교 강사가 되고 1934년 진단학회(震檀學會)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41년부터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출강하였다.

  8.15광복 이후에는 1946년 서울대학교 교수, 1954년 학술원 종신회원에 선임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에 취임하였다.
  1960년 문교부장관에 등용되고 같은 해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에 선임되었다.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65년 동구학원(東丘學園) 이사장, 1966년 성균관대학교 교수 겸 대동문화연구원장에 취임하였으며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에 추대되었다. 1976년 동도학원(東都學院) 이사장에 선임되었고 1980년 국정자문위원(國政諮問委員)에 위촉되었다. 1986년 식민사관에 의하여 신화로 치부되었던 단군(檀君)의 실재를 인정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그 동안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학술원 공로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5?16민족상 등을 수상하였다.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한국사(중세편)》, 《고려시대 연구》, 《국사와 지도이념》 등이 있다.
* 이병도의 조선사 왜곡(歪曲))에 기여한 내용(클릭) : 昔有桓因(석유환인)
1986년 10월 9일자 조선일보 기사와 상고사연구가 최태영박사의 증언
< 檀君朝鮮(단군조선)은 史實(사실)-古代史(고대사) 복원해야 >
  李丙燾(이병도)박사 : 『神話(신화)규정 잘못---교과서 보완 시급』[開天(개천)의 달---本紙(본지-조선일보)특별기고-인터뷰]

  국사학계의 원로 李丙燾(이병도)박사(90)는 그동안 학계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킨 檀君神話說(단군신화설)에 언급,
  『檀君조선(단군조선)은 신화가 아닌 실제적 史實(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開天節
(개천절)을 맞아 朝鮮日報(조선일보)에 기고한「開天節(개천절)의 역사적 의의」에서 그동안 발표했던 그의 여러 논문을 열거, 『三國遺事(삼국유사)와 삼국사기 타 관계기록은 충분한 사료적 근거다』고 지적하면서 최근 사학계 일부에서 대두되고 있는 단군조선실재론과 삼국사기등 고대史書(사서)의 신빙성을 인정했다.(특별기고 전문 5면)

  이박사는 『지금까지의 각종 史書(사서)와 문헌기록 등을 검토해 볼 때 단군과 단군조선을 단순한 신화나 전설로 처리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박사는 이 기고와 함께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당군왕검의 實存(실존)을 전제로 고고학, 민속학 등 인접학문과 협력, 단군조선이후 삼국시대초까지 한국 上古史(상고사)의 공백을 역사과학으로 정립하는 학계의 노력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조선일보의 광복 41주년 기념 특별기획 「역사교과서 새로 써야한다」연재를 읽었다고 밝힌 李박사는 『2세들에 대한 바람직한 역사교육을 위해서는 삼국의 건국시조 및 초기 역사를 교과서에 수록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李박사는 또 『단군및 단군조선을 신화로 규정, 한국사 서술에서 제외하고 한국고대사의 폭을 축소한 日人(일인) 학자들의 연구는 비판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李박사의 기고및 발언 내용은 숱한 미해결 과제를 안고 있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 획기적 변화를 예고하는 것으로 보인다.

< 상고사연구가 최태영박사의 증언 >
  (서울법대 초대학장을 역임한 상고사연구가 최태영박사가 2001년 1월 3일자 문화일보와 특별대담을 하였다.)

  이병도와 더불어 「한국상고사 입문」(1989)을 발간했던 상고사연구가 최태영박사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했다.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한국 땅에서 단군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증사학을 내세워 단군을 가상 인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이승만정권 때부터 이지요.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이지만 이병도박사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박사는 말년에 건강이 나빴는데, 어느날 병실을 찾아갔더니 죽기 전에 옳은 소리를 하겠다단군을 실존인물로 인정했어요. 그 사실을 후학들이 모르고 이박사의 기존 학설에만 매달려 온 것입니다.

  그리고 한민족이면 누구나 어린아이 때부터 배웠던 「동몽선습(童蒙先習)」이나 「세종실록(世宗實錄)」등 각 고전에도 단군 기록이 나옵니다. 수백년전 기록을 어떻게 믿겠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역사기록이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판소리도 그 긴 내용을 한자도 바꾸지않고 노래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역사기록은 더욱 정확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병도(李丙燾)의 결자해지(結者解之) 참회의 글
「開天節(개천절)의 역사적 의의」
< 1986년 10월 9일자 조선일보에 기고하여 게재된 이병도의 논문 전문 >
(주)1986년 10월 9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글 사진이 너무 작아서 글을 읽을 수가 없기 때문에 전문을 구해 옮기면서 원문 대로 한자를 쓰고(청색), ( )안에 한글(흑색)을 병기하였다.

1-1.역대왕조의 단군제사 일제 때 끊겼다
  대체 天(천)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지만, 그 중에서 天(천)을 君長(군장)의 뜻으로 해석할 때에는 開天節(개천절)은 즉 「君長(군장)을 開設(개설)한다」는 것이 되므로 開國(개국), 建國(건국)의 뜻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이른바 開天
(개천)은 즉 最古(최고) 시조인 檀君(단군)의 즉위와 開國(개국)을 의미하는 開天(개천)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三國遺事
(삼국유사) 紀異(기이) 제1권의 「古朝鮮고조선(王儉朝鮮왕검조선)」條(조)에 의하면 『檀君王儉(단군왕검)이 阿斯達(아사달)에 도읍하고 國號(국호)를 朝鮮(조선)이라 하였다』고 했다.

  단군의 아버지 桓雄
(환웅)이 「弘益人間(홍익인간)」의 理念(이념)을 가히 실현할 만하므로, 하늘이 그를 인간세계에 내려 보내 다스리게 하니 桓雄(환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頂(정) 神壇樹下(신단수하)에 내려와 이곳을 神市(신시)라 하고 그를 桓雄天王(환웅천왕)이라고 하게 되었는데, 그는 風伯(風神)[풍백(풍신)] 雨師(雨神)[우사(우신)] 雲師(雲神)[운사(운신)]의 三神(삼신)을 거느리고 主穀(주곡) 主命(주명) 主刑(주형) 主善惡(주선악)등 무릇 人間三百六十余事(인간삼백육십여사)를 主管(주관)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일견 지상국가를 천상국가의 한 연장으로 觀念
(관념)한데서 생긴 신화와 같이 보이나 이 신화를 검토하면 桓雄(환웅)천왕의 존재는 실상 지상국가를 개창한 君長(군장)이라기 보다는 인간사회의 百事(백사)를 주관하는 守護神的(수호신적) 성격을 가진 존재임을 알 수 있다.

< 1-2. 서낭당은 天王堂(천왕당) >
  이 守護神(수호신)의 住處(주처)는 곧 神壇樹(신단수)로 이것은 지금 民俗(민속)중에 생생히 남아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서낭당이 그곳이니 仙王黨(선왕당:서낭당) 은 즉 天王堂(천왕당)인 것이다. 이 서낭당의 나무가 곧 神壇樹(신단수) 그것이고 그 밑의 돌무더기가 神壇(신단)이다. 그리고 옛날에 이 神壇(신단)을 중심으로 한 부락이 神市(신시)였던 것이다.

  神壇樹
(신단수)는 실상 원시사회의 수목숭배(樹木崇拜)에서 시작되어 처음에는 樹木(수목)자체가 神(신) 그것이었는데, 그 후 변천하여 神壇樹(신단수)는 天神(천신) 天王(천왕)의 降下階段(강하계단), 혹은 天王(천왕)의 住處(주처) 또는 그것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렇다 하고 옛날의 國號
(국호)는 대개 도읍지의 이름과 일치하므로, 단군의 도읍지라고하는 阿斯達(아사달)이 정작 국호였고, 朝鮮(조선)은 후에 이르러 「阿斯達(아사달)」을 雅譯(아역)한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서울大(대) 논문집(社會科學)(사회과학)제2집에 「阿斯達(아사달)과 朝鮮(조선)이란 졸고를 통해서 자세히 발표하였다.

  환웅천왕이 熊女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古記(고기)에 전하여 오지만 여기의 웅녀는 古記(고기)에는 熊(웅)이 여신으로 화한 것이라 하나 이는 熊(곰) 토템族(족)의 여자로 해석하여야 옳다고 나는 年來(연래) 주장해 오고 있다.

  즉 熊
(웅)을 神聖視(신성시)하여 자기의 조상이 곰에서 나왔다 하여 종족의 칭호로 삼던 족속의 여자란 뜻이다. 그리고 보면 웅녀는 地上族(지상족)이라 할 수 있고 이에 대하여 환웅은 天上族(천상족), 天神族(천신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단군은 즉 이 天神族(천신족)과 地神族(지신족)과의 결혼에서 생긴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10월3일(음력)을 開天節
(개천절)이라 하여 檀君(단군)의 開國日(개국일)로 기념하여 온 데는 역시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원래 十月節(시월절)은 종교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큰 의의를 가진 달이다.

  즉 十月節
(시월절)은 4계절의 하나로서 계절과 농업과는 큰 관계를 가졌으므로 고대 농업사회에서는 「季節(계절)」이란 것을 상당히 중시하였다. 그래서 계절마다 부락공동체의 종교적 大祭典(대제전)이 행해져 신인공락(神人共樂)의 놀이를 하였던 것이다. 이를 季節祭(계절제 Season festival)라고 하는 것인데, 계절제 중에서도 더 중요시하는 것이 落種낙종(下種하종)시의 계절제와 추수기의 계절제였다.

  이 두 계절제는 어느 계절제보다 더 중요시하고 따라서 그 의식도 성대하였다. 전자는 즉 神
(신)에게 年事(년사)의 豊登(풍등)을 기원하는 것, 후자는 수확에 대한 감사제 혹은 薦新祭(천신제)로서 서양에서는 이것을 「Thanks giving」이라 하여 오늘날까지도 행하고 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落種期
(낙종기)의 祭奠(제전)을 五月(5월)에, 추수기의 그것은 10월에 행하여 군중이 한데 모여 天神(천신)에게 제사하고 歌舞(가무)와 飮酒(음주)로 주야를 쉬지 않고 즐겁게 놀았는데 [君民(군민)이 同樂(동락)하였는데] 이 제사를 수리라고 했던 것 같다.

  후세에 5월 端午
(단오)를 수릿날이라 하며, 수리취떡을 만들고 술을 빚어 여러 가지의 놀이를 하며, 十月(시월)을 상달이라 하여 초생에 집집이 神(신)에게 고사하고, 선조무덤에 時祭(시제)를 지내는 풍속이 있지만, 이야말로 옛날로부터 내려오는 五月祭(오월제) 十月祭(시월제)의 遺風(유풍))이라 할 것이다.

< 1-3.「상달」은 「수리달」>
  「수리」란 말은 上(상),高(고),山(산),神(신) 등을 의미하는 古語(고어)로 그 어원은 「솟」「소슬」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보면 10월을 상달이라고 하는 것도 즉 「수리달」의 譯(역)으로 볼 수밖에 없다. 夫余(부여)의 迎鼓祭(영고제), 高句麗(고구려)의 東盟祭(동맹제), 東濊(동예)의 舞天祭(무천제)가 다 이러한 추수감사제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고려시대에 성행하던 燃燈大會(연등대회), 八關大會(팔관대회)도 春冬二期(춘동이기)의 국가적 대제전이었지만 그 중에도 가장 성대하던 것이 仲冬八關(중동팔관)이었다.

  그런데 최근세 갑오경장이후로 민족의식 민족정신이 앙양됨에 따라 이 10월절의 古俗
(고속)을 갱생시켜 이로써 檀君立國(단군입국)의 開天節(개천절)을 삼은 것은 오랜 전통에 기인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옛날 민속에 흔히 음력10월초생 특히 3일에 「고사」를 지내왔다는데 왜 3일을 택했느냐 하면, 3이란 수는 세계적으로 널리 애용되는 수인 까닭이다. 3은 정족
(鼎足)의 수인만큼 안정감을 가진 것이니 1이나 2는 실상 不安定監(불안정감)의 수이다.

  일제의 멍에를 벗고 해방이 되자 그 해로부터 개천절을 우리의 전 민족적 국경일로 삼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행하여 오다가 정부수립 후에는 양력 10월3일로 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위에 말한 것들은 졸저 「斗溪雜筆
(두계잡필)」에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런데 顯正會(현정회) 理事(이사) 李喜秀(이희수)씨가 1977년 10월 「顯正誌(현정지)」에 「史書上(사서상)에서 본 國祖檀君(국조단군)이라는 제목하에서 三國遺事(삼국유사)의 저자 一然(일연)이 지금은 없어진 「古記(고기)」와 「舊三國史記(구삼국사기)」와 현존 魏書(위서)와는 다른 또 하나의 魏書(위서)의 檀君記事(단군기사)에서 인용하였다고 그 출처를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事大(사대)의 입장에서 기술한 三國史記(삼국사기)의 저자 金富軾(김부식)도 삼국이전의 史記(사기)를 意識的(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하면서도 여러 곳에서 古朝鮮(고조선)과 단군에 관하여 언급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金富軾
(김부식)은 三國史記(삼국사기)에서 단군에 관한 記載(기재)를 제외하였지만, 同書(동서) 卷十七(권17) 高句麗本紀五(고구려본기5) 東川王二十一年春二月條(동천왕21년춘2월조)
    「王以丸都城經亂不可復都築平壤城移民及廟社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惑云王之都王儉」
(왕이환도성경란불가복도축평양성이민급묘사평양자본선인왕검지택야혹운왕지도왕검)
    [譯] (왕은 환도성이 난을 겪어서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이 살던 곳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되어 왕검에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이라고 하였다[惑云
(혹운)이하의 王之(왕지)는 王(왕)노릇을 하였다는 동사로 읽어야 하고 「都王儉城(도왕검성: 왕검성에 도읍하였다)」의 都(도)도 동사로 읽어야 할 것을 잘못 「王之都王儉(왕지도왕검: 왕의 도읍은 왕검이다)」이라고 連書(연서)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때의 平壤
(평양)은 지금의 平壤(평양)이 아니라 高句麗(고구려)의 黃城(황성)(皇城황성), 즉 丸都城환도성)의 對岸(대안)인 東皇城(동황성)(今江界금강계)인 것이다. 지금의 平壤(평양)에는 아직도 이때 樂浪郡(낙랑군)이 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仙人王儉之宅
(선인왕검지택)」이라고 한 平壤(평양)은 후일의 平壤(평양)(지금의 平壤평양)의 지칭이므로 전후자를 혼동하여서는 안 된다.

< 1-4. 당시 평양은 다른 곳 >
  金富軾(김부식)과 같은 史家(사가)의 태도로 미루어보면 古城箕子之宅(고성기자지택) [譯](옛 성인 기자의 집)이라고 하지 않고, 仙人王儉之宅也(선인왕검지택야) [譯](선인 왕검의 집이다)라고 한 것은 金富軾(김부식)의 머릿속에 지금의 平壤(평양)이 仙人王儉(선인왕검)의 도읍지인 것은 움직일 수 없는 史實(사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內外史書
(내와사서)들이 한결같이 지금의 平壤(평양)을 王儉城(왕검성)이라고 하는데 異議(이의)가 없었던 것 같다.

  金富軾
(김부식)이 古記(고기)를 인용한 부분을 보면
    ① 史記地理誌高句麗條
(사기지리지고구려조)에서
      「古記云朱蒙自夫余逃難至卒本則紇升骨城」
(고기운주몽자부여도난지래본칙흘승골성: 고기에 이르기를 주몽이 부여로부터 난리를 피해 도망쳐 졸본 즉 승골성에 이르렀다)

    ② 史記
(사기) 志一(지1) 祭祀條(제사조)에서
      「古記云溫祚王二十年春二月設壇祀天地」
(고기운온조왕20년춘2월설단사천지) [譯] (고기에 이르기를 온조왕 12년 봄 2월에 제단을 쌓고 천지에 제사를 지냈다)

    ③ 史記
(사기) 列傳(열전) 金庾信上(김유신상)에서 金春秋(김춘추)가 講和(강화)하려고 高句麗(고구려)에 갔던 기록 가운데 주석을 달기를
      「此與本紀眞平王十二年所書一事而小異以皆古記所傳故兩存之」
(차여본기진평왕12년소서일사이소이이개고기소전고양존지) [譯](이는 본기에서 진평왕 12년에 쓴 것과 같은 사건이지만 내용은 조금 다르다. 모두 고기에서 전하는 것이므로 두 가지를 모두 남겨둔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古記
(고기)에는 檀君記事(단군기사)가 기재되어 있을 뿐아니라 그 기록이 高句麗(고구려)에 金春秋(김춘추)가 갔던 西紀(서기)64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金富軾
(김부식)이 史記(사기) 高句麗本紀(고구려본기) 東川王二一年春二月條(동천왕21년춘2월조)에서
    「平壤者本 仙人王儉之宅
(평양은 본래 선인왕검의 집)」이라고 한 것은 역시 古記(고기)이거나 檀君記(단군기)를 인용한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그리고 金富軾
(김부식)은 三國史記(삼국사기)에서 新羅(신라)의 六村(6촌)도 朝鮮(조선)의 遺民(유민)이 山間(산간)에 와서 자리잡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三國史記
(삼국사기) 卷第一(권제1)新羅本紀第一(신라본기제1)에 보면
  「始祖姓朴氏‥卽位居西干時年十三國號徐那伐先時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爲六村」
(시조성박씨--즉위거서간시년십삼국호서나벌선시조선유민분거산곡지간위육촌)
  [譯](시조의 성은 박씨--13세에 거서간에 올라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였는데 그 선조는 조선의 유민이 나뉘어 산간에 흩어져 살면서 6촌을 이루었다
  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一然
(일연)이 인용한 古記(고기)의 檀君記載(단군기재)를 근거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거듭 언급하지만 金富軾(김부식)이 平壤(평양)이 仙人(선인)(檀君단군(王儉왕검)의 宅(댁)이라고 명기한 데서 古記(고기)가 檀君記事(단군기사)를 實載(실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一燃(일연)이 마치 근거도 없는 古記(고기)를 들먹여서 檀君記事(단군기사)를 지어냈다고는 볼 수가 없다.

  우리 민족이 여러 차례의 國難
(국난)을 겪으면서도 檀君廟(단군묘)에 제사하며 국가의 대행사인 축제 때에는 노래 (世年歌세년가))에 의하여 檀君(단군)의 사적을 전해 내려온 사실은 너무도 명확하다.

  世宗實錄
(세종실록)(권)40 世宗(세종)10年(년) 戊申(무신)6月條(월조)에 柳寬(유관)의 上書(상서)를 보면 文化縣(문화현) 九月山(구월산) 東嶺(동령) 허리에 神堂(신당)이 있는데 어느 때에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北壁(북벽)에 桓雄天王(환웅천왕), 東壁(동벽)에 桓因天王(환인천왕), 西壁(서벽)에 檀君天王(단군천왕)을 모셨는데 文化縣(문화현) 사람들은 이를 三聖(삼성)이라고 일컬으며 산아래 부락을 聖堂里(성당리)라고 한다고 하였다.

  柳寬
(유관)은 그 上書(상서)중에서
    「九月山
(구월산)은 縣(현)의 主山(주산)이던 檀君朝鮮(단군조선) 때에는 阿斯達山(아사달산)이라고 하였으며, 新羅(신라)에 와서 闕山(궐산)이라고 고쳤습니다. 그때에 文化縣(문화현)을 闕口縣(궐구현)이라고 처음에 이름하였습니다. 高麗(고려)때에 儒州監務(유주감무)로 하고 후에 또 文化縣(문화현)으로 고쳤습니다. 산 이름의 闕(궐)자를 느리게 소리내어 九月山(구월산)이라고 부릅니다.
    文化(문화)의 동쪽에 장장(藏壯)이라고 하는 지명이 있습니다. 父老(부로)들이 전하기를 檀君(단군)의 都邑地(도읍지)라고 합니다‥」하였으며

    「九月山下
(구월산하)에는 桓雄(환웅)을 南面(남면)으로 모시고 東西向(동서향)으로 桓因(환인)과 檀君(단군)을 모신 삼성당(三聖堂)이 지금도 존재하며 단군(檀君)이 立都(입도)하였다는 자취를 볼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 1-5. 두 首(수)의 시에 나타나 >
  世宗(세종)18년 丙辰(병진) 12月(월)丁亥條(정해조) 柳斯訥(류사눌)(柳寬류관의 조카)의 上書(상서)중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臣以世年歌考之檀君初都平壤後都白岳武丁八年乙未入阿斯達山爲神其歌曰亨國一千四十八至今廟在阿斯達則豈無所據乎又況高麗建廟於九月山下其堂宇位版猶存與世年歌合---」
BR>    (신이세년가고지단군초도평양후도백악무정팔년을미입아사달산위신기가왈형국일천사십팔지금묘재아사달칙기무소거호우황고려건묘어구월산하기당우위판유존여세년가합)
    [譯](신이 세년가를 상고해 보건데, 단군이 처음에는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백악에 도읍하였으며, 은나라 무정 8년 을미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서 신이 되었는데 그 노래에 이르기를 '1천 48년 동안 나라를 누리고, 지금도 사당이 아사달에 있네' 했으니, 어찌 그 근거가 없겠습니까. 또 더군다나 고려에서는 구월산 밑에 사당을 세워 그 당우와 위폐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세년가와 합치하니---)

  이로써 보면 古記
(고기) 檀君記(단군기) 외에 歌詞(가사)형식으로 된 檀君記事(단군기사)가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世年歌(세년가)는 사실들과 부합되니 檀君記載(단군기재)에 근거가 있다고 하였다.

  柳斯訥
(류사눌)은 漢城府使(한성부사)를 지냈는데 또 상서하기를
    「臣伏觀世年歌檀君朝鮮之始祖也其生也異於人其歿也化爲神」
(신복관세년가당궁조선지시조야기생야이어인기몰야화위신)
    [譯](신이 단군세년가를 고찰해 보니 단군은 조선의 시조입니다. 그 출생이 일반사람과 다르고, 몰함에 신이 되었다고 합니다)고 하였다.

  어쨋든 朝鮮
(조선) 世宗代(세종대)까지 檀君世年歌(단군세년가)가 남아있었고, 識者(식자)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기해 둘 만한 사실인 것이다.

  앞에서 제시한 柳寬
(류관)의 上書(상서)에 따르면 삼성당(三聖堂)은 黃海道(황해도) 九月山(구월산) 東嶺(동령)에 있다. 柳寬(류관)은 젊었을 때부터 거기에 내려가서 父老(부로)들로부터 檀君事迹(단군사적)이 오래되었음을 알았다고 했다.

  三聖堂
(삼성당)에 桓雄天王(환웅천왕)을 上座(상좌)에 모셔서 南面(남면)하게 하고 東壁(동벽)에는 桓因天王(환인천왕)을 모셔서 西向(서향)하게 하고 西壁(서벽)에는 檀君天王(단군천왕)을 모셔서 東向(동향)하게 하였다고 한다.

  三聖堂
(삼성당)의 경내외에는 새, 짐승들이 서식하지 않으며 산짐승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또 가뭄이 심할 때 빌면 비가 내린다고 했다.

  文獻備考
(문헌비고)(권)64 札考(찰고) 1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三聖祠
(삼성사)는 황해도 文化縣(문화현) 九月山(구월산)에 있으며, 桓因(환인) 桓雄(환웅) 檀君(단군)을 모셨으며 春秋(춘추)로 제사를 드린다 하고,

  역시 文獻備考
(문헌비고)에 의하면
      조선조 成宗
(성종) 13년에 황해도 관찰사 李芮之(이예지)의 말에 좇아서 九月山(구월산)에 三聖廟(삼성묘)를 세우고 平壤(평양)의 檀君廟(단군묘)의 예에 따라서 매년 香祝(향축)을 보내어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東國輿地勝覽
(동국여지승람)(권) 42 文化縣(문화현) 祠廟條(사묘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三聖祠
(삼성사)는 桓因(환인) 桓雄(환웅) 檀君(단군)의 祠(사)이다. 춘추로 제사를 지내며 가물 때 빌면 효험이 있다」

  東國輿地勝覽
(동국여지승람)(권)51 平壤條(평양조)」에 보면 두 首(수)의 詩(시)를 통하여
      「開國
(개국)한 지가 멀고 먼 檀君(단군)은 朝鮮始祖(조선시조)이다. 檀君(단군)의 역사는 언제 비롯되었는가. 堯(요)와 함께 開國(개국)하였다고 들었으니 去今(거금: 지금까지) 四千年(4천년)이며 檀君廟(단군묘)를 남겼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主體(주체)사상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조선 양조를 통하여 1천년간에 단군에 대한 국가적 태도는 廟
(묘)를 세우고 祭祀(제사)를 받드는 등 자못 융성하였다. 이것은 단군을 國祖(국조)로 섬겼음을 알 수 있다.

< 1-6. 世宗(세종)때 새 祠堂(사당) 지어 >
  文獻備考(문헌비고)(권) 13 輿地考(여지고) 1 歷代國界(역대국계) 1에서는 檀君朝鮮國(단군조선국)을 첫머리에 싣고, 遺事(유사)의 기록을 인용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白岳
(백악)은 지금의 文化縣(문화현)이며 九月山(구월산)의 본명은 闕山(궐산)인데 檀君(단군)의 궁궐터가 있기 때문이다. 闕山(궐산)은 소리를 느리게 내어 闕山(궐산)이 구월산으로 와전되었으며 九月山(구월산)의 藏唐京(장당경)은 또 藏藏坪(장장평)으로 와전되었을 것이다.

  세종때의 司온
(酉변 王을 뺀 瑥)主簿(사은주부) 鄭陟(정척)의 상서에 의하면
      「平壤
(평양)의 箕子祠堂(기자사당)에 가보니 箕子(기자)의 位牌(위폐)는 북쪽에 있어서 南向(남향)하였고 檀君(단군)의 위패는 동쪽에 있어 西向(서향)하였습니다. [漏落]
      * [漏落부분] 신이 그곳 관청(평안감영)의 이간 교수관에게 이유를 물으니 말하기를 "옛날 조정에서 사신이 이곳(평양)에 왔기에 기자사당에 뒤를 이을 -배향할-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니 기자묘를 둘러보고 갔는데, 그 후 나라(조정)에서 명으로 문묘 동쪽에 사당을 짓게 하고, 또 단군을 배향하라는 명령이 내려왔기 때문에 지금과 같이 되었다" 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단군은 唐堯(당요)와 같이 立國(입국)하였고 箕子(기자)는 武王(무왕)의 명으로 朝鮮(조선)에 봉하여졌으니 帝王歷年數(제왕역년수)로 보더라도 帝堯(제요)에서 武王(무왕)까지는 1230여 년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箕子
(기자)가 북향하여 南面(남면)하고 箕子(기자)보다 앞서서 立國(입국)한 檀君(단군)을 동쪽에 配享(배향)하는 것은 立國傳世(입국전세)의 선후에 위배됩니다. 臣(신)이 本朝(본조)의 祭祀儀式(제사의식)을 고찰해보니 檀君祭(단군제)의 陳設圖(진설도)에 이르기를 「신위는 당의 중앙에 모셔서 남면」토록 되어있으며 臣(신)이 箕子祠(기자사)에서 본 西向(서향)坐(좌)는 陳設圖(진설도)와 맞지 않습니다.
      만일 단군을 箕子
(기자)와 나란히 南向(남향)하게 하더라도 단군을 上座(상좌)에 箕子(기자)를 다음에 앉히는 것이 立國(입국)의 선후에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름이 箕子祠堂(기자사당)인데 檀君(단군)을 主神(주신)으로 하는 것도 편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臣(신)의 생각으로는 따로 檀君祠堂(단군사당)을 지어서 檀君(단군)을 南向(남향)하게 하고 祭祀(제사)를 받들면 祀儀(사의)에도 맞을 것 습니다』고 하였다.

  (원문)「回至平壤 謁箕子祠堂 箕子之位在北向南 檀君之位在東向西 [中略부분: 臣問於其府敎授官李簡曰 昔朝政使臣到此府 問箕子祠堂與後嗣之有無 往謁其墓 其後國家命建祠堂於文廟之東 又有檀君配享之令 故흘(착받침위에乞)今如此而享之也]
      臣愚人와 謂檀君與唐堯竝立 而自號朝鮮者也 箕子受武王之命 而奉朝鮮者也 以帝王歷年之數 自帝堯至武王凡千二百三十餘年矣 然則箕子之坐北 檀君之配東 實有違於立國傳世之先後矣
      臣敢將愚抱 欲達天聰 適遭父喪 未克上聞 今除臣爲司온(酉변 王을 뺀 瑥)主簿 仍差儀禮詳定別監
      臣敬此謹按本朝諸祀儀式 享檀君陳設圖云 神位堂中南向 臣낭(日아래襄)時所見西向之坐 不合於此圖 若使檀君 箕子竝坐南向 而檀君居上 箕子次之 則立國之先後 似不紊矣 然箕子爲武王陳
      [洪範] 在朝鮮作八條 政敎盛行 風俗淳美 朝鮮之名聞於天下後世 故堂我太祖康獻大王之請國號也 太祖高皇帝命襲朝鮮之號 於是朝廷使臣凡過平壤者 或往謁焉 則名之以箕子祠堂 而檀君作主 誠爲未便
      臣又聞箕子有祭田 而檀君無之 故箕子每奠於朔望 而檀君只祭於春秋 今檀君旣配於箕子 則幷坐一堂 而獨不奠於朔望 似亦未安 臣愚以謂 別建檀君祠堂 南向奉祀 則庶合祀儀」

      (「회지평양 알기자사당 기자지위재북향남 단군지위재동향서 [누락부분: 신문어기부교수관이간왈 석조정사신도차부 문기자사당여후사지유무 왕알기묘 기후국가명건사당어문묘지동 우유단군배향지령 고걸금여차이향지야]
      신우인와 위단군여당요병립 이자호조선자야 기자수무왕지명 이봉조선자야 이제왕역년지수 자제요지무왕범천이백삼십여년의 연칙기자지좌북 단군지배동 실유위어입국전세지선후의
      신감장우포 욕달천총 적조부상 미극상문 금제신위사온주부 잉차의례상정별감
      신경차근안본조제사의식 향단군진설도운 신위당중남향 신낭시소견서향지좌 불합어차도 약사단군 기자병좌남향 이단군거상 기자차지 칙입국지선후 사불문의 연기자위무왕진
      [홍범] 재조선작팔조 정교성행 풍속순미 조선지명문어천하후세 고당아태조강헌대왕지청국호야 태조고황제명습조선지호 어시조정사신범과평양자 혹왕알언 칙명지이기자사당 이단군작주 성위미편
      신우문기자기자유제전 이단군무지 고기자매전어삭망 이단군지제어춘추 금단군기배어기자 칙병좌일당 이독부전어삭망 사역미안 신우이위 별건단군사당 남향봉사 칙서합사의」)

  이에 대하여 세종은 禮曹(예조)에 명하여 鄭陟(정척)의 상서대로 시행토록 하였다. (단군 사당을 따로 다시 짓게 하였다)

  이상에서 보면 단군은 역대왕조에서는 國祖(국조)로서 祀堂(사당)을 세우고 祭祀(제사)를 받들었으니 箕子(기자)보다는 上位(상위)로 여기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檀君(단군)의 祭享(제향)이 끊어진 것은 日帝(일제) 때부터였다고 본다.

< 1-7. 檀君朝鮮(단군조선) 연구 숙제 >
  三國遺事(삼국유사)의 檀君記載(단군기재)는 他書(타서) 등에서 뒷받침되는 바가 없지 않으므로 믿을 만한 것이며 一然(일연)의 창작은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一然
(일연)이 인용한 古記(고기)도 金富軾(김부식)의 인용 古記(고기)와 일치되는 바가 많으므로 古記(고기)는 당시에 분명히 있었으며 金富軾(김부식)도 仙人王儉(선인왕검)과 그 도읍지를 平壤(평양)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古記(고기)에는 檀君史記(단군사기)가 분명히 있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檀君
(단군)의 世年歌(세년가)가 전하여져서 많은 識者(식자)들이 알고 있었으며 여러 곳에 檀君(단군)의 祠廟祭天壇(사묘제천단)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또 享檀君陳設圖(향단군진설도)가 世傳(세전)되어 왔고, 그것은 檀君祭儀(단군제의)가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역대왕조에서는 朝議
(조의)에 의하여 建廟(건묘) 奉祭祀(봉제사)했던 것이다. 만일 단군이 하나의 전설 신화거리에 불과하다면 위와 같은 일들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아무튼 단군과 단군조선에 관한 記載(기재)는 숙제로 남길지언정 神話(신화)로만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三國史記
(삼국사기)에서 檀君記載(단군기재)를 제외한 것은 金富軾(김부식)의 事大的(사대적) 태도보다는
    ①삼국사기의 명분상 삼국이외에는 夫余
(부여)등도 모두 제외하였으며
    ②신라중심의 三國史
(삼국사)로 하였고, 신라보다 上代(상대)의 역사는 피하려고 한 데다
    ③단군을 부인하려는 생각보다는 신라사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