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역사와 땅이름 왜곡, 지역이기주의 폐단의 현장
나제통문(羅濟通門)과 삼도봉(三道峰)터널
沙月 李 盛 永(2004. 12. 5)
  내가 시골집을 갈 때 옛날에는 별 수 없이 경부고속도로로 김천으로 가서 다시 서남쪽으로 역행해야 했다. 그러나 몇 년 전 대전-진주간 고속도로가 개통된 후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대진고속도로 무주 나들목(IC)에서 나와서는 무주구천동계곡을 지나는 길과 무주읍-설천면을 지나는 두 길이 있는데 거리와 시간은 거의 비슷하다.

  봄, 여름, 가을 철에는 가급적 구천동계곡을 지나는 길로 가면서 아름다운 구천동계곡의 산천경개를 감상하고, 눈이 와서 길이 미끄러운 겨울에는 무주읍-설천면을 지나는 안전한 길을 택한다. 두 길은 구천동계곡 입구에서 만난다

  하기는 고속도로 개통 전에도 바쁜 게 없으면 가끔 옥천에서 경부고속도로를 나와서 옥천-이원-무주를 지나 시골집으로 가기도 하였다.
  그것은 양산의 호탄교에서 금강의 맑은 물 구경도 하고, 학산 포도 단지에서 맛 있는 포도도 사고, 무주-설천간 30번 국도를 따르면서 늘 감탄하는 전라도 길가의 조경을 감상하고, 설천의 반디불이축제 현장도 지나면서 철 따라 바뀌는 산 경치와 남대천의 맑은 물을 감상하는 짭짤한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두 길이 만나는 무주구천동계곡 입구, 그러니까 37번 국도와 결별한 30번 국도가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원당천 다리를 건너면서 차량 두 대가 교행 할수도 없는 단차선의 길이 20m 정도의 짧은 터널 하나를 지나고, 약 10Km를 더 가서 백두대간을 지나는 해발 600m 되는 곳에 길이 500m 쯤 되는 복차선의 꽤 긴 터널을 하나 더 지나야 한다.

  전자가 ‘나제통문(羅濟通門)’, 후자가 ‘삼도봉(三道峰)터널’이라고 인위적으로 이름지어졌다. 이 두 터널의 이름이 모두 다 잘못 지어졌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제통문은 일제가 우리 땅을 유린하면서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그도 모자라 전국 곳곳의 땅 이름까지 왜곡(歪曲)한 결과이고, 삼도봉터널은 현대 정치사에서 씻을 수 없는 수치인 지역이기주의(地域利己主義) 소산이다.
◆ 나제통문(羅濟通門)
  나제통문 이름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이곳에서 북쪽으로 올려다 보이는 민주지산(岷周之山)의 이름에 관한 이야기부터 먼저 하여야겠다.

  백두대간 마루금에서 충청, 전라, 경상 삼도의 지경(地境)을 이루는 삼도봉(三道峰)에서 서북쪽으로 5Km 쯤 비켜선 충북 영동군 상촌면과 용화면 그리고 전북 무주군 설천면의 경계지점에 있는 민주지산(岷周之山)은 원래 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에 백운산(白雲山)이란 이름이 있었지만 순한 산세 때문에 충청도 사람들은 늘 ‘민두름산’이라 불러왔다. 충청도 인심처럼 가파르지 않고 ‘밋밋한 산’이란 뜻이다.

  그런데 일제 때 지도제작과정에서 그들은 지도상에는 한글 표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발음과 뜻이 ‘민두름산'에 유사한 한자로 岷(산봉우리 민), 周(두루 주), 之(--한), 山(뫼 산)을 찾아낸 것이다.

  산 이름 치고는 좀 이상하고 낯설다. 설사 당시 식민정책상 지도에 한글 표기가 불가능 해서 ‘민두름산’이라 표기할 수 없었다면 좀 더 역사적 고찰을 거쳐 ‘白雲山(백운산)’이란 이름을 찾아 표기했어야 마땅할 것인데, 얼토당토 않은 돌연변이 같은 ‘민주지산’이란 산이름이 탄생하여 역사도 뿌리도 없이 일제 침략의 잔재(殘滓)로서 남아서 지금까지 그냥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본론 '나제통문'으로 돌아가자.
  백두대간이 덕유산 구역에 들어서는 덕유삼봉산 지나 얼마 안되는 지점, 빼재(다른 이름: 신풍령, 수령, 상오정고개) 동편 수정봉(933.4m)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린 산줄기는 석모산(852.1m)을 지나 설천에서 남대천원당천의 합수 지점에서 끝이 난다.

  석모산 끝자락 30번 국도 상에 인공으로 뚫은 길이 20m에 불과한 조잡한 굴이 있는데 동, 서 양쪽 위에 글씨 하나는 일품인 ‘羅濟通門’(나제통문)이라 음각(陰刻)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물론 관공서에서까지 이 굴을 나제통문이라 부른다. ‘羅濟通門’글씨의 크기로 보나 품위로 보나 이는 작업현장의 인부나 현장소장 정도가 생각해서 한 것이 아니라 당국(당시 조선총독부)이 개입하여 다분히 의도적으로 새겨 놓은 것 같다.   이 ‘나제통문’이란 것이 옛날 ‘신라(新羅)와 백제(百濟)가 통교(通交) 하던 문(門)’이란 뜻으로 신라의 ‘羅’자와 백제의 ‘濟’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해석하는데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나아가서 사람들은 마치 이 굴이 지금부터 약 1500여년 전인 삼국시대에 뚫어졌고, 신라와 백제가 서로 맞대던 국경(國境)이며, 이 굴을 통해 신라인과 백제인들이 서로 통교하던 문이라 생각하는데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더구나 요즈음은 하술 더 떠서 능선 위에 깃발을 꽂아 성벽 모양을 연출하고, 터널 양쪽에 허수룩 한 초소막을 지어 ‘국경초소’라 써 붙여 놓고, 신라, 백제 병사를 가장한 조선시대 병사 복장을 한 사람을 보초로 세워 놓았으니 내력을 모르는 사람들은 진짜 옛날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던 것으로 알고 간다.
나제통문 서쪽(위)과 동쪽(아래)
위가 백제쪽이고, 아래가 신라쪽. 위, 아래 사진의 가운데 네모난 흰 부분이 ‘羅濟通門’ 글씨.
백제쪽 굴 앞 교량이 무주구천동계곡을 흘러 온 원당천 다리이고, 양편 오른 쪽에 초소막이 보인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굴은 일제 때 호남지방의 곡물을 수탈해 가는 길의 하나로 신작로(현 30번 국도)를 닦으면서 처음으로 뚫은 굴이다.

  이 신작로와 굴이 생기기 전에는 위로 비스듬히 넘어다니는 고갯길이 있었는데 하도 가팔라서 기어 넘는다 하여 ‘기넘이재’또는 게처럼 기어 넘는다 하여 ‘게넘이재’라고 불렀다 한다.

  또 나제통문의 굴 동쪽 마을의 원래 우리말 이름이 ‘게너미마을’이고, 지금도 이 곳 토박이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제통문은 일제가 식민지 수탈을 위한 신작로를 닦으면서 역사적 고증도 없이 붙인 이름인 것이다. 그 때 올바른 이름을 붙였다면 아마 '게넘이굴' 이나, 한글 표기가 불가능했다면 한역하여 '蟹越門(해월문: 게넘이재문)'정도가 되었어야 할 것이다.

  민주지산 동남쪽 5Km 지점의 백두대간 마루금에 있는 삼도봉(1177m)에 대한 한국사대사전 기록에 ‘신라의 길동현(吉同縣:영동) 과 금물현(金勿縣: 김천), 백제의 무산현(茂山縣: 무풍)이 삼도봉을 가운데 두고 힘겨루기를 했다’는 기록이 있고 보면 삼도봉을 남북으로 연하는 험준한 백두대간이 신라와 백제간의 국경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왜냐 하면 비록 신라가 백두대간 이서 쪽의 땅을 확보하였거나, 백제가 이동 쪽의 땅을 확보하더라도 헙준한 지형과 교통 때문에 통제하고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국사대사전에서 무주군 편을 보면 『이곳(나제통문)에서 동쪽으로 더 나아가 백두대간의 서편을 이루는 무풍현(茂豊縣)백제의 무산현(茂山縣)이었는데 백제 멸망 후 신라의 무산현(茂山縣)으로 되어 상주(尙州)의 개령군(開寧郡)에 속하였고, 경덕왕(AD 742-764년) 때 (백제 멸망후 80여년 후) 이름을 무풍(茂豊)으로 고쳤다』고 되어있다.

  삼도봉 북쪽으로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은 서북쪽으로 나아가 민주지산-각호산-도마령-진삼령-압재-기웃재-천태산-서대산으로 이어지는 선이 아마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실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신라의 향가 이다. 양산가는 백제군이 양산지역신라군을 야간 급습하여 이 곳 을 지키는 장수를 죽임으로서 신라군의 역부족을 원통해 하고 있는 내용이다.
양산가
  돼지 같은 원수들이
  우리 땅을 짓밟았네
씩씩한 화랑도들
  애국심이 끓었다네
  창을 메고 고향 떠나
  배줄이며 선잠 잤네
  적이 밤에 날뛰어서
  장렬하게 몸바쳤네

  양산가의 ‘양산’은 지금의 영동군 양산면이다. 금강이 무주를 지나 북으로 사행(蛇行) 하다가 금산군 재원면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영동군 양산면으로 들어서서 소위‘양산팔경’이라는 경승을 일구는 곳이다.

  신라 땅을 곳곳에서 자주 넘보던 백제군이 태종무렬왕 2년(서기 655년)에 이 곳 양산의 신라군을 야간 급습하여 신라의 김흠운(金欽運) 장군을 죽이니 이를 원통하게 생각하여 양산가가 생겨났다고 삼국사기에 기록 되었다.

  다른 하나는 서기 660년 나당연합으로 백제를 멸망시킬 때 신라 김유신장군의 5만군이 백제의 계백장군의 5천결사대와 싸우기 위해 황산 벌로 접근할 때의 경로이다.
  신라군은 백제군을 기만하게 위해 일단 남천점(지금의 경기도 이천)까지 올라가 거기에 왕이 주군하는 총사령부를 차려놓고, 다시 병력은 남진하여 옥천에 전방사령부 차리고, 전투병력은 대둔산 배티재를 넘어 황산벌(지금의 연산)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이 두 사실로 볼 때 양산과 옥천은 당시 백제와 신라의 국경 동쪽에 있는 신라 영토였던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은 늘 충돌이 심했던 진주, 합천, 양산, 옥천과 같이 상대방의 중심부(신라의 경주, 백제의 부여 또는 공주)에 이르는 교통이 좋은 곳에서는 신라와 백제 양국의 세력에 따라 유동적이었겠지만 나제통문이 있는 이 지역 같이 험준한 곳은 백두대간이 거의 고정적으로 국경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나의 주장을 입증이라도 하는 듯 부항령 남쪽 백두대간 요소요소에는 언제 축성한 것인지는 몰라도 석축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이곳에 축성을 할 필요가 있었을 시기는 백제와 신라가 대치했던 그 때 밖에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발굴 등을 통하여 고증을 하게 되면 '나제통문'이란 이름이 허구임이 밝혀질 것으로 생각된다.
부항령의 현 모습
부항령 남쪽 백두대간 상의 성터 모습

  나제통문은 이렇게 이치에 맞지 않은 일제 침략의 잔재를 놓고 무주군은 보다 깊은 연구도 없이 관광객 유치를 위한 상술로 깃발을 세우고, 허수룩한 초소를 지어 조선조 병사 복장의 초병을 세워 놓으며, 중국어판 전라북도 홍보물에까지 사진과 함께 ‘羅濟通門 是過去新羅和百濟國境(나제통문 시과거신라화백제국경: 나제통문은 과거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다)이라 하고,
  구천동 33경의 제1경이라고 설명한 후 ‘羅濟通門, 是百濟人和新羅人相互往來, 進行文化交流的關門, 具有重要的歷史意義’(나제통문, 시백제인화신라인상호왕래, 진행문화교류적관문, 구유중요적역사의의: 나제통문은 백제인과 신라인이 상호 왕래하면서 문화교류를 진행하던 관문으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추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으니 어찌 온전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는가.

  구천동33경은 덕유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10년 전인 1961년에 구천동 출신으로 당시 대전에 있던 육군통신학교 교장으로 있던 모 대령의 군용차량(찝차) 등 지원 하에 무주군은 향토 사학자들을 모아 구천동 일대를 답사하면서 경승지 33개를 선정하여 1961년 9월 15일 ‘무주(茂朱)의 전망(展望)’이라는 사진첩을 발행 함으로서 공식화 되었다.

  구천동 33경 중에는 조선조 말 우암 송시열의 후손으로 알려진 송병선이 일사대(수성대) 옆에 서벽정을 짓고 소요하면서 일사대 등 9개의 경승지에 이름을 붙이고 중국 송나라 때 주희(주자)를 본 따서 무이구곡(武夷九谷)이라 불렀는데 이들 9개와 세심대, 인월대, 안심대 등 옛날부터 전해오던 것은 그대로 포함하고, 나제통문 등 21개를 새로 선정 추가하여 33경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나제통문이 구천동 33경에 들어 있듯이 이 주변의 경관은 참으로 아름답다.

  따라서 당국은 이렇게 왜곡된 나제통문의 사실들을 가지고 잘못된 홍보에 헛된 노력을 하지말고,
  (1) 왜곡된 사실을 현장에 공시하여 일제의 역사 왜곡에 이어 땅 이름 왜곡의 현장 증거자료로서 부각시키고,
  (2) 불필요한 인공지물을 모두 철거하고,
  (3) 석모산에서 흘러내린 게넘이재 일대의 능선과 원당천 맑은 물이 연출하는 아름다운 순수한 자연경관을 부각시키도록 홍보방향을 바꾸어야 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도리어 더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첩경일 것이다.
◆ 삼도봉(三道峰)터널
  삼도봉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이 주변에서는 가장 낮은 해발 약 670m의 부항령(釜項嶺)이 있다. 세종14년(1432년)에 완성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釜項峴 在縣西三十七里’(부항현: 지례현 서쪽 37리-14.8Km-에 있음)으로 기록되어 있고, 철종 12년(1861년)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대동여지도(大東與地圖)에는 ‘釜項’(부항)으로 표기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례현편
부항령 부근의 대동여지도

  이 부항령 이름은 이 고개 동쪽의 마지막 자연부락 가목(가마목의 약자이며 한자로 釜項)에서 따 온 것이다. 1999년에 이 곳 부항령을 동서로 관통하는 아스팔트포장길이 완공되면서 해발 607m에 길이 500m의 터널을 뚫었다.
  그런데 이 터널의 이름이 엉뚱하게도 ‘삼도봉터널’이다. 삼도봉 밑을 뚫은 것이 아니라 부항령 밑을 뚫었는데 이름이 삼도봉터널이라면 누가 봐도 통념에 맞지 않는 이름이다.
동쪽에서 본 삼도봉터널
터널 위 가장 낮은 안부진 데가 부항령이다

  또 충북, 전북, 경북의 지경인 삼도봉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 10Km나 되는 먼 거리에 있고, 또 남쪽 10Km쯤 되는 대덕산에도 경남, 경북, 전북의 지경인 삼도봉이 또 있다. 후자를 사람들은 거창삼도봉이라고도 한다.
  그러니 삼도봉터널의 ‘삼도봉’은 어느 삼도봉을 지칭하는 지도 애매하다.

  오랜 역사적 뿌리가 있는 ‘부항령’이름을 두고 구태여 관련도 없고 사람들에게 헷갈리게 하는 이름을 붙인 것이 또한 ‘지역이기주의’때문 이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제 때 행정구역으로 ‘면(面)’생겨날 때 백두대간 동쪽 김천군은 이웃 대덕면대덕산에서 그 이름을 따 오듯이 이 곳은 역사 깊은 부항령에서 따서 부항면(釜項面)이라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이 터널 이름을 ‘부항령터널’이라 하면 경상도쪽의 부항면만 돋보이게(pr) 하기 때문에 전라도쪽(무주군 무풍면)에서 반대하여 엉뚱한 이름이 지어졌다는 이야기다. 지역이기주의가 이 곳에서도 역사를 깔아뭉갤 정도로 그 위력(?)을 떨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삼도봉터널을 지나 무주 쪽으로 갈 외지인이 '삼도봉터널이면 당연히 삼도봉 아래 있겠지'하는 생각으로 물어보지도 않고 삼도봉을 향하여 차를 몰아 가다가 해인동에서 길이 막히자 헛걸음치고 돌아 나와 다시 주민들에게 물어서 제대로 찾아가는 예가 허다하다고 한다.

  터널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면, 리 등 행정구역 명칭변경처럼 주민들의 호적, 지적등 행정서류를 모두 변경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이정표 등 도로 간판 몇 개만 바꾸면 되므로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올바른 이름을 찾아 명명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나는 아내와 함께 한 달에 한, 두 번 시골집에 간다. 고향에 아담하게 가꾸고 있는 시골집과 밭에 심어 논 과수와 농작물이 어떻게 되었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카세트에서 음악도 듣고, 라디오도 청취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가다가도 이 두 곳, 나제통문과 삼도봉터널을 지날 때면 그만 심통이 부풀어 오른다.

  친일청산은 자칫 칼자루(권력) 쥔 자들의 표적이 된 생사람 때려잡을 수 있는 위험스런 것보다 이런 왜곡된 것부터 바로잡고, 지방 균형발전은 국론을 반쪽으로 갈라 놓으면서 특정지역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보다 이런 지역이기주의부터 순화시키는 것이 기본 바탕이 아닐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