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산문명(紅山文明)의 후예, 동이족(東夷族) 중심의 나라
상(商)나라
沙月 李 盛 永(2009, 12, 30) 옮김
  앞서 다물이야기에 올린 ‘홍산문화 대 황하문화의 4000년 전쟁’이라는 제목의 글 중에
  제1부 : “이제는 알타이語族이 아니라 홍산語族이다”의 네번째
  「전쟁과 쿠데타 시대 연 청동기」란에
  「청동기 시대로 진입하면서 화하족은 ‘하(夏)’라고 하는 중국 최초의 나라를 만들었다.
  그런데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왕(桀王)이 폭정을 일삼자, 하(夏)나라 조정에 협력하던 상족(商族)의 대표 탕(湯)이 여론의 지지를 업고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한다.
  그리고 상족이 하화족 전체를 지배하는 상(商)나라('은(殷)나라'라고도 한다)를 열었다」
는 대목이 있다.

  여기 나오는 ‘상족(商族)’, ‘상(商)나라’의 실체를 선명하게 설명한 경향신문 2008년 2월 1일자 이기환 기자의 글 ‘천하를 제패한 동이족’이 국과연 다물지 통권185호에 ‘코리안루터를 찾아서’의 제18화로 실려 있는데, 이는 ‘치우(蚩尤)이야기’ 다음으로 먼 우리의 조상 동이족(東夷族)의 행적으로 추정된다.

  이 글의 대강을 보면 중국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은(殷)나라’ 는 본래 ‘상(商)나라’ 인데 다음 왕조인 주(周)나라 사람들이 상(商)나라를 낮추어 마지막 도읍지 ‘은(殷)’을 나라 이름으로 부른 데서 유래하여 ‘은(殷)나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학계에서는 상(商)나라에 대하여
  ‘중원의 하(夏)나라(BC2070년-BC1600년)의 일개 소국이었고, 차츰 세력을 넓힌 뒤 성탕(成湯) 때(BC1600년) 하(夏)나라를 멸망시켰다’고 하면서 하(夏)나라와 같은 하화족(夏華族)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아전인수격 해석이고 상족(商族)은 홍산문명(紅山文明)-발해연안에서 일어난 문명이기 때문에 ‘발해문명(渤海文明)’이라고도 한다-의 후예들이 BC 1600년 경 중원으로 진출하여 폭군 걸왕(桀王)하(夏)나라를 멸망시키고 상(商)나라를 건국하여 BC 1046년까지 554년간 중원의 주인으로서 황하문명으로 일컬어지는 찬란한 고대문명을 이룩하였다.

  그러다가 BC 1046년 상(商)나라는 역시 폭군 주왕(紂王) 때 다시 하화족(夏華族)의 주(周) 무왕(武王)이 일어나 상(商)나라를 멸하고, 주(周)나라를 세운 이후 진(秦), 한(漢), 진(晉) 등 하화족이 계속 중원을 차지해 왔기 때문에 상(商)나라를 세웠던 발해문명의 후예 상족(商族) 즉 동이족은 하화족에게 숙청, 추방 또는 흡수되고, 상(商)나라의 찬란한 문명의 역사는 하화족의 역사로 탈바꿈 시켜버렸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기환 기자의 글 전문을 이해하기 좋도록 약간 편집하여 올린다.
천하(天下)를 제패(制覇)한 동이족(東夷族)
이기환(경향신문 선임기자, 2008년 2월 1일)
◆ 중원통일 상(商)나라는 발해문명(渤海文明)의 후예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은(殷) 본기(本紀)에
  「은(殷)나라 시조 설(契)의 어머니는 간적(簡狄)이다. 그녀는 제곡(帝 學에서子대신告: 黃帝의 증손자라 함)의 둘째 부인이다. 간적 자매가 목욕을 하러 가는데 제비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간적이 이를 받아 삼켜 잉태했다. 그가 설(契)이다」 하였다.

  사기(史記)에 나오는 은(殷)은 본래 상(商)나라이다. 최근 중국 학계와 정부는 ‘하(夏), 상(商), 주(周) 단대(斷代) 공정’
(세 나라의 연대를 확정하는 작업인 듯)에 따라 상(商)나라의 연대를 확정하였다.
  즉 상(商)나라는 BC 1600년에 성탕(成湯)이라는 영웅이 하(夏)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했으며, BC 1300년에 은(殷)으로 천도한 뒤 BC 1046년 주(紂)임금 때 주(周) 무왕(武王)에 의해 멸망하였다.

  ‘은(殷)’이라는 나라 이름은 상(商) 왕조의 마지막 도읍(都邑) 명칭인데 주(周)나라 사람들이 ‘은(殷)’으로 낮춰 부른데서 유래되었다.


◆ 상(商)나라는 폭군의 나라?
  상(은)나라는 왠지 ‘폭군의 나라’ 혹은 ‘망국의 한(恨)’을 연상시키기 십상이다.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의 난행이 너무도 생생한 필치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紂)왕은 하(夏)나라 마지막 왕인 걸(桀)과 함께 ‘걸주(桀紂)’라는 이름으로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다.
    - 요망한 애첩 달기(女旦 己)의 비위를 맞추려 술로 연못을 만들고, 숲에 고기를 달아놓고는 벌거벗은 남녀를 뛰어 놀게 한 이른바 ‘주지육림(酒池肉林)’
    - 기름을 바른 구리기둥을 숯불 위에 걸어놓고 죄인을 걷게 하고는 떨어져 불에 타는 모습을 보고 깔깔땠다는 ‘포락지형(火包 烙之刑)’
    - 신하(臣下)이자 서형(庶兄)인 비간(比干)이 목숨을 걸고 간언하자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가 뚫렸다는데 한 번 보자”면서 심장을 꺼냈다는 만행의 기록들은 지금도 뭇사람들을 진저리 치게 한다.
    - 제후들을 죽여 포(脯)를 떠서 소금에 절인 뒤 다른 제후에게 보내서 맛을 보라고 강권하기도 하여 그것으로 충성도를 시험했다는 기록.
    - 망국 후에 충신 기자(箕子)가 황폐해진 도읍지 인쉬(殷墟)를 지나다가 지었다는 ‘맥수지가(麥秀之歌)’는 지금도 ‘망국의 슬픔(恨)’을 상징한다.

      * 맥수지가(麥秀之歌): 기자(箕子)가 파괴된 상(은)나라 궁실 자리에 곡식이 자란 모습을 보며 지었다는 노래
        “보리는 잘 자랐고, 벼와 기장은 싹이 올라 파릇하구나. 개구장이 어린애(紂王)야! 나하고는 사이 좋게 지냈더라면---”

      * 맥수지가(麥秀之歌)는 지금도 유학계(儒學界)나 한문학계(漢文學界)에서는 지금도 최고의 산문(散文)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 천하쟁탈전(天下爭奪戰)
  역사는 승자의 기록. 왕조교체 후 전대의 마지막 왕을 망나니로 만들어 버리는 예는 하(夏)나라 걸왕(桀王)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만 상(商)나라의 폄훼는 더 심한 편이라는 것이다. 후대의 사가(史家)들이 지어낸 과장(誇張)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상(商)나라의 실체를 알게 되면 더욱 확실해 진다. 하(夏), 상(商), 주(周)의 왕조 교체는 단순한 왕조의 흥망에 따른 교체가 아니다. 동이족(東夷族)한족(漢族: 당시는 夏華族)과 처절한 중원쟁탈전(中原爭奪戰)을 벌인 끝에 하(夏)나라를 무찌르고 550년 가까이 천하를 통일했다. 그것이 바로 상(商)나라다. 그런 상(商)나라를 다시 중원의 종족(漢族)이 몰아내고 주(周)나라를 세운 것이다. 이후 중국의 역사는 줄곧 한족(漢族)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선문대 이형구 교수는 상(商)나라의 실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상(商)나라는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어요. 갑골문자(甲骨文字)를 발명했을 뿐만 아니라 청동기문명을 꽃피웠으며, 동양의 예제(禮制)를 확립했잖아요---”

◆ 천하를 통일한 동이(東夷)
  중국 역사서에 나타난 상(商)나라의 역사상 중요한 것들을 일별(一別)해보자

    - 상(商)나라 시조인 설(契)는 요순(堯舜) 시절에 우(禹)의 치수(治水)를 도운 덕에상(商)이라는 곳에 봉지(封地)를 받았다. 그래서 ‘상(商)’이라는 나라 이름이 생겨났다.
    - 3대 상토(相土)마차(馬車)를 발명했으며, 그 세력을 ‘해외’에까지 넓혔다.
    - 7대 왕해(王亥)는 비단과 소를 화폐로 삼아 부락들을 상대로 장사를 벌였다. 훗날 왕해(王亥)는 유역(有易)이라는 곳에서 엄청난 환대를 받는디.
    - 왕해(王亥)의 아우 왕항(王恒)은 유역족을 대패시키고 그 족속의 재물을 빼앗았다.
    - 세력을 넓혀간 상(商)은 훗날 성탕(成湯)이라는 영웅을 낸다. 탕(湯)은 덕(德)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요리사 출신의 이윤(伊尹)을 재상으로 등용하여 국세를 떨친다. 이 무렵 하(夏)왕조는 걸(桀)임금의 학정 때문에 멸망기에 접어든다.


      * 이윤(伊尹): 은(殷: 商)의 어진 재상, 탕(湯)의 세번 초빙을 받고서야 탕의 재상이되어 하(夏)의 걸(桀)을 치고 탕으로 하여금 천하를 가지게 한다. 훗날 주(周)의 태공(太公)과 함께 '천하를 다스리는 계책'을 뜻하는 '이윤태공지모(伊尹太公之謨)'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난다.

    - 천하 인심을 얻은 성탕(成湯)은 도읍을 박(毫)으로 옮긴 뒤 11차례의 접전 끝에 하(夏)왕조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통일한다. 이 때가 BC 1600년이다.
    - 하(夏)왕조 멸망 뒤에도 상(商)은 5회나 도읍을 옮겨 반경(盤庚)이 BC 1300년에 도읍을 은(殷)으로 천도한 뒤에야 완전히 정착한다.
    - 상(商)은 은(殷)으로의 천도 이후에도 12왕 254년 동안 화려한 문명의 꽃을 피우다가 멸망한다.
    -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나중에 폭군이 되고, 여인(女旦 己)의 치마폭에 싸여 천하를 그르쳤지만 ‘처음에는 총명하고 말재주가 뛰어났으며, 그의 지혜는 신하의 간언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 였다고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 기록되어 있다.
(백제 마지막 왕 義慈王과 유사)

◆ 상(商)은 발해문명(渤海文明)의 후계자
  BC 6000년부터 잉태한 발해문명(渤海文明: 紅山文明을 말함)의 후계자였던 상(商)나라의 문명은 대단했다.
  그러나 중국 학계는 상(商)나라가 중원 하(夏)나라(BC 2070년 - BC 1600년)의 일개 소국이었고, 차츰 세력을 넓힌 뒤 성탕(成湯) 때(BC 1600년) 하(夏)나라를 멸망시켰다고 여기고 있다.
(이는 商나라도 夏나라와 같은 漢族이었다는 해석이다)

  그랬을까?
  우선 도성(都城)의 규모를 보자. 도성은 한 나라의 중심이자 왕조의 위세를 나타내는 상징이다.
    - 상(商)나라는 멸망할 때까지 10차례가 넘는 천도를 하였는데 천도한 곳곳에 흩어져 있는 도성의 규모는 만만치가 않다. 또 모든 상(商)나라 도성이 판축기법(板築技法)으로 쌓은 점이 특기할 만하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신희권 학예관은
    “자연적인 방어시설인 강변에 쌓은 점이라든지, 흙을 켜켜이 쌓아 조성한 이른바 판축기법(板築技法)으로 보면 기원후 1세기 때부터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백제의 풍납토성(風納土城)과 매우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다.

    - 먼저 성탕(成湯)이 세운 것으로 여겨지는 허난성(河南省) 옌스(偃師,언사) 상성(商城)의 궁전터는 그 규모가 19평방Km에 달한다.

    - 성탕(成湯)은 하(夏)를 멸한 뒤 다시 허난성(河南省) 정저우(鄭州,정주)에 도읍했는데 규모가 25평방Km나 된다.(이는 仲丁시기에 건립되었다는 설도 있다)

  정저우(鄭州,정주) 상성(商城)의 경우
    - 궁전 내부에 100기 정도의 인골(人骨)이 묻힌 구덩이가 확인되었는데, 이는 순장(殉葬)제도 혹은 사람을 제사에 바친 증거로 보고 있다.

    - 외성(外城)에는 중, 소형 무덤이 100여기 확인되었다. 이 무덤에서 역(膈에서 月대신金: 솥의 일종), 작(爵: 술잔), 분(盆: 물과 술을 담는 동이), 규(規아래月을 뺀膈: 제사에 쓰이는 세 발 달린 가마솥), 언(獻에서犬대신瓦; 시루), 존(尊: 술그릇,
'술그릇'즉 주전자를 의미할 때는 '준'으로 발음한다.) 등이 대거 발굴되었다.

    - 이곳에서는 노예들이 거주하면서 수공업을 담당한 것으로 보이는 작업장이 확인되었다. 이는 상(商)나라 시기에 노예제도가 확립되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정저우(鄭州,정주) 상성(商城) 출토 청동 술잔(尊)

  인쉬(殷墟,은허) 유적의 발견은 뭇사람들의 시상(詩想)을 자극할만한 한편의 대서사시(大敍事詩)같다.
인쉬(殷墟,은허) 발굴지 모습

  1899년 가을 심한 학질에 걸린 국자감 좨주 왕이룽(王毅榮,왕의영)이 의원의 처방에 따라 ‘용골(龍骨)'이란 약재를 구했는데 약재에 무슨 전서(箋書)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금석학자(金石學者)인 그는 흥분에 휩싸였다.

  *용골(龍骨): 고생대에 살던 코끼리 종류의 mastodon의 뼈가 흙에 묻혀 화석이 된 것, 한의에서는 강장 약재로 쓰임

  이것이 훗날 갑골문(甲骨文)으로 확인되었다. 이 갑골이 허난성(河南省,하남성) 안양센(安陽縣,안양현)의 샤오둔춘(小屯村,소둔촌)에서 집중 출토된 것을 파악한 중국 학계는 1928년 본격적인 발굴 작업에 들어갔다.
  15차에 걸친 발굴 끝에 2만 4,794점의 갑골이 발굴되었다. 상(商)나라의 위대한 발명품인 한자(漢字)의 원형 갑골문자(甲骨文字)를 발견한 것이다.
갑골문자(甲骨文字)

  인쉬(殷墟,은허)는 BC 1300년부터 BC 1046년 상(商)나라의 마지막 주왕(紂王)이 자살할 때까지 상(商)나라의 마지막 도읍지였으며 254년간 이른바 은(殷)나라 시대를 이끈 곳이다.

  망국(亡國)의 한(恨)이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에도 녹아 있는 바로 그 인쉬(殷墟,은허), 이곳에서는 갑골문자 뿐만 아니라 궁전(宮殿) 터종묘(宗廟) 유적 그리고 왕과 귀족의 무덤 떼(群)가 고스란히 확인되었다.

  인쉬(殷墟,은허)에서는 100Kg이 넘는 청동기를 주조하던 주형(鑄型)이 확인되는 등 크고 정교한 청동기(靑銅器)옥기(玉器)가 대량으로 쏟아졌다.

  발굴 성과가 중국 역사에 준 충격은 엄청났다. 전설상의 나라로 여겨온 상(商)나라의 실체가 완벽하게 드러난 것이다. 무엇보다 갑골문(甲骨文)이 해독되면서 상(商)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가 소설이 아니라 사실(史實)이라는 것을 확인시켰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 수수께끼의 열쇠
  선문대 이형구 교수는
  “이로써 상(商)나라의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했지. 상(商)나라 사람들이 전쟁에 나서거나 큰 일을 치를 때는 그 길흉을 점쳤다는 것과 신(神)과 인간(人間)을 소통시키는 신권(神權)과 왕권(王權)의 복합왕국(複合王國)이었다는 것까지---” 라고 하였다.
  특히 발해산(渤海産) 청동기로 무장한 상(商)왕조는 청동기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하(夏)나라를 압도했다.
  짐승문양, 도철(號아래食 殄아래食: 怪獸)문양 등 왕권과 신권을 상징하는 다양한 청동 예기(禮器)는 물론 다양한 형태와 다양한 쓰임새가 자랑인 생활용기도 상(商)왕조의 문화를 살찌웠다.

  그렇다면 상(商)나라 문화동이족(東夷族)과는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는 상(商)나라가 차하이( ? )/싱룽와( ? ) 문화(BC 6000년-BC 5000년) - 훙산(紅山)문화(BC 4500년-BC3000년) - 샤자뎬(夏家店)하층(下層)문화(BC 2000년-BC 1500년: 古朝鮮文化)의 찬란한 발해문명(渤海文明)의 일파가 남하하여 중원의 하(夏)나라를 쓸어버린 뒤 천하를 통일한 나라가 곧 상(商)나라라고 확신한다.
발해문명과 상(商)나라 관계도

  ◆ 앞으로의 풀어야할 과제
  - 중국 학계는 이 상(商)나라와 상(商)나라문화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 발해문명의 일파가 남하하여 상(商)나라를 건국했다면 발해연안에는 어떤 나라가 존재했을까?
  - 상(商)나라가 망한 뒤 발해연안에 건국되었다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실체는 무엇일까?


    * 기자(箕子): 은(殷)나라 성인으로 이름은 서여(胥餘), 수유(須臾). 주왕(紂王)의 숙부로 은(殷)을 멸한 주(周) 무왕(武王)의 청을 뿌리치고 조선(朝鮮)으로 망명하여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워 예의, 전잠(田蠶), 방직, 8조법금(八條法禁)을 가르쳤다는 전설적인 인물. 고려 중엽에 평양에서 기자묘(箕子墓)를 찾아 묘사(廟祠)세웠다는 기록이 있다.(한국사대사전)

  - 상(商)나라문화를 쏙 빼닮은 부여국(扶餘國)의 존재는 무엇이며, 왜 중국인들은 동이(東夷)의 역사 가운데 유독 부여(扶餘)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서술했을까?
  이런 것들이 앞으로 풀어야 할 수수께끼 보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