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관(植民史觀)과 우리민족의 역사서 세 종류
다물 통권 13호(1995.7.1) 김태영 작 「小說 檀君」(1회) 중에서
沙月 李 盛 永 옮김(2008.8.25)
    1995.8.1에 발표한 김태영씨의 「小說 檀君」은 초입에 식민사관(植民史觀)을 다룬다.
    우리들에게 식민사관(植民史觀)이라면 ‘20세기 초 일본제국주의가 이 땅을 강점하여 영구적인 식민지(植民地)로 만들기 위하여 그 기초 작업으로 우리의 역사를 왜곡(歪曲), 날조(捏造)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小說 檀君」에서는 이 뿐만 아니라 이보다 훨씬 전에 중화사상(中華思想)유학(儒學)에 빠진 우리 선조들의 모화사상(慕華思想) 때문에 우리의 역사가 삭찬(削纂), 왜곡(歪曲), 날조(捏造)된 것까지 그 범주를 넓혀서 이야기 하고 있다.

    더구나 「小說 檀君」은 일제 식민사학(植民史學)이 일제(日帝)에서 벗어난 지 이미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우리의 역사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과 그동안의 횡포와 재야사학자들의 고군분투 해온 것을 생생하게 이야기 하며 울분을 호소하고, 이 땅에서 식민사관을 퇴치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 이런 문제는 역사학 부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홈페이지(www.sungyoung.net) 다물이야기에 ‘우리땅 산경 I, II’라는 제목으로 올려놓은 지리학 분야에도 똑 같은 문제가 내재하고 있다.

    우리나라 각급 학교 지리학에서는 우리 조상들이 오랜 세월 발전시켜 온 합리적이고 우리들 생활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산경(山經)’ 개념을 팽개치고, 일제가 식민지정책 수행을 위하여 단 몇 개월 만에 급조한 합리성도 없고, 우리들 생활에도 아무 쓸모 없는 ‘산맥(山脈)’ 개념을 지금도 버젓이 가르치고 있으니 말이다.

    「小說 檀君」은 작자를 말하는 듯한 칠순을 바라보는 선도가(仙道家) 삼풍(三豊)선생의 자택을 방문한 「우주일보」문화부 이루리라는 젊은 여기자와「주간 광명」의 김선호 기자, 그리고 삼풍선생에게 선도(仙道)를 지도 받고 있는 수련생 정도희라는 제자, 세 사람을 앞에 놓고 문답으로 대화하는 형식으로 엮어 간다.

    처음 화두가 세종로 경복궁 앞에 떡 버티고 있던 해방 후에는 ‘중앙청’으로 불려온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에서 시작하여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와 임지왜란 때 원군으로 온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이 우리나라 전국 명산의 요혈(要穴)에 박아놓은 쇠말뚝을 제거하는 문제,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기를 고취할만한 지명까지 왜식으로 바꾸어 놓은 것을 복원해야 한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비록 소설(小說)이라는 형식을 빌렸지만 이는 엄연히 우리의 과거는 물론이고 현실에도 존재하고 있는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어 대부분이 이 문제를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알리고, 고군분투하는 민족사학자(民族史學者)들에게 미력이나마 보태고자 하는 충정에서 기자들의 질문은 생략하고, 삼풍선생이 답하는 이야기를 옮겨 놓는다.
* 중간 < >안의 소제목은 옮기면서 편의상 삽입한 것이다.

<식민사관(植民史觀)>
    『일제는 한국을 강점하기 훨씬 전인 19세기 말부터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하여 역사를 날조하는 거창한 작업을 착착 진행시켜 왔습니다.
    그들은 만주의 집안현에 있는 광개토대왕릉(廣開土大王陵) 비(碑)의 내용 일부를 훼손, 날조하여 명치유신 이후 순전히 한국을 침략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4, 5세기에 한반도 남부를 그들이 지배했었다는 소위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통치기관이 존재했었다는 허위 조작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자료로 이용했습니다.

    이처럼 일제는 치밀한 역사 날조 작업을 한국 침략 훨씬 이전부터 진행시켜 왔습니다. 그러니까 1910년 8월에 대한제국이 일제에게 강점된 이후에는 더 말할 여지도 없습니다.

    남의 민족을 침략하여 그들을 영원히 자기네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민족의 혼(魂)인 역사부터 완전히 뜯어고쳐 그들의 민족정기를 아예 말살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일제는 장기간의 연구 끝에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은 식민사관(植民史觀)을 이 땅에 부식하는데 일본 국왕의 칙령까지 발령하여 집요하고 철두철미한 작업을 진행시켜 왔습니다.

    그들은 이 땅을 강점한 이후에는 소위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라는 방대한 역사 날조 기관을 만들어 그때까지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오던 수많은 역사 기록들을 강제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는 한편 식민사관에 입각한 조선사(朝鮮史)를 편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소위 조선사(朝鮮史) 35권입니다.

    35년 만에 드디어 이 땅에서 철수하면서 모든 것이 우리 손으로 돌아왔건만 한국사(韓國史) 분야만은 광복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일제의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그대로 묶여 있는 실정입니다.』


    『일제가 이 땅에서 35년 동안 감행한 갖가지 식민정책은 모조리 실패했지만 오직 한가지 식민사관(植民史觀)을 이 땅에 심어 놓은 일만은 아직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는 일제가 양성해 놓은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과 그 제자들이 실증사학(實證史學)이라는 탈로 바꿔 쓰고 사학계에서 행세하고 있으니까요.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에서는 국사학 분야에서만은 지금까지도 일제의 망령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따라서 일제의 우리나라에서의 식민정책은 모조리 다 실패했지만 한국사 분야만은 지금까지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나라 현역 사학자들의 상당수가 아직도 일제가 만들어 놓은 ‘조선사 35권’ 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식민사학자들의 모든 저술활동은 조선사의 한계 속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겉포장이야 그럴 듯하게 치장해 놓았지만 그 내용은 식민사관의 영역 속에서 맴돌고 있을 뿐입니다. 』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선생은 일찍이 ‘역사는 피(彼)와 아(我)의 대결’이라고 갈파하였는데, 식민사학자들의 정신적 조국은 일본이지 한국이 아닙니다.
    비록 그들이 한국에서 태어나고, 한국어를 쓰고는 있지만 그들의 학문세계만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관점을 통해서 만들어진 역사관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으므로 애국심이고 뭐고 할 건더기도 없습니다.
    몸은 한국인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정신만은 식민사관으로 꽉 들어차 있는데 어떻게 애국이고 뭐고 하는 말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현행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를 보세요. 우리는 보통 반만년의 역사를 노래하고 있지만 역사교과서에는 실질적으로 위만조선에서 시작되는 2천년의 역사 밖에는 없습니다. 적어도 3천년의 역사는 증발되어버렸습니다. 위만조선 이전의 역사라면 고작해야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을 인용한 것 밖에 없습니다.

    ‘아득한 옛날 하늘나라를 다스리는 한인(桓因)이 계셨는데 그 아들 한웅(桓雄)홍익인간(弘益人間)의 뜻을 품고 백두산 신단수 아래 내려와 신시(神市)를 개설했고,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에게 쑥과 마늘을 주고는 동굴 속에서 수련을 하게 했습니다. 범은 도중에 참지 못하고 도망쳐 버렸고, 곰은 시련을 이겨내어 여자로 탈바꿈했다’는 것입니다.
    ‘한웅은 이 여자와 결혼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을 낳았는데 그가 서기전(BC) 2333년에 평양에 도읍을 정하여 단군조선(檀君朝鮮)을 세웠다’는 겁니다. 이것이 이른바 단군조선에 대한 교과서 서술의 전부입니다. 』

<우리민족 역사서의 세 종류>
    『 일제가 우리의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해서 한국 침략 이전부터 우리의 민족사를 왜곡 날조했고, 그것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 수많은 일본인, 한국인 식민사학자들은 양성해 놓았고, 그 식민사학자들이 해방 반세기가 지나도록 고스란히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지금은 왜정 때 일본인들에게 식민사학을 직접 전수받은 학자들은 거의 다 작고했지만 그 2세, 3세들이 여전히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왜곡 날조되기 시작한 것은 왜정 때 이전 오래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원래 우리나라에는 예부터 세가지 종류의 역사책들이 전해져 내려 왔습니다. 유가사서(儒家史書), 불가사서(佛家史書), 선가사서(仙家史書)들이 그것입니다.

    유가(儒家)의 대표적인 사서(史書)가 바로 삼국사기(三國史記)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저 유명한 모화사대주의자(慕華事大主義者
: 중국을 사모하는 사대주의자) 김부식(金富軾)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사학계는 바로 삼국사기를 한국사의 기본 사료로 삼아왔죠.

    그러나 이 책에는 빠진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단군 역사가 몽땅 다 빠져 있습니다. 혹자는 제목 그대로 삼국사기(三國史記)니까 신라, 고구려, 백제 역사만 썼으면 됐지 단군 역사는 무엇 때문에 써야 하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단군 역사를 말할 때는 단군조선의 뿌리인 배달국(倍達國) 역사와 그 배달국의 뿌리인 한국(桓國)의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당연히 삼국(三國)의 뿌리인 단군 역사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김부식은 단군 역사를 단 한 줄도 쓰지 않았습니다.

    삼국의 뿌리는 당연히 단군조선인데 일제 식민사학도 이 ‘단군조선’이란 용어를 쓰기 싫어서 문헌에는 있지도 않은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라는 것을 만들어서 쓰고 있는 실정입니다. 』


    김부식이 단군 역사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삼국사기가 쓰인 고려 인종 23년, 서기 1145년 바로 전에 김부식은 사대파(事大派)를 대표하여 국풍파(國風派)이고 민족주체세력을 대표했던 묘청(妙淸) 대사와 지금의 평양일대를 중심으로 사생의 승부를 겨룬 끝에 불행히도 사대파인 김부식이 승리를 거두어 이 땅에는 존화사대주의자(尊華事大主義者)가 체계적으로 탄탄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반을 닦게 되었습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신라가 이 땅에 당(唐)의 세력을 끌어들여 동족 국가를 차례로 멸망시키던 무렵부터 싹트기 시작한 사대주의 사상적 체계를 완성한 역사적인 문헌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문헌 속에 조금 전까지 사생의 승부를 벌렸던 국풍파 묘청대사가 주장한 단군의 역사를 단 한 줄이라도 언급하기가 몹시 거북했을 것입니다.
    또 김부식은 그것
(묘청의 단군 역사)을 용납할 만큼 너그럽지 못한 사학자였습니다. 단군 역사 이외에도 삼국사기에는 빠진 부분이 많습니다. 그 중에는 불교에 관한 역사도 있습니다.

    이처럼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빠진 부분을 보충한다고 해서 쓰여진 책이 바로 승려인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입니다. 그러니 이 책에 나온 단군 역사 역시 한단시대(桓檀時代) 72대 6960년의 방대한 역사를 한인(桓因), 한웅(桓雄), 단군(檀君) 3대에 걸친 할아버지, 아들, 손자의 역사로 왜곡, 축소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는 우리나라의 진정한 역사라기보다는 유교도(儒敎徒)불교도(佛敎徒)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조명해 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긴 유교와 불교 신봉자들이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기술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잘못일지도 모릅니다.

    항차 이 사서들을 기록한 모화사상에 철저히 세뇌된 김부식이나, 독실한 불교도인 일연 같은 사람이 민족적인 자존심이라든지 민족 주체성 따위에 관심을 기울일 리도 없는 일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빠진 부분들을 보충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들이 선가(仙家)사서(史書)들입니다. 이들 선가사서들이야 말로 민족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우리 역사를 서술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정기를 를 선양하는데도 크게 이바지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선가사서들은 거의 모든 벼슬을 독차지하다시피 한 유생(儒生)들에 의해 배척당했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와 이들을 바탕으로 쓰여진 지금의 역사교과서들은 모두 오랫동안 동면기를 거쳐 1980년도에 햇빛을 보게 된 「한단고기(桓檀古記)」속에 나오는 삼성기(三聖記), 단군세기(檀君世紀),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태백일사(太白逸史) 같은 기록과는 전연 다른 우리 민족 역사의 왜곡인 것입니다.

    이 사서들에 따르면 한인(桓因), 한웅(桓雄), 단군(檀君)은 할아버지-아들-손자 사이의 3대가 아닙니다. 한인(桓因)시대만 해도 7세에 걸쳐 3301년, 한웅(桓雄)시대18대에 걸쳐 1565년, 단군조선(檀君朝鮮)시대47대에 걸쳐 2096년에 달합니다.
    한인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를 합하면 무려 6960년, 근 7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 교과서는 이것들을 모조리 빼버렸습니다.

    우리민족의 역사는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운 것입니다. 6960년의 한단시대(桓檀時代)의 역사야 말로 우리민족의 뿌리이며, 고향이고, 기층문화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 장구한 역사가 뭉떵 잘려나갔습니다.』

<식민사학(植民史學)의 횡포와 민족사학자(民族史學자)들의 고군분투>
    『지금 형편으로는 역사복원(歷史復元)이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한국 사학계를 좌지우지하고 철옹성 같은 학파를 만들어 자기네 승인을 받지 못하는 한 일개 사학과 전임강사 자리 하나 얻을 수 없는 실정 아래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상당수의 한국사 교수와 역사 교사들은 ‘단군’ 이라는 말만 나와도 얼굴부터 찡그리고, 심한 경우 발작적인 신경질부터 내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단군’ 은 47대 단군을 거친 2096년 동안 지속된 단군조선(檀君朝鮮)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단군조선의 뿌리인 18대 1565년 동안 역대 한웅천황(桓雄天皇)배달시대(倍達時代)와 배달시대의 뿌리인 7대 3301년 동안의 역대 한인천제(桓因天帝)한국(桓國)를 한데 뭉뚱그려서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단군’ 하면 한ㆍ단시대(桓ㆍ檀時代) 전체를 대표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단군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이전의 상고사(上古史) 전체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


    『역사교수나 교사들이 단군소리만 나오면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그를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단군’은 우리의 민족혼(民族魂), 민족정기(民族精氣)의 원천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식민사학(植民史學)은 바로 이런 이유로 왜정 때에는 ‘단군’ 이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터부시해 왔습니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이어져 내려와 지금도 식민학자들은 '단군'이라는 말만 나와도 얼굴을 찡그리고 속에서 강한 거부반응이 치밀어 오르는 것입니다. 마치 ‘단군’ 운운 하는 사람은 신흥종교나 사이비종교의 광신자나 아예 바보 멍청이 취급을 합니다.

    사학계 안에서 지금까지도 이러한 풍조가 팽배하고 있으니 사학으로 출세해 보려는 사람 쳐 놓고 누가 단군을 들먹이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단군’ 은 지금까지 주로 재야 사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되고 논의되어 왔습니다. 역사의 추세(趨勢)라고 할까. 운세(運勢)라고 할까. 좌우간 지금은 그래도 많이 완화된 편입니다. 내가 10년 전에 이러한 식민사학의 비리를 장편소설로 써서 정면으로 다루었을 때만 해도 사학계에서 심한 반발을 샀었습니다.

    그래서 내 책을 읽은 뜻있는 군인경찰관들, 그리고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내 신변보호를 자처하고 나서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아무도 거역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요즈음 ‘단군’ 을 정식으로 다루며 동아출판사에서 낸 김산호 회화극본 「대쥬신제국사(大朝鮮帝國史)」나, 청림출판사에서 간행한 문홍삼 구성, 김의섭 그림으로 된 「잃어버린 단제(檀帝)」같은 만화판 단군 역사가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한 민족의 역사역사는 결코 일부 소수 학자들에 의해서 독점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


    선가사서(仙家史書)들은 황당무계한 참서(讖書: 참언 즉 거짓으로 꾸며 남을 헐뜯어 하는 말을 모은 책)라고 하여 사갈시(蛇蝎視: 몹시 싫어하여 뱀이나 전갈처럼 봄) 당하고, 이단시(異端視: 어떤 사상이나 학설 또는 종교에서 이단으로 취급하는 것)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들 사서들은 오랜 세월 고가(古家)나 암굴(暗窟)이나 땅 속에 은밀히 숨겨서 겨우 명맥을 이어 온 것입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한인(桓因), 한웅(桓雄), 단군(檀君)시대에 관한 한 선가사서(仙家史書) 만큼 풍부하고 다양한 기록을 남긴 책들은 없급니다. 선가사서(仙家史書) 만큼 존화사대(尊華事大)주의를 통렬히 비판한 책들은 이찍이 없었습니다.

    「단군기(檀君記)」, 「선사(先史)」, 「고조선비사(古朝鮮秘史)」,「삼성밀기(三聖密記)」, 「표훈천사(表訓天辭)」, 「도증기(道證記)」, 「지공기(지공기)」,「대변설(대변설」등등 수많은 선가사서 중에서도 한단고기(桓檀古記)의 바탕이 된 안함노(安含老), 원돈중(원돈중)「삼성기(三聖記)」, 행촌(杏村) 이암(李 品아래山)「檀君世紀」, 범장(范 木章)「북부여기(北扶餘記)」,이맥(李陌)「태백일사(太白逸史)」 그리고 조선조 중엽 병자호란 직후에 쓰인 북애노인(北崖老人)「규원사화(揆園史話)」가 있고, 8세기 대진국(大振國ㆍ일명 渤海) 시조 대조영(大祚榮)의 아우 대야발(大野渤)이 쓴 「단기고사(檀奇古史)」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입수할 수 있는 단군 사서들은 「한단고기(桓檀古記)」,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이외에 최근 햇빛을 본 신라 때 박제상(朴堤上)이 썼다는 「부도지(符都誌)」가 있을 뿐입니다.
    앞으로 어떤 사서들이 또 발굴되어 나올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이 네 가지 사서만이라도 전해진 것은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그야말로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서들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지금까지도 삼국유사에 나오는 엉뚱하고 황당무계하게 축약, 왜곡된 단군사화 정도로 만족할 수 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생물학적 상식으로도 도저히 수긍이 가지 않는 곰의 자손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서기전(BC) 2333년 지금으로부터 4328년 전에 곰이 사람으로 둔갑한 여인의 자손이 바로 우리들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우리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이 날조된 단군사화가 지금도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서기 1145년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완성된 시점으로부터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무려 765년간 온갖 벼슬은 독차지해 왔던 유생(儒生)들에 의해 혹은 왕명(王命)으로 선가사서(仙家史書)들은 철두철미하게 파상적으로 발견되는 대로 압수되었습니다.
    선가사서(仙家史書)를 읽는 사람조차 사문난적(斯門亂賊
: 유교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어긋나는 언행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사람)으로 몰려 죽음을 당해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시대를 우리 조상들은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는 일제에게 강점 당하게 되었습니다. 765년 동안 온갖 수난을 겪어온 선가사서(仙家史書)들은 이번에는 그전보다 더 혹독한 탄압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제들은 선가사서(仙家史書)들이 발견되는 족족 불태워버리는 만행을 거침없이 자행했습니다.

    일제가 무엇 때문에 이처럼 선가사서(仙家史書)들을 말살하는데 혈안이 되었는지 여러분은 구태여 내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이 갈 것입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와 같은 책들은 저자들이 각기 자기네 종교의 시각으로 한국사를 보았기 때문에 한국인의 민족정기(民族精氣)라든지 민족혼(民族魂)은 거의 다 퇴색, 제거되다시피 되어 있지만 선가사서(仙家史書)들은 그와 정반대로 민족정기를 부추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식자들은 흔히 말과 글만 잃지 않으면 민족은 망해도 언제든지 다시 일으날 수 있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배달민족의 한 갈래였던 만주족(滿洲族)은 중원 천지를 정복하여 청제국(淸帝國)을 건설했지만 말과 글이 한족(漢族)에게 동화됨으로서 하나의 민족으로서는 역사에서 사실상 사라져버렸습니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응집시킬 역사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과 글을 잃어버렸어도 민족혼(民族魂)이 살아 있는 한 그 민족은 비록 한 때 멸망 당하는 일이 있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실례를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2천년 전에 하나의 민족 단위로 일정한 거주처를 잃고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 살아왔습니다.
    현지인들과 어울려서 무려 2천 년을 살아오는 동안 그들은 자기네 고유의 말과 글까지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민족혼은 변치 않고 살아 있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그들의 옛 보금자리에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를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의 역사였습니다. 기독교의 구약성서는 바로 그들의 역사이며, 민족정기였습니다. 탈무드 경전과 함께 구약 성경이 있음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은 다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국을 강점하기에 앞서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도 집요하게 우리의 민족혼인 우리 역사를 말살하려고 혈안이 되어 날뛰었던 것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시각으로는 삼국사기삼국유사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사서들에는 민족정기(民族精氣)민족혼(民族魂)이니 하는 것이 이미 제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일제의 잔재를 이어받은 현 한국의 사학계 역시 고대사 하면 의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을 금과옥조(金科玉條
: 금과 옥 같이 귀중히 여기며 신봉하는 법칙이나 규정)로 삼고 잇습니다. 일제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그대로 방치해 두거나 이용한 것은 전자가 유생(儒生)의 입장에서 쓴 한국사이고, 후자가 불교도의 입장에서 쓴 한국사일 뿐 그 책 속에 민족정기(民族精氣)민족혼(民族魂) 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나라의 사권(史權)을 잡고 있는 일부 사학자들은 한단고기, 단기고사, 규원사화 같은 귀중한 선가사서(仙家史書)들이 마치 특정 종교, 예컨대 대종교(大倧敎)를 비호할 뿐이라고 생떼를 쓰는가 하면 국수주의적인 황당무계한 참서(讖書)위서(僞書)니 하고 중상모략만을 일삼고 있는 실정입니다. 』


    『1948년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정권을 인수하여 대한민국이 수립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이 된 이승만박사는 국내에 정치 기반이 전연 없었습니다. 임시정부의 계열인 김구 선생이 주도하는 한독당(韓獨黨)과 맞서려면 역부족이었습니다.

    이 때 미군정 당국이 이용해 온 친일 관리들을 비롯한 친일파들은 이승만을 밀어주었습니다. 이들 친일파를 기반으로 이승만 정권은 탄생했습니다. 이승만 자신은 생리적으로 반일적(反日的)인 인물이지만 정권을 잡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친일파들과도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국회에서 구성되었던 반민특위(反民特委)도 흐지부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 그 뒤에 실증사학자(實證史學者)라고 이름을 바꾼 왜색사학자들이 이 땅에서 판을 치게 만든 온상이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이 땅에서 민족사학은 도저히 발붙일 수 없었는데, 해방이 되면서 박은식, 신채호 같은 민족사학자들은 이미 작고한 뒤였고, 중국에 있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선생이 유일한 민족사학자로 귀국해서 연희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을 뿐입니다.

    6.25전까지만 해도 남한 땅에는 민족사학과 식민사학이 대립 상태에 있었습니다. 연희대학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선생을 대표로 하는 민족사학과 왜정 때 조선사편수회에서 이마니시 류(今西龍)라는 가장 악질적인 일본인 식민사학자의 가장 충실한 제자였고, 일본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나왔고,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修史官補)를 지냈던 이병도(李丙燾)씨를 대표로 하는 식민사학이 팽팽한 대립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6.25 때 위당 정인보선생이 북괴군에게 어이없이 납치되어 간 뒤로는 남한에는 오직 이병도식민사학의 독무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왜정 때 조선사편수회 수사관을 지낸 신석훈씨도 계속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니까 이 땅의 사학은 식민사학 일색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 상태가 지금까지 줄곧 계속되어 오고 있는 것입니다. 』


    문정창, 임승국, 박시인, 박창암, 그 밖의 많은 재야 민족사학자들이 이 땅에서 식민사학을 몰아내려고 온갖 수단을 다 써 보았지만 번번이 중과부적으로 허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문정창선생은 사재를 털어 식민사관을 통박하는 수많은 저서들을 출간했고, 박창암 예비역장군 역시 사재를 털어 「자유(自由)」라는 잡지를 내어 식민사학을 공격했지만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식민사학은 워낙 물샐틈 없이 단단한 학맥을 구축하고 있어서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생각다 못해 국회 청원까지 냈습니다. 국사교과서에 단군 역사와 한사군(漢四郡) 같은 왜곡 날조된 사실이 기재되어 있는 것을 일일이 예기(例記)하면서 시정을 촉구했습니다.
    청문회까지 열렸지만 교과서를 쓴 식민사학자들은 요리 조리 구실을 붙여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데만 이골이 나 있었습니다. 70년대의 국회 속기록을 들추어보면 그때의 상황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국회 청원이 실패로 돌아가자 민족사학자들은 생각다 못해서 법정에 호소하였습니다. 역사를 모르는 법관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무엇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민족사학자들은 이렇게라도 해서 집권자들과 일반 국민의 관심을 끌려고 했던 것입니다.

    국사 교과서에서 왜곡, 날조된 역사 사실들을 일일이 문헌이나 고고학적 증거들을 제시했지만 법관들은 심정적으로는 재야 민족사학자들을 동정하지만 실정법의 한계를 벗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법정에서 다루기는 곤란하다는 반응이었습니다.

    국회와 법정에서도 실패하자 이번에는 대통령과 정부 당국에 직접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고, 이것을 언론에 대대적으로 홍보했습니다. 그 때가 1974년이었습니다.

    드디어 반응이 왔습니다. 「현행 검인정(檢認定) 국사 교과서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므로 이를 폐지하고 올바른 국사 교과서를 만들어 새 학기부터 쓴다」는 문교부 방침이 만들어져 교과서 개정작업이 벌어진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정기를 되찾는 이 막중한 작업이 겨우 일개 문교부 실무자에게 위임되었습니다. 일본은 식민사관(植民史觀)을 구축하기 위해서 그들의 전 국력을 수 십년 동안 집요하게 끈질긴 노력을 기울였는데 우리는 일개 문교부 실무자에게 그 막중한 임무를 떠맡긴다니 말이 됩니까?

    그 전에 참여했던 국사교과서 집필자들을 소집해서 다시 쓰게 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이것은 까마귀 보고 갑자기 백로가 되라는 것 만큼이나 엉뚱한 주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과서 집필자들은 식민사학을 전수받은 핵심 친일 사학자들인데 어떻게 그들에게 식민사관을 제거하는 일을 맡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음의 극치가 아닐 수 업는 일이었죠.

    처음부터 그래가지고는 아무 일도 되지 않습니다. 온 국민이 일치 단합하여 국력을 총 동원해도 장구한 시일이 걸려야 할 일을 어떻게 일개 하급 공무원에게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당시만 해도 대통령이나 문교부 당국자들이 우리의 민족혼을 마취시키고 있는 식민사관의 위험성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 없습니다. 』


    『70년대와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재야 사학자들의 활동이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리곤 했는데 요즈음은 뜸한 편입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문정창선생이나 임승국교수 같은 일당 백의 맹장들이 이미 작고하셨고, 남이 있는 분들도 연로하셔서 요즈음은 별로 매스컴에 오르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더구나 최근까지도 ‘단군(檀君)'반인민적 노예제도 사회의 일개 군장(群長) 정도로 깎아 내렸던 북한(北韓)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평양 근처에 「단군릉(檀君陵)」을 거창하게 세움으로써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다가는 오히려 북한이 식민사관의 퇴치에는 우리를 앞지르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북한이 이렇게 태도를 표변한 것은 잃었던 역사를 복원한다든가, 식민사관을 퇴치한다는 차원보다는 공산권이 몰락한 이때 북한식 공산독제체제를 유지하려는 책동의 일환이고 주민들의 단합을 꾀하여 황급히 날조해 낸 것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단군 얘기만 나오면 얼굴을 찡그리고 신경질적인 거부반응부터 일으키는 대한민국 관변사학 풍토 속에서는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47 사람의 단군 중에 어느 단군인지 밝히지도 않은 채 무조건 단군릉만 세우면 되는 줄 알고 있는 북한 당국자들의 치졸한 역사의식 따위는 제쳐놓고라도 민족사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신선한 자극이 아닐 수 없다고 봅니다. 』

<식민사학(植民史學)의 퇴치방법>
    『이 땅에서 식민사학이 판을 치는 한 민족정기가 되살아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입니다. 그 가장 한국적인 것의 핵심이 바로 우리의 민족정기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되찾으려면 지금까지 유생(儒生)들과 외세(外勢)에 의해 왜곡, 날조된 우리의 역사를 되찾는 길이 가장 시급하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서라도 식민사관 퇴치는 초미의 긴급사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것 없이는 태평양의 중심국가로 부상하는 것도, 세계화에 성공하는 것도 어려울 것입니다.

    무슨 문제든지 그것을 해결하려면 그 문제가 발생한 원인부터 소급해 보아야 합니다. 군대에서 소총은 분해했을 때 결합은 분해의 역순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 땅에 식민사관이 일제의 국가권력에 의해 수 십 년에 걸쳐서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구축되어 왔다면 그것을 해체하는데도 대한민국의 국가권력이 앞장서서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해체작업을 해야 합니다. 마치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국가권력 즉 정부가 앞장서서 해체하듯이 말입니다.

    만약에 국가(정부)가 앞장을 선다면 대다수 국민들은 이것을 절대 지지 찬동할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나는 최근에 선도수련(仙道修練)의 한 방편으로 「언어문화사」 간 윤청광「소승열전」10권을 읽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


    『일제 강점 35년 동안에 한국불교를 완전히 왜색불교로 탈바꿈해 있었습니다. 일제의 한국 침략은 각계 각층, 전국의 방방곡곡에 걸쳐서 그야말로 집요하고 치밀하고 철두철미하게 진행되어 왔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임진왜란 때 육지에서 왜군을 가장 괴롭힌 것은 관군(官軍)이 아니라 의병(義兵)이었습니다.
    왜군이 육지에서 패배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관군도 아니고, 원조 나온 명군(明軍)도 아니고 바로 의병들의 맹활약이었는데 그 의병의 주축이 바로 승병(僧兵)이었습니다. 일제는 이 뼈아픈 패배를 설욕이라도 하듯 관권을 동원하여 전국의 사찰에서 청정 비구승을 조직적으로 몰아내고 취처육식음주(娶妻肉食飮酒
: 처를 얻고, 고기 먹고, 술 마시는)하는 왜색승(倭色僧)으로 채웠습니다.

    1천6백년 동안 깨끗하고 조용하고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의 사찰내에 갑자기 어린애 기저귀가 내 걸리고,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을 하고, 주지승 내외의 부부싸움 소리가 시끄럽게 났습니다. 일본의 사찰과 똑 같은 풍경이 벌어진 것입니다.

    깨끗해지기는 어렵지만 더러워지는 데는 한 순간이면 충분합니다. 물건을 만들기는 어렵지만 깨버리는 것은 내던지기만 하면 됩니다. 비구승대처승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해방 당시 30개 본산의 한국 사찰은 모조리 왜색 승려들이 독차지하였고, 구도승들은 참선할만한 곡간도 없어서 이리저리 쫓겨다니는 신세였습니다.

    그 당시 왜색 대처승1만2천명이었는데 비구승은 겨우 8백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일제가 35년 만에 이 땅에서 물러갔지만 왜색승들은 여전히 기세가 당당했습니다.
    청담스님을 비롯한 뜻있는 비구승들이 불교정화에 앞장섰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기개와 명분만 가지고 일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6.25 직후인 1954년 드디어 때는 왔습니다. 이승만대통령왜색승을 몰아내는데 앞장을 섰던 것입니다. 이승만대통령은 은 정권 말년에 독재자라는 낙인이 찍혀 실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분의 위대한 점은 바로 이런데 있습니다.
    그분은 기독교인이기에 앞서 한국인이었고, 독립투사민족주의자였습니다. 왜색승을 몰아내는 일을 착수하기 바로 1년 전에도 이승만대통령은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민족적인 쾌거를 일으켰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


    『그 때 판문점에서는 포로교환 문제로 정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공산측에서는 포로를 전원 강제송환할 것을 주장했고, 유엔군측은 포로들 각자의 자유 의사에 따른 송환을 주장하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때 유엔군에 포로가 된 인민군 중에는 북에서 반공투쟁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끌려 나와 유엔군 포로로 잡혀 있는 사람도 있었고, 또 진짜 인민군 포로 중에는 상당수가 공산측으로 송환되기를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이북에 송환되면 공산당의 생리상 희생당할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유엔군측은 공산측의 집요한 강제 송환요구에 말려들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장기간 고심 끝에 이승만대통령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미군 감시하에 남한 각처에 산재해 있던 송환반대 포로수용소를 한국 헌병들이 일시 접수하고 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석방케 했던 것입니다. 이승만대통령과 같은 철저한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면 감히 생각해 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때도 조병옥과 같은 야당 인사들은 이승만의 포로석방을 반대했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의 쾌거를 쌍수로 환영앴고, 이때 3만6천명의 반공포로들은 이들을 환영하는 국민들의 품 안으로 숨어버렸습니다.

    이때 미군들은 석방된 포로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지만 오리무중으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석방된 포로들을 보는 족족 친형제처럼 감싸주었기 때문입니다. 』


    『이러한 이승만대통령이므로 왜색승을 몰아내는 일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막상 일을 벌려놓고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우선 전국 사찰의 운영권과 재정권을 완전히 틀어쥐고 있는 1만2천명의 왜색승을 상대하는데 경찰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아무 실권도 없이 참선할 공간조차도 없어서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8백명의 청정 비구승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명분이 아무리 좋아 보았자 소수의 청정 비구승들은 왜색승의 막강한 힘 앞에는 용 빼는 재주가 없었죠. 이 때 만약 이승만대통령이 발벗고 나서지 않았더라면 불교 정화는 지금까지도 숙제로만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정부의 묵인 하에 식민사학이 아직도 이 땅에 활개 짓을 하는 것을 보아도 능히 상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때 이승만대통령은 경찰력을 동원해서 각 사찰에서 요지부동의 둥지를 틀고 저항하는 왜색승들을 끌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공비토벌과 일상적인 치안업무에도 모자라는데 결사적으로 저항하는 왜색승들을 방방곡곡 산재해 있는 사찰에서 끌어내는 데는 힘이 부쳤습니다.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승만대통령의 성격으로 한 번 결심한 일을 중도에 포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생각보다 큰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승만대통령은 이의 타개책을 놓고 궁리했지만 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측근 중의 한 사람이 묘안을 내놓았습니다. 지하 폭력배를 동원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국내 폭력조직의 왕초는 김두한이었는데, 그는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마땅한 일거리가 없어서 부하들과 허송세월을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이제 말한 이승만대통령의 측근은 이들을 불교 정화운동에 이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경찰의 힘으로도 역부족이었던 일을 이들 폭력조직에 떠맡게 되었습니다. 요즈음 「 모래기계 」에서 폭력조직이 한창 화재거리가 되고 있는데 말하자면 김두한의 부하들은 「 모래기계 」에 나오는 폭력조직의 대 선배였죠.

    이들은 마치 꿩을 본 매처럼 달려들어 전국 사찰에서 결사적으로 저항하는 왜색승을 마구잡이로 끌어냈습니다. 그들은 일단 절에서 끌어낸 왜색승들이 절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습니다. 경찰이 못한 일을 결국은 폭력조직이 해냈습니다.

    한국 사찰을 왜색승이 독차지하게 된 것은 순전히 조선총독부가 조직적으로 한국 불교를 일본화시킨 정책 때문이었는데, 한국 정부가 관여하여 이번에는 이들 왜색승들을 쫓아낸 것입니다. 즉 일본의 관권이 만들어 낸 것을 한국의 관권이 개입하여 말끔히 쓸어낸 것입니다. 』


    『내가 이런 이야기를 구구하게 늘어놓는 것은 우리 정부가 왜색승을 몰아내듯 왜색 식민사관(植民史觀)을 이 땅에서 뿌리뽑았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새삼스레 그 문제가 거론되지도 않았으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땅에 식민사학이 구축된 것은 일제가 한국 사찰에 왜색승을 심어놓은 것보다 훨씬 더 집요하고, 악랄하고, 끈질기게 동원된 관권의 작용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 정부는 식민사학 퇴치를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긴 지금의 집권자들도 학교에서 식민사학자들에게서 한국사를 공부한 사람들이라 자기네가 배운 내용과는 다른 것을 주장하는 민족사학자들을 오히려 머리가 돈 사람이 아닌가 이상하게 여기는 정도가 되었으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