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땅 악의 소굴 현장을 묘사한 뮤지컬
요덕스토리
沙月 李 盛 永 엮음
[제1화] <2006.3.28. 조선일보 사설>
‘대통령의 사람들’은 왜 ‘요덕스토리’를 두려워 하는가?

  뮤지컬 ‘요덕 스토리’에 관객이 밀려들고 있다. 지난 주말에는 입장권이 매진됐고 평일 예매율도 70%를 넘는다. 千辛萬苦(천신만고) 끝에 무대에 오른 지 10여일 만의 극장 앞 풍경이다.
br>  처음엔 실향민을 비롯한 중·노년층이 좌석을 메웠으나 지금은 초·중·고생과 대학생, 직장인으로 폭이 넓어지고, 멀리 지방에서 일부러 올라오는 관객도 많다.

  공연 내내 객석에선 한숨과 숨죽인 흐느낌이 흐르고, 홈페이지에는 ‘차라리 저것이 먼 나라 이야기였으면…’ 한다는 괴로운 관람 후기들이 넘친다.

  어린이에서부터 전직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관객이 다녀갔지만, 정작 이 뮤지컬을 꼭 한번 봐야만 할 사람들은 아직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대통령, 총리, 통일부장관, 국가인권위원장, 그리고 ‘민족과 ‘통일’을 입에 달고 사는 일부 정치인과 시민운동가들이 그들이다.

  총성과 매질, 비명 소리로 가득한 무대 속에서 북한 동포의 고통을 제 몸으로 느껴 봐야 할 사람들만 ‘요덕스토리’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수용소 경험자들은 감자를 훔쳐먹은 아이의 손을 작두로 자르고,
  살아 남기 위해 아들이 아버지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것 정도는 요덕의 地獄(지옥)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거기 누가 있다면/
  이 비명 소리 듣고 있는지/
  거기 누가 있다면/
  제발 우릴 구해주세요….’


  참혹한 장면마다 무대를 짓누르는 노래 ‘촛불 같은 생명’의 노랫말은 요덕 수용자들의 실제 울부짖음이다.

  그러나 ‘민족’과 ‘통일’로 먹고사는 대한민국 집권세력들은 수용소 동포들의 울부짖음에 철저하게 귀를 막고 있다.

  그래서 요덕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하는지 모른다. ‘신이시여 남조선에만 가지 마시고/ 공화국 요덕에도 오시옵소서’라고.

  태풍이 덮치고 산불이 휩쓸어도 단체로 뮤지컬을 구경하던 남조선의 집권세력들, 국경일에도 골프채를 놓지 않던 남조선 지도자들에게 요덕 동포들의 모습은 보아서는 안 될 장면이고, 그들의 울부짖음은 들어서는 안 될 소리라는 것이다.

  탈북자 출신 정성산 감독‘요덕스토리’를 무대에 올리기까지 친북 단체들의 갖은 협박과 권력의 회유에 시달렸다고 한다.

  못난 권력, 못된 친북 단체들이 진 빚을 갚는 것도 결국은 국민의 몫이다.
  공연이 끝날 때마다 감사 인사를 올리는 감독의 호주머니에 눈물 글썽한 눈으로 슬그머니 몇 만원을 찔러 주고 간다는 그 국민들이다.

<뮤직컬 '요덕스토리'> 주요 장면

북한 요덕수용소의 실상을 고발한 뮤지컬 '요덕스토리' 주요 장면들

▶ 함경남도 요덕군 조선인민군 경비대 제2915부대. 그 속의 이야기가 뮤지컬 요덕스토리로 세상에 나왔다.
    아이들의 기아와 굶주림, 공개처형이라는 끔찍한 상황, 아버지를 비판하며 채찍으로 내리쳐야하는 아들의 비정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인간의 세상을 다룬 그들의 이야기가 무대 한가득 펼쳐져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요덕스토리 뮤지컬을 만들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무대에 올린 정성산 감독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글·사진=최순호기자 (choish@chosun.com)

(엮은이 주) 그들의 인권을 찾아 주고, 자유로운 세상에 살 수 있게 해 주는 것도 다물운동(多勿運動)의 일환이 아니겠는가?

<요덕이 어딘고 하니>
(요덕 주변 지도)
요덕군의 서편 평안남도 맹산군은 사람들에게 '철옹성(鐵甕城:쇠로만든 독 같은 튼튼한 성)'으로 잘 알려진 오지이고,
요덕군도 마찬가지로 서북쪽 지경으로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오지이다.
제1화 끝

[제2화] <김영순의 육필 수기>
체포에서 탈북까지 처참했던 나의 35년

▶ 김영순 수기 ‘요덕스토리’ 개요
    김정일 부인 성혜림과 친구라는 이유로 10년이나 요덕에 수용됐다가 풀려난 뒤
    탈북한 김영순의 육필 수기
수기 필자 김영순씨
현재 72세

    북한 인권유린의 대명사로 불리는 함경남도 요덕 정치범수용소에서 1970년부터 1979년까지 10년간 수감생활을 한 김영순씨(72).
    북한판 ‘아우슈비츠’에서 부모와 자식을 잃고 탈북자가 된 김씨가 인권의 사각지대인 요덕수용소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칠순의 나이에 펜을 들었다.
아우슈비츠수용소 이야기(클릭): 동구관광 5-1(폴란드 크라코프)

    새해 1월 말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가제목)라는 수기를 출간, 요덕에서의 처절했던 삶을 고발할 예정이다.
    주간조선은 국제사회가 주목하고 있는 북한의 인권유린 실상을 조명하는 차원에서 김씨의 양해를 얻어 수기를 사전에 입수, 요약 소개한다.
    중간에 있는 해설 기사들과 따옴표 안에 넣은 김씨의 말은 김씨와의 인터뷰 등을 통해 보강한 내용이다.

▶ 보위부 예심과 312호 (1970년, 33세)
    기차역서 느닷없이 연행…
    “성혜림과 나눈 얘기 다 적어라”,
    노부모, 네 자녀와 요덕행… .
    이유도 모른 채 공포에 눈물만 흘렸다.


    “김영자(김영순) 동무 맞습네까?”
    평양 협주단 무용수를 그만두고 평양 시내 여행자상점에서 근무하던 나는 1970년 8월 1일 신의주 출장 명령을 받고 서평양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중 보위부 직원들에 의해 강제로 연행됐다.

    여행자 상점은 북한 고위층이 해외에 나갈 때 물건을 구입하던 곳이다. 그때 나는 4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북한 사회에서 ‘엘리트’로 살아온 나는 보위부 직원에게 연행될 당시만 해도 요덕수용소에 수용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북한 사회에서 혁명열사의 집안으로 당국의 혜택을 받고 살아온 터라 사상적인 측면에서 전혀 하자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인도된 곳은 병원으로 위장된 보위부 312호 예심과였다.

    보위부 312호 예심과는 평양시 보통강 구역 대타령동에 있는 비밀 초대소다. 이곳에서는 1호 정치범(김일성 관련)을 주로 취급하는데 사상 검증 등의 심사를 한다. 심사기간은 보통 2개월 안팎이다.

    나는 이 초대소에서 꼬박 60일을 보냈다.
    보위부는 내가 33년간 살아온 모든 이야기를 기록하도록 했다. 태어난 곳부터 누구를 만나고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또 가까운 지인들에 대해서도 상세히 적도록 했다. 내가 적은 내용 중에는 성혜림이 내 아파트에 잠시 들러 “김정일의 가계로 들어가게 됐다”는 얘기를 나눈 것도 포함돼 있었다.

    조사 직후, 보위부 직원들은 “조선노동당원으로서 영자(영순) 동무가 한 말이 남한에 전달되었다고 할 때 얼마나 엄중한 과오를 범했는지 알겠습네까. 이 시각 이후 당이 취하는 조치에 무조건 복종하시오”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리고 나는 칠순이 넘은 노부모와 자녀 4명과 함께 함경남도 요덕행 기차를 탔다.

    나는 너무도 무서워서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 흘렸다. 엘리트 사회에 살다가 갑자기 인생 막장으로 끌려가는 기분은 공포 그 자체였다.

▶ 조선인민경비대 제5군부대 (1970년, 33세)
    소금국, 강냉이죽… ,“꼭 살아 나가자” 이 악물어
    내가 잡혀가기 직전 남편은 국경 넘다 총살


    우리 가족이 도착한 곳은 사방이 가시 철망으로 둘러싸인 조선인민 경비대 제5군부대, 즉 제15호 요덕정치범수용소였다.
    나는 이때부터 인권을 보장받을 수 없는 요덕에서의 지옥 같은 삶을 시작했다.매일 삶과 죽음의 사선(死線)을 넘나들어야 했다.

    나는 공교롭게도 사지(死地)나 다름없는 수용소에서 남편이 국경을 넘다 총에 맞아 죽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들었다.
    “수용소 입소 첫날 멀건 소금국과 통강냉이죽을 받아 든 순간 아찔함이 밀려왔다.
    살아서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한다는 일념하에 죽을 힘을 다해 일했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는 1950년대 중반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1958년 평안남도 북창군 득장 탄광지역에 최초로 통제구역이 설치됐다.
    처음에는 지주, 친일파, 종교인 등 계급투쟁의 타도 대상만 수용됐다.
    1968년부터는 김일성, 김정일 세습체제 비판자와 정권에 반발하는 사람들도 수용하기 시작했다.

    ‘북한판 아우슈비츠’로 불리는 요덕수용소는 1969년 함경남도 요덕군에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킨 후 들어섰다.

▶ 부모와 큰아들을 잃다 (1971년, 34세)
    탈출하다 총살… 영양실조… 동상… 집과 들엔 시체 즐비,
    종일 중노동 대가는 강냉이 200g… 들쥐 잡아 먹는 사람도


    “당신들은 무의식중에 당과 정부의 유일체계에 걸리는 발언을 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이곳은 사회로부터 격리된 통제구역입니다. 여기서 정말 당과 위대한 수령님을 위해 투신했을 때만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함경남도 요덕군은 서쪽에 맹산군, 북쪽에는 평안남도 대흥군, 동쪽은 금야군, 남쪽은 고원군의 수동 탄광지대와 마주하고 있는 해발 1700m의 험준한 산악지대다.
    요덕수용소는 용평리, 평전리, 구읍리, 입석리,대숙리 등 5개 리를 합쳐서 만들었다.

    철조망 속에서 보면 험준한 능선밖에 보이지 않는 지역이다. 철조망이 없어도 그 자체만으로 천혜의 감옥인 셈이다.
    수감된 정치범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도록 해놓았기 때문에 도주가 거의 불가능하다.
    북한 보위부가 만들어놓은 세계 최고의 격리 감시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요덕수용소는 끼니를 연명해 가는 것조차 기적이라고 여겨질 만큼 최악의 감옥이었다. 그야말로 죽음을 벗 삼아 살아야만 했다.
    수용소에 들어오면 배가 나온 사람도 보름이면 허리가 잘록해졌다. 배급 받는 식량은 통강냉이뿐이었다.
    들쥐도 잡아 먹었다. 어미 쥐의 배에 든 털 없는 새끼 쥐가 아이들 식독(食毒)에 가장 좋은 약으로 알려져 쥐도 귀한 형편이었다.

    수용소에 들어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아버지가 병들어 누웠다.
    나는 여자의 몸으로 7명의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절박한 처지가 됐다.
    새벽 4시30분에 출근하기 위해 3시에 눈을 떴고 어두워서야 귀가하는 중노동에 시달렸다.
    그 대가로 받는 게 통강냉이 200g 정도에 불과했다. 이로 인해 비타민 결핍으로 인한 ‘펠라그라병’, 즉 영양실조로 죽는 이가 많았다.

    1970년대 요덕에 수용된 전체 수용인원은 최소 수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당시 요덕군 용평리와 평전리에 수용된 인원만 5000명이 넘었다.
    1개 작업반에 성인 노동 인력만 100명이 넘고 가족까지 합치면 400명을 상회했다.

    김영순씨 가족이 수용돼 있을 당시 두 개 리에 10개 작업반이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5000명 정도가 두 개 리에서 생활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요덕군 소재 다섯 개 리로 환산하면 1만5000명 정도다.

    수용소에서는 매일 죽는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탈출하다 걸린 사람은 공개 총살형에 처해졌고, 영양실조와 동상으로 숨진 시체가 집과 들에 즐비했다.
    죽음의 그림자는 예외 없이 우리 가족에게도 들이닥쳤다. 입소 1년여 만에 아버지도 영양실조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가장 큰 충격은 아들 세영이를 먼저 떠나 보낸 사건이었다. 1973년 여름 큰아들 세영이가 물에 빠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내게 세영이는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한 가닥 희망이었다.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깊어진 한으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머니가 없었더라면 그때 나는 자살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극단적 선택을 말려준 어머니도 수용소 생활을 그리 오래 버텨내지 못했다. 마지막 보루였던 어머니도 1976년 1월 영양실조로 세상을 등졌다.

    나는 한없이 울었다. 김일성을 용서할 수 없었다. 북한 당국이 말했던 원수는 미국이 아니었다.
    그들 스스로가 인간 백정이었다. 시체를 너무 많이 봐서 지금은 시체를 봐도 무섭지도 않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표현하는 슬픔은 북한에 비하면 너무 사소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 "내가 여자란 것도 잊었다"(1976년, 39세)
    초가집 맨 구들장에서 생활…,
    4년간 생리도 멎어
    어딘가로 끌려간 뒤 안 돌아오는 사람 수두룩


    수용소에서의 비인간적인 삶은 남녀의 성별조차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먹을 게 없어 굶는 것은 다반사였다.
    우리가 거주하던 초가집은 돗자리도 하나 없어 맨 구들장에 누워 지내야 했다.
    남자들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뱀을 잡아 먹고 이름 모를 병에 스러져 갔다.
    완전 통제구역인 용평리 일대 수용소에 입소한 남자들은 대부분 제3의 장소로 끌려가 돌아오지 않는 일이 허다했다.

    수용소에 들어간 날부터 정신적, 육체적 피로와 극심한 스트레스로 여자로서의 성별도 잃었다.
    수용소에 들어올 무렵인 1970년 10월부터 4년간은 생리조차 멎었다. 수용소 여성들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매일 저녁이면 새로운 사람들이 시체로 바뀌었고 보위부원들의 압박은 심해졌다.

    당시 수용소에 입소한 사람들의 죄명은 대부분 김일성과 체제에 대한 사소한 문제 제기 때문이었다.
    북한 당국은 이들에게 ‘반체제’라는 죄명을 덮어씌워 요덕수용소에 강제 입소시켰다.
    김씨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수용된 정치범 중 다수는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끌려왔다고 한다.

    ‘김일성의 목에 혹이 있다’고 말한 사람, 김일성ㆍ김정일의 석고상을 깬 사람, 김일성 사진이 있는 신문으로 장판을 바른 사람, 외국 비디오를 본 사람, 김정일의 처 성혜림과 아들 김정남에 대해 말한 사람, 남한 방송을 청취한 사람 등이 대부분이었다.

▶ 지옥에서 벗어나다(1979년, 42세)
    성혜림이 김정일에게 버림받자 요덕서 해방.
    수용소 끌려갔던 이유도 출소 후에야 알게 돼


    내가 국경을 넘은 것은 대한민국에 가서 북한의 실상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1979년 1월 나는 요덕수용소에서 출소했다. 처음엔 나를 포함해서 7명의 가족이 입소했지만 10여년 뒤 출소할 때는 큰딸과 아들 2명을 포함해 생존자는 4명뿐이었다.

    우리는 다시 금광으로 유명했던 함경남도 장진군 중흥광산에 배치됐다. 하지만 출소 후에도 보위부의 감시는 계속됐다.
    그때서야 나는 왜 요덕수용소에 잡혀가게 됐는지 이유를 알게 됐다.

    함흥 지역 보위부 직원이 어느날 찾아와
    “성혜림은 김정일의 처도 아니고 아들도 낳지 않았다. 새빨간 유언비어다. 어디서 들었다거나 유포할 때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간 것이다.
    ‘내가 요덕에 가게 된 까닭이 거기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소 직후 평양을 잠시 방문했던 때 고영희성혜림 이후 김정일의 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영희가 김정일의 처가 된 것은 우리 가족이 요덕에서 출소한 시점과 일치했다.

    보위부 직원들은 내가 수용소에 끌려간 이유와 출소하게 된 배경을 전혀 설명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수용소를 나온 뒤 보위부에서 나를 관찰할 때 성혜림과 관련된 이야기에 유독 신경을 썼다.

    고영희의 등장으로 내가 수용소를 나오게 됐다는 게 우연이 아님을 직감했다.”

    나는 장진에서 함흥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인민반장을 맡아 25가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반원들은 예외 없이 노동력을 착취당했고 매번 이어지는 자아비판 등을 통해 체제에 순응하기 바빴다.

    나는 최대한 반원들을 배려하며 15년 정도 이곳에서 살았다.
    중앙은 물론 지방 말단 당원들의 권력 남용도 심각한 수위였다. 구역당 비서쯤 되면 애첩이 하나씩은 있을 정도였다.
    김일성 시대에는 이런 일을 용서치 않았지만 김정일 시대에는 눈감아 주는 분위기였다.
    그러다 다른 문제가 드러나면 스캔들로 엮어 처벌을 했다.

    북한에서는 지금도 ‘5호 댁과 관련된 정보를 아는 자체가 1호(김일성) 가계 권위와 위신 훼손’이라는 죄목으로 처벌 대상이다.

국경을 넘다(2002년, 65세)
    썩을 대로 썩은 북한 사회, 뇌물만 주면 탈북도 가능,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늘그막에 자유 품으로


    우리 가족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88년 막내 아들 충국이 탈북을 시도하다 잡혀 5년 동안 수용소에 감금됐고, 재탈북 도중 붙잡혀 총살을 당했다.

    이때부터 나는 북한을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