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는 돌이 박힌 돌 뺀’ 격이 된 견과(堅果)의 최고(最高)!
가래나무/ 호도나무
沙月 李 盛 永(2005.12.5)
  호도나무는 누구나 잘 아는데 가래나무는 아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나 가래나무는 오래 전부터 우리 땅에 자라 온 순수 우리나무다. 우리나라 지명 중에 ‘가래골’이라는 이름이 많은데 이것은 ‘가래나무가 많은 곳’라는 뜻이다. 호도나무는 지금부터 약 700년 전에 중국 원나라에서 가져 온 나무이다. 그러나 700년 이상 우리 선조들과 함께 하면서 이제 외래종의 때를 벗고 우리나무가 되었다. 가래나무나 호도나무나 목재도 이용하지만 주로 열매를 얻는 과실수인데 과실로 호도가 더 크고, 수확이 많기 때문에 토종 가래나무가 외래종 호도나무에게 밀려난 셈이다.

  그래서 가래나무는 우리 주변에서 보기 힘들고 깊은 산중에 야생으로 자라거나, 수목원 등에 전시용으로 보존되고 있을 뿐이다. 4-5년 전에 종친회 일로 익산 삼기면 현동에 갔을 때 울타리 가에 너댓 그루의 큰 가래나무가 있는 것을 보았다. 임업연구원 이유미 박사는 그의 저서 ‘우리나무 백가지’ 에서 ‘가래나무를 쉽게 설명해서 산호도나무’라고 하였다.

  가래나무와 호두나무는 같은 속(屬)에 속하는 형제나무로서 사람의 성(姓)에 해당하는 속명이 주구란스(Juglans)인데 이는 고대 로마 신화에서 최고의 신인 ‘주피터’라는 뜻의 라틴어 ‘조비스(Jovis)’와 견과(堅果)라는 뜻의 ‘그랜스(Glans)’ 의 합성어로 ‘견과 중에 최고’ 를 의미한다.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나무 이름을 가지고 엮어가는 민요에 ‘오자마자 가래나무’ 라는 구절이 있어 마치 가래나무 이름이 ‘가라’ 는 뜻에서 유래 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이는 나무이름의 음을 따서 지은 것일 뿐이다. 가래나무는 옛날에 한자로 ‘加來南于(가래남우)’ 라 불렀다고 하며 이것이 음이 순화되어 ‘가래나무’로 변화한 것으로 전해진다.

  가래나무는 가래나무과에 속하는 낙엽성 교목으로 다 자라면 키가 20m를 넘기도 한다.줄기는 곧으며 수피가 세로로 갈라지는 회갈색이고, 잎이 여러 장씩 깃털 모양으로 달리는 우상복엽(羽狀複葉)이다. 손가락 하나 정도의 길이의 타원형 소엽이 적게는 일곱 개, 많게는 열 일곱 개가 나란히 매달리는 복엽이 가지 끝에는 마치 한자리에서 돋아난 듯 둥글게 모여 달린다.

가래나무

  가래나무 열매를 추자(楸子)라 하고, 호도나무 열매를 호도(胡桃)라고 하고, 본초강목(本草綱木)에서는 핵도(核桃)라고도 하였다. 호도가 전래된 지 오래되어 우리나무가 되고 또 가래나무를 재치고 더 많이 가꿔지게 되면서 호도를 추자라고 하기도 하고, 또 추자를 ‘산핵도(山核桃)’ 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내가 어릴 때나 지금도 우리 고향에서는 호도를 보고 추자란 말을 예사롭게 쓰고 있다. 호도는 ‘호두’라고도 하는데 이는 원나라에서 전래된 것에서 유래하여 ‘오랑케(胡)의 머리(頭)’ 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국어대사전에는 호두를 한자로 ‘胡 -’ 라 쓰고 있어 ‘두’자는 한자가 없고 순수 우리말인 것 같다.

  가래나무를 한자로 楸木(추목) 또는 梓木(재목)라고 쓴다. 가래나무는 뽕나무와 함께 고향을 의미하는 ‘상재지향(桑梓之鄕)’이란 말에 인용되고 있다. ‘뽕나무와 가래나무가 자라고 있는 조상이 대대로 살아 와 묻혀있는 잊지 못할 내 고향’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또 옛 사람들은 조상의 묘가 있는 곳을 ‘추하(楸下)’ 라고 하였고, 조상의 산소를 찾는 것을 ‘추행(楸行)’ 이라 하였는데 이는 후손들이 조상에게 효도한다는 뜻으로 산소 가에 가래나무(楸木)를 심어 가꾼 데서 유래된 말이다.

  추자는 호도보다 작고 속 껍질이 더 딱딱하고, 둥근 호도보다 길쭉하고, 주름이 호도보다 더 깊게 패였다. 두 개를 손 안에 쥐고 손바닥 안마용으로 사용하는데 호도는 껍질이 얇아 쉽게 깨지지만 추자는 오래 동안 사용할 수 있고, 오래 될수록 검고 반질반질한 윤기가 흐른다. 추자가 단단하고 잘 깨지지 않음으로 불가(佛家)에서는 작은 것을 골라 둥글게 갈아서 실에 꿰어 염주(念珠)를 만들고, 좀 더 큰 것은 손목에 걸고 다니는 단주(短珠)를 만들었다고 한다.
  또 향낭(香囊: 향을 넣는 주머니)이나 노리개 또는 조각 재료로 썼고, 상감(象嵌: 금속, 도자기, 목재 등의 겉면에 무늬를 파고 다른 재료를 박아 넣는 공예품)을 만들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추자가 복숭아 씨를 닮은 데서 ‘귀신을 쫓는다’는 주술적인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옛사람들은 두 개를 손안에 넣고 비비는 것도 이 열매가 ‘중풍에 걸리게 하는 귀신을 쫓아준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현대의학으로 볼 때는 혈액순환을 촉진시키는 효과가 있고, 한방에서 볼 때는 지압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추자는 포도처럼 한 꼭지에 10개 이상 송이를 이루어 열리지만 호도는 2개가 가장 많고, 1개 또는 3개가 간혹 있으나 4개 이상은 보기 힘들다. 추자는 한 꼭지에 많이 달리는 대신 송이가 적고, 호도는 한 꼭지에 적게 달리는 대신 잔 가지가 많이 뻗는데다 가지마다 맺혀서 호도가 수확이 훨씬 많다. 호도가 추자를 밀어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추자(왼쪽)와 호도(오른쪽)

  9월이 되면 익어서 겉껍질이 저절로 벌어지고 딱딱한 속껍질의 추자나 호도가 떨어지지만 이렇게 벌어지기 전에 수확을 한다. 발로 밟거나 막대기로 두드리면 겉껍질이 갈라져 추자나 호도가 빠져 나오는데 이를 우리 고향에서는 “배가 돌았다’고 한다. 배가 돌기 전에 딴 것도 며칠 놓아두면 배가 돌게 된다. 7-8월 여름 방학 때 냇물에 멱 감으로 가면서 따가서 바위에 문지르면 겉껍질이 갈아지는데 이렇게 겉껍질을 대충 갈아내고 돌로 속껍질을 깨고 속살을 꺼내 먹으면 완전히 익었을 때보다 고소한 맛이 더 좋다.
  그러나 겉껍질을 갈고, 속껍질을 깨고, 속살을 꺼내 먹는데 정신이 없다가 무심코 자기 손을 보고 진한 갈색의 물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란다. 더구나 이 진갈색은 오래 동안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국민학교나 중학교 시절 여름 방학 동안 내내 나와 동네 친구들은 양 손에 호두 물이 들어 있었다.

가래나무 숫꽃(왼쪽)과 암꽃(오른쪽)

가래나무는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야생해 왔지만 호도나무는 기원전 1세기경 중국 사람들이 티벳트에서 종자를 들여와 심어 길렀다고도 하고, 천안 광덕사 호도나무 천연기념물을 소개하는 안내판에는 ‘호도나무의 원산지가 중국이라고 하나 지구상 최초로 나타난 곳은 페르시아(지금의 이란)로 중국 한나라 때 장건이 서역에서 돌아오면서 들여 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들어온 경위는 문헌과 천안 광덕사에 세워진 천연기념물 안내간판과 호도전래사적비가 일치한다. 즉 지금부터 약 700년 전인 고려 충렬왕 때 유청신이라는 사람이 원나라에서 종자와 묘목을 가지고 와서 고향인 천안 광덕면에 심은 것이 처음 전래된 유래라고 설명하고 있다. 천안시 광덕면 광덕사 경내에는 최초에 가지고 온 묘목을 심은 것이라는 고목 호도나무가 천연기념물 제398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고, 1987년 지방 유지들이 세운 호도전래사적비(胡挑傳來事蹟碑)가 세워져 있다.

처음 우리나라에 심은 호도나무
배경 왼쪽은 광덕사 선화루(善化樓)이고 오른쪽은 종각(鐘閣)이다.
선화루 아래로 올라서면 대웅전이 바라보인다.

처음 심은 호도나무 설명

호도전래사적비

(이면 비문 내용)
胡挑傳來事蹟碑(호도전래사적비)
  胡挑(호도)나무가 우리나라에 傳來(전래)된 것은 高麗(고려) 忠烈王(충렬왕) 16년(1290)에 英密公(영밀공) 柳淸臣(유청신) 先生(선생)이 元(원)나라로부터 王駕(왕가)를 모시고 돌아올 때에 열매와 苗木(묘목)을 가져와 苗木(묘목)은 廣德寺(광덕사)의 境內(경내)에 심고, 열매는 天安郡(천안군) 廣德面(광덕면) 梅堂里(매당리) 鄕邸(향저) 뜰 앞에 심은 것이 始初(시초)라고 한다.

  그 후 거의 七百年(칠백년) 동안 先生(선생)의 後孫(후손)과 地域住民(지역주민)들이 부지런히 심고, 가꾼 결과 胡挑(호도)나무는 車嶺山脈(차령산맥)의 골짜기마다 무성하게 繁盛(번성)하여 오늘날에는 우리 고장의 名物(명물)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三南(삼남)의 곳곳에서까지 널리 栽培(재배)되기에 이르렀다.

  이 胡挑(호도)나무는 그 크기가 最長(최장) 二十(이십) 미터나 되며 樹齡(수령)도 4-5백년이나 되는 長壽巨木(장수거목)으로 이 나무의 열매인 호도(胡挑)는 예부터 木夾 桃 木夾 桃仁楸子(협도협도인추자: 뜻?) 등으로 불리면서 冠婚喪祭(관혼상제)에 없어서는 아니 되는 과일로 그리고 어린이들은 머리가 좋아지는 과일로 그리고 營養價(영양가)가 높아 便秘(변비), 기침, 高血壓(고혈압) 등의 疾病(질병)을 治療(치료)하는 醫藥品(의약품)으로 널리 愛用(애용)되어왔다.

  또한 옛날에는 우리 고장의 珍貴(진귀)한 進上品(진상품)이었으며 保管(보관)과 運搬(운반)이 容易(용이)하면서도 값이 나가는 貴重(귀중)한 交易品(교역품)이어서 우리고장의 살림을 潤澤(윤택)하게 하였다. 그리고 胡挑(호도)나무 板子(판자)는 단단하고 나무결과 무늬기 아름다워 木工藝(목공예)의 資材(자재)로도 많이 利用(이용)되어 우리나라 家具工藝(가구공예)의 格調(격조)를 더욱 높여 주었다.

  이렇게 유용한 胡挑(호도)는 오늘날 우리고장에서의 收穫(수확)만도 數 千石(수 천석)에 이르러 우리 고장의 큰 所得源(소득원)이 되고 있으며 나아가 外國(외국)에까지 輸出(수출)하는 손 꼽는 土産品(토산품) 중의 하나가 되었고, 이 胡挑(호도)로 만든 胡挑菓子(호도과자)도 이 地域(지역)의 빼어 놓을 수 없는 名物(명물)이 되었다.

  이와 같은 胡挑(호도)나무에 대한 來歷(내력)과 事緣(사연)들이 행여나 잊혀질까 하여 이 고장에 代(대)를 이어 살아오면서 胡挑(호도)나무를 가꾸어 온 人士(인사)들이 정성스런 뜻과 愛鄕心(애향심)을 모아 胡挑(호도)나무를 처음 옮겨 심었던 廣德寺(광덕사) 境內(경내)에 胡挑傳來事蹟碑(호도전래사적비)를 세운다.
1987年 月 日
胡挑傳來史蹟碑建立委員會(호도전래사적비건립위원회) 세움
天安鄕土文化硏究所(천안향토문화연구소) 閔丙達(민병달) 지음
高桐(고동) 印永宣(인영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