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천(九泉)까지 향내 풍긴다는 청정(淸淨) 나무

(香)나무

 

 

 

 

 

 

 

 

 

 

 

 

 


생강나무, 라일락, 천리향 등 많은 식물은 독특한 꽃향기, 모과. 레몬 등은 과일향으로 주목을 받는데 향나무는 목재향기가 좋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향나무 향기가 구천(九泉: 저승)에 까지 이른다고 하여 이미 구천에 가 있는 사람 즉 돌아가신 분에게 좋은 향기로서 제사 날을 알리려고 제사 때 향불을 피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향나무는 나서 자라면서 여러 가지가 변한다. 우선 줄기는 처음에 초록색이고, 2년이 지나면 붉은 갈색, 다시 또 1년이 지나면 자주빛의 진한 갈색, 오래 묵으면 잿빛 또는 흑갈색이 된다.

 

15년쯤 지나면 껍질이 조각조각 벗겨진다. 향나무 잎도 햇 가지에는 뾰족뾰족한 침엽(針葉)이 달려 손에 닿으면 찌르지만,  5년 이상 묵은 가지에는 얇고 작은 입들이 비늘처럼 포개져 손이 닿아도 찌르지 않고 부드러운 촉감을 주는 이른바‘고기비늘’이란 뜻의 인편엽(鱗片葉)이 난다.

 

향나무의 학명 주니페루스 시넨시스(Juniperus chiensis)의 시넨시스란 ‘중국산’이란 뜻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향나무들이 중국에서 건너 온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의 향나무는 우리나라 고유의 나무다.

 

향나무는 기본 종 외에 몇 가지 변종이 있는데

줄기가 밑둥부터 많이 갈라져 전체 수형이 둥근 둥근향나무,   

잎의 일부가 금색 또는 은색 무늬가 있는 금반향나무, 은반향나무,

한라산, 설악산 등의 고지대에서 강한 바람에 순응하여 원 줄기가 누워서 옆으로 자라는 눈향나무,

자라다가 가지가 전체적으로 수평으로 퍼지는 뚝향나무 등이 우리나라 특산 수종이다.

근래에 와서 일본에서 개량한 가이스카(貝塚: 오오사카 부근의 마을 이름)향나무 또는 나사백이라 불리는 향나무가 수입되어 많이 보급되고 있는데 전정성(剪定性)이 좋아 인위적으로 모양을 내기가 용이하여 서양식 조경에 많이 이용된다.

 

 

 

 

 

 

 

 


가이스카향나무

또 지금부터 20년 전만 해도 연필은 향나무로만 만드는 것으로 알 정도로 향나무를 연필 만드는데 썼는데 이것이 연필향나무로 그 당시 나무를 많이 수입하여 심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에서는 향나무를 아주 귀하게 여기며 향목(香木)이라는 이름 외에도 원백(圓栢), 보송(寶松) 등으로도 불려진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향나무 자생지는 섬을 제외하고는 북위 30도 이남 뿐이지만 심은 나무는 함경도 무덤 가에서 자라고 있는 것도 있으니까 분포지역은 전국적이라 할 수 있다.

 

향나무는 예로부터 청정(淸淨) 나무라 하여 궁궐, 절, 정원, 우물가, 그리고 산소에 많이 심었다. 특히 향나무를 우물가에 심은 것은 그 뿌리가 물을 깨끗하게 하고 물맛도 좋게 향기로워지며 늘 푸른 향나무처럼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향나무는 오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아끼고 좋아해 현재 향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11점으로 소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에 이어 랭킹 4위이다.

 

서울의 창경궁(제94호), 창경궁의 향나무는 이상하게 꼬이고 오래된 줄기는 아래로 처져 버팀목으로 받히고 있는 모습이 나무가 겪은 역사의 온갖 풍상을 말해주는 듯하다.

 

동대문구 제기동 선농단(제240호), 지금의 제기동 선농단(先農壇)은 조선 태조 때부터 중국 고사에 농사를 주관했다고 전하는 신농씨(神農氏: 북남향)와 후직씨(后稷氏:동서향)를 신으로 하여 매년 임금이 친히 나아가 그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 지내는 단(壇)인데 여기에 있는 쭉 뻗은 잘생긴 향나무는 단을 처음 축조 할 때 예닐곱 그루를 심었다는 향나무 중의 한 나무가 지금까지 살아 남은 것이라 하니 족히 600년은 될 것으로 본다. 선농단 제사 의식에 쌀로 만든 막걸리를 나무 뿌리에 붓는 의식이 있어 선농단 향나무는‘술 마시는 향나무’로 유명하다.

 

또 제사 지낸 후에 소의 머리, 내장, 족, 무릎도가니, 뼈 등을 가마솥에 푹 고은 것을 참석한 백성들에게 푸짐하게 나눠 먹였는데 이것을‘선농탕(先農湯)’하였는데 후에 점차 변음하여‘설렁탕’이 되어 지금의 설렁탕 음식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2005년 7월 7일자 조선일보 「 이구태 코너 」에 “한솥밥 정신’이란 제목의 글이 올랐다. 선농단에서 설렁탕을 한 솥에 끓여 위는 임금으로 아래로는 거지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가 정신적 단합을 꾀했던 행사라고 설명하고 있다. 전문을 옮긴다.

(이규태 코너---한솥밥 정신)우리나라 혼례에 있어 하이라이트는 표주박잔에 신랑신부가 입을 번갈아대며 한 잔술 더불어 마시는 합근례(合 承밑에己 禮)다.

쿠데타를 음모했던 수양대군은 허리춤에 표주박잔 끼고 다니며 뜻을 같이하고 결의할 일이 있을 때마다 이 한 잔에 술을 부어 더불어 마심으로써 모사를 성사시켜 유명하다. 옛 관공서나 향촌마다 말(斗)들이 대포(大匏), 곧 큰 술잔이 있어 돌려 마심으로써 결속을 다지는 향음례(鄕飮禮)를 정기적으로 베풀었었다. 의리가 굳건한 사이를 대포지교(大匏之交)라 했음은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헌부의 대폿잔을 아란배(鵝卵杯), 예문관의 대폿잔을 장미배(薔薇杯)라 했듯이 미명이 붙어 있었고 그 관청의 대명사로도 통용됐었다. 제사 때 제주와 제수(祭需)를 고루 나누어 먹는 음복(飮福)도 정신 결속 수단이었다. 신라를 망친 것이 술잔을 물에 띄워 돌려 마시는 포석정(鮑石亭) 곡수연(曲水宴)으로 알려져 있지만 포석정은 군신(君臣)이 공음(共飮) 함으로써 충성을 다지던 정신문화의 현장이다.

한 잔술 더불어 마심으로써 끈끈한 사이가 되듯이 한솥밥 먹는다는 것도 농도 짙은 정신 접착제였다. 옛날 손님이 오면 가족이 먹는 한솥밥을 차려낸다는 법은 없었다. 가문에 따라 다르나 대체로 친계(親系) 8촌, 외계(外系) 4촌, 처계(妻系) 2촌 밖의 손님은 딴 솥으로 밥을 지어냈다. 소금장수나 나그네 등은 사랑채에 유숙하게 마련이요 밥상도 차려내지만 국이나 찬은 차려도 밥만은 차려내지 않는 것이 법도였다. 그래서 밥만은 단지밥을 따로 지어 밥상에 올려 먹었다. 그만큼 한솥밥의 의미가 컸다. 농사신(農事神)인 선농(先農)제사 때 희생당한 신성한 신체(神體)인 소의 어느 한 부위도 버리지 않고 한 솥에 끓인 국물에 밥을 말아 위로는 임금부터 아래로는 문무백관, 백성, 거지에 이르기까지 한솥밥을 나누어 먹었던 공식음식이 선농탕 곧 설렁탕이다. 별나게 큰 것을 빗댈 때 ‘선농단 국솥만하다’ 했는데 무척 컸던 것 같다.

충청도 괴산에서 4만 군민의 밥 40가마를 한 솥에 지을 수 있는, 45t짜리 선농단 국솥은커녕 세상에서 가장 큰 솥을 만들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군민의 일심동체를 다지기 위해서라니 그 정신 민속의 부활에 조명을 대고싶다.

 

양주 양지리(제232호)  거창신씨 묘지에 심은 향나무는 줄기가 울창한데 한 줄기에는 깎여 나간 흔적이 있다고 한다.

 

조치원 봉산동(제321호) 향나무는 강화최씨 최완이란 사람이 이 마을로 낙향하여 살다가 죽자 그 아들이 시묘살이 하면서 심은 나무라 전해진다.

 

청송 안덕면 장전리(제313호) 향나무는 약 400년 전에 영양남씨가 조상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시조의 비각 옆에 심어서 정성껏 돌보며 키운 나무라 한다.

 

승주 송광사 천진암의 뒤뜰에 있는 쌍향나무(제88호)는 두 그루의 곱향나무가 70Cm 간격으로 나란히 커 올라가 붙여진 이름으로 모양새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가장 으뜸으로 치는 나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려 때 보조국사와 제자 담당국사가 중국에서 수도를 마치고 돌아올 때 짚고 온 지팡이를 나란히 꽂은 것이 뿌리가 나서 자라 지금은 워낙 커서 멀리 서 보면 붙어 있는 것처럼 다정해 보이고 실 타래처럼 촘촘히 꼬인 줄기와 약간 크고 작게 어우러진 수관(樹冠)이 매우 조화롭고, 마치 서로 절하고 있는 형상이라 사람들은 두 국사가 사제지간의 정과 예의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죽변 후정리(제158호) 향나무는 수령이 500살이 넘은 것으로 추정하며, 동해가 바라보이는 바다 가에 높고 크고 그리고 아름답게 자란 것이 가지를 두 갈래로 벌리고 서 있어 바다를 향해 무슨 기도라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울릉도에서 이곳까지 파도에 밀려 온 것이 뿌리를 내려 자란 것이라 하며 이 곳 사람들은 이 향나무에 선신(船神)이 있다고 믿고 매년 정월 보름날 이 나무 아래서 뱃길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고사를 지냈으며 그 흔적으로 나무 옆에 서낭당이 지어져 있다.

울진 화성리(제312호),

 

보통 향나무와 사촌 격인 나무로 곱향나무와 뚝향나무가 있는데 안동 와룡읍 주하리 뚝향나무(제314호)는 조선 세종 때 이정이란 사람이 평안도 정주 판관으로 있으면서 약산성을 축조하고 돌아오는 길에 기념으로 가져온 세 그루 중의 하나를 이 곳에 심은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한다.

 

울릉도 서면 남양리(제48호) 향나무 자생지는 바닷가 험준한 산 위에서 바닷바람에 이리저리 꼬인 줄기가 그 관록을 나타내는데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2000살이 넘은 나무도 있다고 한다.

 

태하리(제49호)의 향나무 자생지 자생지는 인근에 군청과 등대가 있어 감시가 잘 되어 비교적 잘 보존되어 한 아름쯤 되는 큰 나무들도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일제 때는 두 아름이 넘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비록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서울 강감찬 장군의 출생지 낙성대, 서초동 사거리, 그리고 여주 신륵사의 무학대사가 스승을 모셨다는 조사당 등에 오래된 향나무가 유명하다.

 

향나무가 제사 때 쓰이는 것은 향나무를 태울 때 나는 향내가  좋아서 이기도 하지만 향나무가 잡귀를 쫓는 벽사(벽邪)의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덤가, 사당 등 경건한 곳에 심어 잡귀가 범접하지 못하도록 하는 의미가 있다.

 

제사에 쓰는 향은 줄기의 심재(心材)인 붉은 부분을 쓰지만 요즈음 시장에서 사는 파란색 향은 향나무 잎을 가루로 만든 후에 다른 첨가물과 함께 반죽하여 국수처럼 뽑은 것이다. 이런 향 제조 방법은 향나무 보호 차원에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향나무 목재는 색깔과 향기가 좋을 뿐만 아니라 조직이 치밀하여 결이 곧고 윤이 나서 쓰임새가 많았다.

고승들의 바리때와 수저까지 향나무로 만들었고,

고관 부호들은 향나무 가구나 조각을 만들어 썼다.

향나무 상자는 벌레가 생기지 않아서 귀중한 옷이나 서책을 향나무 상자에 보관하였으며,

5품 이하 관리들이 가지고 다니는 명패인 홀(笏)을 향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향나무를 홀목(笏木)이라 부르기도 했다.

 

향나무를 씨앗으로 번식하기는 무척 어렵다고 한다. 잘 익은 씨앗이 땅에 떨어져 묻혀도 좀처럼 발아(發芽)하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새가 향나무 씨앗을 먹은 후 배설물에 섞여 나온 씨앗은 쉽게 싹을 틔운다고 한다. 그것은 씨앗이 새의 위장을 지나면서 산성인 소화액에 의하여 딱딱한 껍질이 엷게 되어 발아가 되도록 처리된다는 설명이다. 이 복잡한 과정을 통하여 번식하는 것은 자손을 넓게 퍼트리려는 하나의 생존전략(生存戰略)인 것이다. 이러한 씨앗 번식은 역시 새가 잘 먹는 엄나무도 마찬가지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