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아픈 여름 꽃, 구중궁궐(九重宮闕)의 꽃!
능소화(凌宵花)
沙月 李盛永


늦여름 나팔꽃 모양의 주황빛, 홍황색의 꽃이 금빛 찬란하게 피어 나무를 타고 올라가 너울거리고 있는 꽃이 능소화다. 중국이 원산지인 능소화는 덩굴성 목본 식물이다. 중국에서도 강소성에 많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언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꽃이 동양적인 정서를 지녀서인지 다분히 우리 꽃처럼 느껴지는 꽃이다.

능소화는 옛날 양반집 정원에만 심을 수 있고, 상민의 집에서 이 꽃을 심으면 관가에 잡혀가 곤장을 맞았다 하여 '양반꽃'이라 했다고 한다.
그것은 능소화(凌宵花)의 한자어가 '능가할 능' 또는 '업신여길 능(凌)'자와 '하늘 소(宵)'자이고 보면 선인들은 이 꽃을 곧 '하늘을 능가한다'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남을 업신여기는 꽃으로 보았던 것 같다. 상민의 집에 이 꽃을 심어 자부심을 배워서 양반을 업신여길까 봐 상민의 집에는 못 심게 했는지도 모른다.

능소화는 지역에 따라서 금등화(金燈花)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금빛 찬란한 등불 같다' 하여 생긴 이름 같다.
또 서양에서는 능소화를 '차이니스 트럼펫 클리퍼(Chinese Trumpet Clipper)'라고 부르는데 이 꽃의 모양을 트럼펫 나팔을 연상한 데서 생긴 이름이다.

능소화를 일명 '구중궁궐의 꽃'이라고 불렀다고 하는 데 그것은 이 꽃에 전해져 오는 슬픈 전설 때문에 생겨 난 이름인 듯 하다.
중국에서 전해오는 능소화에 얽힌 슬픈 전설은 다음과 같다.
먼 옛날 중국에 자태가 곱고 아름다운 소화라는 궁녀가 있었다. 소화는 임금의 눈에 띄어 단 하루 밤 임금을 모시고 후궁이 되었으나 어쩐 일인지 임금은 그 이후에는 소화의 처소에는 단 한번도 찾지 않았다.
후궁이 하나 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임금이 소화를 기억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소화는 고운 자태를 가졌지만 여우는 못 되어 꾀를 쓸 줄도 몰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같은 후궁들로부터도 업신여김을 당하여 궁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으로 떠 밀려나 거처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마냥 임금이 자기를 다시 기억하고 찾아 들기만 기다렸다. 혹시나 하여 담장을 사이에 두고 기다렸다.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얼른거리는 그림자에도 안타까운 눈길을 보내는 한 많은 세월을 보낸다. 그러다가 어느 여름날 기다림에 지쳐 불행한 빈궁 소화는 죽고 말았다.

임금에게 총애를 받아 권세를 누린 후궁이라면 초상이라도 거창하게 치루어 주었겠지만 구중궁궐의 초라한 이 여인은 초상도 제대로 못 치루고 그녀의 유언에 따라 대궐 담장 밑에 묻히게 된다. 담장 가에 묻혀 내일이라도 오실지 모르는 임금을 기다리겠다는 뜻이었다.

담장 가에 묻힌 소화의 넋이 꽃이 되어 자라고 핀 꽃이 능소화라 한다. 담장 넘어 더 멀리 보려고 넝쿨로 담을 넘어 길게 자라나고, 더 멀리 임금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려고 꽃 모양을 나팔처럼 넓게 벌리는 꽃이 능소화다.
그래서 꽃이 아름다운 능소화! 그러나 장미에는 가시가 있어 더욱 아름답게 보이 듯 능소화는 독이 있어 더욱 아름답단다. 아마 한이 많은 때문에 생겨난 독이란다.


* 이렇게 능소화 꽃가루에 독이 있기 때문에 꽃을 따서 가지고 놀다가 꽃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실명까지 할 수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덩굴 식물이 덩굴손을 가지고 다른 물체를 휘감아 오르면서 자라는데 능소화는 튼실한 줄기가 꼬이며 자라 오르다가 줄기의 마디에서 생겨나는 흡반이라고 하는 뿌리를 건물의 벽이나 다른 나무에 붙여가며 타고 오른다.
    담쟁이덩굴이 무성하게 가지를 내는데 반해 능소화는 많지 않은 가지를 곧고 단정하게 뻗어낸다.

봄이 되면 능소화 가지의 마디에서 마주보는 두 개의 큰 잎자루를 내고 각 잎자루에는 7 또는 9개의 잎이 달리는데 잎의 가장자리는 톱니 같은 결각이 나 있고 보송보송한 털이 있다. 늦여름까지 만들어지는 잎새들은 그 무성함에 비해 녹색이 진하지 않기 때문에 보기에 질리지 않고 시원스러워 보인다.

여름 나기가 지칠 때쯤 되면 이번에는 시원스럽게 꽃차례들을 뽑아내고 꽃차례에 작은 꽃자루들이 매달린다. 가지 끝에 자란 꽃대에 열 송이 안팎의 큼직한 꽃송이가 매달리면서 꽃자루는 힘에 겨운 듯 축 늘어져 꽃차례가 전체적으로 거꾸로 된 원뿔 모양이 된다.
이 꽃차례의 작은 꽃자루들은 동서로, 남북으로 엇갈려 갈라지면서 깔때기 같은 꽃송이를 매다는데 마치 한껏 힘을 주어 부는 섹스폰 나팔처럼 위로 고개를 쳐들고 핀다.

능소화 꽃은 겉은 연한 주홍 색이지만 안을 들여 다 보면 나팔처럼 벌어진 부분은 진한 주홍빛이고 긴 통으로 이어지면서 다시 연한 주홍빛이 되고 그 가운데 진한 주홍빛 줄무늬가 세로로 나 있고 곳곳에 갈색 반점이 있다.
다섯 갈래로 벌어진 꽃 속에서 한 개의 암술과 네 개의 노란 수술이 들어 나는데 수술의 끝은 꾸부러져 있다. 수술 끝에 매달리는 꽃가루는 갈고리 같은 것이 있어 눈에 들어가면 실명까지 한다고 하니 극히 주의해야 한다.
10월이 되면 능소화의 네모난 열매가 둘로 갈라지면서 씨앗이 들어 난다.

나의 시골집 능소화 꽃에 범나비가 앉아 꿀을 따고 있다.


잘 가꾼 능소화(凌宵花)한 그루
沙月 李盛永(2015. 6. 25)
여름도 중간으로 접어드니 능소화 꽃이 피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내가 여가만 나면 땀 좀 빼러 가는 용인시 삼가동 조일골프연습장 한 귀퉁이에 아주 잘 가꾼 능소화 한그루가 꽃을 활짝 피워 찍었다.
잘 가꾼 능소화 한그루 (2015. 6. 25)


능소화는 교목도 관목도 아닌 덩굴나무인데
죽은 나무에 능소화 덩굴을 잘 배열해서 올려 마치 한 그루 나무처럼 잘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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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꽃이 다 지고 한 송이만 남아 성하(盛夏)의 계절을 아쉬워 한다.
(2015. 7. 17)
원 지주 나무는 거의 다 썩었지만 이를 타고 올라간 능소화 넝쿵들이
서로 힘을 모아 버티고 서 있어 마치 한 그루의 교목(喬木)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