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 푸캇산의 곰, 맹호되어 고보이 들판을 누비다
고보이평야 평정작전
沙月 李盛永(2012. 8. 19)
  푸캇산에서 중대장이 중대원들로부터 ‘곰’이란 별명을 얻어가면서 훈련을 하고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 중대에는 ‘전쟁터의 전투부대’ 답지 않은 임무가 떨어졌다. 작전 이름은 ‘평정작전(平定作戰)’이라 했다. 정확히 출동한 날자나 끝나서 베이스로 돌아온 날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69년 5월 중순경에 베이스를 나가서 7월 중순경에 돌아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빈딘성(BINH DINH)에서 가장 큰 물줄기는 콘강(Sg Con)인데 서쪽 산악지역을 북에서 남으로 관통해 흘러와서 안케패스 동쪽에 이르러 방향을 동으로 바꾸어 19번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푸캇군(PHU CAT)과 안논군(AN NHON), 푸캇군(PHU CAT)과 투이폭군(TUY PHUOC)의 지경(地境)을 흐르면서 저지대로 인하여 여러 개의 물길로 나눠졌다 합치기를 반복하면서 이른바 삼각주(三角洲)를 형성하고, 동지나해(BIEN DONG)로 흘러든다.
  이 콘강(Sg Con) 하류 삼각주 넓은 평야지대는 옛날 월남 중부의 곡창지대라 불릴 만치 땅이 비옥하여 농산물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우리 파월 한국군인들은 이 지역을 ‘고보이평야’라 불렀다.
고보이평야 위치
 
  ‘고보이평야’ 지역은 2년 전까지는 월맹군 3사단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맹호부대(주로 비호 1연대)가 66년 파월하여 정비한 다음 이 지역을 작전지역(TAOR)으로 맡으면서 피아간에 불꽃튀는 쟁탈전이 벌어졌다. 나의 육사 동기생 정주영, 윤태곤도 이 시기 이 지역 작전 때 전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아군측은 전투간 피해를 줄이기 위해 지역주민들을 1번 국도를 연한 안전지대로 소개시키고, 오작교작전백마사단(9사단)까지 지원을 나오는 대규모 작전을 수차 전개하여 월맹군 3사단을 와해시키고, 아군이 완전 장악하였다.
  월맹정규군은 복원(復員)을 위하여 캄보디아국경 근처로 물러가 내가 파월할 즈음에는 흔적을 불 수 없고, 그 앞잡이 역할을 했던 베트콩(VC)들은 교묘한 은신 방법으로 지역에 남아 밤을 지배하였다. 그래서 이곳이 고향인 소개된 주민들이 쉽사리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피난살이를 하고 있었다.

  평정작전이란 바로 고보이평야의 옛 주민들을 고향에 돌려보내, 농사를 짓고 생계를 안정되게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작전이었다. 군사작전이라기 보다는 정치작전에 까까운 성격이었다. 지역을 샅샅이 뒤져 베트콩을 박멸하고, 주민들이 진입하여 몇 년간 폐허가 된 가옥을 복구하고, 농토를 다시 일구게 하는 작전이었다.

  이 평정작전에서 한국군이 할 일은
      ①곳곳, 특히 대나무 뿌리 밑에 굴을 파서 만든 아지트를 찾아내서 베트콩을 소탕하고,
      ②주민들이 가옥을 복구하거나 농토를 일구는 동안 안전하도록 경계를 제공하며,
      ③입주한 주민들이 자위력(自衛力) 가출 수 있도록 편성된 지방예비군(중대급 RF, 소대급 PF)에게 사격술, 총검술, 수류탄 사용법 등 각개전투와 소대 이하 소부대전술 등을 가르치는 것이 평정작전에 출동한 중대의 임무였다.
  한번 출동하면 약 2개월 만에 다른 중대와 교대하게 된다. 이 작전은 우리 연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맹호, 백마, 청룡 등 모든 파월 전투부대가 적정한 지역을 택하여 시행하였다.
중대 임시 베이스로 선정한 폐 사원
고보이 평정작전 중 지역내 수색작전

  이러한 평정작전은 하급부대 지휘관들에게는 비교적 안전하고, 편하기는 한데 ‘전장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전과(戰果)가 없는 작전이기 때문에 별로 호감이 가는 작전이 아니었다. 더구나 중대장급 이상 지휘관은 임기간 누적 전과로서 평가하여 훈장을 주는 제도였기 때문에 더욱 더 그랬다.
  그러나 사단사령부, 주월사, 월남정부에서는 아주 좋아하는 다분히 정치성을 띈 작전이다. 그래서 주월사에서는 참모들로 편성된 평정작전 확인 및 현지지도팀을 구성하여 방문하기도 하였다.

  우리 중대가 평정작전을 나가 있는 동안에는 사단사령부와 작전지휘 통신망이 구성되어 작전에관한 지시와 보고를 하고 행정사항은 대대장의 지시와 보고를 하여야 하나 대대 지휘통신망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연대 작전 상황실에 파견 나와 있는 대대 연락장교를 통해 보급 신청 등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사실은 작전사항도 일일이 연락장교를 통하여 대대장에게 보고하였다.)
  하루에 한 번씩 보급 헬기가 다녀가는데 중대장 이하 장교나 사병이나 이 보급헬기를 무척이나 기다린다. 헬기가 싣고 오는 짐 꾸러미 속에는 눈을 감으나 떠나 아롱거리는 고향의 부모님, 두고 온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과 안부가 들어있는 편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평정작전 나가 있는 동안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 우리 중대에 오는 주월사 현지지도팀이 항공기 사고로 일행이 전부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안논군(AN NHON-월남 사람들은 ‘안녕’으로 발음함. 퀴논은 ‘뀌녕’ ) 어느 마을의 지역예비군(PF)에게 사격술을 교육하는 날 주월사 작전참모의 지도방문이 있을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 평정작전에 투입되면 행정적인 사항은 대대장의 지시를 받고, 보고하지만 작전에 관한 사항은 사단사령부의 지시를 직접 받도록 되어있고, 무선통신망도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11시경에 온다는 주월사 작전참모가 12시를 지나 1시가 되어도 오지 않더니 1시가 지나서 지도방문은 취소되어 오지 않는다고 연락이 왔다. 후에 안 이야기지만 주월사에서 맹호사단 사령부로 가던 항공기(고정익)가 갑작스런 비구름에 휩싸여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하다가 사단사령부 뒷산에 추락하여 주월사 작전참모(대령 진예)를 비롯한 탑승원 전원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더욱 더 어처구니가 것은 작전참모는 며칠 전 준장 진급 발표 명단에 들어 있는 사람이었다. 평정작전 현지지도팀을 처음 편성할 때에는 맹호부대가 아니라 다낭의 청룡부대(해병대)로 가도록 되었는데 이 참에 당시 우리 군에서 막강한 영향력이 있는 것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맹호사단장(윤필용 소장)에게 인사도 드릴 요량으로 건의하여 맹호지역으로 편성된 군수참모(?)와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장교생활의 꽃이라는 ‘장군’ 진급 발표를 받아놓고 줄 한번 잘 서보려고 계획을 바꾼 것이 죽을 데를 찾아 간 것이 되었다.

  이런 일은 내 생에 또 한번 있었다. 이로부터 15년이 지난 1984년 7월 쯤으로 생각된다. 나는 50사단 121연대장(해안연대)을 마치고 2군사에서 차기 작전과장이라면서 우선 계획편성과장을 맡으라고 해서 열심히 일하고 배우면서 1년 마쳤는데, 작전과장 자리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하고 나의 본업인 율곡사업 감사관을 맡기 위해서 국방부 특검단으로 전출된 직후였다.

  육군참모총장이 조치원에 창설된 205특공여단(여단장 장병용 준장, 2군 작전과장에서 진급) 초도방문을 영접하기 위해 2군사령관(김홍한 대장)이 직접 가는데 작전참모가 수행하도록 계획되었다가 당일 아침 작전처 사정 때문에 못 가게 되어 정보참모가 수행하도록 바뀌었다.

  그러나 참모총장이 육본을 출발 할 시각에 전국적으로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헬기가 이륙 할 수 없게 되어 방문이 취소되었다.
  영접하려고 조치원 205특공여단에 1시간 전에 미리 가서 기다리던 2군사령관 일행은 용감하게(?) 그 폭우 속에서도 헬기를 이륙시켜 귀환하다가 세찬 비바람과 짙은 안개 속에서 충북 영동 어느 야산에 부딪쳐 추락하여 양쪽 기관총사수 2명은 부상을 입고 치료하여 완쾌되었으나, 군사령관과 수행 전속부관, 정보참모, 조종사, 부조종사 계 5명이 현장에서 즉사하였다.

  사령관이야 모든 것을 선택한 당사자이고, 전속부관은 바늘 가는데 실 따라가듯 사령관을 따라다니는 직책이니까 운명으로 치부해야 하겠지만, 정보참모와는 관련도 없는 특공여단에 가야 할 곳도 아닌데 작전참모 사정 때문에 대타로 뽑히는 바람에 장군 진급된 후 6개월간 1차보직(35사단 부사단장)을 마치고 2군 정보참모로 온지 몇일 만에 군사령관을 따라 불귀의 객이 되었다.
  야전사령관도 아닌 2군사령관이 폭우를 뚫고 귀환해야 할 긴급상황도 아니고 가까운 유성온천 육군휴양소에 가서 목욕도 좀 하면서 차량을 불렀으면 2시간쯤이면 안전한 차량으로 귀환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고보이 평정작전 이야기 하다가 '삼천포로 빠지듯' 항공기 사고 이야기로 빠져버렸군.
  고보이평정작전은 2개월 후에 다른 대대 어느 중대에게 인계하고 기지로 복귀하였다. 초급 지휘관의 한 사람인 나는 부임 초기인데도 초조하고 마음이 조급하였다. 전 중대장 2대에 걸쳐 꼴찌에 가까운 전투서열의 중대를 빠른 기간 내에 다른 중대 못지 않는 수준으로 끌어 올리려는 욕심인데, 고보이 들판에서 2개월 동안이나 2-3년 전 옛날 베트콩의 아지트나 수색하면서 한 번의 접적도 없이 허송세월(?) 하는 것 같은 느낌에서 오는 조바심이었다.

  그러나 중대는 마냥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수색작전을 훈련으로 생각하고 철두철미한 준비와 작전 원칙을 지키면서 접적상황과 똑같이 작전을 전개하였고, 여가 있을 때마다 베이스 인근의 고무나무를 이용하여 전입 신병들의 담력과 체력을 단련하는 훈련 방법을 고안하여 시행하였다. 이러한 나의 노력은 멀지 않아 그 성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확신을 하면서---
고무나무를 이용한 전입 신병 담력 및 체력단련
왼쪽은 중대장이 직접 줄사다리 타는 법을 시범 보이는 장면이고,
오른쪽은 중대장이 줄사다리 꼭대기에 올라가 내려다보며
병사들의 훈련을 감독하고 있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