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편지 ( 제 21 신 )
옥이 당신에게
  오월도 다 가고 오늘부터 유월이 시작되나 봐. 요 며칠간은 월남의 건기 기후의 전통을 깰는지 밤에는 비가 오고 낮에는 구름이 끼곤 하니까 초목이 생기를 얻는 것 같애. 사람도 지내기가 훨씬 좋군.

  못자리가 파릇 파릇하고, 피갈이를 한다니 본격적인 농사철인 모양이지? 보리가 누릇 누릇 해지고, 보리 논에 깔 풀도 거의 다 베었다니까 얼마 안 있어 보리타작을 포함해서 가장 힘드는 농사일이 곧 닥치는 것 같군. 이런 때 산 위에 올라가면 참 좋은 경치를 볼 수 있을꺼야.

  여보! 힘 들 잖아? 당신은 처음이지? 부모님들이나 농촌 사람들은 모두 힘 들 때지. 그렇지만 평생을 두고 몸에 배었으니 그래도 괜찮겠지만 당신은 퍽 힘들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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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화, 미애는 아빠처럼 새까맣게 돼 가지고 잘 논다니 다행이야. 길이 험하고, 산으로 들로 다니다가 다치지는 않겠나? 하기야 나도 어릴 때는 항상 발가락에 피가 흐르고, 마른 적이 없이 자랐지만---

  아버님은 수술을 하신 후로는 농사 일에 지장이 없나? 너무 무리하시면 좋지 않으실 텐데--- 누에 기르는 철이니까 시화는 오디(뽕나무 열매) 먹고 입이 항상 빨갛겠군. 할머니나 할아버지 한테 어리광 피우지 않나?

  지금 열 한시가 넘었는데 가뜩이나 초저녁 잠이 많은 당신이니까 더구나 농촌의 하루는 피곤하니 지금쯤 시화, 미애 하고 정신 없이 잠들었겠군. 혹시 미애는 할아버지 한테 가 있는지 모르지.

  난 아직 잠이 안 와. 병아리들
(중대원들)(매복)내보내 놨기 때문에 그런지. 어째 잠이 안 오는군. 밤이면 까부는 V.C놈들을 혼내주기 위해 1개 소대쯤 매복을 내보내는 거야. 잘들 하니까 무사히 내일 아침 졸리는 눈으로 돌아오겠지만 잠이 안 오는군.

  여보! 수상스키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아주 고역이야. 보-트 뒤에 줄을 잡고, 높고 낮은 파도를 오르내리며 따라가는데 여간 스릴이 아니야. 나같이 그래도 운동신경이 기민한 축에 드니 쉽게 배울 수 있지만--- 아직도 이제 입문이야. 지금은 300m 서클을 두 바퀴쯤 돌 수 있는 실력 밖에 못 돼. 그래도 그게 어디야? 한국에서 완전히 배우는데 20만원 정도 들여야 된다는데---

  목화나무 씨를 받았다니까 다행이야. 난 보내면서 안 갈 줄 알았는데. 어디 한 번 닭이 파 먹지 않을 곳에 잘 심어 봐. 늦지 않았을까? 한꺼번에 다 심어서 실패하지 말고 반쯤 심어 봐. 성공한다면 시화, 미애 장가가고 시집 갈 때 이불 솜쯤은 걱정 안 해도 될꺼야. 나무가 꽤 크게 자란다고. 여기에 있는 나무들을 보면 높이가 8-10m 정도는 크니까 주먹 두 개 만한 목화가 주렁 주렁 달릴지도 몰라.

  5월분 송금은 110$ 보냈나 봐. 아직은 파월 초년생을 못 면했으니 그렇지 않겠지만 귀국이 가까워 오는 사람을 보니 송금을 못하는 경우가 많더군. 당신, 알아서 예비금을 확보해야 될거야.

  오늘은 이만 쓸래. 깊은 밤인데 참 조용하군. 이따금씩
(월남)민병대와 V,C가 교전하는 총소리가 잘 들리는데 오늘은 아주 조용하군. 또 무슨 음모를 꾸미고 들어 앉았느라고 활동을 안 하는 모양이지. 우리 매복조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고만 잘래. 그럼 안녕.
월남에서 당신의 영 씀

고국 편지 ('69. 6. 16)
여보! 당신에게
  한국의 날씨도 이젠 차츰차츰 더위가 더해가나 봅니다. 오늘따라 비가 오려는지 흐린 날씨에 무덥기만 하지만 당신이 있는 곳과는 비교가 안되겠지요.

  여보! 무서운 작전과 더위와 싸워야 하는 당신의 모습을 그려 봅니다. 땀에 젖어 어떻게 해야 V.C를 잡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잠겨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생각하는 것 같은 모습들, 생사를 앞에 놓고 분주히 이곳 저곳 찾아 다니는 모습들 등 상상으로 그려봅니다.

  여보! 21신을 받은 지가 3, 4일이 된 것 같은데 또 이렇게 늦게 펜을 들었어요. 바뻤다고 변명을 할까요. 낮에는 틈이 없었고, 저녁에는 미애 재운다고 누우면 그냥 자고. 미안--- 그러나 항상 당신 생각은 일을 할 때도 앞서 간답니다.

  당신이 고국의 환경을 그렸듯이 시화는 오디 따 먹기에 바쁘고, 심심하면 앵두나무 밑에 매달리기가 일수고, 요사이 날씨가 더우니까 앞 냇물에서 목욕하느라고 집에 올 때는 옷도 뒤집어 입고, 얼굴은 홍당무 같이 빨개 가지고 들어오면서 “엄마, 밥 줘” 하면서 들어 온답니다. 잘 노니 다행이에요.

  미애는 이웃 집에 말
(마실)도 가고, 엄마, 아빠 소리를 아주 똑똑히 잘 해요. “아빠 어디 있니?” 하면 당신 사진을 가리킨답니다. 돼지막 앞에 감나무 밑에만 가면 할아버지 부른다고 “하부지-” 하고 크게 부르면 할아버지가 “왜야-”하고 대답하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답니다. 막대기 가지고 병아리 꽁지 따라 다니며 제법 잘 놀아요. 이웃 아이들과 싸우는 것 보면 웃음이 나와 죽겠군요. 지지 않아요. 아주 깎쟁이 같이 신에 물이 묻어도 안 신고 다닌답니다.

  그런데 바뻐 저녁도 늦고, 돌아다니다 보면 치마 꼬리 붙잡고 울며 매달리다가 그냥 뿌리치면 못 이기고 마루에 엎드려 똥구멍을 하늘로 쳐들고 잘 때는 일을 해도 가엾은 생각들어 저녁이면 꼭- 안아주고 잔답니다. 아빠가 옆에 있으면 안아 줄 텐데 하고 아쉬워진답니다.

  집엔 거문갈이
(봄갈이를 안 한 논) 모는 다 심었고 이젠 보리를 베어야 한다나 봐요. 아직 보리가 익지 않아 못했는데 이제 내일이라도 보리를 베어야 할라나 봐요. 옥이도 모를 심었답니다. 난생 처음 심은 모라 모 포기만 만지작거리다 말았죠. 그걸 보니 한숨이 나와요. 어떻게 그때까지(귀국 때까지) 기다릴까 하고 말이에요. 그러나 당신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할 수 없이 그 때까지 기다려야 하겠지.

  집엔 모두 안녕들 하세요. 그리고 오늘은 당신 수당이 도착 될 것 같군요. 지난 번 편지에 돈 이야기를 했는데 너무 신경은 쓰지 마세요. 그런 정도라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여보! 미안-. 여보! 보고싶어--- 요사이는 사진도 찍을 시간이 없나 봐요. 시화는 편지만 오면 사진 왔느냐고 묻는데---

  여보! 그럼 또 쓰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쓸께요. 건강에 조심하고, 안녕 하시기를---
고국에서 당신의 옥이가 6.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