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편지 ( 제 56 신 )
미애 엄마에게
  (편지 번호가 중복되었음)
  오늘이 추석인가 봐. 호두 알이 영글고, 감이 붉어 주렁주렁 달린 그 곳을 생각하고, 한가한 추석 낮을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옛 노래의 조용한 멜로디를 귓전에 들으며 읽던 책을 던지고 이렇게 펜을 들고 있어.
  여보! 오늘은 무척 바뻤겠군. 아침부터 조상에게 햇 곡식으로 정성 들여 음식을 장만해서 올리느라고 자손들은 몹시 바쁜 게 추석이니까.오후도 한 참 됐으니 지금쯤 집안을 두루 돌고 피곤한 몸을 쉬고 있을 지 몰라.
  여보! 추석이라니 문득 작년 생각이 나는군. 지금은 마치 숙명처럼 이렇게 멀리 떨어져 아무리 애태워도 만날 수 없다는 기정사실 앞에 막연히 그립다, 보고싶다 하는 꿈을 꾸는 듯한 심경에 있지만 작년에는 그렇지 않았거든---
  (추석을 지내고) 공연히 (시골) 집에 남겨두고 왔다는 후회와 함께 식사마저 걱정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역에 두 번이나 나갔다가 혼자서 발길을 돌릴 때의 절망감--- 그리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던 일--- 덕분에 세 번째 역에 나가 당신을 만나고 반가움을 삼키면서 뾰로통 했던 내 자신을 회상해 보곤 하는군.
  여보! 잘 있겠지? 건강히 말야. 시화도, 미애도 잘 놀고? 무슨 추석 선물이라도 사 줬나? 지금쯤 새옷 입고 뜻도 모르고 즐겁게 놀겠군. 그리고 부모님들도 무사하시고? 황금물결 치는 들판을 건너다 보며 1년의 고생을 잊는 계절이지. 김천 학생들도 들어 왔겠군. 정영이는 못 왔을 꺼야?
  난 잘 있어. 여전히 날씨는 덥지만 그래도 훨씬 서늘해 진 날씨에 월남 생활도 다 한 것 같은 느낌이야. 날자를 따져보면 아직 아득한데---오늘은 휴무일, 중대가 아주 조용하군. 모두가 추석이라는 실감은 못 느끼면서도 지난 일을 회상하며 고향을 그리고, 지금 나처럼 당신과 같은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고들 있지.
  여보! 사진만 가지고는 그리움을 조금도 위로하지 못하는군. 그래도 버릇처럼 되어 당신과 시화, 미애가 어수룩한 시골(이원)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과 올 때 가지고 온 사진들을 책상 앞에 꺼내 놓는군.
  요사이 책이 많이 나와 독서에 아주 열중하고 있는 중이야. 미국 소설 ‘어설픈 흉내’라든가, 지금 읽고 있는 ‘철이 들 무렵’ 등은 모두 십대의 소년 소녀들이 생각하는 사랑이라든지 남녀 교제에 대한 관념을 잘 엿 볼 수 있고, 그 자유스런 생활 환경과 관습 등이 우리들의 관념과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그 중에서도 우리와 한 가지 일치하는 것은 ‘진실’이 승리할 수 있다는 거야.
  일본 소설 ‘에덴 행’은 쌕스를 적나라 하게 다룬 것인데, 남자 주인공은 많은 여성들로부터 찬양을 받고 또 쌕스 관계를 맺지만 역시 ‘사랑은 주는 것’인가 봐. 한 여성을 좋아하면서 그렇게 능란한 여자 다루는 솜씨도 꼼짝 못하는 것을 보니까 말야. 책이란 참 좋은 거야. 앞으로 틈틈이 많이 읽어 양식을 키워야지. 당신은 그럴 수도 없으니---
  올해는 철후가 조금 늦은 모양이던데 추석에 햇 쌀밥을 지을 수 있었나? 지금 라디오에서 ‘나 혼자만이’가 흘러 나오는군. ‘나 혼자 만이 그대를 알고 싶소---’ 여보! 그 옛날 듣던 말 같애 그리고 나도 했고---
  여보! 정말 보고싶어. 이렇게 떨어져 있고 보니 같이 있던 때에는 더 다정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애. 여보! 그래, 응
  자, 그럼 오늘은 이만 줄일래. 여보! 이렇게 떨어져 있는 동안 당신이 내게,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해 줘야 할 그 첫째가 만날 때 건강히 반갑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 줘. 계절이 바뀌는 시기니까 당신과 아이들의 건간이 걱정돼서 그래. 여보! 안녕.
월남에서 당신을 그리는 영으로부터
고국 편지 ('69. 10. 12)
떠 오르는 당신의 모습을 그리며
  편지를 연 이틀 2장이나 받았는데 이제 펜을 들어 미안, 난 반가웠지난---
  식욕도 좋고, 건강하다니 난 더 무엇을 바라겠어요. 앞으로도 항상 그러하기를 빌어야지.
  여보! 이제 당신이 이 곳을 떠난 지도 6개월 째 접어들었군. 그러나 남은 시간을 어떻게 기다리지? 늦게는 앞으로 일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나? 어쨌던 무사하기만--- 참고 기다려야지.
  지금 미애는 옆에서 젖을 한 번 빨아보고 당신의 사진을 쳐들고 “아빠 아빠” 하며 중얼거리다 딩굴곤 해요. 시화는 아이들 떠드는 소리듣고 밖으로 나갔고요. 새 때(새참)는 수제비를 끓이고 남은 밀가루 반죽을 소다 등의 넣고 뻐터를 발라 구워 주었더니 맛이 있는지 또 해 달라고 졸으더니 나가고 없군요. 심심하면 불도 없는 고래(부엌 아궁이)에 와서 감자 구워라고 땡깡도 부리고 또 구울려고 몇 개 넣으면 채 껍질도 익기 전에 꺼낼려고 하고, 아주 말썽꾸러기, 그러나 잘 노니 다행--- 어떤 때는 혼자 물그럼이 바라보다 ‘내 새끼가 저렇게 컸는가’ 하고 생각하면 귀여움에 안아 주고, 업어주고도 하지요.
  여보! 시화, 미애가 안아보고, 같이 놀고, 보고 싶지요. 우리들의 새끼인데--- 둘이 마루에서 장난치며 노는 것을 보면 (불현듯) 당신이 보고싶어요. 노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같이 웃고, 보았더라면 하고---
  (새참 가지고)논에 갔다 왔더니 시화가 미애를 마루에서 내려놓아 신을 신겨 가지고 골목 길을 나오며 “엄마” 하고 부르는군요. 그래도 동생이라고 데리고 나오는데 귀여워서 들을 양 손에 붙잡고 집에 와 이렇게 펜을 들며 당신을 그리워 한답니다.
  부모님도 아가씨도 다 무고들 해요. 그런데 큰 도련님은 취직은 되었는데 돈 안 먹인다고 발령을 쉬 안 낸다나요. 윗 놈들이 손을 벌리고 좀 먹으면 발령을 내겠다는 식이라나요. 어떻게 되겠지. 10일이면 발령이 날 거라고 하던데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군요.
  그런데 (큰 도련님이) 부모님 한테 너무 의탁을 하는 것 같아요. 집엔 무슨 돈이 있다고--- 당신이 큰 도련님 한테 편지 좀 해 줘요. 네 살 도리는 네가 좀 하라고, 부모님이 무슨 돈이 있느냐고, (부모님) 앞에 놓인 일도 많은데---
  여보! 그럼 또 쓰기로 하고 --- 옥이도 열심히 쓸게요. 당신처럼.
고국에서 당신의 옥이가
펜을 놓을려니 미애가 옆에서 잠이 들었군. 10.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