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편지 ( 제 86 신 )
(85신은 연번이 누락된 듯)
옥이 당신에게
  내일이 X-mas Eve고 모래가 X-mas인가 봐. 유일한 소식과 뮤직 감상 수단인 라디오도 멀리하는 버릇이 생기고부터는 크리스마스 캐롤이나 X-mas의 냄새를 풍기는 음악이라곤 들을 수 없고---
  밖엘 안 나가고 기껏해야 베이스와 작전지역을 왕래하는 전쟁터의 군인 눈에는 X-mas를 위해서 요란스럽게 장식한 것도 볼 수 없군.
  더군다나 X-mas 경에는 눈이 내리거나 아니면 쌀쌀한 날씨 속에서 맞던 것이 (여기는) 그것마저도 없으니 전혀 실감이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겐 전연 관심이 없는 일.
  여보! 당신도 떠들썩한 X-mas에 대해서 별로 큰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X-mas 캐롤과 날씨 등 조금은 그 분위기에 젖겠지?
  여보! 서울서 내려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 동안 어떻게 지내나? 날씨가 쌀쌀하니 방에서 아이들고 전쟁?
  서울서 며칠 있는 동안에 아이들 살결이 고와졌다고? 봄, 여름, 가을 볕과 농사일에 시달렸기 때문에 거칠었을 거야. 이제 겨울이니 시골서도 고와질 거야. 잘 뒤를 돌봐주면 말야. 그리고 당신도---
  나도 우기 철이 되면서 상당히 희어진 편이야. 늘 구름이 끼거나 비가 내리니까. 그리고 밤이나 높은 산은 낮에도 추워서 내의와 쟘바를 입어야 되니까---
  여보! 이제 꼭 중대장 시작한지 8개월이 됐군. 그 동안 큰 실수 없이 중대를 끌어 온 건 내 자신의 능력이라 기 보다는 내 뒤를 지켜보고 있는 당신과 아이들의 새까만 눈동자들 덕분이 아니겠나. 지치려는 내게 용기와 힘을 넣어주고 했기 때문이 아니겠나.
  여보! 내일을 위해서 어떠한 고통도 꾹 참고 오늘을 넘겨야지? 그렇지? 여보! 돈 몇 푼이 사람됨을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지. 특히 월남에선 더 해. 귀중하게 경험한 전쟁터에서의 생리를 소화하지 못하고 한 줌 밖에 안 되는 귀중품에 눈이 어두워진 부류가 많으니까.
  여보! 적어도 내겐 당신이 나에게 얼마나 귀중하고, 내 핏줄이 얼마나 진하다는 것을 뼈 속까지 느꼈으니까. 여보! 혹시 지난 날 당신을 괴롭힌 일이나 업었는지 두렵군. 앞으로 절대로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지.
  여보! (옛날에) 극장에 가서 시화가 밖에 나가자고 졸라서 화를 내고 한 차리 때린 적이 있는데 잊혀지지 않고 (맘에) 걸리는군. 영화가 뭐길래---
  여보! 그럭저럭 한 해가 며칠 안 나았군. 당신 말처럼 세월이 흐르고 날자가 가는 것이 지금은 조금도 미련은 없지만 금년 한 해는 당신과 나에게 가장 괴로운 한 해가 아닐까. 나야 또 전쟁터에서 이리 저리 뛰었으니까 정신없이 넘어갔다 하더라도 당신은 정말 몇 년은 더 늙어 지지나 않았나 걱정이야.
  여보! 우린 젊었으니까 괜찮아. 건강만 가지고 있다면 그걸 밑천으로 더 아름다워 질 수도 있으니까. 서로 사랑하면서 말야.
  휴가자 편에 보낸 녹용이 어떻게 잘 받아 복용 해 봤는지 궁금하다. 받거든 빨리 알려 줘. 그리고 정영이한테 맡겼다는 TV는 쉽게 찾았는지 모르겠군.
  라디오와 과자를 잘 받았다니 다행이야. 그 녀석도 귀대하고 나서 무척 걱정되었나 봐. 한 번 되돌아 왔기 때문에 말야.
  여보! 이만 그치고 자야겠다. 그럼 안녕.
월남에서 당신을 그리면서 영 씀
고국 편지 ('70. 1. 9)
여보! 당신에게
  몹시 쌀쌀한 날씨가 풀리는 것 같더니 좀 쌀쌀한 날씨인 것 같군요. 여보 그간 안녕? 80신을 2일 전에 받았는데 이렇게 늦게 펜을 들어 미안---
  부모님께서도 안녕하시고, 고모들, 삼촌들도 다 별 일 없이 지냅니다. 석희 아가씨는 졸업을 일주일 앞두고 섭섭하게 학생시절을 떠나나 본데 어쩐지 마음이 안 되었나 보지. 그럴 테지.
  시화는 요사이 삼촌 따라 다니며 썰매 타러 다닌다고 야단이군요. 어젠 양쪽 발을 (물에) 빠져 가지고 울며 들어왔군요.벌써 시화가 썰매를 탄다고 하니요. 잘 타는지는 가 보지 않아 잘 모르지만---
  미애는 지금 고모하고 옛날이야기 한다고 무어라고 중얼거린답니다. 새벽 5시만 되면 두 놈이 일어나 잠은 다 자고, 노래하자고 하고, 옛날이야기 해 달라고 조르고--- 당신이 올 때는 잠버릇을 고쳐야 할 텐데 걱정이군. 늦잠 자는 당신을 괴롭힐까 봐.
  TV는 69년 12월 31일 찾았답니다. 약수동 영옥이(김종헌대위 생질)네 집에 갔다 놓았다고 합니다. 빨리 세월이 흘러 당신이 빨리 와야지 TV도 보고, 맛있게 토스트도 구워 먹고--- 정말 아이들이 짜증을 내고, 어설퍼 보일 땐 화도 안 나지는 않았지. 서울에서 TV를 본다고 앉아 있으니 오래까지 자지 않더군. 심심하니까. 어두우면 잠을 잘려고 하고 , 사람한테 엉겨 붙어 보채고 하였지. 그렇지만 당신이 오면 그렇지 않을 거야.
  석희 아가씨는 졸업이 1月 16일인데 졸업하고 곧 서울 큰 도련님 밥도 해 주고 또 취직 틈도 보겠다고 하면서 서울로 갈려고 합니다. (큰 도련님이) 오라고 하니까.
  보고싶고 빨리 시간이 흘러가라고 (하는 것) 밖에 쓸 말이 없군. 오늘 아침 새벽에도 잠은 안 오고 가만히 당신을 맞을 생각 등으로 가슴 부푼 마음으로 (한참 동안) 누워 있었지. 여보! (당신과 만나는) 그 장면을 생각하니 영화를 연상하는 것 같군.
  여보! 그럼 또 쓰기로 하고 이만 그칠께요. 여보---! 보고싶지만 꾹 참고 기다릴께요.
당신의 옥이가 70. 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