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편지 ( 제 89 신 )
여보!
  가장 지루하고 긴 한 해도 별수없이 지나 가는군. 몇 시간 후면 새해가 시작되니 말야. 여보! 금년 한 해를 돌이켜 보며 아무 미련도 남기지 않고 훌쩍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애. 다만 너무나 긴 한 해 동안 당신을 너무 고생시키고 괴롭힌 것만 같아서--- 앞으로 어떻게 이를 보상해야 할 지 책임을 느끼는군.
  여보! 정말 고생 많았어. 서투른 농촌 생활에 답답하기만 한 산골에서 아이들 데리고 어떻게 지내 왔는지 어렴풋이 상상이나 할 뿐이야.
  여보! 새해에는 우리에게 지금까지 그 어느 해보다도 더 황홀한 해가 될 수 있을 거야. 당신과 알게 된 후로 조금씩 조금씩 이해가 커져 갔고, 정이 들었기에 결혼, 약혼, 이런 절차 상의 행사보다 못 견디게 보고파 하던 두 사람이 만나 쌓이고 쌓인 한 해의 회포를 새해에는 풀 수가 있으니까. 그것도 멀지 않은 날에 말야.
  그런데 뒤늦게 중대장 하면서 뒤늦게 일거리가 많아졌어. 베이스를 잘 만들자니 일거리가 자연 가득 쌓이는군 그래. 그렇지만 겁 낼 것은 없어. 그래도 중대장이라고 내 얼굴을 쳐다보며 믿고 따르는 중대원이 백 수 십 명이나 되니 아무리 힘든 일일지라도 뭐 안 될게 있겠나. 중대장 임무가 끝나는 그날까지 열심히 일하고, 긴장을 풀지 말고 조심해서 다음 후임자에게는 훌륭한 베이스를 물려줘야지---
  여보! 요사이 굉장히 춥지? 눈도 자주 내리고--- 김장이 한창 맛들 때 됐군. 그리고 된장찌개도---
  추위가 가고 나무 잎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이른 꽃들이 필 무렵 그러니까 4월 중순께가 되겠군. 우리에게는 굉장히 기다려 지는 때가 아닌가.
  시화, 미애 잘 논다니 다행이야. 당신을 위해서도 날 위해서도--- 시화는 많이 컸는 모양이지? 엄마 떨어져 고모한테 가서 며칠씩 있다 오곤 하니 말야. 미애가 말을 열심히 배울려고 한다고? 기집애. 참 예쁘게 놀 때가 됐는데---
  지난 번 77신에 함께 보낸 사진(포상자 일동 사진)은 실은 훨씬 전에 찍었던 거야. 지남 8월 격전(전진 제21호작전) 을 치루느라고잠도 제대로 못자고 새까맣게 탔을 때.(그래서 얼굴이 쪽 빠져 보이는거야)
  오늘 아침 사단 내 전 중대장들이 (한자리에) 모일 기회가 있었지. 시범 견학차--- 동창들 중에서 우리 동기생이 최고 고참인데 그것도 겨우 보병에 내가 포함돼서 2명, 포병이 1명, 광주에서 어리광을 피우던 22기생이 무려 4명. 참 (중대장을) 너무 늦게 하는 것 같애. 모두 (내) 얼굴이 좋아졌다 고들 하는데 농담인지 몰라도--- 그래도 난 얼마 안 남았으니 (황원탁 대위에 비하면) 다행이야.
  마침 시범 장소가 김광현 중령이 지휘하는 대대의 (예하) 중대였길래 (김광현 중령을) 만나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불의의 화재 사고로 화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했다는군. 그래서 못 만나 봤지.
  여보! 오늘은 좀 일찍 잘래. 그래야 내일 아침은 개운한 맘으로 일찍 일어나지.
  여보! 새해에 당신 복 많이 받길 바라고 그리고 시화, 미애에게도---
  그럼 이만. 안녕
월남에서 한 해를 보내면서 당신이 보고파 영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