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편지 ( 제 92 신 )
옥이 당신에게
  여보! 올해가 시작된지도 벌써 열흘. 바쁘니까 시간이 잘 가는 것 같애. 하루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언제 지나가는지 몰라. 하루 일을 끝내고 이렇게 내 방이라고 찾아 들 때만 시간이 너무 느린 것 같고, 당신 편지가 오늘도 안 왔구나 하는 허전한 생각에 잠기게 되는군.
  여보! 뭐가 그렇게 바쁜 일이 많으냐고? 그럴 수 밖에, 집 짓는 일처럼 바쁜 게 없으니까. 불도쟈 뒤를 따라다니면서 조금이라도 더 튼튼하고 멋있게 할려고 운전수를 달래고, 얼르고, 큰 바위 덩어리를 없애자면 폭파작업도 해야지, 그 중에도 취사장과 식당 그리고 휴게실 등은 이미 준공이 내일이나 모레쯤, 그러니 마지막 손질 하는데 내 맘에 안 들면 되나. 그러자니 자연 위로 갔다, 아래로 갔다 할 수 밖에.
  여보! 그래도 걱정 말어. 일을 하니까 식욕도 더 좋고, 건강에는 조금도 이상이 없으니까--- 흙을 뒤집어 쓰고, 수염을 제 때에 깍지 못 해 모양은 안 나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고 하니 건강에 좋은 모양이야.
  올해는 추위가 더 일찍 왔다 고들 하던데--- 몹시 춥지? 어떻게 지내나? 아이들 데리고--- 시화, 미애는 추우니까 밖에 못 나오고 방안에서 몹시 소란을 피우겠구나. 한 겨울 건강하게 지내야 항 텐데. 당신도 마찬가지.
  아버님 편지를 못 받았는데 어머님 병환의 세부 내용이 뭐야? 치료 경과가 좀 좋고 하다니 다행이지만--- 일 철에 너무 무리해서 일을 하시니까 겨울철에 편찮으신가 봐. 빨리 우리가 기반을 잡아서 일도 건강에 알맞도록 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할 텐데.
  여보! 무척 지루하지? 사실 나도 그래. 그렇지만 내가 후임자에게 중대를 물려 주는 그 시각까지 어느 중대에도 못 지 않는 부대를 물려 줄 수 있도록 최후까지 최선을 다 할 것이고, 당신과 시화, 미애를 품에 꼭--- 껴 안을 때까지는 전장에 선 군인으로서 성실하고 냉정한 판단 속에 행돌 할 거야.
  서양 명언에 ‘장교는 따스한 가슴과 찬 머리를 가져야 한다’고 했어. 부하를 위해서는 가슴 속 깊이서 울어 나는 온정을 주고, 모든 판단은 냉정한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하라는 뜻인가 봐.
  여보! 지난 크리스마스에는 난 당신과 시화, 미애에게 그리고 석희한테 카-드 한 장씩 밖에 버낸 것이 없는데 (내게는) 카드가 많이 오는군. 중대원 부형으로부터, 또 알지 못하는 관서장, 그 중에서 전 대대장님(육사 11기 선배 안교덕 중령)으로부터 이쁜 성모상이 금색으로 박힌 이색적인 카드와 중대의 무운을 비는 짤막한 몇 줄의 글이 적혀 왔군.
  (전 대대장님은 내가 보기에) 참 훌륭한 군인이었지. 특히 작전면에서 배운 바가 많아. 왜 이런 카드 얘기를 쓰나 하면 몇 개월 후면 나도 이와 같은 글을 적어 보낼 것만 같애. 그 분의 담담한 심정을 상상해 보는 거야.
  전장에서 맺어지는 상관과 부하, 전우, 살과 피를 서로 아끼던 사이가 아니던가. 때로는 불평도 하고, 다투기도 하지만 전장에서 서로 아끼며 진정으로 걱정 해 주는 인정 속에 서로가 고달픔을 잊고 지내는 게 아닐까.
  지난 창군기념작전(10월1일 시작된 맹호사단급 작전) 때 (우리 중대가) 가장 위험한 곳에 제일 먼저 헬리콥터로 내리게 되는 긴장된 속에서 대대장님은 일부러 중대를 찾아 와 아무 말 한마디 없이 그냥 악수를 청하면서 “잘 해” 하는 한 마디 뿐. 그러나 그 분의 얼굴에는 진정 걱정 해 주는 빛을 읽을 수 있었지. 부하인 나는 (대대장님을) 조금이라도 안심시키고자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는 얼굴을 했었지.
  여보! 당신과 우리 시화, 미애만 아니면 아니 지금 내 곁에 와 있다면 이들(중대원들)과 함께 계속 있고싶다. 전쟁이 끝나고 그들을 데리고 돌아 가 그들의 부모 형제들에게 돌려 보내며 그들의 공로를 얘기 해 주고싶다.
  이제 꼭 석 달만 있으면 나의 임무도 끝나겠군. 가벼운 마음으로 당신과 시화, 미애에게 돌아 갈 수 있게 끝까지 열심히 그리고 조심할게.
  여보! 어느 외국 책에서 “사랑은 흘러가는 것” 하면서 허무하게 지껄인 것이 있더군. 모르지 사랑은 흘러가고, 사람과 인정은 변하는 것인지도--- 그러나 여보! 당신이 말 한 것처럼 이 세상 끝까지 , 이 세월이 다 할 때까지 서로 꼭 잡고 살아가면 (외국 책에서 본) 위의 문구들은 헛된 소리일 거야.
  시화가 미애 손을 잡고 다니는 모습이 눈에 선- 하다. 정말 피는 진한가 봐.
  세상에 숱한 아이들이 모두 우리 시화, 미애만 못하고, 세상에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있지만 내게는 전부가 당신만 못 해 뵈니 바로 그런 것들을 불가에서는 ‘인연’이라고 했는가 봐.
  여보! 난 당신이 잘 알다싶이 눈치가 없고,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편에 드나 봐. 이제부터라도 노력해서 고치도록 할게.
  아-, 피곤한가 보다. 이만 줄일게. 여보! 나도 당신을 한없이 사랑해. 그럼 안녕. .
월남에서 사랑하는 옥이 당신에게 영 씀
시화, 미애에게
  바깥 날씨가 매우 춥지? 눈도 내리고---
  이제 추운 날씨가 풀리고 봄이 와 꽃이 피면 아빠가 좋은 장난감들을 많이 사 가지고 시화, 미애에게 줄려고 갈게. 엄마 말 잘 듣고 추운 때 밖에 나가지 말고 방에서 엄마에게 공부 배워야 한다. 그리고 미애는 시화 동생이니까 싸우지 말고 잘 데리고 놀아야 한다.
  아빠는 시화하고, 미애가 보구싶어 잠이 잘 안 온단다. 빨리 갈게. 노래도 많이 배워 뒀다가 아빠하고 같이 부르자. 응. 참 착하지.
아빠로부터
고국 편지 ('70. 1. 26)
옥이 당신에게
  겨울 날씨 치곤 따스한 날씨 입니다. 따뜻한 햇볕이 온 마루에 들어 미애가 놀기엔 아주 좋습니다.
  올 겨울은 눈이 적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추위도 다 갔으니 이제 봄도 멀지 않았다고 하는군. 빨리 추위가 가야지.
  여보! 그간도 안녕? 우리들은 잘 있어요. 시화는 밥만 먹으면 얼음판으로, 들로 나다니며 놀고, 미애는 내 옆에서 심심하면 업어달라고 하고, 떼도 잘 쓰지만 그런대로 재롱을 부리며 잘 놀아요. 새로운 말을 할 땐 신기하고 예뻐. 온 집안 식구들이 한바탕 웃음으로 지내요.
  (나는) 튼튼한 시화를 보고 대견스러워 혼자 웃음 짓고, 여보! 그리고 당신의 올 날을 상상하며 즐거워 좋아하고---
  무영이 삼촌도 방학이 거의 끝나 내일이면 김천으로 나간다고요. 어머님 눈도 이젠 다 나아가고, 석희 아가씨는 큰 도련님에 설에 내려 와 데려 가겠다고요. 온 집안 식구들이 당신 올 날만 손꼽아 기다립니다.
  시화는 삼촌하고 싸울 땐 “우리 아빠가 과자, 장난감 많이 사 오면 넌 안 줘” 하며 싸우곤 하는군.
  (시화, 미애)저희한테 당신이 쓴 편지(92신 말미)를 읽었더니 (시화는) 입을 딱 벌리고 좋아 죽겠다고 하는 군. 무엇이든지 있으면 아빠 오면 먹자고 하는군.
  1월도 6일이면 다 가는군. 빨리 가야지. 그러면 2월, 3월이 지나면 당신을 만날 수 있겠군. 시화 한테는 달력 3장만 넘기면 (아빠가) 온다고 했더니 가끔 가다 “아빠, 달력 3장만 넘기면 와?” 하고 묻곤 합니다.
  여보! 보고싶다는 말을 빼 놓을 수가 없어. 지금 미애가 옆에서 양쪽 볼은 붉으스럼 해 가지고 안자 있는 품이 참 예쁘군요. 옆에 당신이 있다면 꼭 안아 줄 거에요. 보고싶지요?
  연기를 안 했으면 이젠 곧 오실 텐데. 이런 말 하지 말아야 하는데. 당신이 속상할 텐데.
  여보! 어쩼던 이제 당신 올 날이 가까워 오는 것 같으니 좋아. 정말 일년의 못다한 정 나누며 재미있게 살자고요. 여보---! 응?
  그럼 또 쓰기로 하고 이만 줄여요. 안녕---
당신을 사랑하는 당신의 옥이가 1.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