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월남이야기(서언)

맹호 1연대 2대대 6중대(나의 중대) 베이스에서
  내가 월남을 가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중대장 경력 때문이었다. 65년 중위로서 대대작전장교를 마치고 곧 소총중대장으로 나가려고 하는 시기에, 본의 아니게 원주 하사관학교 교관요원, 1년 후에 또 육군보병학교 훈육관으로 차출되어 육사22기생 기초군사반(OBC) 구대장, 후보생 중대장, 교육통제장교(보직은 전술학교관)으로 전전하다 보니, 전방 중대장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었다.
  당시는 전방 중대장을 고참 중위나 대위 초기에 끝내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생각 끝에 군인으로서 중요한 전투경험도 얻고, 중대장 경력도 이수하기 위해서 월남을 가기로 맘먹고, 당시 장교 고등군사반(OAC)의 제도변경 과도기 과정인 특별보수반(OSRC)에 들어가 12주의 단축된 과정을 마치고, 제7파월보충교육대에 입소하여 2주 정도의 훈련을 끝내고, 월남으로 떠났다.

  월남으로 가는 수송수단은 공군 C-54 항공편과 민간수송선 배편 두 가지가 있었는데, 나는 배편으로 분류되었다가 뒤늦게 항공편으로 바뀌었다고 연락이 와서 7보단에서 짐을 꾸려 부랴부랴 서울로 나왔다.
  알고 보니 파월장병 위문공연단을 수송할 계획이었으나, 베트콩의 구정공세 때문에 취소되어 여유 좌석이 생겼다는 것이다.
  마침 아이들 데리고 시골로 간 아내는 내가 떠나는 것을 보겠다고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에 와 있었기에 연락이 되어 만날 수 있었다.
  당일이 출국일이기 때문에 얼굴만 보고 헤어져야 할 판이었는데, 폭설로 김포비행장에 항공기가 이륙하지 못하여 출국이 하루가 연기되어 퇴계로 어느 호텔에서 가족이 함께 하루 밤을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우리 네 가족의 사진도 찍었다.
  이 사진은 월남에 도착한 후에 아내의 편지에 동봉되어 귀국할 때까지 품에 넣고 몇 번(?)을 들여 다 보았는지 다 헤지고 퇴색되어 버렸다.

  필리핀 크라크비행장에서 1박을 하고, 사이공에 도착하여 하루를 지내고, 미군 C-130편으로 이미 선발 때부터 분류되어 있던 맹호부대로 갔다.
  맹호부대 즉 수도사단 사령부는 퀴논 서쪽 근교에 있었다.
  사단사령부에 와 보니 중대장, 그것도 소총중대장이 아주 인기 보직이었다. 서로 하려고 줄 서 있다는 것이다. 나 역시 별 수 없이 기다려야 했다.
  1연대 2대대 작전장교 하면서 약 6개월 기다리면 6중대장 자리가 난다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마침 동기생 반준석대위가 그 대대작전장교를 하고 있는데 귀국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 그와 인계인수 하였다.
  이 때가 1969년 2월 7일이었다.

  그러나, 중대장으로 나갈 기회는 의외로 빨리 왔다. 두 달 남짓 지난 1969년 4월 19일에 원래 생각했던 2대대 6중대장으로 나가게 되었다.
  전임 중대장이 사이공에 전투관광 다녀오다가 재구대대(1연대 3대대)와 우리 대대(1연대 2대대)의 경계 지점인 '파랑새고개' (한국 군인들이 붙인 이름)에서 베트콩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월남에 온 제1의 목적이 중대장 경력 이수인데 하루라도 빨리 중대장을 나가게 된 것은 다행스런 일일지 모르지만 중대장이 베트콩에게 피살됨에 따라 중대의 사기는 아주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내가 중대장을 시작하면서 가장 급선무는 어떻게 하던지 중대의 사기를 높여 정상적인 전투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전투부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흔히 사람들은 군대의 '사기'라고 하면 그 처방을 '복지'로 생각하지만, 그때 나는 사기를 높이는 제1의 첩경은 '강한 훈련'이라고 생각하였었다.
  그래서 취임초 나는 훈련장을 해발 996m의 푸캇산(Nui Ba: 풋캇군 복판에 있다하여 한국 군인들이 붙인 이름)으로 잡았다. 약 3주간의 그야말로 곰 같이 미련할 정도로 강한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래서 병사들 사이에 나는 '곰'으로 통했다.

  이 '곰 같은 훈련'의 결산은 내가 월남을 떠나 귀국 길에 오른 1970년 4월 13일 까지 만 1년 동안에 전사 3명, 경상 3명으로 당시 150명의 소총중대의 1년 피해 치고는 최소화 하였다고 평가될 수 있었다.
  또 부임 당시 중대원 중에는 훈장을 탄 사람이라고는 이중사 한 사람 뿐, 그것도 다른 부대에서 하사 때 훈장을 타고 중사로 승진하여 소대선임하사관으로 전입한 하사관이었다.
  내가 중대장으로 부임한 이후 임기 1년 동안에 모두 15명이 화랑훈장을 비롯하여 각종 무공훈장을 수상하는 사기가 높은 중대가 되어 육사 1년 후배인 이준대위에게 내 나름대로는 우수한 전투부대를 넘겨 주었다고 생각하고 귀국 길에 올랐었다.

  나의 월남이야기는 두 가지다.
  하나는 고국 시골집에 떼어놓고 온 아내와 시화, 미애 두 아들 딸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틈만 있으면 펜을 들고 쓴 월남편지와 낯선 심심산골 시집에서 농사 일손을 거들랴, 두 아이 다독거릴랴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고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또박또박 답장을 써 준 아내의 고국편지를 엮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글을 누비면서 '적과 우리'가 생(生)과 사(死)를 걸어 놓고 쫓고 쫓기는 전장이야기를 회생한 것이다.
  이 외에 돈을 벌어 횡재한 이야기나, 관광을 하며 즐긴 이야기 등은 나와는 인연이 없는 먼 나라 이야기에 불과하다.

  월남편지는 당시 보안이라면서 날짜를 일체 기록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쓴 날짜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편지를 쓴 순서대로 일련번호를 매겼기 때문에 순서와 편지 내용으로 보아서 대략은 짐작할 수 있다.
  월남편지는 제1신에서 제106신까지 나갔다. 간혹 전번에 쓴 편지의 일련번호를 잊어버려서 기억을 더듬어 붙이다 보니 중복된 것도 있고, 누락된 것도 있다. 월남편지를 받고 답장으로 쓰거나,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보고싶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바쁜 농사일 에 짬을 내서 쓴 것도 있고, 주로 한 밤중에 쓴 아내의 편지가 94통이니 한국에서 월남으로 바다건너 오간 월남편지와 고국편지가 무려 200통이다.
  아내는 이 편지들을 한 장도 버리지 않고 보관하였고, 그 후로도 군대생활 하는 동안 십여 차례 이사를 하면서도 이 편지들이 없어지지 않고 이삿짐 속에 꽁처져 있었다.

  이 월남편지 때문에 아내는 '향기품은 군사우편'란 노래를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34년이 지난 지금도 노래방 기계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눈물이 글썽글썽한 것을 쉽게 볼 수가 있다.
  이 노래는 6.25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나와서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높았던 노래다.
  아내는 내게 시집 온 후 5년 동안 그야말로 단봇짐 싸 들고 화천 간동면 용호리에서 신접 살림을 시작하여 원주 일산동, 광주 마륵리, 풍락동, 계림동으로 이사 다니다가, 그 남편은 이 지구상 어딘지도 모르는 월남이라는 곳으로 떠나고, 두 아이 데리고 낯선 첩첩 산중의 시댁, 결혼한지 5년이 되었지만 함께 몸을 부딪치며 산 적이 없는 시부모, 시동생 둘, 시누이 둘(큰 시누이는 출가), 그 속에 서툰 농사일은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고, 힘드니 월남편지가 얼마나 위안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이 노래가 마치 당시 아내의 처지와 심경을 노래한 것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편지에 좀더 따스한 위로의 구절을 쓰지 못했던 것도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 탓으로 돌리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향기품은 군사우편
(1) 행주치마 씻은 손에 받은 님 소식은/ 능선의 향기 품고 그대의 향기 품어/ 군사우편 적혀있는 전선 편지를/
전해주는 배달부가 싸리문도 못 가서/ 복받치는 기쁨에 나는 울었소/

(2) 돌아가는 방앗간에 받은 님 소식은/ 충성의 향기 품고 그대의 향기 품어/ 군사우편 적혀있는 전선 편지에/
옛추억도 돌아왔소 얼룩진 한자 두자/ 돌아가는 수레도 같이 울었소/

(3) 밤이 늦은 공장에서 받은 님 소식은/ 고지의 향기 품고 그대의 향기 품어/ 군사우편 적혀있는 전선 편지에/
늦은 가을 창 너머로 보이는 저달 속에/ 그대 얼굴 비치어 빵긋 웃었소/


  다음은 나의 월남전 전투이야기다. 소총중대장으로서 월남전의 전체적이거나 전략적인 상항은 잘 몰랐다. 또 알 필요도 없었다. 오직 적군(당시 베트콩과 월맹 정규군)과 아군, 죽음과 죽임, 피해와 전과, 공존할 수 없는 이 두 가지 전장생리 속에서 적을 죽이고 피해 없이 전과를 올리면 그저 좋아하고, 반대로 아군이 죽고 피해가 많으면 슬퍼하고, 속상해 했던 이야기들이다.
  근래에 와서는 현충일에도 동작동 국립묘지에 들리지 못했는데, 그 곳에 묻혀 있는 나의 중대원으로서 전사한 세 사람의 옛 부하, 일병 김후기, 상병 유재군, 일병 박문수 이야기도 옛 기억을 더듬어 '월남전 전투이야기'에 써 나갈 생각이다.
  지금으로부터 삼십사오년 전 이야기라 지명이나 날짜나 숫치는 거의 다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옛날이야기 듣는 것으로 생각하면 좋겠다.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편지나 이야기는 창작하거나 꾸민 것은 없다. 다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 )안에 해설이나 단어를 삽입하였다.

월남 전장 유머 한가지 - 파월 군인들의 빤스 갈아입기
  월남은 더워서 땀도 많이 나고 비가 많이 와서 자주 빤스를 갈아입지 않으면 몸이 개운치가 않았다. 그런데, 우기에 들어 매일같이 수색이다 매복이다 하며 우중 작전이 계속되는데, 피복 보급은 여의치 않아서 병사들에게는 갈아 입을 여분의 팬티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주번사관 맹구소대장이 점호를 취하고 나서 중대원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에-, 오늘은 좋은 소식이 하나 있다. 지금부터 빤스를 갈아 입는다."

  물론 맹구소대장의 이 말에 병사들은 좋아서 "우-아!"하고 소리치며 손뼉까지 쳤다.
  그러나, 맹구소대장은 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나쁜 소식이 하나 있다. 그것은- " 한참 뜸을 들이던 맹구소대장은 호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하나 꺼내더니 읽기 시작한다.
  "김상병과 최일병, 이병장과 박상병, 오상병과 정일병 ----- " 하며 지루하게 전 중대원의 이름을 다 호명한 다음 한 참 뜸을 좀 드리다가
  "빤스를 서로 바꾸어 갈아입는다. 실시!"